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1506년 ~ 157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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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빼앗긴다는 것의 의미가 당신들과 우리 사이에 굉장한 차이가 있는 듯하오. 당신들에게서 왕국을 하나 빼앗으면 우리는 그대의 팔을 잘라낸 것과 같소. 당신들이 우리의 함대를 격퇴하더라도, 이는 그저 우리의 수염을 벤 것이나 다름없지. 한 번 잘린 팔은 다시 자라지 않지만, 한 번 깎인 수염은 전보다 더 두껍게 올라오는 법이라오.
소콜루, 레판토 해전 후 베네치아 대사에게[1]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Vezir-i Azam, Sadrazam).소콜루, 레판토 해전 후 베네치아 대사에게[1]
2. 생애
세르비아인[2]이거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서,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되어 예니체리가 되었으며, 나중에 재상까지 올랐다.[3] 모국어인 세르비아어 외에도 오스만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베네토어, 라틴어 등을 구사할 수 있었다.데브시르메로 징집되어 황궁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당시의 황제였던 쉴레이만 1세의 눈에 들었으며, 예니체리 군단의 일원으로서 모하치 전투와 제1차 빈 공방전을 시작으로 쉴레이만이 친정한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 승진하여 1551년에는 여러 지방관직 중에서 가장 높은 루멜리아 대총독에 임명되었으며, 1555년에 부재상. 1565년에 마침내 재상에까지 올랐다. 한편 1559년에는 반란을 일으킨 황자 바예지트의 군을 격파하여 훗날 셀림 2세가 되는 셀림이 쉴레이만의 뒤를 이어받도록 만들었으며[4] 이듬해에 쉴레이만이 현 헝가리의 시겟바르로 친정했을 때에도 수행했고, 쉴레이만의 임종을 지키고 셀림 2세가 순조롭게 황위를 이어받는 과정을 주도했다.
셀림이 즉위한 이후로도 재상직을 유지했으며, 향락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는 황제 셀림 2세를 대신해 사실상 제국을 운영했다. 이때까지의 재상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휘둘렀다. 쉴레이만에게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라 황제인 셀림 2세가 최악의 암군임에도 제국을 현상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뇌물을 상당히 밝히는 면이 있어서 고위 관직에 진출하기를 원하는 관료들은 일단 그에게 고액의 선물부터 바쳐야 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당시 베네치아령이었던 키프로스를 공략하는 일만은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셀림 2세의 뜻을 받들어 추진해야 했으며, 그 결과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군이 패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이 밖에도 수마트라 원정이나 예멘 원정 등을 지시했으며, 수에즈 운하를 개통하려고도 시도했으나 실패로 그쳤다.
셀림 2세가 서거하고 그 아들인 무라트 3세가 즉위한 이후로도 재상직을 유지했다. 무라트 3세를 보좌하며 합스부르크 제국 및 사파비 왕조와의 전쟁을 겪었으나 1579년에 암살로 생을 마쳤다. 무라트 3세의 애첩이었던 사피예 술탄의 사주를 받은 예니체리 병사가 살해했다고도 하고 하사신파의 범행이라고도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는 황제의 모후나 애첩 등이 정권을 잡는 여자 술탄 시대가 이어지며, 오스만 제국은 내부적으로 곪아가기 시작한다.
3.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
자세한 내용은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 문서 참고하십시오.[1] 소콜루 본인은 베네치아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부재상 중 하나로 해군 총사령관 직을 역임한 바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던 피얄레 파샤에게 상당한 공격을 받고 있던 와중에 꺼낸 말이다. 자신의 재상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레판토에서 한 번 깨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묻어갈 필요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베네치아 대사에게도 이렇게 강경하게 나가고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울루치 알리에게 함대를 즉시 재건하도록 시켰다.[2] 세르비아에서는 자국 출신이라고 가르친다.[3] 오스만 제국에서는 지방관에게 기본적으로 군사적인 재능을 요구했으며, 따라서 예니체리 출신이라도 국경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길이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행정적으로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아내면 점점 더 중요한 지방으로 부임할 수 있었으며, 끝내는 중앙의 요직에 앉을 수 있었다.[4] 오스만 제국에서는 모든 황자들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총독 업무를 보게 하면서 경험을 쌓게 하고, 황제가 서거하면 황자들끼리 경쟁을 벌여서 진 쪽은 몰살당하는 법이 있었다. 쉴레이만이 슬슬 고령이 되다 보니 살아남은 둘뿐인 황자였던 셀림과 바예지드의 사이가 갈수록 나빠진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에 아들들끼리의 분쟁에 질려 버린 쉴레이만은 둘의 임지를 바꾸어 버렸다. 이 때 셀림은 순순히 황명에 따랐지만 바예지드는 드러내 놓고 불만을 나타내며 새로운 부임지로 가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었는데, 이거 반역을 꿈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판단해 버린 쉴레이만은 소콜루 메메드 파샤와 셀림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시켰다. 결국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로 판단한 바예지드는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한다. 다만 훗날 즉위한 이후의 행보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부황의 명령에 순순히 응하는 것을 빼면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셀림이 승리를 거둔 건 순전히 소콜루 메메드 파샤 덕이었는데, 황위 계승 분쟁에 황자가 아닌 일개 관료가 끼어들어 처리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