최근 수정 시각 : 2025-01-31 11:05:45

DDT(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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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fff> 파일:데데테 로고.svg 데데테
ДД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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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colcolor=#000>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
[[러시아|]][[틀:국기|]][[틀:국기|]]
결성 1980년
활동 기간 1980년 - 현재[1]
멤버 유리 셰프추크 (보컬, 기타)
콘스탄틴 슈마일로프 (키보드)
알렉세이 페디체프 (리드 기타)
아르툠 마마이 (드럼)
안톤 비시냐코프 (트럼본)
알료나 로마노바 (백보컬)
로만 네벨레프 (베이스)[2]
장르 하드 록, 포크 록, 얼터너티브 록
레이블 DDT Records, Navigator Records 등
링크 파일:데데테 로고.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VK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2. "데데테"라는 이름의 유래3. 역사 및 특징
3.1. 1980년대 초중반: 1기 데데테(우파) 시절
4. 들어보기5. 디스코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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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ДДТ(데데테)는 소련러시아의 락 밴드로, 1980년 여름 현 바시키르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우파에서 결성되었다. 밴드의 리더는 락 뮤지션 유리 셰프추크(Юрий Шевчук)[3]로, 결성 이후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원년 멤버이다. 40년 넘게 존속해 오면서 권위나 부조리에 굴하지 않고 진리와 진실을 외쳐온 밴드로 유명하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푸틴 행정부의 눈에 찍혔고,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공연 강제 취소 등의 탄압을 받고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2. "데데테"라는 이름의 유래

밴드명은 살충제DDT(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를 러시아어식으로 표기한 것일 뿐이다. 러시아 현지에서는 Дом детского творчества(아이들의 창의력의 집)[4]의 약자에서 따왔다는 썰이 돌고 있으나[5], 리더 셰프추크가 몇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이를 일축했다.
— А что такое ДДТ, Юрий? Не аббревиатура, разумеется, а группа, стиль?
— Ну ДДТ, конечно, название сатирическое. Придумали мы его в 1981 году а Уфе, когда только начинали работать. ДДТ — дуст. Им еще недавно всяких тараканов да клопов травили… Только не нужно очень смелых аналогий проводить…
인터뷰어: "데데테"가 무엇인가요, 유리? 물론 약자는 아니라 그랬죠. 그룹, 아니면 스타일?
셰프추크: 데데테란, 물론, 풍자적 명칭입니다. 1981년 우파에서, 막 우리가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우린 이 이름을 떠올렸죠. 데데테, 그러니까 가루 살충제 말이죠. 최근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걸로 바퀴벌레니 빈대니 하는 놈들을 잡았죠... '용감한' 추측들을 더 끌고 올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 «ДДТ» — Дом детского творчества?
— Никакого детского творчества здесь быть не может. Это какой-то идиот придумал. Скорее «ДДТ» — яд, химикат, такой жуткий, в котором человечество видело панацею от всех вредителей, а на самом деле он сам принес большой вред. Фантазируйте! Помню список названий, которые мне пришли в голову, — «Монитор», «Блюминг», еще что-то. Ребятам понравилось «ДДТ». Исамбаев сказал — да, «ДДТ» — это круто. Представляете, вы выходите на сцену — объявляют: Д-э-э Д-э-э Т-э-э! И весь зал: Уу-a-a-a! Мы, конечно, посмеялись. Никто этому не верил, а название осталось…
인터뷰어: 데데테라는 게 "아이들의 창의력의 집"의 약자인가요?
셰프추크: 아이들의 창의력이니 그런 게 끼여들 여지가 여긴 전혀 없습니다. 어떤 바보들이 그런 걸 떠올렸죠. 데데테는 끔찍한 화학 독으로, 인류가 모든 해충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보았지만 사실 더 큰 해악을 가져온 존재입니다. 생각해 봐요! 당시 제가 떠올렸던 (밴드 이름) 몇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니터", "블루밍" 뭐 그런 것들이었죠. 아이들은 "데데테"란 이름을 좋아했습니다. 이삼바예프[6]가 그랬죠. 그 이름이 멋지다고요. 상상해 봐요. 당신이 무대 위에 서 있는데 사람들이 외치는 거죠. "데-데-테!" 그리고 다들 외쳐요. "우-와!" 물론 우린 크게 웃었죠. 아무도 이를 믿진 않았지만, 이름만은 남았죠...[7]

3. 역사 및 특징

3.1. 1980년대 초중반: 1기 데데테(우파) 시절

1970년대 소련은 가능한 서구 문화의 유입을 막으려 하였으나, 새로운 영미권 음악을 듣고자 했던 젊은층의 욕망을 막지는 못했다. 비틀즈,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지미 헨드릭스, 제프 벡, 킹 크림슨, 딥 퍼플 등의 이름은 소련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소련의 대도시 중 하나였던 우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기에, 당시 우파의 중심가였던 레닌 거리(Улица Ленина)는 "브로드웨이"(Broadway)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각종 정보가 오가고 거래가 활발히 일어나던 곳이었다. 여기서는 서구권에서 흘러들어온 각종 음악 CD/카세트와 다양한 문학 작품[8] 같은 것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들 중에서는 음악을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연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잦았다. 모스크바부터 극동까지 공장, 학교, 사무실마다 자생한 아마추어 밴드[9]가 없는 곳이 없었다. 조악한 실력일지언정 이들은 미래의 비틀즈를 꿈꾸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물론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지 못했기에 이들은 여러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소련에서 직업적 음악가로 활동하기 위해선 문화부 등록 과정을 거쳐야 했다. 관제 ВИА의 경우 검열은 필수였으며 노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지만 그 대가로 라디오 및 TV 등을 통한 음악 송출과 홍보, 제대로 된 악기와 녹음 환경의 보장, 스튜디오 앨범 제작[10] 등을 보장받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직업을 음악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11]

소비에트 정부와 문화부는 이런 "반동적 흐름"을 막기 위해 안간힘이었으나 역부족이었다.[12] 1981년 브레즈네프는 제26차 공산당 회의에서 이러한 규제가 약간이나마 완화시켜 주었고, 그 결과 소련 문화부는 폴란드헝가리 등 같은 공산권 국가에 한정하여 외국 노래도 1-2곡 정도 공연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물론 이는 아주 훌륭한 핑계가 되어 주었다.
Бывало, играем мы на танцах, а нас очередной худсовет выслушивает. Услышит что-нибудь, явно не относящееся к нашей тогдашней эстраде, так переполошится. „Это вы что тут антисоветскую музыку играете?“ Приходилось хитрить. „Как это антисоветскую? Это же песня известного венгерского композитора Джими Хендрикса! Ещё в нашем репертуаре есть произведение видного польского композитора Роллинга Стоунза“. И ничего, выкручивались.
가끔씩 우리는 댄스 파티에서 공연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예술 소비에트[13] 측에서도 우리 음악을 듣곤 했다. 그 자들이 그 시절 에스트라다 음악[14]와 확연히 다른 음악을 듣게 되면 깜짝 놀라곤 했다. "당신들 지금 반소비에트적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가?" 우린 교활하게 나가야 했다. "반소비에트적이라뇨? 이 노래는 헝가리의 유명한 작곡가 지미 헨드릭스의 노래입니다! 우리 레퍼토리에는 유명 폴란드 작곡가 롤링 스톤즈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는걸요." 그러면 아무 일도 없었고, 우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15]

이러한 분위기가 한창이던 1980년 여름, 데데테가 결성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썰이 있는데, 하나는 1980년 우파 텔레비전 센터에서 음악가 블라디미르 시가초프(Владимир Сигачёв)가 당시 정치적 노래를 부르던 3인 밴드의 리더 유리 셰프추크(Юрий Шевчук)를 만나 자신들의 밴드에 들어오라고 제안하여 영입했다는 썰이고, 다른 하나는 시가초프가 속해 있던 밴드 리더였던 겐나디 로딘(Геннадий Родин)이 1979년 12월 말 셰프추크를 자신들이 활동하고 있던 "아방가르드" 문화 궁전(ДК «Авангард»)[16]에 초대했다는 썰이다.

결성 당시 멤버는 보컬 유리 셰프추크, 기타리스트 루스템 아산바예프, 베이시스트 겐나디 로딘, 키보디스트 블라디미르 시가초프와 드러머 리나트 샴수트디노프였다. 당시에는 밴드명도 없었고, 스스로 "겐나디 로딘 주도 하의 앙상블(ансамбль под управлением Геннадия Родин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들은 같은 해 가정집에서 데모 앨범 "데데테 1집(ДДТ-1)"[17]을 녹음했다. 데모 앨범에는 총 13개 곡이 들어갔으며, 이 중 1곡 "검은 태양(Черное солнце)"[18]을 제외하고는 이후 공식 1집 앨범인 "무지개 위의 암퇘지"(Свинья на радуге) 제작에 다시 사용되었다. 이 앨범의 부틀랙 중 하나는 우랄 하지예프(Урал Хазиев)[19]를 통해 당시 모스크바의 음악가이자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유리 모로조프 및 레닌그라드의 유명 락 뮤지션이었던 마이크 나우멘코에게 전해졌고, 이들은 이 데모 앨범을 "나쁘지 않다"고 평가하며 우파의 음악가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1982년 봄 겐나디 로딘이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Комсомольская правда)지에 실려 있던 "골든 튜닝 페스티벌(Золотой камертон)"에 대한 기사를 가지고 왔다.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이 관영 페스티벌은 "소련의 애국적 노래들을 발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참가하기 위해선 총 3가지 곡을 제출해야 했는데, 하나는 평화에 대한 곡[20], 하나는 소련 음악가들의 커버곡, 다른 하나는 자유곡(밴드의 재량에 따라)이었다. 우승자에게는 관영 음반사이자 당시 소련의 하나밖에 없던 음반사 멜로디야에서 데뷔 싱글을 찍을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21]. 음악 제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밴드는 허겁지겁 음악을 녹음했고[22], 밴드 이름도 그 과정에서 정해졌다. 블라디미르 시가초프가 "데데테"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밴드는 본선까지 진출하였고, 훗날 데데테의 18번이 될 "쏘지 마시오!(Не стреляй!)"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에 셰프추크는 멜로디야 취입 기회를 얻어 모스크바에 갔으나, 최종적으로 싱글 음반은 무산되었다. "소련의 공식 음악가들의 곡에 소련의 공식 작사가/시인들의 가사를 붙인 노래를 공연해야 한다"라는 계약 조건을 셰프추크가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23] 결국 정식 데뷔는 무산되었고, 대신 지역 TV 방송국인 바시키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기념비적인 첫 녹음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데데테는 "쏘지 마시오!"(Не стреляй!), "검은 태양"(Чёрное солнце), "외계인"(Инопланетянин) 세 곡을 녹음하였다.

"쏘지 마시오!"는 당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직접 저격한 노래였다. 셰프추크는 훗날 이 노래를 두고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였으며 전쟁 당시 아프간에 파견되었던 장교 빅토르 탸핀(Виктор Тяпин)이 전해 준 이야기를 듣고 쓴 노래라 밝힌 바 있다.[24][25] 그러다 보니 당시 이 곡은 우승곡이었음에도 해당 페스티벌의 TV 상영 당시에는 잘렸다. 이후 KGB 및 지역당은 셰프추크를 "소비에트의 국제주의 병사들이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을 때 이러한 비애국적 노래를 공연한 죄(непатриотично исполнять такие песни, когда советские воины-интернационалисты принимают участие в боевых действиях)"라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당시 수사관과 셰프추크가 나눈 대화가 압권이다.
수사관: 우리 조국이 이런 국제적 의무에 매진하고 있는데 무슨 권리로 이딴 노래를 부르고 있나?(Какое право вы имеете ее петь, когда наша страна выполняет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ый долг?!)
셰프추크: 하지만 그게 내가 생각한 바란 말이요(А я так думаю!)
당시는 (굳이 따지자면 반체제 성향에 오히려 가까웠던) 유명 바르드 가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셰프추크의 곡 성향이나 목소리가 비소츠키와 비슷하다고 보던 KGB 및 지역당 측에서는 데데테를 위험 밴드로 찍어 감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셰프추크의 아버지는 "높으신 분"이었기에 모 시베리아의 홈 밴드와 같은 직접적인 탄압은 당하지 않았다.[26]

이후 이와 연계되어 1982년 4월 데데테는 우파 석유 대학교(Уфимский Нефтяной Институт)에서 기념비적인 첫 공연을 가지게 되었으나, 스캔들로 끝났다. 당시 관중의 많은 수가 가짜 표로 들어왔으며, 여기에는 밴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던 지역 관리들이 보낸 버스 두 대 분의 동독 출신 여행객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7] 이 와중에 밴드가 공연한 사회풍자적 노래 "무지개 위의 암퇘지"(Свинья на радуге)는 공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82년 봄 데데테는 1집 앨범인 "무지개 위의 암퇘지"(Свинья на радуге)를 3-4일 만에 바시키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녹음하였다. 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를 동원해 두 스테이지에서 녹음했고, 믹싱과 사운드 엔지니어도 동원되었다.[28] 유리 셰프추크의 회고에 따르면 1집과 2집 앨범은 가정용 테이프 레코더로 녹음할 수 밖에 없었으나 오버더빙을 통해 녹음했고, 다행히 레코더가 질 좋은 정품 레코더[29]였기에 음질은 괜찮게 나왔다고 한다.[30] 해당 앨범은 하드 락, 락 발라드, 리듬 앤 블루스, 락앤롤 등의 여러 장르로 구성된 노래를 선보였고, 그 아래 포크 스타일의 모티프도 드러나고 있었다.

이후 셰프추크와 시가초프는 골든 튜닝 페스티벌 당시 만났던 체레포베츠 출신 락 밴드 "로크-센탸브리"(Рок-Сентябрь)와 협업하기로 결정하고 체레포베츠로 넘어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이들은 갈등을 빚게 된다. 로크-센탸브리의 리더 뱌체슬라프 코브린은 두 사람을 세션 뮤지션으로 기용하고 싶었던 상황이었으나 세프추크-시가초프는 새로운 데데테 앨범을 녹음하고 싶어했다. 더욱이 코브린은 당시 지역 필하모닉 단체에 취직하고자[31] "이념적으로 당국의 통과를 받을 수 있는" 제믈랴네[32] 스타일의 노래를 녹음하려 하려던 상황이었으나, 셰프추크에게 있어 이런 노래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는 쓰레기였고, 더욱이나 앨범 취입도 없이 빈손으로 우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갔다. 앨범 녹음만을 위해 무턱대고 낯선 도시에 왔던 상황이라 둘의 금전 사정도 여유롭지 못했기에 셰프추크는 지역 영화관에서 화가로 일하고 시가초프는 댄스장에서 연주를 하며 버텨야 했다.
Денег нам практически не платили, жили мы там, буквально, на хлебе и воде. Собирали бычки на остановке — курить хотелось. Помню, так оголодали, что я пошёл на вокзал, а там какой-то мужик ел в кафе. Я к нему подошёл и говорю: „Дай хлеба!“. Он говорит: „На!“. Я с этим хлебом убежал и тут же его съел в кустах. Было невесело.
우리에게 말 그대로 한 푼도 지불해 주지 않았죠. 우린 거기서 말 그대로 빵과 물로 간신히 버텼죠. 우린 버스 정류장에서 담배 꽁초를 주워모았죠. 담배를 피우고 싶었거든요. 그 일이 생각나네요. 언제 우리가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기차역에 갔는데 누가 뭘 먹고 있는 걸 봤어요. "빵 좀 주십쇼!" 제가 그 자에게 가서 말했죠. "여기 있소!" 그가 말했죠. 전 그 빵을 가지고 달아나 거기 담불 밑에서 먹어치웠습니다. 정말 슬펐죠.[33]

이후 로크-센탸브리와 합의를 본[34] 셰프추크와 시가초프는 며칠 간의 리허설 끝에 1983년 1월 13일에서 16일 사이 두 번째 앨범 "타협"(Компромисс)[35]을 녹음할 수 있었다. 로크-센탸브리의 멤버들이 녹음을 도와주었고, 그 외 체레포베츠의 다른 인원들의 도움도 받았다. 당시 도움을 주었던 인원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 녹음 바로 다음 날 셰프추크와 시가초프는 돈을 빌려 우파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해당 앨범은 시가초프가 좋아하던 하드 락 스타일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앨범으로, 인상적인 앨범 커버만큼이나[36] "날이 선" 가사 및 멜로디가 두드러진다. 셰프추크는 이 앨범이 성공적이었다며 회고하였고, 실제로도 앨범은 소련 전역에 퍼져나가며 데데테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1984년 데데테는 앨범 "지방촌동네"(Периферия)를 발매하게 되나, 이 앨범은 사실상 우파 시절의 데데테를 완전히 끝장내버리게 된다. 당시 밴드는 "아방가르드" 문화 궁전 등의 장소에서 리허설을 거친 뒤[37] 3일 동안 한밤중의 바시키르 TV 방송국에서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잠자는 경비 몰래 살금살금 녹음 및 레코딩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나흘째 되던 날, KGB가 불심 검문을 이유로 갑작스럽게 방송국에 들이닥치며 앨범은 미완성으로 끝나버렸다. 앨범의 마지막 곡이 될 예정이었던 "차스투시키"(Частушки)는 급습 과정에서 가사가 유실되었고[38] 시간이 촉박했기에 노래 "지방 촌동네"(Периферия)는 음악 부분만 완성된 상태였다. 결국 이 노래의 보컬 파트는 셰프추크가 본인 집 화장실에서 직접 녹음해야 했다. 멤버들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차스투시키" 원본 가사의 1/4 정도밖에 떠올려 내지 못했고, 이 미완성 부분은 추후 녹음하여 마지막 노래 "지방 촌동네"의 마지막 부분에 어설프게나마 덧붙여졌다.

미완임에도 불구하고 "지방 촌동네"는 발전을 보인 앨범이었다. 이전 앨범과 비교했을 때 리듬감은 더욱 추가되었고, 뉴웨이브와 바시키르의 토속적 느낌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더욱 사회비판적인 면모를 보이는 가사는 덤이었다. 심지어 "차스투시키"에서는 "랩"을 시도하기도 했는데[39], 당시 러시아에서는 "랩"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이었다.[40]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이고리 베레샤카의 도움 덕분에 앨범은 마그니티즈다트 형태로 1주일 만에 바시키르 전체에 유통되었고, 심지어 일부는 극동까지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 관료들 입장에서는 껄끄럽기 그지없는 노래들이 여럿 수록되어 있었고, 결국 테이프가 KGB 우파 지부의 손에 들어가게 되며 일이 커졌다.

밴드는 '반소비에트적'이라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셰프추크는 콤소몰 > 지역당 > KGB 순으로 소환당하며 심문의 이름 하에 탈탈 털렸고, 결국 콤소몰에서 제명당하게 된다.[41] 당국은 "Ещё одна запись — сядешь"(한 번만 더 녹음하면 바로 감옥 신세일 줄 알아라)라는 경고를 남겼다. 사정은 다른 데데테 멤버들이라 해서 다를 게 없었고, 이들 또한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는 등 각종 불이익에 시달렸다. 예를 들어 앨범 제작 및 유통에 관여했던 베레샤카의 경우 사건 이후 몇 년 동안 반강제로 시베리아로 쫓겨나 거기서 일해야 했다. 소련 붕괴 이전까지 셰프추크나 시가초프 등 당시 멤버들은 이 일에 대해 가능한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후 1984년 7월, "Нияз Абдюшев с друзьями"(니야스 압듀셰프와 친구들)이라는 밴드의 공연이 우파의 모델 학교에서 열렸다. 사실 이 이름은 데데테가 정체를 숨기기 위해 내건 가짜 이름이었으며[42] 이 공연은 "지방 촌동네" 앨범의 노래들을 처음으로 올린 공연이었다. 당시 무직이었던 셰프추크의 금전적 사정을 지원하기 위해 이 공연에서는 돈을 받았는데, 이후 이를 빌미로 공연 관련자들과 참석자들이 "금전 사기"를 이유로 경찰에 소환당했다. 당시 당국은 데데테를 못 잡아서 안달이었다.
Иногда приходится слышать магнитофонные записи некоего Ю.Шевчука. Говорят, он — уфимец. А недавно узнал, что ему предоставляют возможность для публичных выступлений, например, в медицинском институте, Доме моделей. Этот факт меня поразил: каким образом советские учреждения предоставляют свою сцену для пропаганды вульгарщины и пошлости, которые воспевает Шевчук с ансамблем ДДТ? Знаю, что его песни пользуются определенной популярностью у молодежи с неустоявшимся мировоззрением. Считаю, что с такими, как Шевчук, необходимо бороться публично.
간간히 당신은 저 유리 셰프추크라는 사람이 녹음한 테이프를 들을 때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우파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최근 나는 그가 의학 연구소나 모델 학교 같은 곳에서 공개 연설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난 이 사실에 매우 놀랐다. 어떻게 소비에트의 기관이 셰프추크가 데데테 밴드와 하는 공연이라는 이러한 저속하고 또 음탕한 선동에 판을 깔아줄 수가 있는 것인가? 나는 그의 노래들이 건전하지 못한 세계관을 가진 몇몇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정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생각컨데, 이런 셰프추크 같은 사람들에 공개적으로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중략)

Есть у нас в Уфе небезызвестный ансамбль ДДТ. Репертуар его под стать «хлорофосному» названию: гимн алкоголю, безделью. Однако мой товарищ считает: когда звучит рок-музыка, можно не обращать внимание на слова песен. Так ли это? Кто из нас прав?
우리 우파에는 그럭저럭 알려진 데데테라는 밴드가 있다. 이 밴드의 레퍼토리는 그 "클로로포스"적 이름에 걸맞기 그지없다.[43] 이 밴드는 알코올과 게으름의 찬가 그 자체이다. 하지만 나의 친구 하나는 생각하기를, 저 락 음악이란 것이 울려퍼지면 노래를 구성하는 단어들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들 중 누가 맞는가?

(중략)

В газете «Вечерняя Уфа» недавно было опубликовано интервью с руководителем рок-группы «Динамик» В.Кузьминым. Этот коллектив по праву считается одним из ведущих на нашей молодежной эстраде. Поэтому мнение его лидера о современной музыке, думается, небезынтересно. Он говорит, в частности, о том, что пошлость в текстах — это «дворовое» хулиганство. Полностью согласен с таким утверждением и в качестве образчика последнего хочу назвать песни Ю.Шевчука, которые довелось однажды слышать.»
"베체르냐야 우파"(석간 우파) 신문에서 최근 락 밴드 "디나믹"의 리더인 쿠지민과의 인터뷰를 실었다.[44] 이 밴드는 우리 젊은이들을 올바르게 이끄는 선도주자들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현대 음악에 관한 쿠지민의 의견은 무시할 것이 못 된다고 본다. 그가 말하길, 특히나, 가사의 불건전함은 뒷마당에서 야합하는 반동 훌리건주의라 말한다. 나는 이 의견에 특히 동의하며, 특히 후자의 사례로 내가 한 번 들어본 유리 셰프추크의 이름을 대고자 한다.
(후략)

"낯선 목소리"의 음유시인(Менестрель с чужим голосом), 우파 "레니네츠" 신문[45] 1985년 03월 21자 사설 번역 출처

이런 조리돌림은 "낯선 목소리"[46]를 비난하는 지역 신문의 사설로 그 정점을 찍었다. 이 글은 명목상 마라트 율디바예프(М. Юлдыбаев), 엘샤트 텔랴셰프(Э. Теляшев), 샤밀 말리코프(Ш. Маликов)라는 세 젊은이가 발표한 신문 사설이었으나 실제로는 (훗날 이 "저자"들이 고백하였듯) 지역 KGB가 이들에게 작성을 강요한 조리돌림이었다. 이 대자보에 따르면, 가사에 공공연히 "신"을 언급한 셰프추크는 무려 "바티칸의 하수인"(агент Ватикана)이자 불순분자였다.[47]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빽"과 여기저기서 긁어모아온 탄원서들[48] 덕분에 이 불순분자는 감옥에 가거나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되는 것은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결국 데데테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멤버들 중 셰프추크는 스베르들로프스크의 지역 락 밴드였던 우르핀 주스(Урфин Джюс)의 초대를 받아 스베르들로프스크로 떠났고, 거기서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 등 다른 밴드들과 같이 일하기도 했다. 이후 세프추크는 여러 곳을 떠돌다 최종적으로 레닌그라드에 정착하게 되고,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와 함께 1985년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정착 이후에도 셰프추크는 한동안 궁핍하게 살아야 했는데, 사실상 허가 없이 정착한 셈이었기에 제대로 된 직업은커녕 거주 및 직업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С написанием этой песни связана дурацкая история. Я шел по Невскому, и как-то там неправильно перешел лицу. Меня остановил милиционер, потребовал штраф. А у меня с собой было три рубля — мы тогда с Эльмирой ровно на три рубля в неделю жили: все было подсчитано-расписано. Я взмолился: «Дяденька, отпусти меня, нет денег, жену кормить не на что!» Мент: «Тогда в отделение!» Я прикинул — у меня ни прописки нет, ни работы — и лимитой — то назвать нельзя. Ну и отдал ему этот трояк. Потом шел из центра в Купчино пешком и по дороге сочинил эту песню…
이 노래엔 약간 바보같은 뒷이야기가 있다. (레닌그라드의) 네프스키 대로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무단횡단을 하게 되었다. 경찰관 하나가 날 불러세워 벌금을 부과했다. 당시 나에겐 3루블이 있었다. 당시 엘미라와 나는 1주일에 정확히 3루블로 살았다.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내가 애원했다. "아재요, 좀 보내주십쇼. 돈이 없으요. 아내를 먹여살릴 돈이 없다구요!" 그러자 짭새 왈, "그럼 (경찰)서로 가야지!" 그때 떠올랐다. 난 직업도 거주 허가도 없었다. 그렇게 잡혀갈 순 없었다. 그렇게 난 3루블을 냈다. 그 뒤엔 시내에서 쿠프치노 역까지 걸어갔고, 걸어가는 와중에 이 노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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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성당(Церковь)"에 대해 회고한 셰프추크의 발언 중에서

1982년 첫 앨범 "무지개 위의 암퇘지(Свинья на радуге)"를 발매했으나, 발매 후 KGB의 감시 대상이 되어 공식 활동을 금지당하고 언더그라운드로 기어 들어갔다. 앨범 수록곡 중 대놓고 반전을 외친 '쏘지 마시오'가 문제가 된 것도 있고, 당시 DDT는 비틀즈 등 서양 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런 종류의 곡은 소련 당국의 검열 대상이었다. 당국에서는 셰프추크에게 소련 음악가들이 작곡한 (그리고 체제의 입장에서 건전한) 노래를 부르라고 명했는데, 셰프추크는 이를 씹었다. 여기다 셰프추크의 목소리가 러시아의 유명 반체제 가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와 흡사해 금지당했다는 소문도 돌았다(실제로 두 사람의 목소리는 꽤 유사한 편이다). 이 때 KGB가 보컬 유리에게 "이 '무지개 위의 암퇘지'가 누구인가? 설마 브레즈네프인가?"라고 물었고, 유리가 "어떻게 알았지?"라고 응수했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이후 정부의 탄압이 이어지는 가운데 잠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활동하다 1986년 리더이자 결성자였던 유리 솁첸코가 가족 전체와 레닌그라드로 이주한 뒤 동명의 밴드를 다시 만들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므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도 끼워주는 편이다. 이 쪽도 징크스[49]를 피하지 못해 리더를 제외한 밴드 멤버 전체가 물갈이 된 전력이 있으며, 소속 멤버들 중 두 명이 단명했다.

4. 들어보기


뱀 페트로프(Змеи Петров)


무지개 위의 암퇘지(Свинья на радуге)


조국(Родина)


쏘지 마라!(Не стреляй!)


눈보라(Метель)


나는 소련에서 태어났다(Рождённый в СССР)


FSB 장군이랑 술 한잔 했다네(Я пил у генерала ФСБ)

(대놓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지만) 절묘한 사회 풍자와 반정부적 성격, 그리고 반전 사상으로 유명하다. 이를 대표하는 곡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참전한 친구 빅토르 탸핀(Viktor Tyapin)의 말을 듣고 작곡한 곡 "쏘지 마라!(Не стреляй!)"[50]와 제목만으로 무슨 곡인지 설명이 되는 "FSB 장군이랑 술 한잔 했다네(Я пил у генерала ФСБ)".
파일:miru_mir.png
Самая темная ночь перед рассветом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МИРУ - МИР!
세상에 평화를!

Юрий Шевчук, 2022
유리 셰프추크, 2022년[51]
Родина, друзья, это не жопа президента, которую надо все время мусолить, целовать. Родина – это бабушка нищая на вокзале, продающая картошку. Вот это — родина.
조국이란 건 말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언제나 애무하고 키스해 줘야 하는 대통령의 후장이 아닙니다. 조국이란 기차역에서 감자를 팔고 있는 거지 노파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국이란 것입니다.
유리 셰프추크, 2022년 05월 우파 공연 중 발언

5. 디스코그래피

  • 데모 앨범, 스튜디오 정규 앨범, 라이브 앨범[52], 유리 셰프추크 솔로 앨범 등 중요하거나 대표적으로 간주되는 앨범 전부 포함.
연도 앨범 특이사항
1981 데데테 1집(ДДТ-1)"무지개 위의 암퇘지" 이전 테스트 삼아 가정에서 녹음한 데모 앨범.
공식 발매된 적은 없으며, 마그니티즈다트로만 유포
1982 무지개 위의 암퇘지(Свинья на радуге)1982년 마그니티즈다트로 유포, 1999년 공식 발매.
1983 타협(Компромисс)밴드 'Рок-Сентябрь'와 협업.
1983년 마그니티즈다트로 유포, 1997년 공식 발매.
1983 지방 촌동네(Периферия)녹음 도중 KGB의 압수수색으로 인해 녹음을 끝내지 못했으며, 원본은 압수 후 분실.
1983년 엔지니어가 만들어 둔 복사본을 마그니티즈다트로 유포, 1991년 공식 발매.
1985 화부(Кочегарка)우파를 떠나 레닌그라드에서 데뷔한 셰프추크가 바실라초프와 진행한 솔로 공연 앨범.
1985 시간(Время)1985년 마그니티즈다트로 유포, 1995년 공식 발매.
1987 해빙(Оттепель)1987년 5월 레닌그라드 슈사리(Шушары)에서 개최된 락-니바(Рок-Нива) 축제실황.
공식 발매된 적은 없으며, 마그니티즈다트로만 유포.
1989 나 이 역할을 맡았네(Я получил эту роль)데데테 역사상 최초로 공식 발매된 스튜디오 앨범.
1989[53] 내란의 불길한 예감
(Предчувствие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공연 프로그램 "플라스툰"(Пластун) 관련 사운드트랙 모음.[54]
공식 발매를 목적으로 작업한 것이 아니나 이후 유출됨.[55]
1991 해빙(Оттепель)1987년 실황 녹음과는 다른 정규 앨범.
1992 여배우 봄(Актриса Весна)
1993 검은 개 페테르부르크
(Чёрный пёс Петербург)
동명의 공연 실황 앨범.
1995 이것이 전부(Это всё)타이틀곡은 이후 싱글컷되어 발매됨.
1995 플라스툰(Пластун)
1996 사랑(Любовь)타이틀곡은 이후 싱글컷되어 발매됨.
1997 소련에서 태어났네(Рождённый в СССР)동명의 공연 실황 앨범.
1999 0번 세상(Мир номер ноль)타이틀곡은 이후 싱글컷되어 발매됨.
1999 스쳐 지나갔네(Просвистела)[56]컴필레이션 앨범으로 타이틀곡 "스쳐 지나갔네"(Просвистела)가 첫 수록된 앨범.
2000 8월의 눈보라(Метель августа)
2001 두 개의 공연. 어쿠스틱
(Два концерта. Акустика)
2001년 11월 17/21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한 솔로 공연 앨범.
2002 통합 1(Единочество I)
2004 창문 없는 도시. 입구/출구
(Город без окон. Вход/Выход)
동명의 공연 실황 앨범.
2003 통합 2. 라이브(Единочество II. Живой)
2005 실종된 이들(Пропавший без вести)
2007 아름다운 사랑(Прекрасная любовь)"유리 셰프추크와 데데테 밴드"(Юрий Шевчук и группа ДДТ) 명의로 발매.[57]
2011 그렇지 않다면(Иначе)
2011 P.S.(P.S)"그렇지 않다면"의 확장판에 포함된 앨범.
1985-2010년 사이 작곡했으나 기존 앨범에 실리지 않은 곡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2014 그렇지 않다면. 2013년 에센 실황
(Иначе. Live in Essen 2013)
2013년 독일 에센에서 있었던 공연 실황 앨범.
2014 투명한(Прозрачный)
2014 투명한/민스크 공연
(Прозрачный/Концерт В Минске)
2014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있었던 공연 실황 앨범.
2018 가자, 갈랴(Галя ходи)
2021 허공 속 창의성(Творчество в пустоте)클라우드펀딩을 통해 발매.
2022 허공 속 창의성 2(Творчество в пустоте 2)클라우드펀딩을 통해 발매.
2023 사격장 속 늑대들(Волки в тире)유리 셰프추크와 드미트리 에멜리야노프(Дмитрий Емельянов) 명의로 발매.
클라우드펀딩을 통해 발매.


[1] 1985-1986년경 일시적이긴 해도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재결성된 전력이 있다.[2] 이상 2024년 기준[3] 한국에서는 셰프추크, 솁축, 솁추크 등의 호칭이 혼용된다. 과거 유튜브 자동번역에서는 "유리 셰우추크"로 잘못 표기되던 적이 있었다. 셰프추크라는 성씨가 우크라이나 계열인 건 맞지만, 유리 셰프추크 본인은 러시아인이고 러시아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 러시아 정부 측에서 제공하는 아동 교육 시설의 명칭.[5] 이 외에도 "좋은 오후요, 동지들(добрый день, товарищи)"의 약자라는 등 바리에이션이 많다.[6] 당시 데데테의 멤버 중 하나 - 번역자 주[7] 출처: "모스크바 콤소몰(Московский Комсомолец)" 인터뷰, 1988년 11월 11일[8] 이 중에서는 심지어 조지 오웰1984년까지 있었다. 물론 수색 중에 걸리면 최대 징역 8년형이었다.[9] 당시 소련에서는 이를 공식 명칭으로는 보컬-기악 앙상블(ВИА, 비아)이라 불렀다. 소련에서 장르 불문 밴드 등 음악 단체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은 "앙상블"이었다. 단 현재 ВИА라고 하면 소련 당시 관제 밴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10] 당시 소련의 "공식적인" 음반사는 국영 음반사였던 멜로디야(Мелодия)가 유일했다. 소련 전체의 음반을 독점하고 있다 보니, 소련 붕괴 이전까지 멜로디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음반사였다. 소련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최전선이었던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 같은 곳에서는 뇌물을 주고 정규 스튜디오를 (뇌물을 바치고, 혹은 몰래) 빌리는 사례도 있었고 불법 사설 스튜디오도 있었지만, 시베리아 쪽으로 가면 "드럼이 없어 피오네르 장난감 드럼이나 쇳덩이를 두들기던"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나 "스튜디오 대신 대학 기숙사에서 앨범 녹음을 진행한" 얀카 댜길레바 같은 사례도 있었다.[11] 당시 소련에서 무직은 형법으로 처벌 가능한 사안이었으며, 밴드 활동으로는 수익이 잘 들어오지 않았기에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은 생계 보장용 + 위장용으로 직업이 필요했다. 아크바리움의 그레벤시코프는 경비원으로, 주파르크의 나우멘코는 극장 직원으로, 키노초이는 화부로 일했다. 대학에서 미술 쪽 학과를 졸업한 셰프추크도 초창기에는 미술 교사로 일했다.[12] 당시 라디오 등에서 공식적으로 송출할 수 있는 노래는 소련 군가, 소련 행진곡, "국가에서 허락한 공식" 노래, 클래식 음악 정도가 전부였으며, 해외 음악 중에서는 프랑스 · 이탈리아 팝 음악 정도가 송출을 허락 받던 수준이었다.[13] Художественный совет. 정부 측 인사 및 문화예술계 인사로 구성된 소비에트. 예술가들이 "이념적 가치"를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는 단체였다. 쉽게 말해 검열 단체 중 하나.[14] 쉽게 말해 소련식 팝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소련의 주류 음악 장르로 한국의 7080 트로트와 비슷하다.[15] 데데테 멤버였던 루스템 아산바예프의 증언.[16] 문화 궁전(Дворец культуры, 줄여서 ДК)은 진짜 궁전이 아니라 쉽게 말해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홀이나 극장 같은 큰 시설을 말하는 러시아식 명칭이다. 이런 큰 규모의 시설을 러시아어로 "드보레츠"라고 하는데, 원래 이게 궁전이라는 의미였다 보니 직역한 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북한 등지에서 큰건물을 가리켜 궁전 운운하는 건 소련식 용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17] 러시아에서 (밴드 이름)-(숫자)는 "(해당 밴드)의 (숫자)번째 앨범"을 의미한다. 이 데모 앨범은 "먼지"(Дуст), "외계인"(Инопланетянин)이라고도 불린다.[18] 이 곡은 이 앨범과 극초기 라이브를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다.[19] 당시 우파 지역에서 유명 락 전문가이자 수집가였으며, 히피이기도 했다. 이 즈음 되면 서구에서 히피는 몰락한 지 오래였지만 시베리아만 가더라도 80년대까지 히피 쪽 세력이 있을 정도였다.[20] 당시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기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1] 거기에다 TV 중계까지 되었기에 무명 밴드들에게 있어선 좋은 홍보 기회였다.[22] 외계인(Инопланетянин), 검은 태양(Чёрное солнце), 쏘지 말라!(Не стреляй!) 이렇게 자작곡 3개를 녹음했고, 커버곡으로는 유리 안토노프의 "모든 건 예전과 같이(Все как прежде)"를 녹음했다. 최종적으로는 "검은 태양", "쏘지 말라", "모든 건 예전과 같이" 3곡을 제출했다.[23] 다만 일설에 따르면 이에 동의하고 친구 몇몇에게 소련 작사가의 곡을 녹음해 들려주었다는 증언도 있다.[24] 탸핀은 전쟁 초창기 사망자들의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소련으로 잠시 돌아왔고, 이 때 셰프추크와 만났다고 한다.[25] 언론인이자 당시 소련 락 투소프카의 인사였던 아르템 트로이츠키는 이 노래를 제외하고 당시 소련 언더그라운드 락 업계에서 이 전쟁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룬 노래는 이 노래가 거의 유일하다며 이는 이상한 일이라고 평한 바 있다. 물론 언더그라운드에서 주요 세력 중 하나였던 레닌그라드 투소프카가 가능한 정치에는 연관되지 않으려 했다는 점도 참작되어야 하나 확실히 이상한 건 사실이었다.[26] 공산당원이자 바시키르 통상부에서 일하는 고위 관료였다. 셰프추크가 슬쩍 지나가는 말로 "청바지" 등을 밀수해서 한 몫 잡는 건 어떠냐 물었을 때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냐며 호통을 치는 등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아들이 길거리에서 경찰과 시비가 붙어 감옥에 갔을 때 손을 써서 아들을 풀어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본인은 자신이 이런 "마조르"(소련의 금수저)라는 점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고, 나중에는 마조르들을 까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27] 이 관광객들은 공연에 만족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28] 이고리 베레샤카(Игорь Верещака). 이후 재발매 시에는 블라디미르 쿠즈네초프가 사운드 엔지이너를 맡았다.[29] 2개의 싱글 채널을 가진 에스테엠(СТМ) 릴테이프 레코더를 가지고 녹음했다고 한다.[30] 물론 지금 이 두 앨범을 들어보면 질이 그리 좋지는 못하지만, 당시 환경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 정도면 충분히 최선이었다. 저질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로 집에서 녹음한 포세프 앨범 같은 것과 비교해 보면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31] 당시 소련에서 필하모닉은 단순히 관현악단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공연 · 연주할 수 있는 음악 조직 및 단체였다.[32] ВИА Земляне. 당시 가장 유명했던 관제 ВИА 중 하나. 대표곡으로 "고향집의 풀밭"(Трава у дома)이 있다.[33] 셰프추크의 증언.[34] 말이 합의지 셰프추크 본인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 잃을 게 더 없다 싶었기에 밤중에 코브린을 찾아가서 "죄다 포기하고 당신네들 찾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상황은 뭣같고 우린 돌아갈 차비도 없는 신세다. 어서 우리를 도와줘라, 그럼 우린 떠나겠다. 안 도와주면, 당신네들을 죽이겠다."라고 눈을 부라리며 주먹과 함께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지금이야 성격이 다 죽었지만 80년대 셰프추크는 한 성깔 하는 싸움꾼으로도 유명했다. 코브린은 이렇게 쳐들어온 셰프추크를 보더니 얼굴이 창백해진 채 동의했다고 한다.[35] 녹음 당시 제목은 "데데테 3집"(ДДТ-3)이었다. 부틀랙으로 유포된 것 말고 원본 테이프는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훗날 발견되어 재발매되었다.[36] 금이 간 안경의 사진인데, 이 안경의 정체는 수 차례의 주먹다짐 끝에 날려 먹은 셰프추크의 안경이다.[37] 물론 제대로 리허설을 할 환경은 못 되었기에, 실제 앨범을 들어보면 상당히 거칠게 느껴진다.[38] 최종 완성된 가사를 적은 종이가 담긴 폴더를 방송국에 두고 왔는데, 하필 다음 날 KGB가 쳐들어왔다.[39] 원래 차스투시키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민요의 일종이다. 이 노래에서는 랩 특유의 라임을 맞추는 등 "랩"을 시도한 흔적이 조악하게나마 드러난다.[40] 여담으로, 러시아의 본격적인 "랩"은 1983년 쿠이비셰프의 디스코 밴드 "차스 픽"(러시아워)이 앨범 "랩(Рэп)"에서 최초로 시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랩이 시작된 것이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 상당히 빨랐던 셈. 다만 당시 소련에서 큰 인기는 끌지 못하고 묻혔다. 데데테가 이들에 대해 알았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41] 당시 소련에서 20대 젊은이가 콤소몰에서 제명당하는 것은 큰 타격이었다. 당장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셰프추크 또한 이를 두고 "고아가 된 것만 같았다. 이제 뭘 해야 할 지 몰랐다."고 표현했다.[42] 니야스 압듀셰프는 당시 데데테의 베이시스트 이름이었다.[43] 곰팡이의 일종인 Mycena chlorophos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 - 번역자 주[44] 쿠지민은 소련의 관제 밴드인 디나믹 소속이었으며, 특별히 친정부적 노래는 부르지 않았으나 정치적 · 사회적인 노래는 일절 부르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낭랑18세스러운 노래들을 불렀다.[45] 바시키르 공산당 콤소몰 소속 언론.[46] "낯선 목소리"란 마치 앵무새마냥 자신의 의견 없이 남의 말만 줏대없이 따라하는 걸 의미하는 러시아 숙어이다. 예고르 레토프 또한 비슷한 제목의 사설로 조리돌림당한 전력이 있다.[47] 해당 앨범에 수록된 노래 "우리 하늘을 善으로 채우세"(Наполним небо добротой)의 가사 "Вперёд, Христос, мы за тобой"를 말한다. 한국어 번역[48] 이 탄원서에 서명한 사람 중에서는 엘미라 빅보바(Эльмира Бикбова)라는 20대 여성이 있었는데, 이후 그녀는 셰프추크와 결혼하게 된다.[49] 1980-90년대 러시아 락가수들이 단명하거나 밴드들이 오래 가지 못하고 해체된 것을 두고 이르는 말로, 팬들은 이 시기를 '암흑기'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자세한 사항은 마이크 나우멘코 문서 참조.[50] 가사 내용은 사격 실력이 출중하던 한 남자가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PTSD를 앓게 된다는 이야기다.[51]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데데테의 공식 사이트에 걸린 배경. 셰프추크의 친필이다.[52] 라이브 앨범의 경우 가능한 VHS나 DVD 발매가 아닌, CD나 LP 등 음악 앨범의 형태로 발매된 앨범을 우선하여 기재함.[53] 1990년이라는 설 있음.[54] 당시 데데테는 소련에서 "플라스툰" 투어를 돌았고 이를 TV 송출용으로 녹화하였다. 하지만 기술적 문제점 등으로 인해 음향의 질이 매우 떨어졌고, 결국 음악을 스튜디오 환경에서 전부 재녹음한 뒤 공연 영상과 싱크를 맞추는 식으로 영상을 재제작하여 유통하였다.[55] 스튜디오 "경종"(Колокол)에서 녹음하였는데, 원본 테이프가 복사되어 유출되었다. 현재도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다.[56] 2001년 재발매판은 제목이 스쳐 날아갔네(Пролетела)로 바뀜.[57] 검은색 커버의 디럭스 에디션이 발매되었는데, "총검을 땅에 묻었네"(Закопали штыки)라는 노래가 보너스로 추가된 것 말고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