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1 02:59:09

크세노폰

파일:크세노폰.jpg

Ξενοφῶν (생몰년도: 기원전 427년 ~ 기원전 355년)

1. 개요2. 생애3. 평가4. 저서5. 여담

1. 개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군인, 역사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다.

2. 생애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철학을 공부했다. 아테네 출신으로 제2계급인 기사 계급 출신으로 흔히 생각되는데, 전쟁터에 말을 끌고 참전했다는 점, 승마술에 뛰어났다는 점, 그가 부유하면서도 귀족 인사들과는 가깝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어느날 페르시아의 내전이 터지고 그리스 용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와 전쟁을 했던 나라이지만, 페르시아 전쟁에서 크세르크세스의 막강한 군대를 그리스인들이 막아내자 능력을 인정하고 고용하기 시작했다.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게 용병으로 가도 되겠냐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가지 말라고 하면서, 정 가려 한다면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오라고 한다. 크세노폰은 어떻게 하면 무사히 돌아오겠냐고 신탁을 묻고 결국 페르시아로 간다.[1]

소 키루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으로 그리스 용병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다. 크세노폰은 그에게 고용되어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가며 전투를 시작한다. 그러나 쿠낙사 전투(BC 401)에서 패배하고 고용주 소 키루스와, 용병대의 지휘관들은 모두 사망하고 만다. 이때 남은 그리스 용병이 약 만 명이었고, 이들은 만병대라고 불린다. 크세노폰과 남은 그리스인 용병들은 페르시아의 적군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크세노폰은 만병대의 수장이 되어 지옥같은 처절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적의 매복이 우려되는 유프라테스 강이 아닌 적들의 매복이 없는 티그리스 강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이때 겨울의 날씨로 동료들이 동상을 입고 높은 산지라 말을 끌 수 없어 두 발로 걸어 흑해로 가야했던 그 상황을 자신의 책 아나바시스에 묘사한다. 페르시아의 영향권에서 탈출한 시점에서 만병대의 숫자가 약 8000명, 이후 다시 용병들이 각자의 이유로 부대를 이탈하면서 6000여명이 됐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의 도움으로 그리스로 돌아오게 된다.

394년 경, 그리스에 돌아와 코로네이아 전투에 참전해 스파르타 진영에서 테베와 아르고스를 상대로 싸운다. 아테네의 적인 스파르타를 도운 탓에 고향 아테네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그는 결국 391년부터 스파르타의 올림피아에서 책을 쓰기 시작한다. 371년에 스파르타가 테베를 상대로 레욱트라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목숨이 위험해지자, 코린토스로 이민을 간다. 355년에 죽음을 맞이한다.[2]

그의 대표작인 아나바시스가 바로 저 용병대 참전을 다뤘으며 그 의미는 '올라감'이다. 높은 산지를 올라야했던 크세노폰의 기록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대부분 올라갔던 우리가 어떻게 내려왔는가에 할애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매우 잘생겼다고 한다.

3. 평가

아나바시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대제국, 그것도 적의 수도 중심부에서 닥친 최악의 상황에서도 원래의 직분이 아니었던 총지휘를 임시로 맡아 반 이상의 병력을 살려내는 과정을 보면 확실히 명장의 기질이 있다. 그 상황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전멸을 막으면서 안정적으로 퇴각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즉, 크세노폰은 스승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주요 제자 중 하나지만 그와 소크라테스의 친분이나 사제관계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좀 붙는 편이다. 그러나 크세노폰의 저작에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도 소크라테스가 상당히 많이 나오거나 중요하게 나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인해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대단히 앙모하는 것은 틀림없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여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는 달리 그는 군인으로서의 삶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처럼 소크라테스의 방식이라던가 인생관 따위의 전부를 추종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견해가 많다.[3] 키루스도 상당히 존경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키루스와 같은 제왕적 혹은 지방 유지의 삶과 생활에 소크라테스풍의 추론이나 지혜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예로부터 같은 스승을 둔 플라톤의 라이벌 철학자, 작가로 취급되어 온 경향이 있으며, 후세에는 대체로 크세노폰이 플라톤에게 많이 꿀리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플라톤에 비해 논리 및 문장력이 박약하고, 플라톤과는 좀 다른 상의 소크라테스를 진술하며, 세속적인 편견을 자랑하고, 말 사육법 같은 별 구질구질한 잡지식이나 논한다는 이유로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고상한 철학자' 상에 영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대체로 플라톤이 그리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자신의 이상적 철인상이 많이 투영되어있고, 크세노폰은 그런 매력적인 철학자상을 지어낼 능력이 없으므로 좀 더 사실에 가까운 소크라테스를 묘사 했으리라 보는게 중론이다.[4]

분명히 말해서 크세노폰은 플라톤에 비해서 학문적으로 딸리는 것이 맞다. 그리고 둘 간의 은밀한 대립이 있었다고 보지 못할 것도 없다. 플라톤의 경우 행적을 볼 때 다른 학파를 이뤘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학문교류를 하기도 하고, 또 그들을 거침없이 자신의 대화편에 출연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대의 유명인이라 할 수 있던 크세노폰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출연하지 않는다.[5] 이는 크세노폰 역시 마찬가지로, 크세노폰은 플라톤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툭 던지듯이, 제자 중에 플라톤이 제일이라는 언급을 하고 거기에서 그칠 뿐이다. 뿐만 아니라, 크세노폰의 글들 중에서 좀 고차원적이다 싶은 부분은 걍 플라톤 학설의 복사판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리 많지 않은 크세노폰의 작품들만 봐도 플라톤에 대한 묘한 경쟁의식을 느낄 만한 것들이 제법 있다. 당장 향연이나 소크라테스 회상만 봐도 플라톤을 겨냥했다 볼 수 있는 것들이며, 크세노폰 글을 읽다 보면 플라톤 국가가 끼친 영향력도 느낄 수 있다.

헌데 현대에 와선 플라톤의 이름이 워낙 독보적이라 간과하기 쉽지만, 당대 그리스의 기준으로 보면 크세노폰이 플라톤에게 이름값에서 심히 꿀릴 것은 없었다고 보는게 맞다. 세속적인 명성를 중시하던 당시 그리스인들의 기준에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정치가로서 성공하거나, 군인으로서 전장에서 공을 세우거나, 아니면 운동선수로서 올림픽에서 이름을 떨치는 등의 업적을 말했다. 이 점에 비추어보면 페르시아 땅을 누비던 전설적인 무용담의 주인공인 크세노폰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대중적인 인기인이었고, 플라톤은 정치적인 좌절만 두어번 맛 본 철학자이니, 서로 몸담은 물이 달랐고, 피차 소 닭보듯 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다보니 한편으로는 예로부터 크세노폰의 추종자도 많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다리우스 3세로부터 빼앗은 보석함에 대왕 자신의 평생 애독서 두 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을 넣어 애지중지 보관했다 하는 얘기는 유명하다.[6] 키케로는 크세노폰의 문체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체보다 떨어질 것이 없다고 보았는데, 크세노폰의 군더더기 없이 간명한 문체야말로 논지가 명확해서 청중에게 이해받기 쉬운 모범적인 문체이며, 능력도 안 되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흉내 내려다가 가랭이 찢어지는 멍청이들의 문체보다야 낫다고 여긴 것이다.[7]니콜로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크세노폰의 저서를 칭찬하였으며,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같은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군사학의 필수 고전이다.

이렇듯 철학자와 현실정치가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들이 크세노폰을 중시했다. 크세노폰의 실천적, 현실주의적, 기술적인 내용의 저서들은, 플라톤의 저작들과는 상이한 매력이 있다.[8] 실제로 장군이자 역사가이면서 철학가였던 크세노폰의 저작과 비교할 경우, 플라톤의 정치적 저작들은 지나치게 몽상적이라고 비웃을 수 있을 만큼, 그에게는 플라톤과는 또다른 거대한 설득력이 있다. 이런 크세노폰의 매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그 저서 목록과 현존하는 저서의 목록이 일치하는 경우로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유이하다.

4. 저서

  • 아나바시스
  • 헬레니카
  • 소크라테스의 회상
  • 향연
  • 경영론 - 이스코마코스라는 지주의 가정경영학을 다룬 대화편이다. 이스코마코스는 실존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 대화편에 나타난 모습은 실은 크세노폰의 페르소나라고 한다.
  • 키루스의 교육
  • 마술(馬術, On Horsemanship) - 말 그대로 말을 고르는 법이나 다루는 법 등 여러가지 필요한 기법을 다룬 저서로, 현대 승마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명하다.[9]
  • 단편들을 포함한 기타 다수
  • 아테네 헌법 - 크세노폰의 저작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민주정을 심하게 디스하는 성향이 크세노폰과 맞아보였던 듯해서 그렇게 알려졌으나, 19세기와 20세기부터는 이름없는 누군가[10]위작이라고 본다.

5. 여담

  • 플라톤에 대해서는 저서에서 지나가듯이 딱 한 번 언급했다(《소크라테스 회상록》, 3.6.1.). 플라톤은 저서에서 크세노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아예 없다.


[1]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가도 되는지부터 물었어야지!'라고 크세노폰을 꾸짖었다고 크세노폰의 저서에 써 있다.[2] 이런 경험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아게실라오스 2세를 찬양하다시피 띄워줬다. 아예 아게실라오스라는 단편이 따로 전해질 정도. 그 영향 때문인지 로마 시대까지 가서도 아게실라오스 빠들이 많이 양산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키케로다. 물론 아게실라오스는 객관적으로 봐도 당대의 명장이고 영웅인 건 맞다. 특히 아나바시스를 읽다가 감정이입한 독자들이라면 헬레니카에서 아게실라오스가 만인대에게는 최종보스 급이자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인물인 티사페르네스를 두 차례나 엿먹여서 참수당하게 만드는 걸 보고 통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3] 예를 들어 플라톤은 누차 철학자의 삶이 가장 좋다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 말하지만 크세노폰은 그러지 않는다.[4]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편견을 비판하면서, 철학의 소양이 낮은 사람이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더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오히려 잘못 전달하거나 곡해할 염려가 크다고 지적했다.[5] 플라톤 대화편 메논의 주요 등장인물인 메논이,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서도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는 기묘한 공통점은 있다.[6] 이 두 책의 공통적 특징은 '영웅 일대기'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키루스의 교육》의 키루스 대왕을 자신이 지향할 영웅상으로 보았다. 다만 다리우스 3세는 키루스 2세의 후손이자 후대의 왕이기에 아이러니하다.[7] 참고로 키케로가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체란, 지금은 소실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의 문체를 말한다.[8] 이 같은 특징 때문에 중국의 묵자왕수인에 비견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모든 전쟁술을 적극적으로 진술한 크세노폰과는 달리 묵자는 수비술만을 논했다: 모두가 수비에 통달하고 공격은 안 하면 세상에 평화가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9] 특히 말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일방적인 명령이나 강요를 지양하고 말과의 교감을 중시하여, 당장의 성과를 위해 말을 학대하는 것을 경계시켰다.[10] Pseudo-Xenophon, 또는 늙은 과두파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무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