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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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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3. 중세
3.1. 십자군 전쟁 시대
4. 근세5. 근대6. 현대
6.1. 레바논 내전6.2. 레바논 내전 종전 이후

1. 개요

레바논역사를 다루는 문서.

2. 고대

페니키아의 땅으로 페니키아의 중심도시인 티레, 시돈고대 이집트에 목재를 수출하면서 지중해 최대의 무역 도시로 번성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최초로 갤리선을 사용하여 무역한 민족이자 최초로 표음문자를 개발한 민족으로도 알려져 있다. 바이블의 어원이 된 비블로스 같은 도시들도 번성했다. 하지만 당시 페니키아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서로 통일되지 않은 별개의 관계를 유지했고,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등 많은 나라들이 이곳을 차지하고 도시들로부터 공물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페니키아 문자아람어로 전수되면서 아람 문자로 변화한다.

고대 페니키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언어는 거의 비슷했지만 종교가 달랐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를 믿던 반면 페니키아인들은 바알과 타니트 등의 신을 숭배했다. 그러나 성경의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보듯 유대인들이 종종 페니키아의 종교 문화를 흡수할 때가 있었던 것처럼 페니키아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흔했다.

페니키아인들의 종교와 이스라엘인들의 종교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었다. 가령 제사의 규례를 소개한 레위기에 따르면 해마다 속죄의 날에 두 마리의 숫염소가 제물로 바쳐지는데 한 마리는 제단 위에서 야훼에게 바쳐지고 나머지 한 마리는 '아사셀 Azazel'을 위해 황무지로 끌려가 벼랑 끝에 떨어져 죽게 된다. ‘떠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아잘’과 ‘염소’라는 뜻의 ‘에즈’가 결합된 단어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그것의 궁극적인 원천으로 다시 보내졌다는 측면에서 ‘악마’, ‘사막 귀신’ 또는 ‘사탄’을 언급한 이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대속죄일 의식을 위해 두 마리의 염소가 선택되고, 그중에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광야로 내보내는데 그것이 바로 ‘아사셀 염소’이다. (레 16:8, 10) 상징적으로 백성의 죄를 전가시킨 산 염소를 광야로 내보냄으로써 더 이상 백성의 죄가 남아 있지 않고 모든 죄악이 제거되었음을 확인시키는 일종의 속죄(贖罪)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첫 번째 해석을 좇아 아사셀 염소는, 인류의 모든 죄악을 홀로 짊어지시고 예루살렘 밖 갈보리 십자가 제단으로 나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표상이요 그림자로 본다(사 53:6, 11-12; 롬 3:24-26).

아사셀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위기에 한 번 등장할 뿐 그것이 무엇 혹은 누구를 의미하는지 말해주는 단서가 성경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랍비들은 아사셀을 광야에 사는 일종의 악귀나 악령으로 묘사했다. 이는 해마다 두 염소를 각각 신과 악귀에게 바친 우가리트의 종교 의식과 유사하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들어서고 그리스인들이 유입되었으며, 헬레니즘화가 진행되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이 고대 로마에 정복당하고 이 지역은 로마 제국 영토로 이어진다.

한편 고대 페니키아인들은 오늘날 튀니지 동부에 우티카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한 이후 다시 서진하여 카르타고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하는데, 이 카르타고는 도시 국가를 넘어 시칠리아 섬과 이베리아 반도 해안지대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가 되었다. 본래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본토의 티레에 조공을 바칠 의무가 있었으나, 상술한 알렉산드로스 3세티레 공방전의 결과 티레가 멸망한 이후 시돈에게 상납금을 바쳤으며 이후 시돈이 몰락하자, 카르타고가 페니키아 도시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게 되어 외려 카르타고가 우티카 같은 먼저 건설된 식민도시들은 물론 심지어 페니키아 본토의 여타 페니키아 도시들로부터 상납금을 받게되었다.[1]

고대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에서 출발한 국가이다 보니, 페니키아어 그리고 페니키아 문자를 사용하였다. 한편으로 카르타고인들이 믿던 신 역시 페니키아인들이 믿던 바알이었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페니키아 본토에서는 이슈타르 숭배와 연계된 바알 신앙이 우세했던 반면[2] 카르타고에서는 바알의 부인이자 그림자, 달의 여신으로 여겨진 타니트를 숭배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카르타고에서는 바알 숭배보다 타니트에 대한 숭배가 오히려 더 유행하였지만, 타니트는 페니키아 본토에서는 숭배되지 않던 신이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고대 로마 시대 페니키아와 팔레스티나 일대가 전부 동일한 정부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니키아인들의 유대교 개종이 더 가속화되었다.[3] 유대인 사회에서는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출신 개종자들을 어떻게 유대교 사회에 흡수해야 하는가 관련한 논란이 끊이지가 않았고, 오늘날 비교종교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유대교 사회 내 이러한 갈등이 오늘날 초기 기독교의 보급 및 발전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서기 3세기 이후 로마 제국 동부에서 기독교가 점점 유행하기 시작하고 313년 밀라노 칙령 및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기독교 국교화 선언 이후 바알 숭배 신앙은 페니키아에서 몰락하고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되었다.[4]

서기 3세기 무렵부터 고대 베리투스(베이루트)는 로마 제국의 법학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전통적인 대학 역할을 해왔던 아테네, 로도스, 밀레투스, 에페소스 등등이 몰락하고 3~6세기 기준 로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시리아 근교의 베리투스가 법학 대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베리투스 법학교는 주로 그리스어가 사용되던 동로마 제국 내 학교 중에서도 라틴어 법전 연구가 특히 활발한 학교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절 말기에 퍼진 역병으로 동로마 제국 전반에 학문 지원이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5] 지진과 해일로 베리투스 시가 파괴되고 이를 제대로 복구하지 못하였다. 7세기 아랍 무슬림들이 레바논 일대를 정복하던 당시 베리투스는 일개 어촌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3. 중세

동로마 제국 시기의 종교 분열 및 그리스어 사용자들과 아람어 사용자들간의 반목으로 정교회에서 아람어 사용자 대부분이 오리엔트 정교회(네스토리우스파, 야코부스파)를 받아들여 분리되어 나갈 때,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칼케돈파-가톨릭을 지지했고 야코부스파와의 갈등을 피해 레바논 산악지대로 이주한다. 이들은 이후 교회의 동서분열 이후 교황수위권을 받아들이며 마론파의 기원이 되었다.

이슬람이 레반트 지역에 퍼지면서 상당수의 아람어 사용자들은 아람어 대신에 아랍어를 사용하게 되고 인근 지역 주민들은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쿠스는 레바논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그 속도도 더 빨랐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기독교인 인구가 더 많았고, 이를 바탕으로 요안니스 1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 군대가 이 지역을 다시 정복하기도 하였다. 같은 시대 이집트에는 이스마일파들이 세운 파티마 왕조 치하에 있었는데, 11세기 알 하킴을 신의 현현으로 숭배하던 일단의 신도들이 1020년 무렵 파티마 왕조에서 추방당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레바논 산악 지대 일대로 숨어들었다. 이들이 믿는 종교를 드루즈라고 불렀는데, 현재 드루즈교는 아예 이슬람과 다른 독자적인 종교로 분류된다.

3.1. 십자군 전쟁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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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이 튀르크인들과의 전쟁으로 약화된 이후 이 지역은 십자군 전쟁 중 십자군 세력의 주요 거점이었다. 트리폴리 백국 내 일부 마론파들은 십자군들이 지배하던 키프로스로도 이주하였는데 이들은 키프로스 마론파 아랍어라는 특유의 방언을 현대까지 유지하였다. 마론파 외에도 시아파 이슬람 소수종파였던 알라위파들이 십자군과 협조하였다. 초창기 십자군들은 알라위파 신도들을 다른 무슬림들과 구분하지 못해서 보이는 족족 죽였으나 이후 이들이 다른 무슬림들과 풍속이 많이 다르고, 기독교에게 우호적이지만 대신 다른 무슬림들과 사이가 극악이라는 것을 알아챈 후 이들을 투르코폴레스 같은 보조 병력으로 활용하였다.

십자군 운동은 결국 맘루크 왕조가 레반트 내 십자군을 완전 축출하면서 실패하였다. 맘루크 왕조는 과거 무역이 부흥했던 이스라엘 북부-레바논 남부의 항구도시 아크레가 다시 십자군이 유입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유럽인 상인들에게 레반트 지역을 들리지 말고 이집트의 항구들을 직접 방문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십자군들이 다시 레반트로 넘어오면 다시 알라위파들이 십자군과 협조할 수 있다는 위험과, 이븐 타이미야로 대표되는 순니파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요청으로 레바논 산맥 일대의 알라위파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레바논의 알라위파 상당수는 이 과정에서 맘루크들이 믿던 순니파로는 개종을 거부하고 대신 그나마 교리가 비슷했던 12이맘파로 개종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레바논 시아파들의 기원이 된다.

4. 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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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레바논 유수프 파샤.png파일:오스만 레바논.jpg파일:레바논 정세 1774.png
유수프 파샤 (사이프 가문), 파크르 앗 딘 2세 (마안 가문), 자히르 알 우마르 (자이다니 가문)의 자치 공국들

오스만 제국맘루크 왕조를 격파한 이후 오스만 제국의 땅이 되었다. 1516년 시리아 정복 후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 시대의 시돈, 베이루트 윌라야를 합쳐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도) 산하의 시돈-베이루트 산작(Sanjak)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중동의 일반적 이미지와 달리 협소한 산악지역이다보니 동방 가톨릭 계통인 종교적 소수자들인 마론파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지역이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교역하는 베네치아, 제노바 상인들은 무슬림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보다는 정교회 신도들이나 동방 가톨릭 신도들과 거래하는 것을 선호했고 이 때문에 레바논 해안지역의 정교회 신도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기독교를 유지했다.[6] 이 과정에서 일부 정교회 신도들은 마론파와 마찬가지로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들은 안티오크식 그리스 정교회 전례를 유지하되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으로 갈라져나온다.

마론파 공동체 역시 유럽과의 교류가 점점 더 활발해지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18세기 중반까지는 마론파 사회는 소군주들이 지역 사회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졌으며 주교와 대주교에 대한 임명권도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6세기 그레고리우스 8세가 마론파들을 지원한 것을 계기로 일부 마론파 성직자들은 로마로 유학할 수 있었고, 로마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성직자들을 자신들의 입지와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은 레바논에 대학들을 설립하였고, 마론파 성직자들과 지식인들은 점차 체계적인 관료 집단을 구성하기 이르렀다. 마론파 성직자들은 교회 예하 학교를 운영하고 지역 소군주들에 대항한 농민들의 봉기를 선동하였고, 이는 기존의 지방분권화되었던 마론파 사회가 중앙집권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5. 근대

마론파교도들은 레바논 산맥 남부의 드루즈들과 크고 작은 국지전을 반복했다. 계속되는 드루즈교도들과 마론파 신도들 간의 다툼에 프랑스가 개입하여 1861년 자치권을 얻어냈다. 자치권을 얻어낸 이후 레바논인 상당수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지로 대규모 이민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레바논이 명목상이나마 오스만 제국 영토였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한 레바논인들은 오스만 제국 여권을 들고 이주해야 했고, 이러한 연유로 이들은 이민간 현지에서 투르코(Turco)라고 불렸다. 마론파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라틴 아메리카 각지에 세워졌다. 드루즈교도들도 대규모 이민 행렬에 동참하였지만 교리가 경전보다는 구전으로 전승이 되는 드루즈교 교리 특성상 많은 드루즈교도들이 이민 이후 종교 생활과 단절되고 결국 얼마안가 현지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파일:external/web.stanford.edu/fig14.jpg
붉은 선 안이 원래의 레바논 영역.
1913년 # 1932년 #
마론파 242,308 58.3% 270,938 31.0%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31,936 7.7% 55,754 6.4%
정교회 52,536 12.8% 93,781 10.7%
기타 기독교 종파 포함 전체 기독교329,482 79.4% 458,987 52.4%
수니파 14,529 3.6% 181,842 20.8%
시아파 23,413 5.5% 159,782 18.3%
드루즈교 47,290 11.3% 56,584 6.5%
기타 이슬람 종파+드루즈 85,232 20.6% 341,624 39.0%
전체 인구 414,747 875,252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은 시리아와 함께 이곳을 위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 때 레바논과 근접한 시리아의 내륙 영토들 중 일부가 레바논으로 편입되면서 기독교인이 다수지만 무슬림들의 비중도 상당해졌다.[7] 이렇게 된 이유는 프랑스에서 레바논의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저해하기 위함이었고, 실제로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원래부터 레바논이었던 지역에서 많이 살던 마론파 교인들은 소 레바논주의를 주장한 반면에 타 기독교 종파와 드루즈파,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계열은 아랍 민족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대 레바논주의를 주장했다. 이 갈등은 1943년 국민협정으로 다수의 마론파 기독교도가 대통령직을 차지하고 수니파와 시아파 등의 종파들이 각각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등의 각료를 나누어 가지는 식으로 권력이 배분되는 형태로 끝났다.

다만 52.4%라는 비율은 기독교도들을 지원해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자 했던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가 1932년 조사 당시 외국에 있는 레바논 기독교도들까지 포함시켜 실상을 조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구 87만 5252명 중 기독교도가 45만 8987명으로 여타 집단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실상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이 같거나 후자가 살짝 우세한 것이었다. 프랑스 당국은 이러한 각색된 결과로 레바논 의회의 의석 배분에 있어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을 6대 5로 설정하였고, 이는 독립 후에 그대로 적용되어 사실 5보다는 6에 가까웠던 무슬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6. 현대

그러나 이후에도 갈등이 지속되어 1950년대 중후반에 샤문 대통령이 친서방 정책을 펼치자 아랍민족주의를 주장하던 수니-시아파계가 대대적으로 반발해서 내전이 일어나는 사태까지 벌어져 미국이 개입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까지는 일단 평화를 유지하지만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 걸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레바논 남부로 대거 유입되고 마론파는 이스라엘로부터 지원을 받아 이를 막으려고 하면서 정치적으로 급속한 혼란을 겪게 된다. 일차적인 원인은 고질적인 종파간 균형 문제에 기인한다. 레바논은 1950-70년대 초반에 중동 최고의 금융허브로 꼽혔을 정도로 경제력이 강했지만 그 혜택이 주로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마론파 기독교인들에게 돌아오고 타 종파들에게 별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발전에서 소외된 무슬림계 종파들이 종파별 인구조사를 다시 시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인구조사 재시행은 이뤄지지 않았고, 마론파와 타 종파들간의 사회적인 위화감은 심화되어 갔다. 두번째로는 하나된 국가라는 인식이 약했던 것에 있는데 애시당초 기독교든 이슬람이든간에 종파별로 각자 따로 살다보니 뭉칠 일이 거의 없었고, 그러다보니 종파적인 정체성은 강했어도 레바논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희미했던 것도 한몫하였다.

어쨌거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걸쳐 요르단 서안지역 상실과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추방으로 갈곳이 없어진 팔레스타인인들이 레바논으로 대거 밀려들어와 전 국민의 과반을 넘던 마론파 기독교인의 비율이 1/3 수준으로 급감하자, 부와 권력의 재분배 요구를 우려한 마론파 기독교인 사이에서 팔레스타인 난민 추방을 구호로 내걸고 팔랑헤 민병대[8]가 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타 종파들도 서로 민병대를 창설하였다. 레바논군과 정부가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종파간의 자립이 강했고 종파간 빈부격차 문제나 정치성향 차이로 인해 제어 자체가 안되던 상황이었다. 기독교계가 대체적으로 전형적인 보수성향을 띠고 있다면, 이슬람계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다만 당시 선거 결과를 보면 무소속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레바논 정부에서 마론파 교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어업권을 주자 시아파 어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에 레바논군에 의해 시아파 어민들이 진압되는 일이 발생하였고 PLO 계열 단원들이 먼저 팔랑헤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팔랑헤가 PLO 계열 단원들에게 보복을 가하면서 레바논 내전이 시작되었다.

6.1. 레바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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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난민촌과 마론파 기독교인 거주지가 각각 잿더미가 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경찰은 종파간 갈등에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채 무력화되었다. 또한 수도인 베이루트는 금융허브라는 명성을 잃고 테러와 범죄가 횡행하는 분단도시라는 오명만 남게 되고 말았다. 드루즈파들은 원래 마론파와는 큰 적대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신도가 팔랑헤에게 살해당하는 상황이 오면서 마론파와 앙숙이 된다.

PLO에게 열세에 놓인 레바논 정부군은 시리아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시리아는 레바논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레바논에 파병하였다. 시리아는 범아랍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나라였음에도 범아랍주의를 지향하던 단체들을 적대하였다. 결국 시리아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우위를 차지하면서 일시적으로 평화가 오는듯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었고 마론파가 배신하면서 내전은 다시 활발해졌다. 한편 시리아가 내전에 참전하자 불안해진 이스라엘도 내전에 개입하였고, 레바논 내전은 사실상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대리전으로 변모하였다. 이를 중재하기 위해 UN 평화유지군이 레바논으로 파병되었지만 내전 종식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이후 미국이 기독교-우파를 지지하고 소련이 이슬람-좌파 민병대를 지지하는 양상으로 확산되었다. 이후에 이슬람 종파 내에서도 좌우간의 갈등은 심해지고 기독교 종파에서도 마론파와 시리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정교회간에 전투도 벌어지는 등 혼란상은 극심해져 갔다. 그러다가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재를 통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타이프 협약이 체결되었고, 이듬해인 1990년에는 기독교와 이슬람 교도의 국회 의석을 64:64로 균형을 이루는 개정 헌법이 발효되면서 내전도 사실상 끝을 맺어 재건 작업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6.2. 레바논 내전 종전 이후

결국 2000년에 내전이 완전히 종식되었지만 종파간 갈등이나 테러 문제 등은 여전히 잔존해있으며 이번에는 친 시리아계와 반 시리아계 간의 갈등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2005년 친 서구파인 라피크 바하 엘 딘 알 하리리 총리가 차량 폭발로 죽었다. 지지파들은 시리아헤즈볼라가 저질렀다고 주장했고, 결국에는 라피크의 아들인 싸드 하리리가 2009년 총리로 임명되었지만 정계로 나온 헤즈볼라와의 갈등으로 사퇴하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스라엘과의 갈등을 빼면 꽤 평온한 편이라 한다. 이라크 주둔군 출신인 다른 나라 평화유지군들 증언을 봐도 이라크와 차원이 다르게 평온하다고 한다. 평화유지군 소속 차량이나 전차가 길에서 현지인 차량이나 당나귀, 양떼에 길이 막혀 한동안 찻길에 방치되어 있어도 거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고. 이라크라면 이런 일이 있다면 공격받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라 긴장해야 하고 이 와중에 긴장감에 애꿎은 현지인을 실수로 쏴죽이면서 대민활동에 타격이 가는 일이 많지만 레바논은 아직껏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9] 헤즈볼라로서도 다국적 유지군과 마찰을 빚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헤즈볼라에서도 강경파로 현 헤즈볼라랑 마찰을 빚어 분열된 세력이 종종 외국인에게 테러를 가한다는 점이다.

물론 감시 도중 이상 징후를 포착해도 직접 전투를 벌이기보단 레바논 정부군에게 통보하거나 이를 지원하는 형식이다. 어차피 평화유지군은 스스로를 지키는 상황이 아니라면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곤란하고 감시활동 자체가 원래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애당초 통제할 힘이 있었다면 헤즈볼라가 그토록 활개치지 못했을 거고 이스라엘도 대놓고 레바논 정부를 무시하진 않았겠지만.

2019년 10월 후기에는 수단, 알제리, 이라크의 영향으로 레바논에도 시위가 일어났으며, 결국 2019년 10월 29일에 총리가 사임을 발표했다. #

2020년에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가운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확산되고, 현지시각으로 2020년 8월 4일에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라는 사상 초유의 사고로 레바논 내전 이후 가장 큰 피해를 입고 국민들은 분노하여 다시 시위에 나섰다. 레바논 정치의 부패에 질린 국민들은 레바논 경제 위기와 맞물려 "레바논 정치체제가 제대로 정립되기 전까지 프랑스가 다시 통치해야 한다. 향후 10년간 레바논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어 달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담은 온라인 청원[10]까지 하게 되었다. 때문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레바논 방문 당시 레바논 국민들의 반응은 '프랑스 지배를 받았던 어떤 나라에서도 프랑스 지도자를 이렇게 환영한 적은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유엔 레바논 특별재판소는 헤즈볼라 지도부가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에 개입한 증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다만,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 암살을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헤즈볼라 대원 4명 중 살림 아야쉬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최종적으로는 전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아야쉬는 이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 중 이스라엘 공습으로 사망한다.#

2020년 12월 19일에는 대학교 수업료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2021년 8월 9일에는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코로나19로부터 회복을 못한 탓에 악화된 레바논 경제 위기로 인해 연료부족현상이 일어나면서 시위가 발생했다.#

2022년 4월 5일에는 사아데 샤미 부총리가 국가파산을 발언하자 논란이 일어났다.#

4월 7일에는 IMF가 레바논에 30억 달러(약 36조6,000억원) 규모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실무 합의했다.#

2023년 이하전쟁이 터지자 헤즈볼라가 하마스를 도우려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스라엘의 보복이 이어지면서 레바논 남부 역시 전쟁에 휩싸였다.

2024년 9월 17일 2024년 레바논 및 시리아 무선호출기 폭발 사태가 발생했다.


[1] 하지만 티레가 페니키아인들에게 가진 상징성이 워낙 강했다보니, 그 카르타고마저도 티레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도시로 복원되자 상징적인 의미로 상납금을 보냈다고 한다.[2] 티레의 모도시였던 비블로스의 수호신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나오는 이슈타르였다. 그리고 페니키아인들은 이슈타르의 남편을 주님이라는 뜻의 바알이라고 불렀다.[3] 여기에는 카르타고가 멸망하면서 페니키아 상인들의 입지가 크게 흔들린 점도 작용했지만, 페니키아인들의 주 거래처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인 점도 있었다.[4] 유대교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 탄압을 받아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5] 베리투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후 동로마 제국 전반에 걸쳐 학문 지원이 큰 타격을 받았고, 연이어 반 세기 뒤쯤에는 페르시아 및 신흥 이슬람 세력과의 계속 싸우게 되면서 이러한 현상이 더 심해져, 제국 내 관료 및 학자들 사이에서는 주변 기층 사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습득하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배워야만 했던 것에 가까웠던 라틴어를 점점 놓게 되었다.[6] 같은 맥락에서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대에서는 그리스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제국과 교역하려는 유럽인들의 주 교역 파트너 역할을 맡았다.[7] 덕분에 시리아에서도 역사적/지리적으로 원래 시리아 영토였다고 주장하며 레바논을 상대로 영토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8] 독재자 프랑코가 속해있던 스페인파시즘 정당 이름에서 따왔다.[9] 다만 2010년대 이후로 이라크도 다소 사정이 호전된 편이다. 특히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은 레바논보다도 훨씬 치안이 안정적이다.[10] 단 이틀 만에 5만 7천 명이 서명했다고 한다. 참고로 2020년 레바논 인구가 566.3만 명인데, 단 이틀 만에 국민 1% 이상이 서명했을 정도면 그만큼 레바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 어마어마하다는 방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