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1b39, #02336b 20%, #02336b 80%, #011b39);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바그라티온 왕조 | ||||
알렉산드레 1세 | 기오르기 1세 | 콘스탄틴 2세 | 알렉산드레 2세 | 바그라트 3세 | |
바그라티온 왕조 | |||||
기오르기 2세 | 레반 | 로스톰 | 바그라트 4세 | 기오르기 3세 | |
바그라티온 왕조 | 구리엘리 왕조 | ||||
알렉산드레 3세 | 바그라트 5세 | 바흐탄그 츠추나슈빌리 | 아르칠리 | 디미트리오스 구리엘리 | |
구리엘리 왕조 | 바그라티온 왕조 | 구리엘리 왕조 | |||
기오르기 4세 | 알렉산드레 4세 | 기오르기 5세 | 시몬 | 마미아 구리엘리 | |
바그라티온 왕조 | 구리엘리 왕조 | 바그라티온 왕조 | |||
기오르기 6세 | 기오르기 7세 | 기오르기 8세 | 알렉산드레 5세 | 기오르기 9세 | |
바그라티온 왕조 | |||||
마무카 | 솔로몬 1세 | 테이무라즈 | 다비트 2세 | 솔로몬 2세 | }}} 이베리아 왕국(고대) · 타오-클라제티 공국 · 타오 공국 · 클라제티 공국 · 이베리아 왕국(중세) }}}}}} 조지아 왕국 · 카르틀리 왕국 · 카헤티 왕국 · 이메레티 왕국 · 카르틀리-카헤티 왕국 · 조지아 공화국 |
2차 이메레티 왕국 24대 군주 სოლომონ | 솔로몬 1세 | ||
제호 | 한국어 | 솔로몬 1세 |
조지아어 | სოლომონ | |
라틴어 | Solomon I | |
가족 | 알렉산드레 5세(아버지) 타마르 아바시제(어머니) 요시프(형제) 바그라트(형제) 아르칠리(형제) 타마르(누이) 다비트(이복 형제) 호레산(이복 누이) 로담(이복 누이) 타마르 세르바시제(첫째 아내) 마리암 다디아니(둘째 아내) 굴칸 툴루키제(셋째 아내) 다비트(장남) 알렉산드레(차남) 다레얀(장녀) 마리암(삼녀) 바그라트(사생아) | |
생몰 년도 | 1735년 ~ 1784년 4월 23일 | |
재위 기간 | 1752년 ~ 1766년(1차 재위) 1768년 ~ 1784년 4월 23일(2차 재위) | |
서명 |
[clearfix]
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24대 군주.2. 생애
2차 이메레티 왕국 21대 군주 알렉산드레 5세와 아바시제 공국의 수장 레반 아바시제의 딸 타마르 아바시제의 아들이다. 형제로 요시프, 바그라트, 아르칠리, 누이로 타마르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 다비트, 이복 누이로 호레산, 로담이 있었다. 1752년 3월 알렉산드레 5세가 사망한 후 이메레티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직후 라차 공국의 로스톰 1세가 마무카를 앞세워 일으킨 반란에 직면했고, 아할치헤에 1년간 피신했다가 오스만 제국의 지원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수도에 돌아올 수 있었다.이후 밍그렐리아 공국의 오티아 다디아니 공작과 결혼동맹을 맺고 대귀족들에 대항하여 하층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 또한 수백년간 수많은 이메레티인들을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악습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에 노예 무역으로 많은 이득을 챙기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그에게 반감을 품고 1757년 레반 아바시제를 앞세워 이메레티로 진격했다. 레반 아바시제는 라차의 로스톰 1세와 동맹을 맺고 쿠타이시로 진격했다.
그는 이에 맞서 포티, 구리아, 아할치헤에서 오는 모든 산길을 차단해 투르크군이 증원을 받을 수 없게 했다. 이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 작전에 착수한 그는 1757년 12월 14일 크레실리에서 투르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아할치헤의 파샤는 자기 손으로 처단했다. 레반 아바시제도 전사했으며, 레반의 아들 기드온은 생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1758년 카르틀리 왕국의 테이무라즈 2세, 카헤티 왕국의 헤라클리오스 2세와 상호 방위 협약을 체결했다. 1759년 12월 동생 요시프를 압하지야의 대주교로 세우고 서부 조지아 정교회의 개혁을 후원했다.
1760년에서 1763년 사이에 오스만군의 침략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모조리 격퇴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1766년 아할치헤의 파샤 하지 메흐메트에게 대군을 맡겨 이메레티를 침략하게 했다. 라차의 로스톰 1세와 동맹을 맺은 투르크군은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작들의 지원을 받은 그를 격파하고 사촌 테이무라즈를 왕위에 세우고 노예 무역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는 산악지대로 피신한 뒤 이메레티 인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병력을 재건한 후 유격전을 벌였다. 투르크군은 적의 습격에 시달리다가 1767년 그와 평화협정을 맺고 이메레티에서 물러났다. 이후 테이무라즈에 대한 공세를 이어간 그는 1768년 츠흐랏스카로 전투에서 승리하고 테이무라즈를 투옥한 뒤 왕위를 되찾았다. 또한 그동안 자신을 적대했던 라차 공국의 로스톰 1세를 붙잡아 실명형에 처한 뒤 라차 공국을 이메레티 왕국에 병합시켰다.
1768년, 막심 쿠텔리를 러시아 제국에 사절로 보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러시아는 고틀롭 쿠르트 하인리히 토틀레벤이 이끄는 소규모 분견대를 조지아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1769년 가을, 토틀레벤은 이메레티로 이동한 뒤 이메레티군과 연합하여 쇼라판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토틀레벤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오스만군이 이메레티의 수도 쿠타이시를 공략하는 걸 막지 못했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수코틴 소장을 새 지휘관으로 세웠다. 이후 이메레티-러시아 연합군은 1770년 8월 초라파니, 바그다디, 쿠타이시를 포함한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수코틴이 여세를 몰아 포티를 공략하려 하자, 그는 늪지대가 펼쳐진 그곳을 무리하게 공격하지 말라고 조언했으나 무시당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열병에 걸렸고, 1772년경 이메레티를 떠나야 했다.
러시아군이 떠났지만, 그는 이후에도 2만 병력을 동원하여 오스만 제국에 항전했다.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은 고리 공작을 격파했으며, 1774년 1월 아할치헤의 투르크군 4,000명을 치헤리멜라 강 협곡으로 유인해 섬멸시키기도 했다. 그 후 1774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큐추크-카이나르지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오스만 제국은 이메레티 왕국으로부터 공물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고, 러시아는 이메레티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좀더 자유로워진 그는 왕권을 드높이고 각지의 통제권을 확장하며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은 1778년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레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친선 관계를 맺고 세력도 강해지는 이메레티 왕국을 경계했다. 1779년 오스만 제국이 후원한 압하지야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되었다. 이에 1780년 오스만군이 이메레티 왕국을 공격했으나 루키 전투에서 패배했다. 1781년 구리아를 놓고 양측이 맞붙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그러던 1784년 3월 숨을 거두었고 겔라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이메레티를 오랫동안 지배하며 갖은 수탈과 노예 무역을 일삼았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한 공으로 조지아인들에게 대왕(დიდი) 칭호를 받았으며, 2016년 12월 22일 조지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축일을 4월 23일로 정했다.
그는 생전에 3번 결혼했다. 첫번째 아내는 티나틴 셰르바시제로, 둘 사이에서 다비트 왕자가 태어났다. 두번째 아내는 오티아 다디아니의 딸 마리암으로, 알렉산드레 왕자와 다례얀, 마리암 공주가 태어났다. 세번째 아내는 굴칸 툴루키제로,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다비트는 일찍 죽었고 알렉산드레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1778년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후 1780년에 사망했다. 이로 인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자, 1783년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의 군주 헤라클리오스 2세의 손자이며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를 왕위 계승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헤라클리오스 2세의 궁정에 있던 다비트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던 다비트 게오르기예비치[1]가 다비트 2세로서 왕위를 가로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