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2 07:52:01

튤립 시대

Lâle devri (لاله دورى) 튀르키예어
Age of Tulip,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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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을 사랑한 술탄 아흐메트 3세의 초상화와 그의 서명(tuğra)
“정원 주변에 거울을 둘러 세워 전시장이 두 배 이상 넓어보이도록 했다. 각 품종의 이름은 은으로 만든 명패에 새겼다. 튤립 4개마다 초를 하나씩 세워 불을 켰는데, 이 초의 높이도 꽃의 키와 일치하도록 만들었다. 금박을 입힌 새장 안에서 새들이 노래를 불렀고, 커다란 거북 수백 마리가 등에 촛불을 지고 정원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게 함으로써 전시장을 환상적인 조명으로 장식했다.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튤립의 색깔을 돋보이게 하고 조화를 이루는 색의 옷을 입도록 했다.”

마이클 폴란, <욕망하는 식물> 중에서
1. 개요2. 특징
2.1. 튤립
3. 유럽에 미친 영향

1. 개요

오스만 제국아흐메트 3세가 집권한 1718년부터 1730년까지를 가리키는 역사용어. 이 시기의 오스만 제국은 이미 과거 빈 공방전 때와 같은 군사력을 잃었으나 문화적으로 중흥기를 맞이했다. 아랍 문자의 활자화가 이루어진 것이 이때의 일이며, 튀르키예 최초의 소방서도 이 시기에 세워졌다. 오늘날 캬으트하네(kağıthane)라고 불리는 '사아다바드(saadabad)'에 종이(kağıt)공장과 화려한 별궁이 지어진 것도, 갈라타 북쪽의 베이오울루(Beyoğlu)지역이 이스탄불에 포함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2. 특징

'튤립 시대'라는 이름의 기원은 아흐메트 3세와 대재상인 네브셰히를리 다마트 이브라힘 파샤(Nevşehirli Damat İbrahim Paşa)의 지원과 후원 아래 코스탄티니예 곳곳에 튤립이 심어졌던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품종까지 무려 1500여 가지에 이르는 튤립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튤립의 전성시대.

그외에 다마트 이브라힘 파샤는 군사 개혁으로도 유명하다. 튀르키예판 왕안석으로 평가되는 그는 1716년에 와지르 (부수상), 1718년에 그랜드 와지르 (수상)이 되어 1730년까지 부임하였다. 카를로비츠에 이어 오스만 제국의 2번째 굴욕인 파사로비츠 조약 이후 1719년, 그는 비엔나에 대사를 파견하였고 1721년에는 파리 대사로 심복인 에펜디를 파견하였다. 파견 전에 이브라힘 파샤는 대사들에게 서유럽 문명을 시찰하고 오스만 제국에 적용할 방안을 강구해 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노력은 튤립 시대에 시작된 것이다.[1]

한편, 1716년경 프랑스 장교인 드로세포는 오스만 조정에 외국인 공병장교대 파견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1720년 게르첵으로 알려진 프랑스 출신의 개종자 다비드는 코스탄티니예에 소방대를 조직하였다. 1721년에는 프랑스 대사관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같은해 7월 5일, 튀르키예 인쇄소[2]가 개장하는 등[3] 여러 변화가 있었다. 플랑드르 출신 화가 반 무어가 오스만 궁정에서 활약한 것도 이 시기이다.

1729년엔 프랑스의 귀족 본느발 백작이 오스만 측에 귀화, 개종한 후 1731년부터 당시 그랜드 와지르이던 토팔 파샤의 요청으로 포병대를 맡게 되었다. 1734년에는 위스크다르에 신식 포병을 위한 훈련소가 생겼으며 이듬해 본느발은 파샤 및 포병대장으로 봉해졌다. 비록 예니체리의 질투로 몇 년 후 폐쇄되긴 했지만 이후로도 바론 드 토트, 캠프벨[4] (잉길리즈 무스타파) 등의 교관들이 군사 교육을 이어나갔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오스만 제국이 파사로비츠 조약 이후 1800년까지 영토를 거의 잃지 않고 일부는 확장하는 '중흥'을 맞이할 수 있었다.

2.1. 튤립

당시의 튤립개량은 돌연변이 튤립을 접목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바이러스에 걸린 튤립을 방치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 때문에 알록달록한 반점이 있는 튤립같은 종류도 있었다고... 물론 이런 종류의 튤립은 번식력이 없거나 병충해에 매우 취약했고 그때그때 새로 교배해서 키워야 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품종은 특별히 각광받지 않는 이상 개발자가 죽으면 그 튤립의 대도 끊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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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정원사(Bostancı - 보스탄즈)라고 불리던 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코스탄티니예 도처에 심어진 튤립들을 관리하는 전문 정원사이자 술탄의 호위대이자 경찰이자 사형집행인이었다. 정원사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를 자루에 담아서 보스포루스 해에 던져버리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특히 고급 관리들의 사형집행은 수석 정원사가 담당했다. 재미있는 풍습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는 정원사와 달리기 시합을 요청할 수 있었다. 톱카프 궁전 정문에서 에미뇨뉴 부두까지 약 800m의 거리를 달리는 시합인데, 만약 죄수가 에미뇨누 부두까지 먼저 도착한다면 그는 사형을 면하고 추방형에 그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는 죽이고 싶지는 않은데 사형을 내려야만 할 경우 빼주는 방법으로 쓰였던 듯하다.

그리고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튤립 파동이 조금 다른 양상으로 코스탄티니예에서 다시 한번 터졌다. 그럼에도 이브라힘 파샤를 변호할 수 있던 건, 네덜란드 튤립 버블에 대해 똑똑히 알고 있던 이브라힘 파샤는 튤립의 품종을 세 가지 층으로 구분한 다음 균일가를 책정해 투기로 인한 버블을 방지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튤립 시대의 문제점은 버블경제가 아니라 제국 전반에 만연한 사치풍조였다.

튀르키예인들은 원래 튤립을 좋아했다. 튀르키예의 고유 품종인 야생튤립의 경우 꽃이 피면 고개를 숙이기 때문에 '겸손함'을 상징하는 꽃으로 여겼으며, 튀르키예어로 튤립을 뜻하는 Lâle를 아랍 문자로 표기하면 'لاله (l a l h)'가 되는데, 을 뜻하는 'الله(a l l h)'‎와 글자가 같기 때문에 이슬람 신비주의에서는 '신의 꽃'으로 여겼다. 이와같은 이유로 티무르에게 NTR당한 걸로 유명한 바예지트 1세는 튤립이 자신을 지켜주는 부적으로 여겨 튤립무늬가 그려진 속옷을 입었으며, 쉴레이만 1세는 오늘날 꽃남방 패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튤립무늬와 초승달 무늬가 그려진 셔츠를 즐겨 입었다. '초승달'을 뜻하는 튀르키예어 hilâl(هلال - 하, 람, 알리프, 람)또한 *알라(الله - 알리프, 람, 람, 하)와 같은 철자를 공유한다. 결국 슐레이만 대제의 꽃남방은 자신은 곧 하느님이라는 강력한 의지가 숨어있는 셈이다.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도 튤립이 그려진 방패나 튤립을 새긴 칼을 자주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당시 튀르키예인들이 좋아하던 튤립종은 튀르키예 고유의 품종이 아니었으며 주로 네덜란드프랑스에서 수입된 종류였다. 이미 100년 전에 튤립 버블을 겪은 네덜란드에선 상당한 품종개량이 진행되어 있었다. 때문에 새로운 품종의 튤립 구근을 수입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이 쓰였다. 원래 돈 많은 오스만 황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제국내에서 전반적인 사치풍조가 만연했다. 자연스럽게 물가가 올라가고, 여기다 정부는 왕가의 사치로 인해 줄어든 예산을 확충하기 위해 세금을 매기는 짓을 저질렀다.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반발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비난여론에 편승한 파트로나 할릴(Patrona Halil)이 반란을 일으켜 이브라힘 파샤를 죽이고, 아흐메트 3세를 퇴위시키고 마흐무트 1세를 옹립하면서 튤립 시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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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아흐메트 3세의 식수대'

마흐무트 1세는 즉위하자마자 사치풍조의 상징이 되어버린 코스탄티니예 내의 튤립을 모두 뽑아버렸다. 즉위할 때 그는 "국가를 무능한 재상[5]들에게 맡기지 말아라.(Devleti ehliyetsiz sadrazamlara teslim etme)" 라는 말을 하였다.

이후 튤립을 키운다는 것은 단지 잉여로운 취미에 불과한 걸로 여겨졌다...... 하지만 한번 돈 맛을 본 제국의 사치풍조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마흐무트 1세 시기의 오스만 제국페르시아러시아,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했지만 그나마도 현상유지에 불과했으며, 이후 점점 영토가 줄어드는 가운데에서도 사치풍조는 계속 이어졌다.

튤립 시대에 유행했던 품종인 mahbud이나 istanbul 같은 종은 오늘날 거의 멸종했다. 하지만 최근에 튀르키예의 식물학자들이 오랜 노력 끝에 istanbul종을 복원해냈다. 단검의 날처럼 뾰족뾰족한 튤립이 바로 그것이다.

3. 유럽에 미친 영향

이 시기 유럽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튀르크리라는 튀르키예풍이 유행했는데, 파리에 파견된 오스만 대사 뮈테페리카 쉴레이만 아아(Müteferrika Süleyman Ağa)는 커피 마시는 풍습을 프랑스에 전파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도착한 오스만 대사는 프랑스의 국왕이 있다는 베르사유라는 도시로 향했지만 프랑스보다 오스만이 한 수 위라고 생각했던지 예복을 갖춰입는 대신 간편한 실내복 차림으로 프랑스 왕을 알현한 데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왕은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루이 14세였고, 오스만 대사의 오만한 행태에 화가 난 루이 14세는 오스만 대사를 당장 파리로 추방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하필이면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였던 메흐메트 4세는 꽤 성격이 급한 인물이었고, 프랑스와의 우호관계를 다지라는 황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하면 어찌될지 모른다고 걱정하던 쉴레이만 아아는 파리의 저택 하나를 사들이고 내부를 튀르크식으로 꾸민 다음 커피를 팔았다. 이것이 파리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커피도 함께 유행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7년 뒤인 1689년에는 파리 최초의 커피숍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본래 튀르키예의 악기였던 심벌즈나 클라리넷이 클래식 음악에서 받아들여졌다. 메흐테르(Mehter)풍의 군악 또한 유럽에 알려지면서 'alla turca'(터키 행진곡)이 여럿 작곡되기도 했다.

[1] 1630년 코추 베이가 무라트 4세에게 올린 상소가 개혁의 시작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1635년경 메르카도르 지리서가 번역되고 무라트 4세가 제국의 영토 제작을 위해 네덜란드의 학자 골리우스에게 초청장을 보낸 사례가 있긴 하다. 1682년에는 스페인식 3층 갤리선이 제작되기도 했다.[2] 1742년 폐쇄되었으나 1784년 재개장하였다.[3] 기존엔 외국 서적만이 인쇄 가능했다.[4] 스코틀랜드 출신 개종자[5] sadrazam. 튀르크어 그대로 직역한다면 대(大)재상이 맞지만, 이미 '재상' 이라는 말 자체에 최고 관료라는 뜻이 있으므로 재상이라 의역하는 것도 허락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