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02:01:47

카르틀리 왕국

조지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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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 왕국의 국기

파일:카르틀리 왕국 국장.png
카르틀리 왕국의 국장


1. 개요

조지아어: ქართლის სამეფო
영어: Kingdom of Kartli

1489년부터 1762년까지 조지아 중부의 카르틀리에서 바그라티온 왕조의 일원에 의해 세워진 군주국. 수도는 조지아 왕국의 수도였던 트빌리시다. 이메레티 왕국, 카헤티 왕국과 함께 조지아 왕국의 후신으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파비 왕조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자처하다 1762년 카헤티 왕국과 연합 왕국을 형성하여 1800년까지 이어졌다.

2. 역사

2.1. 건국 과정

1412년에 즉위한 알렉산드레 1세티무르 제국카라 코윤루 등 외세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조지아 왕국을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때 그는 강력한 귀족들이 각지에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중앙 정부의 명령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귀족들을 숙청하는 한편, 바그라티온 왕조가 조지아 전역을 통제하려면 아들들을 중용해야겠다고 판단하고, 대귀족들을 숙청한 뒤 장남 바크탕 4세를 카헤티, 차남 디미트리오스를 이메레티, 그리고 3남 기오르기 8세를 카르틀리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아들들은 무제한적인 왕권을 마음껏 사용하면서도 아버지의 지시를 그다지 따르지 않았고, 더 나아가 경쟁자를 제치고 절대 권력을 손에 쥐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흘러가자, 그는 자기가 살아있을 때 왕위 승계를 진행하기로 마음먹고 1442년 장남 바크탕 4세에게 양위한 뒤 아타나시오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원 서약을 하고 므츠헤타의 스베티츠호벨리 수도원에 들어갔다.

바크탕 4세는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을 왕중왕이라고 칭하면서 동생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디미트리오스와 기오르기 8세가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귀족들도 각자의 주군을 추종했기 때문에 통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1446년 12월 바크탕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메레티의 권력자 디미트리오스와 카르틀리의 권력자 기오르기 8세가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그 결과 기오르기 8세가 승리하여 조지아 왕이 되었지만, 디미트리오스는 이메레티에서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러다가 1452년 또는 1453년에 이메레티에서 권세를 누리던 디미트리오스가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조지아의 유일한 군주가 된 기오르기 8세는 디미트리오스의 아들 콘스탄틴 2세를 자기 보호 하에 두었으며, 1455년 바그라트 6세를 이메레티 통치자로 세웠다.

1462년, 이메레티의 통치자 바그라트 6세는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와 함께 기오르기 8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밀약을 맺했다. 그는 삼츠헤 외에도 밍그렐리아의 리파리트 1세, 구리아의 마미아, 압하지야 및 스바네티아의 영주들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중앙 정부에 과세를 낼 의무를 면제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반란이 발발하자, 기오르기 8세는 즉각 토벌에 나섰다. 1463년, 리키 산맥을 넘어 이메레티로 진군한 기오르기 8세는 공식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있던 쿠바르쿠바레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쿠바르쿠바레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에 도착했지만, 전장에서 멀리 진을 치고 전황을 관망했다. 양군은 치코리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반란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바그라트 6세는 여세를 몰아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아, 압하지야, 삼츠헤, 스바네티의 대귀족들 앞에서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선포했다.

1465년, 기오르기 8세가 삼츠헤를 정벌하려 했다가 파라바니 호수 인근 전투에서 사로잡혀 아할치헤로 이송된 뒤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는 사이, 바그라트 6세는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조지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카헤티의 통치자 다비트가 이에 맞서 반기를 들었지만, 조지아 대부분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쿠바르쿠바레 3세는 바그라트 6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신에게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하고, 기오르기 8세를 자신의 딸인 타마르 자켈리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풀어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석방된 그는 삼츠헤군의 도움을 받으며 카르틀리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카르틀리 귀족들은 그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걸 우려해 따르지 않았다. 결국 카르틀리에서 패배한 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카헤티로 이동하여 다비트를 내쫓고 1466년 카헤티 왕을 칭했다. 이리하여 조지아는 양분되었고,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는 이 때를 틈타 조지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1477년, 바그라트 6세가 사망한 뒤 차남 알렉산드레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카르틀리와 북 아르메니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콘스탄틴 2세가 수도 트빌리시를 위협하자, 조지아 서부의 쿠타이시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 구리아의 카하베르 2세, 압하지야와 스바네티아의 공작들이 거부하면서, 대관식은 취소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케브수레티와 투체티의 산악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트빌리시를 재빨리 점령하고 중앙 조지아 전역의 많은 요새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렇게 수도를 잃은 알렉산드레 2세는 고리로 후퇴했지만 1479년 그곳마저 공략당하자 쿠타이시로 피신했다. 그러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는 콘스탄틴 2세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틴 2세가 이메레티를 침공하도록 도왔다. 이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이메레티 귀족들은 알렉산드레 2세에게 등을 돌렸고, 콘스탄틴 2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쿠타이시를 공략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랏차와 레흐쿠미 산악 지대로로 피신했고, 콘스탄틴 2세는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작의 충성을 받아낸 뒤 쿠타이시에 수비대를 남겨둔 후 삼츠헤를 정버하러 떠났다. 그 사이 산악 주민들과 동맹을 맺은 그는 콘스탄틴 2세의 군대를 상대로 수년간 유격전을 전개했다.

1483년, 콘스탄틴 2세는 삼츠헤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트빌리시로 철수했다. 여기에 1484년 콘스탄틴 2세의 핵심 지지자로서 이메레티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가 사망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이 때를 틈타 산악 지대에서 내려와 쿠타이시 탈환 작전을 개시해 쿠타이시를 손쉽게 탈환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략에는 실패했다. 한편, 콘스탄틴 2세는 병력을 재정비한 후 1485년 이메레티를 재침공했다. 그러나 치코리 전투에서 그와 로르트키피나제 가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게다가 1486년 카라 코윤루의 술탄 야쿠브가 카르틀리로 쳐들어오자, 콘스탄틴 2세는 어쩔 수 없이 카르틀리로 철수했다.

1487년, 밍그렐리아 공작 라파리트 2세 다디아니는 콘스탄틴 2세에게 이메레티로 원정하라고 권고했다. 콘스탄틴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카르틀리 장정들을 동원해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쿠타이시를 포기하고 산악 요새에서 농성했다. 적군이 요새를 포위하자, 그는 아들을 거기에 남기고 이메레티 북부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2세는 요새를 함락시킨 뒤 이메레티의 지배를 굳히려 했다. 1488년 야쿠브가 또다시 쳐들어왔지만, 콘스탄틴 2세는 알렉산드레 2세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이메레티를 장악할 걸 우려해 귀환을 거부하고 2명의 장군을 보내 자신을 대신해 야쿠브를 격퇴하게 했다. 그러나 야쿠브는 그들을 무찌르고 트빌리시를 포위했다. 콘스탄틴 2세는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철수해야 했다.

1489년, 알렉산드레 2세는 밍그렐리아 공작 리파리트 2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랏차, 레흐쿠미 및 스바네티 산악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와서 이메레티의 여러 전략적 요새를 공략하고 쿠타이시를 탈환했다. 이에 진노한 콘스탄틴 2세는 왕실 평의회를 소집한 뒤 카헤티, 이메레티, 삼츠헤 재정복을 위한 원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평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콘스탄틴 2세의 권력이 증가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조지아 왕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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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년 조지아 왕국 헤체 당시 조지아 세력도.

콘스탄틴 2세는 평의회의 결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이메레티의 알렉산드레 2세 및 카헤티의 알렉산드레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평화 협약이 1491년에 최종적으로 승인되면서, 조지아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메레티 왕국, 카헤티 왕국, 카르틀리 왕국의 3왕국과 5개의 공국으로 나뉘었다.

2.2. 콘스탄틴 2세, 다비트 10세

귀족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조지아 왕국의 분열을 허용한 콘스탄틴 2세는 곧 외세의 침략에 직면했다. 1490년, 카라 코윤루의 군대가 카르틀리를 향해 진군하자 삼츠헤 지배자 쿠바르쿠바레 2세와 카헤티의 왕 알렉산드레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카라 코윤루군은 오르베티 요새에 접근했지만, 점령하지 못하고 코즈호르 요새로 이동했다. 코즈호리 요새의 수비병들은 밤에 그곳을 떠났고, 적군은 요새를 파괴한 뒤 트빌리시로 이동했다.

이윽고 트빌리시를 포위한 그들은 1,500명의 기병과 보병대로 구성된 분견대를 각지로 보내 오르베티 주변을 황폐화시켰다. 카르틀리 장군 술칸 바라타슈빌리가 이 분견대를 추격해 기습 공격을 가하여 섬멸하고 카라 코윤루 샤의 친척을 사로잡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라 코윤루군은 트빌리시의 포위를 푼 뒤 철수했다. 그는 적이 물러가는 걸 확인하고 아직도 어슬렁거리는 유목민들을 섬멸하고 아그자칼라 요새와 카오지아니 요새 등을 파괴했다.

1495년 이메레티 왕 알렉산드레 2세와 "귀족을 토벌할 때 서로 돕는다"라는 내용의 새로운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렇지만 내심 3개로 분열된 나라를 재통합하고 싶은 마음에 교황과 맘루크 왕조에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1505년 4월 27일에 사망했고, 장남 다비트 10세가 왕위에 올랐다. 1509년 이메레티 왕 알렉산드레 2세가 카르틀리 북서부를 침공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다. 왕실 평의회에서 침략자에 대해 단호히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그는 "문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문제를 만난다."라고 응답했다. 그 덕분에, 알렉산드레 2세는 순조롭게 공세를 벌여 카르틀리의 북서 지역 전체를 공략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메레티를 침공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알렉산드레 2세는 서둘러 군대를 철수시키고 그가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걸 용인했다.

1511년, 적절한 외교 정책을 구사하며 평화를 추구하던 카헤티 왕국의 알렉산드레 1세가 장남 기오르기 2세에게 피살당했다. 기오르기 2세는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군공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하고 카르틀리를 침공했다. 그는 아테니 요새로 후퇴했고, 기오르기 2세는 고리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때 중앙 권력에 반대하는 일부 귀족들이 기오르기 2세의 편에 섰다. 이에 그는 왕국의 행정 및 군사 시스템을 개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국을 군 총독이 이끄는 4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각 지역은 사드로초(სადროშო)로 불렸다. 첫번째 사드로초인 메치나베는 카르틀리 하류 일대에 해당했다. 두번째는 메마르지베네로, 지난날 이메레티 왕국에게 빼앗겼다가 도로 되찾았던 카르틀리 북서 지역을 관장했다. 세번째는 메마르츠케네로, 메치나베와 므트바리 사이에 위치했다. 네번째는 무크라니로, 아르그비와 크사니 공국을 다스렸다. 무크라니는 공식적으로는 왕실의 직할지였지만 실제로는 그의 형제인 바그라트 왕자가 통치했다.

1512년, 기오르기 2세가 또다시 왕국을 침략해 무크라니의 주요 요새인 치키스지리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1513년, 므츠헤타 인근으로 진군했지만 바그라트의 군대에게 매복 공격을 받고 생포된 뒤 므트베리 요새에 투옥된 후 얼마 안가 옥사했다. 그는 기오르기 2세를 사로잡은 여세를 몰아 카헤티 왕국으로 진격해 병합에 성공했지만, 기오르기 2세의 아들 레반을 붙잡지 못했다. 1514년 8월, 그는 레반 왕자가 피신한 마그라니 요새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이때 사파비 제국이스마일 1세가 파견한 이란군이 카르틀리 왕국을 침공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여 이들과 맞붙어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1518년경 겨우 격퇴했다. 그러나 레반은 이때를 틈타 마가로에서 귀족들을 소집하고 자신을 카헤티의 왕으로 선포했다.

1520년, 그는 레반을 물리치기 위해 카헤티로 진군했지만 키지키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현실을 인정한 그는 레반을 인정하고, 그 대신 레반과 군사 동맹을 맺어 외적의 침략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이후 사파비 제국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연간 300필의 비단을 공물로 바쳤지만, 이스마일 1세는 그가 비밀리에 자신에게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고 키질바쉬에서 대군을 이끌고 카르틀리 왕국 내에 거주하는 투르코만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카르틀리를 침공했다. 이스마일 1세의 군대는 카르틀리의 많은 지역을 공략하고 아그자칼라 요새에 자리를 잡은 뒤 그에게 자기가 확보한 영역을 이란의 영토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스마일 1세의 요구를 거부하고 카헤티 왕 레반, 삼츠헤 공작 쿠바르쿠바레 5세와 북캅카스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1520년 텔레티 전투에서 이란군과 맞붙었다. 조지아군은 열세한 전력으로도 선전했으나 끝내 패퇴했고, 그는 수도 트빌리시로 후퇴했다. 이스마일 1세는 트빌리시로 진군해 공성전을 벌인 끝에 일부 수비대를 회유하는 전술로 공략에 성공했다. 트빌리시는 며칠간 심각한 약탈에 시달려야 했고, 그는 가까스로 도시를 탈출해 카르틀리 남부 지역으로 피신했다. 이스마일 1세는 수비대를 남겨둔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전력을 끌어모으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다비트 10세는 1524년 이스마일 1세가 사망한 뒤 사파비 제국이 내란에 휩싸인 틈을 타 반격에 착수했다. 아그자칼라 요새를 탈환한 뒤 대다수의 이란인과 투르코만인 이주자들을 학살했다. 내전에 휘말린 이란은 새로운 병력을 보낼 수 없었고, 카르틀리는 이란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즉위 후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고 이란의 침략에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걸 막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는 1525년 퇴위하고 동생 기오르기 9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2.3. 기오르기 9세, 루아르사브 1세, 시몬 1세, 다비트 11세

기오르기 9세카헤티 왕국레반, 이메레티 왕국바그라트 3세와 동맹을 굳건히 다졌으며, 두 왕과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3국의 영원한 우호를 서약했다. 그러나 1526년 3월, 바그라트 3세가 딸 타마르를 카르틀리 왕자이며 다비트 10세의 아들인 루아르사브 1세와 결혼시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바그라트 3세는 루아르사브 1세를 카르틀리 왕위에 올리기로 마음먹고, 1527년 카르틀리를 기습 침공해 기오르기 9세를 폐위시키고 루아르사브 1세를 왕위에 올렸다. 그 대가로 소라미와 보르조미 시를 포함해 프로네 강 서쪽의 모든 땅을 합병했다.

루아르사브 1세의 통치는 사파비 제국의 침략으로 점철되었다. 사파비 샤한샤 타흐마스프 1세는 1541년 카르틀리 왕국을 침공하여 수도 트빌리시를 공략했다. 하지만 카르틀리인들의 저항이 심한데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까지 받자 철수했다. 타흐마스프 1세는 1547년, 1551년, 1554년에 카르틀리 왕국을 잇따라 침략했지만 카르틀리 인들의 유격전에 시달려 정복에 실패했고, 그는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545년,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이메레티 왕이자 장인인 바그라드 3세를 지원했으나 소호이스타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에 유럽 군주들과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조지아를 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다. 1555년,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은 아마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이메레티 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관할이 되고 카르틀리와 카헤티 왕국은 사파비 제국의 관할이 되었다. 이제 조지아 동부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파비 제국은 카르틀리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1556년 또는 1558년경, 그는 아들 시몬 1세에게 군대 지휘권을 맡겨 이란군을 격퇴하게 했다. 양군은 가리시에서 맞붙었고, 그는 언덕 꼭대기에서 전투를 지켜봤다. 이란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해 도주했으나, 도망병들이 언덕에 있던 그를 공격해 치명상을 안겼다. 결국 며칠 후 사망했고, 왕위는 시몬 1세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시몬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수도 트빌리시는 이란군에게 넘어가 있었기에 고리를 새 수도로 삼았다. 그는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이란군에 맞서 싸우는 한편, 1559년 카헤티 왕국과 동맹을 맺고 레반 왕의 딸인 네스탄-다레얀과 결혼했다. 1560-61년 트빌리시 해방 작전에 착수했으나 1561년 4월 치케디디 전투에서 패배했다.

1562년 그의 형제인 다비트 11세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다우드 칸으로 개명했다. 사파비 제국 샤한샤 타흐마스프 1세는 다우드 칸에게 군대를 맡겨 카르틀리를 치게 했다. 그는 1567년 디고미 전투에서 다우드 칸을 격파했고, 1569년 사마들로에서 다시 한 번 물리쳤다. 그러나 1569년 파츠키시 전투에서 퇴각하는 적군을 무리하게 추격했다가 생포되어 이란으로 끌려갔다. 타흐마스프 1세는 다우드 칸을 카르틀리 국왕으로 세웠고, 그는 1578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다비트 11세는 백성들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분노한 백성과 귀족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했고, 그의 실질적인 통치 범위는 트빌리시 인근에 한정되었다.

1578년 이란과 오스만 제국의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 제국의 사령관 라라 파샤가 지휘하는 투르크군이 트빌리시로 쳐들어오자, 다비트 11세는 트빌리시에 불을 지르고 산악 요새로 대피했다. 라라 파샤는 루아르사브 1세의 삼남 바크탕 왕자를 카르틀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사파비 제국의 샤한샤 이스마일 2세는 오스만 제국에 제대로 저항하지 않고 도망친 그에게 분노해 폐위시키고 시몬 1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복위시켰다. 1579년, 시몬 1세의 군대는 카르틀리 왕국의 수도 트빌리시를 포위했다. 오스만 제국은 트빌리시에 갇힌 수비대를 구하기 위해 병력과 식량을 파견했지만, 그는 이들을 모조리 물리쳤으며 여세를 몰아 투르크군에게 지배당하고 있던 사타바고도 해방시켰다.

1580년 여름, 무라트 3세는 오스만군 수장 라라 파샤를 해임하고 시난 파샤를 임명해 카르틀리를 완전히 정복하게 했다. 1581년, 시난 파샤는 이메레티 왕 기오르기 2세에게 시난 파샤로부터 카르틀리 왕권을 넘겨줄 테니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라고 권유했고, 기오르기 2세는 이에 혹해 받아들였다. 이후 이메레티 왕국, 밍그렐리아 공국, 구리아 공국 연합군이 카르틀리 북부를 침공했고, 시난 파샤는 그와 직접 대결했다. 그 결과 카르틀리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오스만과 이메레티 연합군은 트빌리시에 입성했다.

하지만 1582년, 그는 사파비 제국에서 파견한 원군과 합류하고 마누카르 2세 자켈리와 동맹을 맺은 뒤 반격을 가해 이메레티, 밍그렐리아, 구리아, 삼츠헤, 오스만 연합군을 무크란 전투에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1584년, 무라트 3세는 시난 파샤를 해임한 뒤 페르하드 파샤에게 대군을 맡겨 카르틀리로 파견했다. 1587년 삼츠헤와 사타바고가 오스만군에게 넘어갔고, 1580년대 말에 트란스코카서스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렇듯 전세가 기울자, 그는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상을 맺었다. 오스만 제국은 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공물을 납부하게 했다. 또한 1590년 사파비 제국과 협약을 맺어 조지아 전체를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삼았다.

1588년, 그는 일전에 오스만 제국과 연합하여 자신을 공격했던 이메레티 왕국에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메레티 왕 레반은 이에 맞섰으나 고판토 전투에서 참패하고 레흐쿠미 지방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카르틀리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여 압박을 가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고 레반은 왕위를 유지했다. 1590년, 그는 재차 이메레티를 침공하여 바그라트 4세를 축출하고 이메레티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를 장악한 뒤 수비대를 배치하고 떠났다.

그러나 밍그렐리아 공작 마누치르 다디아니가 쿠타이시를 공략하고 로스톰을 왕으로 내세웠다. 그는 재차 군대를 동원하여 쿠타이시로 쳐들어갔고, 로스톰은 밍그렐리아 공국의 수도 오디시로 피신했다. 그는 스칸다, 크바라, 카츠키, 스베리 등 여러 요새를 장악하고 수비대를 배치한 뒤, 로스톰이 달아난 오디시로 진군해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옵슈크비티 전투에서 마누치르 다디아니에게 패배하고 잔여 병력을 수습해 카르틀리로 철수했다. 그 후 로스톰과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포로와 인질을 교환했다.

1595년 이란, 카헤티 왕국과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해, 1599년 고리 요새를 공략했다. 이에 메흐메트 3세는 자파 파샤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반격에 나섰다. 1599년 나키두리 전투에서 패배하여 적에게 생포된 뒤 이스탄불로 이송되어 예디쿨레 감옥에 수감되었다. 메흐메트 3세는 "모로코에서 카스피해까지, 코카서스에서 페르시아만까지 모든 도시에 카펫을 걸고 3일 동안 시몬의 포획을 축하하라"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후 옥중에서 여생을 보내다 1611년 사망했고, 유해는 조지아로 돌아가 므츠헤타에 있는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4. 기오르기 10세, 루아르사브 2세, 바그라트 7세, 시몬 2세

시몬 1세가 이스탄불로 끌려간 뒤, 장남 기오르기 10세가 카르틀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오스만 제국사파비 제국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루스 차르국과 동맹을 맺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인 표도르 2세와 장녀 엘레네의 약혼을 주선했다. 1603년 사파비 제국 샤한샤 아바스 1세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세에 참여해 예레반과 나키체반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전공을 세웠으며,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왕좌를 수여받았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1606년 9월 7일 벌집을 먹고 있던 중 거기에 숨어있던 벌이 튀어나와서 그의 혀를 독침으로 찌르는 바람에 사망했다고 한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루아르사브 2세는 1609년 트빌리시 총독 기오르기 사카제와 함께 잘랄 파샤가 지위하는 크림 타타르군이 오스만군과 합세하기 전에 타시스카리에서 요격해 괴멸시켰다. 1610년 사파비 제국으로 들어가서 아바스 1세에게 경배드리고 공물을 바쳤고, 아바스 1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트빌리시를 그에게 돌려줬다. 1610년, 그는 기오르기 사카제의 누이인 마크리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본래 평민 출신이었던 사카제의 누이를 아내로 삼은 행위에 반감을 품은 대귀족들이 강한 압력을 행사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마크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밍그렐리아 공작의 딸과 약혼했다. 이후 샤디만 바라타슈빌리를 대표로 하는 대귀족들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1613년 카헤티 왕국의 테이무라즈 1세가 그의 누이인 호라산과 결혼했다. 아바스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카헤티 왕국과 카르틀리 왕국이 힘을 합쳐서 이란에 도전할 수도 있다고 여기고 경계했다. 얼마 후 아바스 1세가 두 왕을 사냥 연회에 초대했다. 그러나 그와 테이무라즈 1세 모두 아바스 1세가 자신들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불참했다. 1614년 초, 아바스 1세는 불순종하는 봉신을 처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카르틀리와 카헤티 왕국을 침략했다. 두 왕은 이메레티 왕국으로 피신한 뒤 항전을 이어갔다. 1615년, 아바스 1세가 용서해줄 테니 복귀하라고 권유했다. 테이무라즈 1세는 이를 의심해 응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를 믿고 돌아갔다. 그러나 곧 체포된 뒤 아스트라바드에 수감되었고, 이슬람교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한 끝에 1619년부터 쉬라즈 요새에 수감되었다. 1622년 6월 21일 아바스 1세의 명령으로 활시위에 목이 졸려 죽었다.

이후 다비트 11세의 아들 바그라트 7세가 아바스 1세에 의해 카르틀리 왕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극히 한정되었고, 현지에 주둔한 이란군 사령관 기오르기 사카제가 실권을 장악했다. 1619년 바그라트 7세가 사망한 뒤 시몬 2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9살에 불과했기에 카르틀리 주둔 이란군 총사령관이며 역시 이슬람교로 개종한 조지아 귀족 기오르기 사카제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백성들이 복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정부는 이란군이 보호하는 트빌리시와 하류 카르틀리 일대만 통제했다.

카르틀리의 기독교 귀족들은 이슬람 신자인 사카제를 섭정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1623년부터 1624년에 무크란의 바그라트 2세를 섭정으로 내세웠으며, 1624년부터 1625년까지는 테무라즈 이에르가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이런 상황에 압박감을 느낀데다, 조지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이란으로 강제 이송시키는 아바스 1세에게 반감을 품은 기오르기 사카제는 1625년부터 이란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마르코피 전투에서 이란군을 격파했다. 그는 트빌리시를 탈출하고 아그자칼라 요새로 피신했다. 이후 반란군은 카르틀리의 왕좌를 카헤티 왕이며 당시 이메레티 왕국에 망명가 있었던 테이무라즈 1세에게 넘겼다.

1625년 7월 1일 조지아군이 마라브다 전투에서 이란군에게 패배한 뒤, 아바스 1세는 그를 트빌리시로 옮겨서 통치를 재개하게 했다. 그러나 반란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고, 이란군의 기세는 갈수록 꺾였다. 1630년 아르가비 공작 주라브 1세 시다모니가 잠들어 있던 그를 암살했다. 그 후 조지아인들은 테이무라즈 1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다시 추대했다.

2.5. 테이무라즈 1세, 로스톰

테이무라즈 1세는 사파비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이란의 영향력을 조지아에서 완전히 박멸하려 했다. 1631년 카헤티의 파괴에 적극 가담했던 다케스탄의 산악 부족들을 정벌해 몇몇 정착지들을 파괴했다. 1633년 파르스, 라르, 바레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맘쿨리 칸이 사피 샤에게 살해되자, 이만쿨리 칸의 처남이며 간자와 카라바흐의 총독인 다우드 칸이 그에게 망명했다. 그는 다우드 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의 부대를 조지아군에 배속시켰다. 한편 니콜라스 이르바치를 서유럽으로 보내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구원을 청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통치자들은 30년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조지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피 샤는 다우드 칸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테이무라즈 1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로스톰을 새 왕으로 내세워 조지아를 침공하게 했다. 1633년, 로스톰이 이끄는 이란군이 카르틀리와 카헤티를 휩쓸었고, 테이무라즈 1세는 이메레티로 망명했다. 이후 카르틀리의 왕위에 오른 로스톰은 고리와 수라미 등 여러 요충지에 수비대를 배치했지만, 민중의 반발을 고려하여 이란군인을 쉬르반 민병대로 점진적으로 교체하도록 했다.

과거 거리에서 걸식하며 힘겹게 살아가다가 아바스 1세의 눈에 들어 이스파한의 지사로 임명된 뒤 도시 행정에 상당한 수완을 발휘해 샤한샤의 총애를 받았던 로스톰은 카르틀리 왕으로서도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먼저 카르틀리의 대귀족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상당한 선물을 주었다. 치오치 흐말라제에게 삼치빌데 영지를 하사했고, 과거 자신을 도와줬던 기오르기 사카제를 존경했기에 사카제의 유족들이 이전의 영지를 이어받도록 해줬다. 또한 고르자스프 아바치치빌리 공작의 딸 케테반 아바치치빌리와 결혼해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반면 테이무라즈 1세를 여전히 지지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토벌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는 자들의 영역을 황폐화시켰고, 수십 명의 영주를 파직하고 그들의 아들이나 형제로 교체했다. 또한 기독교인을 특별히 박해하지 않았고 조지아 정교회 대성당을 복원하는 걸 돕기도 했지만, 이슬람교에 노골적으로 적대심을 드러내는 귀족들을 엄격히 처벌했다.

그는 아바스 1세의 통치를 모델로 삼아 카르틀리 왕국의 중앙 집중화에 진력했다. 1635년 카자 치치빌리를 궁전 대주교로 임명했고, 마누차르 숨바티슈빌리를 트빌리시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각지의 관료들을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인사들로 배속시키고 세금을 착실히 거두도록 했다. 1636년 고리 총독의 10세 아들인 파르사단 고르귀자니제를 자신의 보호하에 두는 등, 대귀족의 자제들을 궁궐에 데려와서 인질로 삼는 정책도 진행했다. 한편, 그는 이란 관리와 조지아 관리를 동등하게 대우했으며, 카르틀리 왕국이 쓰던 관직을 이란식으로 개명하되 각 지위의 기능을 변경하지 않아서 조지아 귀족들이 적응하기 쉽게 했다. 또한 조지아 궁정에 이란의 궁중예법과 관습을 도입했다. 개인적으로 사피 샤와 가까운 관계였던 그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화려한 연회를 개최하고 거리 축제도 종종 열었다. 또한 크티아 강과 간자 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아할칼라키 시를 건설하는 등 토목 공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시기 이란 정부는 카르틀리 왕국의 내정에 전례없는 통제력을 행사했다. 트빌리시, 고리, 수라미 등 각지의 요충지에 이란군이 주둔했으며, 왕국의 남쪽 지역, 특히 로우리와 가구리는 페르시아 군 총독의 통치를 받았다. 그는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이스파한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했고, 매년 막대한 공물을 제국에 바쳤다. 이 때문에 니콜로즈 베르드제니치빌리 등 일부 조지아 역사가들은 그가 카르틀리 왕국의 독립을 끝장내고 이란의 속주로 삼는 데 일조했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당시 샤의 심복이었던 그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며, 이전에 잦은 전쟁과 착취로 피폐해졌던 민중이 그의 치세에 어느정도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치세에 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와 마을이 되살아났고, 상업이 번성했으며, 인구도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이렇듯 카르틀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에게 밀려 이메레티로 망명한 테이무라즈 1세는 1634년 카헤티로 복귀한 뒤 카헤티 왕을 선포하고 로스톰에 맞서 싸웠다. 양자의 대결은 수년간 이어지다가 1638년 테이무라즈 1세가 카헤티 왕으로 인정받는 대신 이란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1641년,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카르틀리 귀족들은 테이무라즈 1세에게 카르틀리 왕을 자처하라고 권고했다. 테이무라즈 1세는 자기가 트빌리시로 진격할 테니 그들은 내부에서 호응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당했고, 그는 테이무라즈 1세에게 호응하려 했던 귀족들을 가차없이 척살했다. 트빌리시 인근까지 이동했던 테이무라즈 1세는 계획이 틀어진 걸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그는 이에 보복하기로 마음먹고 1648년 이란군과 함께 카헤티로 쳐들어가 마가로에서 테이무라즈 1세를 격파하고 이메레티로 쫓아냈다.

이후 카르틀리-카헤티 전역을 잘 다스렸으나,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는 고르자스프 아바치치빌리 공작의 딸 케테반 아바치치빌리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보지 못했고, 1638년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 2세 다디아니의 누이 마리암과 재혼했으나 역시 자식이 없었다. 이로 인해 후계자가 없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이메레티 왕자 마무카를 양자로 삼으려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642년에는 시몬 2세의 손자 루아르사브를 입양했으나, 1652년 루아르사브가 암살당하면서 역시 무산되었다. 1653년, 그는 장고 끝에 카르틀리 왕국 남부 일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크란 가문의 일족인 바크탕 5세를 후계자로 세웠다.

2.6. 바크탕 5세

1658년 로스톰이 사망한 뒤 바크탕 5세는 이란으로 찾아가 아바스 2세를 알현하고 그로부터 이스파한과 구이란 지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아바스 2세는 정교회 신자였던 그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무슬림이 되었고 샤 나바즈 칸(شاه نواز خان)으로 개명했다. 다만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바크탕이라는 이름도 계속 쓰기로 했다. 그는 카르틀리-카헤티 일대의 왕으로 군림했지만, 실제로는 이란 당국의 광범위한 통제를 받았다.

아바스 2세는 1659년 모우투즈 알리 칸을 카헤티 총독으로 임명하고 15,000명에 달하는 아제르바이잔인을 카헤티에 이주시키고 3개의 이란인 정착촌을 건설하도록 했다. 또한 트란스캅카스의 이란 당국은 아제르바이잔과 카라바흐에 거주하는 무슬림 50,000명을 카르틀리로 집단 이주시켰다. 당시 그의 왕국은 6개의 영토로 분할되었는데, 그 중 4개는 카라바흐의 베이르베이인 메우테자 쿨리 칸의 감독을 받았고 2개는 나히치반의 지사인 알리 쿨리 칸 칸케를루의 감독을 받았다. 이들은 현지 무슬림 가족을 직접 통치했지만,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많은 제약을 가했다. 그는 귀족 가문의 각 후게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나, 이 권한을 행사할 때 이란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렇듯 이슬람화되어가는 조국에 반감을 품은 기독교 조지아인들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크사니 공작 찰바 크베니프네빌과 카헤티의 전 왕 테이무라즈 1세의 동맹자인 비드지나 촐로카슈빌리는 반란군을 이끌고 바크트리오니와 알라베르디를 점령하고 1660년 여름에 투르코만인으로 구성된 이란군을 괴멸시켰다. 이에 무르투즈 알리 칸이 이끄는 아제르바이잔군이 이들을 진압하려 했다. 알리 칸은 카헤티의 많은 영역을 탈환했지만,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바크탕 5세는 반란을 사주한 혐의로 아라그비 공작 잘랄을 처형했고, 잘랄의 아들들은 오스만 제국에 합류하기 위해 삼츠헤로 달아났지만 자바케티아의 트비스퀴리 호수 인근에서 그의 군대에게 저지되어 이란에 보내졌다. 그는 잘랄이 반란을 주도했다는 보고서를 샤한샤에게 보고했고, 찰바 크베니프네빌, 비드지나 촐로카슈빌리 등을 반란 주도 혐의로 처형되었다. 사파비 제국은 반란 진압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가 북부 카헤티 일대를 합병하는 것을 허락했다. 또한 오타르 시다모니를 새로운 아라그비 공작으로 세웠고, 크사니 공국은 봉기 동안 중립을 지켰던 예세 크베니프네벨리에게 맡겨졌다. 이때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귀족들을 교체할 자유를 샤한샤로부터 얻어낸 그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앙 집권 정책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1660년, 이메레티 왕 알렉산드레 3세가 죽고 바그라트 5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계모 네스탄 다례얀에게 폐위되고 실명형에 처해졌다. 네스탄 다레얀은 연인인 바크탕 츠추나슈빌리를 새 왕으로 추대한 뒤 자신은 여왕을 자처했다. 이에 반발한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두 사람을 몰아낸 뒤 바그라트 5세를 복위시켰다. 하지만 실명 상태였던 바그라트 5세가 왕노릇을 제대로 할 리 없었고, 밍그렐리아 공국의 공작 바메크 3세 다디아니가 실권을 잡았다.

이렇듯 이메레티 왕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그는 이 때를 틈타 이메레티 왕국을 자기의 영향력에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같은 바그라티온 왕실이 다스리는 국가인 이메레티의 혼란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로 들어왔다. 이후 바메크 3세와 협의한 끝에 이메레티 서쪽은 바메크 3세가 관장하고 동쪽은 자신이 관장하기로 했다. 바그라트 5세에게는 이메레티 왕국의 수도인 쿠타이시 시만 주어졌다. 바메크 3세 다디아니는 그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딸과 그의 장남 아르칠리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바메크 3세는 곧 마음을 바꾸고 결혼을 취소했다. 이에 구리아 공작 디미트리오스, 압하지야 및 이메레티 상부 지역의 귀족들과 협정을 체결하고 군대를 이끌고 이메테리로 진군해 삭헤라 인근에 진을 쳤다. 바메크 3세는 즉각 응전했고, 양군은 삭헤라 인근에서 격렬하게 맞붙었다.

삭헤라 전투에서 패배한 바메크 3세는 밍그렐리아 공국의 수도인 오디시로 도주했고, 그는 쿠타이시를 함락시키고 바그라트 5세를 억류한 뒤 오디시 인근으로 진격했다. 바메크 3세는 수도를 지킬 가망이 없자 스바네티로 피신했다. 그는 오디시를 점령한 뒤 그곳에 주둔한 수비대를 학살하고 바메크의 가족과 재물을 모조리 확보했다. 바메크 3세는 스바테니에서 내부의 배신으로 살해당했고, 그는 쿠타이시로 돌아와 아르칠리를 이메레티 왕으로 세운 뒤 바그라트 5세를 인질로 삼은 채 카르틀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1663년 사파비 제국이 바그라트 5세를 복위시키라고 명하자 어쩔 수 없이 아르칠리가 물러나는 걸 받아들였다. 1664년, 그는 아르칠리를 카헤티 국왕으로 세웠다. 이때 사파비 제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아르칠리를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카헤티인들은 아르칠리의 지배를 받는 걸 거부하고 헤라클리오스 1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헤라클리오스는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카헤티로 잠입해 카르틀리군과 맞서 싸웠다. 그는 아들을 돕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고, 헤라클리오스는 투셰티로 일시 후퇴했다. 그러다가 그가 군대를 분산시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아스크바리에서 그의 군대를 기습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투셰티로 후퇴했다. 그는 카헤티 귀족들에게 아르칠리를 왕으로 떠받들겠다고 맹세하도록 강요한 뒤 카르틀리로 돌아갔다. 헤라클리오스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러시아로 이동한 뒤 10년간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1674년, 러시아에서 카헤티로 이동한 헤라클리오스 1세는 투셰티에 도착한 뒤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당시 그와 적대 관계에 있던 이란의 고위 관료인 샤아크 알리 칸은 사파비 왕조의 새 군주 솔레이만 1세에게 헤라클리오스를 카헤티의 새 왕으로 옹립하라고 조언했다. 솔레이만 1세는 그 말에 따라 아르칠리를 몰아내고 헤라클리오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그 후 1675년, 솔레이만 1세는 그에게 아스파한으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에 따라 아스파한으로 출두하던 중 간자의 코스카로에서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망했다.

2.7. 기오르기 11세, 헤라클리오스 1세, 카이호스로

바크탕 5세가 사망한 뒤, 솔레이만 샤는 바크탕 5세의 아들 기오르기 11세를 소환했다. 솔레이만 샤는 처음엔 기오르기 11세를 카르틀리 왕위에 앉히는 걸 거부하고 테이무라즈 1세의 손자 헤라클리오스 1세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크탕 5세의 형 아르칠리는 카르틀리로 이동한 뒤 현지 총독에게 자신을 카르틀리 왕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솔레이만 샤는 현지 총독의 보고를 받고 마음을 바꿔 기오르기 11세가 왕위에 오르는 걸 승인하고 큰 선물을 안겨서 트빌리시로 돌려보냈다. 1676년 트빌리시에 도착한 그는 즉위식을 거행했다. 솔레이만 샤는 그에게 아르칠리를 체포해 이란으로 보내거나 추방하라고 요구했고, 그는 아르칠리를 이메레티 왕국으로 망명시켰다. 이후 동생 루아르사브를 인질로 보내라는 샤한샤의 요구도 받아들여야 했다.

1678년, 그는 아르칠리를 후원하여 이메레티 왕국으로 진군해 바그라트 5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했다. 얼마 후, 시할리 칸이 솔레이만 샤에게 그가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고발했다. 이메레티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아르칠리를 도우면서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전쟁을 부추킬 거라는 것이었다. 1679년, 솔레이만 샤는 아지 알리 칸을 트빌리시로 보내 실상을 알아보게 하는 한편, 그에게 아르칠리를 이란으로 보내거나 추방하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는 아르칠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아르칠리는 드발레티로 도망쳤다. 그는 샤한샤에게 아르칠리를 추방했다고 알렸지만, 솔레이만 샤는 만족하지 않고 아르칠리를 드발레티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형제 레반과 기비 아밀라코르를 아르칠리에게 보내 이 사실을 알렸고, 아르칠리는 러시아로 망명해야 했다.

그는 아르칠리를 이메레티 왕으로 세우려던 계획을 접고 바그라트 5세의 아들이며 1678년 이메레티 왕국을 공략했을 때 인질로 잡아갔던 알렉산드레 4세를 이메레티 왕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그는 아할치헤의 유수프 파샤에게 서신을 보내 알렉산드레 4세를 이메레티 왕위에 앉히라고 제안했다. 아할치헤 파샤는 메흐메트 4세에게 보고했고, 메흐메트 4세는 동의했다. 오스만 제국의 동의를 받아낸 그는 1682년 알렉산드레 4세를 아할치헤로 보냈다. 유수프 파샤는 1683년 알렉산드레 4세와 함께 이메레티로 진군했다. 이메레티 귀족들은 곧바로 알렉산드레 4세에게 귀순했고, 이메레티 왕 기오르기 4세는 구리아로 도피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그에게 딸 마리암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그는 마리암을 다비트 에리스타비와 약혼시켰기 때문에 거부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다시 그의 형제 루아르사브의 딸 엘레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아직 알렉산드레 4세의 입지가 완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결혼 동맹을 맺었다가 사달이 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한편, 솔레이만 샤는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과 협력할 기미가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아지 알리 칸에게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미라고 지시했다. 아지 알리 칸은 카르틀리 왕국 내에 거주하는 음타와르족을 부추겨서 그에 맞서 봉기하라고 촉구했다. 여기에 솜히티 총독 콰마르 벡은 카르틀리 왕의 모든 행동을 샤한샤에게 고스란히 보고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콰마르 벡을 처형했으며,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한 아라그비 공작 야손을 처형했다. 이후 형 아르칠리에게 사절을 보내 조지아로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샤한샤가 레반을 이란으로 보내라고 지시하자, 레반 대신 외아들 바그라트를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샤한샤는 레반과 바그라트를 둘다 보내라고 요구했다. 샤한샤의 고압적인 태도에 화가 난 그는 이란에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카헤티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헤티 귀족들이 협력하겠다고 맹세하자, 그는 1688년에 군대를 모아 쿠르쿠타에 집결시키고 카헤티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토프카라가지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의 삼촌인 타마즈가 도중에 진영을 이탈하여 아그자칼라 요새를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그는 아라그비 공작으로 새로 임명했던 기오르기에게 자신과 함께 하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두셰티를 공략한 그는 아라그비 공작 기오르기에게 재차 합류를 요청했으나 또다시 거절당했다. 한편, 솔레이만 샤는 반란 소식에 진노하여 토흐케에 있던 바그라트와 레반 왕자를 체포해 헤라트 감옥에 수감하라고 명령했다. 또다른 왕자 루아르사브는 강제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케르만으로 보내졌다.

이후 그를 폐위하겠다고 선언한 솔레이만 샤는 14년간 이란에 체류하고 있던 헤라클리오스 1세를 카르틀리의 새 왕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헤라클리오스 1세는 이란 분견대와 함께 트빌리시에 입성하여 즉위식을 거행했다.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라차로 후퇴한 뒤 뒤이어 밍그렐리아 공국으로 망명했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헤라클리오스 1세의 통치는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러시아와 이란에서 보냈기 때문에 조지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게다가 지역 주민들을 약탈하고 노예로 팔아넘기는 페르시아인들의 악행을 눈감아줬고,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해 사욕을 챙기는 데 열중했다.

한편, 기오르기 11세는 1696년 패배를 인정하고 이란에 귀순한 뒤 이스파한으로 후송되었다. 1697년 3월 5일 이스파한에 도착한 기오르기 11세는 케르만 지사로 임명되어 1699년부터 1704년까지 케르만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케르만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술탄 호세인은 반란을 진압해 준다면 카르틀리 왕위를 그에게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동생 레반을 조지아인으로 구성된 분견대 지휘관으로 삼고 케르만으로 보냈다. 레반은 반란을 일으킨 루트바르 부족과 발록 부족을 물리쳤으며, 강도 무리를 3차례 물리치고 수괴의 머리를 샤한샤에게 보냈다. 이후 그는 또다른 조지아군을 이끌고 케르만으로 진군해 반란군을 섬멸하고 수많은 수급을 샤한샤에게 보냈다. 이에 흡족한 술탄 호세인은 그에게 수많은 선물을 보냈고, 레반을 이란의 최고 판사로, 카이호스로를 이스파한의 도시 총독으로 임명했다. 1703년, 호세인은 그를 카르틀리 왕으로 복위시키고 헤라클리오스를 카헤티 왕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카르틀리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고 대신 동생 레반을 카르틀리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샤한샤의 요청에 따라 동생 레반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군하기로 하고, 레반의 아들 바크탕 6세가 두 사람을 대신해 카르틀리 왕국을 다스렸다. 기오르기 11세는 반란 진압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그 과정에서 체포해 이스파한으로 보낸 미르와이스 칸이 술탄 호세인의 환심을 사고 그에게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호세인은 그가 반란을 꾸밀 지도 모른다는 미르와이스 칸의 참소에 넘어갔고, 미르와이스 칸이 그를 암살하는 걸 용인했다. 1709년 4월 21일, 기오르기 11세를 따르는 부하들이 조카 카이호스로의 지휘하에 칸다하르를 떠나 반란군 토벌에 나선 사이, 미르와이스는 그를 자신의 시골 영지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한 뒤 암살했다. 미르와이스 칸은 칸다하르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유품을 십자가와 시편과 함께 이스파한에 보내 반역을 꾀한 증거로 삼았다.

이후 레반이 카르틀리 왕위에 오르는 듯했으나 7월에 이스파한에서 사망하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레반의 아들 카이호스로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카르틀리 왕국으로 돌아가는 건 허락받지 못했고, 형제 바크탕 6세가 그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1709년 아프가니스탄의 조지아 분견대 사령관을 맡아 반란 진압에서 활약했지만 1711년 9월 27일 칸다하르 근처에서 길자이족에게 참패해 30,000명의 병사와 함께 전사했다.

2.8. 바크탕 6세, 예세

기오르기 11세카이호스로가 아프가니스탄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을 때, 기오르기 11세의 조카 바크탕 6세가 그들을 대신해 카르틀리를 통치했다. 그는 1705년 형제 도멘티오스 4세를 조지아 총대주교로 선임하도록 힘썼고, 사바 오르벨리아니가 이끄는 사절단을 프랑스로 보내 조지아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며 기독교가 조지아에서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사절단은 1714년 3월 21일 파리에 도착한 뒤 루이 14세와 협의했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프랑스는 조지아를 위해 어떠한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외국에서 수입된 법률, 과학, 행정, 궁중 예법 등 여러 저서를 수집하여 조지아어로 번역했으며, 1709년 최초의 조지아 인쇄소를 트빌리시에 설립했다. 또한 우수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조지아의 역사를 집대성한 <조지아 연대기>를 집필하게 했다.

그는 문학가로서도 출중한 재능을 갖췄다. 애국적이고 낭만적인 서정시를 여러 편 섰으며, 고대 우화 모음집 칼릴라와 뎀나를 이란어에서 조지아어로 번역했다. 또한 쇼타 루스타벨리의 12세기 서사시 <표범의 가죽을 쓴 기사>를 출간하면서 친히 해설을 달았다. 조지아 문학가들은 이 서사시를 읽고 그동안 잊혀졌던 중세 조지아 문학을 되살리자는, 일명 18세기 조지아 문학 르네상스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그는 성경의 인쇄를 맡아 복음서, 시편, 몇몇 전례서와 기도서를 인쇄하여 대중에 배포했다. 이란 당국은 그가 쿠란을 따르는 대신 기독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애쓰는 행보를 보이는 것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

이 무렵, 이메레티 왕국에서 정변이 일어나 기오르기 6세기오르기 7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기오르기 6세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하며 기오르기 6세의 아들 레반을 카르틀리로 보내라고 제안했다. 기오르기 6세는 처음에 동의했지만, 레반이 카르틀리 왕에 의해 사파비 제국으로 보내질 거라는 첩보를 입수하자 거부하기로 했다. 이에 기오르기 7세를 돕기로 한 그는 1707년 기오르기 7세에게 군대를 지원해 그가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이메레티의 왕으로 등극하게 했다. 기오르기 6세는 이에 대항해 항전했으나 끝내 패배하자 1709년 바크탕 6세의 초청에 따라 카르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1711년 마미아 구리엘리가 정변을 일으켜 기오르기 7세를 축출했다. 기오르기 7세는 카르틀리로 도피하여 고리에서 그의 영접을 받았다. 기오르기 7세는 그에게 기오르기 6세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그의 중재를 받아들여 기오르기 6세와 화해했다. 기오르기 6세는 이메레티로 넘어간 뒤 영지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1711년 카르틀리 왕 카이호스로가 아프가니스탄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뒤, 샤파비 샤한샤 술탄 호세인은 그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카르틀리 왕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개종을 거부했고, 술탄 호세인은 그를 케르만에 억류하도록 했다. 이후 3년간 뜸을 들이다 1714년에 바크탕 6세의 이복 형제인 예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세웠다. 예세는 2년간 나라를 다스렸지만 다케스탄 산악 부족들의 침략에 시달렸고 다른 귀족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한편, 바크탕 6세는 1716년 술탄 호세인의 권유를 마침내 받아들여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후세인 쿨리 칸(Hussayn Qouli Khan)이라는 이름으로 예세를 대신해 카르틀리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파한에서 대법원장을 맡고 있었던 그가 조지아로 돌아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장남 바카르가 그를 대신해 카르틀리를 통치했다.

1719년에 비로소 카르틀리로 복귀하는 걸 허락받은 바크탕 6세는 겉으로는 이슬람 신자로 행세했지만 실제로는 정교회 신앙을 꿋꿋이 이어갔다. 그는 러시아 제국과 손을 잡고 이란의 간섭을 배제하길 희망했다. 차르 표트르 1세는 그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1722년 7월 소규모 병력을 카스피해를 따라 조지아로 파견했다. 당시 사파비 제국은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의 공격으로 수도 이스파한이 포위되는 등 파탄 지경에 처했다. 그는 지금이 이란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고 조지아를 통합할 때라고 여기고 1722년 7월 간자에 4만 명의 조지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을 집결시키고 이란과의 독립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표트르 1세가 원군을 보내주길 희망했지만, 표트르 1세는 오스만 제국이 코카서스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자신이 끼여들었다간 심각한 반발을 살 걸 우려하여 더 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런 사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러시아군이 코카서스 일대로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 간자를 침공했으나 격파당했다.

사파비 제국은 그의 일련의 행동에 분개하여 카헤티 왕국의 군주이며 자신들의 충실한 가신이던 콘스탄틴 2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세우고 그를 대적하게 했다. 1723년 5월, 콘스탄틴 2세의 카헤티군과 이란군이 카르틀리로 쳐들어왔다. 그는 이에 맞서 항전했고 이메레티 왕국의 알렉산드레 5세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1723년 5월 8일 트빌리시가 함락되고 이메레티군이 전멸하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퇴했다. 콘스탄틴 2세는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카르틀리 왕을 칭했으나, 그와 바카르가 카르틀리 상부 일대를 장악하고 산악 지형에서 항전하는 걸 막지 못했다. 얼마 후, 오스만 제국예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내세우며 동부 조지아를 침공했다. 그는 콘스탄틴 2세와 손을 잡고 오스만군에 항전했으나, 전세가 기울자 1724년 7월 1,2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했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트란스캅카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이스탄불 협약을 체결하고 조지아에 대한 관심을 당분간 접었다.

예세는 오스만 제국 덕분에 카르틀리 왕위에 복귀했으나 권력은 유명무실했고, 실제로는 오스만군 지휘관이 실권을 행사했다. 오스만 제국은 1727년 그가 사망하자 카르틀리 왕국을 폐지하고 아할치헤 파샤 이샤크 1세 자켈리를 카르틀리 총독으로 내세웠다. 이리하여 카르틀리 왕국은 일시적으로 멸망했고, 카르틀리를 포함한 조지아 동부 일대는 오스만 제국과 나디르 샤간의 전쟁터로 전락했다.

2.9. 테이무라즈 2세

1744년, 나디르 샤테이무라즈 2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세우고 테이무라즈 2세의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를 카헤티의 왕으로 세웠다. 1745년, 테이무라즈는 수라미 요새에 숨어있는 기비를 이란군과 함께 포위 공격했다. 기비는 곧 체포된 뒤 나디르 샤 궁정으로 보내진 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1747년, 나디르 샤는 카르틀리와 카헤티에 막대한 공물을 부과했다. 그는 이란으로 가서 나디르 샤에게 엎드려 절한 뒤 공물이 너무 많으니 줄여달라고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1747년 6월 19일, 나디르 샤가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이란 전역에서 후임 샤한샤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내전에 뛰어든 인물 중 한 명인 알리 쿨리 칸은 테이무라즈의 딸인 케타반과 결혼했다. 쿨리 칸은 장인의 요청을 받아들여 막대한 공물을 폐지하기로 했다.

그 후 2년간 이란에 머물던 그는 거듭된 내란으로 혼란에 빠진 이란의 상황을 지켜보다가 1749년 가을 조지아로 돌아왔다. 이후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와 함께 이란으로부터 독립하기로 했다. 아스트라바드, 마잔다란, 길란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이란 사령관 무하마드 하산 칸 카자르가 이란으로부터 독립하려 드는 예레반 칸국을 포위 공격하자, 그는 예레반 주민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어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와 함께 예레반으로 진군했다. 헤라클리오스 2세가 선봉에 서서 무하마드 하산 칸을 격파했고, 무하마드는 코르투라프 요새로 도주했다. 헤라클리오스 2세는 요새를 곧 함락시킨 뒤 무하마드를 아버지에게 바쳤다. 그는 무하마드를 정중하게 대접하고 풀어준 뒤, 예레반 칸국을 자국의 속국으로 삼고 공물을 부과했다.

얼마 후, 카라바흐 칸 파나흐 알리칸 자반시르가 간자를 포위했다. 간자 주민들이 원군을 요청하자, 이번에도 응했다. 조지아군이 접근해오자, 카라바흐 칸은 포위를 해제하고 후퇴했다. 그는 이들을 추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간자 역시 속국으로 삼았다. 뒤이어 셰키 칸 하지 첼레비와 동맹을 맺고 조지아 일대를 수없이 습격한 다케스탄 산악 부족들을 향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셰키 칸은 도중에 다케스탄인과 연합하여 조지아군을 격파했다. 1751년,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군 사령관 아자트 샤가 예레반을 포위 공격했다. 이번에도 예레반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인 그는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에게 소규모 병력을 맡겼다. 헤라클리오스 2세는 키르불라키 인근에서 더 많은 병력을 갖추고 있던 아자트 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쫓아냈다.

1752년, 간자 칸 샤하베르드는 더 이상 그에게 충성을 바치길 거부했다. 이에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와 함께 간자로 진군했다. 샤하베르드는 셰키 칸, 다케스탄 산악 부족들과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다. 그와 헤라클리오스 2세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패퇴하여 조지아로 돌아갔다. 셰키 칸은 조지아에 대한 보복 원정을 계획하고, 아들 아가 키시 벡에게 다케스탄인, 쉬르반인, 다르벤트인, 간자인으로 구성된 대군을 맡겨 조지아를 침공하게 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고자 헤라클리오스 2세와 연합하여 트빌리시 외곽에서 맞붙었다. 이번에는 조지아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아가 키시 벡은 50마일 동안 추격한 적군을 가까스로 회피해 본국으로 귀환했다.

1754년, 아바르 칸 무함마드 누살 4세가 조지아를 침공해 므차디바리 요새를 포위했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적군을 무찔렀다. 이듬해(1755년) 헤라클리오스 2세가 크바렐리 전투에서 다케스탄 산악민족을 제압하면서, 다케스탄인들은 마침내 조지아 침략을 단념했다. 한편, 조지아 영토를 배회하던 투르코만인들이 아르메니아로 이주했다. 그는 헤라클리오스 2세를 예레반 칸국으로 파견했고, 헤라클리오스 2세는 아르메니아에 이주한 투르코만인들이 이전 목초지로 돌아가도록 강요하고 투르코만인들에게 이주를 허용한 예레반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얼마 후, 셰키 칸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는 걸 두려워한 간자, 카라바흐, 예레반, 카라다그, 나히체반 칸들이 헤라클리오스 2세와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셰키 칸을 도모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간자 근처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매복하고 있던 조지아군이 습격하여 5명의 칸을 체포했다. 셰키 칸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무슬림 칸들을 무단으로 잡은 이교도를 응징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헤라클리오스를 추격해 악스타파차이 강 인근에서 격파하고 5명의 칸을 구출했다. 뒤이어 조지아를 침공해 카라바흐와 보르찰라 지역을 점령하고 아가 키시 벡을 그곳에 남겨뒀다. 헤라클리오스 2세는 일단 후퇴했다가 병사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고, 카라바흐인 2,000명이 가세한 것에 힘입어 아가 키시 벡을 셰키로 몰아냈다.

1758년, 테이무라즈 2세, 헤라클리오스 2세, 이메레티 왕국솔로몬 1세는 공동 방위 동맹을 맺었다. 1759년 아할치헤의 오스만군과 다케스탄 산악민족 연합군이 조지아를 동시에 침공했다. 오스만군이 아토시와 아브네티 요새를 포위하자, 테이무라즈 2세와 솔로몬 1세가 군대를 통합한 뒤 아토시 요새를 포위한 투르크군을 격파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아브네티 요새를 포위하던 오스만군은 아군의 패전 소식에 아할치헤로 후퇴했다.

1760년 테이무라즈 2세는 이란 북부와 아제르바이잔을 장악한 아자트 샤에 맞서 러시아 제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러시아로 친히 찾아갔다. 그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당시 러시아군은 7년 전쟁을 한창 치르던 중이어서 조지아를 돕기 위한 군사 행동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1762년 1월 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테이무라즈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가 카르틀리-카헤티 연합 왕국의 초대 군주로 즉위했고, 명목상 카르틀리, 카헤티의 주군이었던 잔드 왕조의 카림 칸도 이를 받아들였다.

2.10. 카르틀리-카헤티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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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대 군주

3.1. 카르틀리 왕국(1466년 ~ 1762년)

3.2. 카르틀리-카헤티 왕국(1762년 ~ 18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