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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어: Íslensk matargerð
영어: Icelandic cuisine
1. 개요
아이슬란드의 전통 요리.전통적인 아이슬란드 요리는 양고기, 유제품, 대서양의 물고기 등을 기반을 한다.
2. 역사
아이슬란드 요리의 뿌리는 스칸디나비아 요리의 전통에서 시작되었다. 9세기경 바이킹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하면서 아이슬란드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는 다른 국가들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급자족 농업에 기반한 전통적인 경제 구조를 가진 독특한 문화가 생기게 되었다.아이슬란드 요리는 역사적 사건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했다. 1000년 북유럽 신화가 아닌 기독교를 믿게 되면서 교리에 따라 금식의 전통이 생겨났고 말고기 섭취가 금지되었다. 농업과 식량 공급 측면에서 더욱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14세기에 시작된 소빙하기였다. 농부들은 더 이상 보리를 재배할 수 없었고, 모든 종류의 곡물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주택과 난방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게 되었다. 일반적인 거주 형태였던 초기 정착민의 롱하우스는 제대로 된 부엌을 포함한 여러 개의 작은 방이 있는 아이슬란드의 잔디밭 주택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1517년에 시작된 종교 개혁을 아이슬란드 역사에서 중세와 근대 초기 사이의 전환기로 본다. 아이슬란드의 농업은 14세기부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진 18세기 후반까지 전통적인 방법으로 지었으나 1602년 덴마크 왕이 제정한 무역 독점 명령이 아이슬란드의 요리와 농업제도가 덴마크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덴마크 요리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기는 덴마크와 아이슬란드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19세기와 20세기 초였다. 20세기 초, 상업적 어업과 가공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 호황으로 인해 전통적인 유제품과 육류 기반 식품에서 생선과 뿌리채소 소비로 천천히 전환되었다. 보존 식품은 신선한 재료에 더 중점을 두고 대체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의 요리 형태를 띄게 되었다.
2.1. 중세시대
아이슬란드 요리의 시작은 스칸디나비아와 영국 제도의 바이킹 식민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했을 때로, 그들은 북유럽의 농업 방식과 음식 전통을 가져왔다. 연구에 따르면 중세 시대 아이슬란드의 기후는 지금보다 훨씬 온화했으며 보리와 귀리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곡물들은 대부분 포리지처럼 먹거나 맥주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가 주요 가축이었지만 농장에서는 가금류, 돼지, 염소, 말, 양 들도 사육했다. 아이슬란드에 처음 유입된 가축들은 현대의 품종 개량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고립된 채 진화해 왔으며 이들을 바이킹 품종(Viking breed)이라고 부른다.2.1.1. 보존
중세시대 당시 아이슬란드인들은 생선은 염장해서 보관했고 흑사병 이전에는 노르웨이 베르겐의 어시장으로 건어물을 수출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에는 노르웨이보다 소금이 부족했고 주로 바닷물을 끓이거나 해초를 태워 소금을 만들던 방식은 14세기에 아이슬란드 대부분 지역에서 과도한 벌목으로 인해 땔감이 부족해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소금으로 고기를 절이는 대신 발효된 유청에 고기를 보존하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 노르웨이에서도 알려져 있었지만 소금이 많이 있었던 노르웨이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고고학자들이 중세 농장을 발굴하면서 저장실에 젖산이 담긴 통이 보관되었던 크고 둥근 구멍이 발견하면서 중세 아이슬란드인들은 생선과 고기를 모두 발효시켜 보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음식의 맛을 크게 변화시켜 매우 강한 치즈나 삭힌 홍어와 비슷한 맛과 향을 만들었다. 특히 그들은 상어를 말리는 음식인 하우카르틀, 홍어, 청어를 팔았고 이 음식들은 지역 특산품이 되었지만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고기와 생선을 훈제하고 말리는 요리법도 있었지만 고기를 말리는 것은 더이상 유청이나 소금이 없어 보존식품을 만들 수 없을 때 만드는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2.1.2. 치즈
치즈는 염소젖과 양젖, 그리고 소젖으로 만들었다. 숟가락으로 먹는 부드러운 요거트 같은 치즈인 스키르(Skyr)는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로 전해진 치즈로 현재는 아이슬란드에서만 남아 있다. 스키르를 만들 때 남은 유청은 신맛이 나도록 만들어 고기를 저장하는 데 사용했다. 아이슬란드 요리에서 스키르가 주요한 역할을 하면서 근대에 이르러 다른 치즈 제조 전통이 사라졌고 20세기 전반에 들어서서야 산업적 치즈 제조가 시작되었다.치즈는 늦봄에 고지대의 산장에서 생활하는 농부들이 이동 목축을 하는 셀랴부스카푸르(seljabúskapur)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농부들은 어린 양을 어미에게서 떼어내 성체를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옮겨 새로운 풀을 뜯어먹게 하고 젖을 짜 독특한 풍미를 가진 치즈를 만들었다.
2.1.3. 요리와 식사
초기 정착민들의 롱하우스는 대개 집 중앙에 긴 불을 피워 따뜻하게 데우는 형태였다. 그 주변에는 바닥에 구멍을 파고 빵을 굽고 고기를 요리하는 화덕으로 사용했으며 여자들은 반죽이나 고기를 불에서 나온 뜨거운 잉걸불[1]과 함께 파둔 구멍에 넣고 뚜껑을 단단히 닫아 요리를 했다. 나무로 만든 통나무 우유통[2]에 뜨거운 돌을 직접 넣어 액체를 끓였다. 불 주변에는 낮은 돌 화덕이 있었지만, 요리는 대부분 바닥에서 했다.14세기에 아이슬란드에서 잔디 집이 생겨나면서 롱하우스는 점차 대체되었다. 그들은 흘로디르(hlóðir)라고 불리는 높은 돌 화덕이 있는 부엌을 사용했다. 소빙하기(Little Ice Age) 동안 기후가 추워지면서 보리를 재배할 수 없게 되었고, 양이 값비싼 소를 대신하여 주요 가축이 되었으며 모든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장작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이탄, 분뇨, 말린 헤더[3]를 연료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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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1600년대의 아이슬란드 술잔 |
중세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과 다르게 하루에 두 끼를 먹었다. 정오에 먹는 점심인 다그베르두르(dagverður)와 하루를 끝내고 나서 먹는 저녁인 나트베르두르(náttverður)였다. 음식은 그릇에 담아 먹었고 물은 뚜껑이 달린 탱커드[4]와 유사한 나무 통에 따라 마셨다. 나중에 이 통은 음식을 담아 담는 데 사용되는 불룩한 통인 아스카(askar)로 발전했다. 상류층은 특별한 날에 정교하게 조각된 술잔을 사용했다. 숟가락은 뿔이나 뼈로 만들었으며 종종 조각으로 장식된 경우도 있었다. 식탁을 차리는 잔치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집 외벽에 늘어선 침대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식재료를 가공하고 요리하는 것 외에도 농부의 아내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이 역할을 브리티(bryti)라는 집사에게 맡겼다.
2.2. 근세 시대
중세부터 20세기까지 아이슬란드의 자급자족 농업은 긴 한파에 비해 짧은 여름 때문에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가끔씩 사냥감을 잡는 것을 제외하면 여름 3개월 동안 생산된 식량만으로 9개월의 겨울을 견뎌야 했다. 수 세기 동안 농경 방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어업은 건장한 남자들이 유목[5]으로 만든 낚싯배와 낚싯대를 이용하면서 물고기를 낚았다. 농부들은 배를 소유했지만 본업은 농업이기 때문에 어업은 농장 일손이 필요하지 않은 시기에만 했다.물고기는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교역품이었으며, 외국 상선이 가져온 상품과 교환했다. 사람들은 덴마크 상인들이 아이슬란드로 운반한 호밀과 귀리 같은 곡물을 구입했다. 19세기까지 아이슬란드 농부의 대다수는 아이슬란드 지주, 가톨릭 교회, 또는 덴마크 국왕이 소유한 토지에서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소작농들은 잉여 생선이나 양초용 기름, 버터로 세금을 납부했다.
자급자족 농업은 사람들이 바다 근처에 살느냐 내륙에 살느냐에 따라 지역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북부 지역에서는 주요 어업 기간이 가을 건초 만드는 기간과 겹쳤고 건초 만드는 데 노동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어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반면 남부 지역에서는 주요 어업 기간이 2월부터 7월까지였기 때문에 어업이 크게 발달했다. 허나아이슬란드 사회는 매우 보수적인 농업 사회였기 때문에 짧은 여름철에 농장 일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소작농과 지주들은 어촌 형성에 반대했고 알팅기 의회는 토지가 없는 소작인이 해안 마을에 살면서 어업을 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많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2.1. 무역
아이슬란드는 자급자족 농업이 지배적이었기에 농장 간의 전문화와 상업이 부족했다. 일부 아이슬란드 기록에서도 정착 시대부터 국내 무역과 상업활동은 고리대금업으로 취급받으면서 사람들은 상인들을 업신여겼다. 그러나 외국 상선과의 무역은 활발했고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려면 무역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해외 무역은 활발히했고 특히 곡물과 꿀, 술, 그리고 담배를 자주 구매했다. 유럽 해안 지역의 어선들은 아이슬란드 항구에 정박하여 식량을 구하고 지역 주민들과 거래했다. 그들은 탁한 맥주,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비스킷, 씹는 담배 등을 거래했으며 아이슬란드인들은 뜨개질한 모직 장갑, 담요 등으로 거래를 하였다. 상선들은 네덜란드,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스페인에서 가끔씩 입항하여 주로 건어물을 판매했다.1602년, 덴마크 왕은 자신들의 영해라고 여겼던 곳에서 영국과 독일 선박의 활동을 보고 우려하여 아이슬란드에 무역 독점권을 제정하여 다른 국가의 상인들의 무역 활동을 제한했다. 덴마크 상인들은 아이슬란드에 필요한 무역 상품을 실은 상선을 정기적으로 파견했지만 17세기에는 불법 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1685년부터 정부는 독점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엄격한 조치를 취했고 독점법은 1787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결과, 아이슬란드 농부들은 덴마크에서 주로 재배되는 호밀 품종을 재배하게 되었고, 호밀로 만든 아쿠아비트을 만들게 되었고 이는 맥주를 대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