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전쟁 관련 둘러보기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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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전쟁 מלחמת ששת הימים حرب 1967, نكسة حزيران, نكسة 67, حرب الأيام الستة Six-Day War, June War 1967 Arab-Israeli War, Third Arab-Israeli War | |||
진격하는 이스라엘 육군 소속 M3 자흘란과 이집트 육군 포로들을 싣고 가는 트럭, 1967년 6월 8일 이집트 엘 아리쉬 | |||
기간 | |||
1967년 6월 5일 ~ 10일 | |||
장소 | |||
레반트 | |||
교전국 |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요르단|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시리아| ]] [[틀:깃발| ]][[틀:깃발| ]][[이라크| ]] [[사우디아라비아| ]][[틀:국기| ]][[틀:국기| ]] [[쿠웨이트| ]][[틀:국기| ]][[틀:국기| ]] [[레바논|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이집트| ]]||
지원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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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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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이스라엘의 승리 → 가나안 무력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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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관련사진들]
가자 지구 남부 라파(Rafah) 외곽에서 작전중인 이스라엘군
부상당한 동료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물을 먹이는 이스라엘군
이스라엘군 포탄에 맞아 불타고 있는 이집트 육군 트럭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공군의 공습을 받아 파괴된 이집트 육군
가자 지구 남부 라파에서 포로들을 감시 중인 이스라엘군
이스라엘 공군의 습격으로 파괴된 이집트 공군 군용기
이스라엘 공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이집트 육군(1967년 6월 시나이 반도)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수를 지켜보고 있는 아리엘 샤론 소장[1]
가자 지구 남부 라파에서 포로들을 감시 중인 이스라엘군
전선에 보급품을 투하하는 이스라엘군
동예루살렘 전투가 끝난뒤 부상당한 동료를 후송하는 이스라엘군
환호하는 이스라엘군
전선으로 진격하는 이스라엘 육군 전차들
예루살렘 외곽에서 불타고 있는 요르단 육군 차량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언덕 위에 있는 아랍 연합군 진지가 이스라엘 공군에게 공습당하는 모습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한 뒤 통곡의 벽을 순찰하는 이스라엘군
시나이 반도로 진격하는 이스라엘군
예루살렘 구시가지 점령 후 통곡의 벽 앞에서 쉬고 있는 이스라엘군
시리아 전선에서 이스라엘군
통곡의 벽 앞의 이스라엘군
1분 만에 보는 제3차 중동전쟁 | 또 다른 영상 |
1967년 6월 5일부터 1967년 6월 10일까지 일어난 전쟁.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 공격을 감행,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엄청난 영토를 획득했던 전쟁. 6일 전쟁이라는 별명으로 매우 유명하다. 아랍 측에서는 6월 전쟁이라고 부른다.
제1차, 제2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국제 정세나 여론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세계의 눈치를 많이 보던 상황에서 전쟁 발발 시 UN의 개입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UN이 개입하고 중재하는 순간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따라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UN이 개입하기 전의 단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2] 그러니 이스라엘에게는 장기전은 불리하고,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 언론에서는 이집트군의 가짜 승리를 계속 보도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로운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스라엘의 승전보가 세계에 최대한 늦게 알려지는 것이 도움이 됐기 때문.
2. 배경
제2차 중동전쟁에서 압도적인 패전을 당하고도,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둔[3]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랍 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야심차게 전쟁 준비에 나선다. 소련의 군사 고문단과 최신 장비를 들여와 전쟁 준비에 나서며,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물밑에서 지원하면서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한편, 예루살렘 서안 지구를 두고 충돌을 계속하던 요르단 및 골란 고원을 거점으로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이던 시리아 역시 이집트와 동조하고 있었다.이스라엘의 레비 에슈콜 역시 아랍국과의 국경선에서 일부러 도발을 걸며 영토를 확장하는 참이었다. 원래 6일 전쟁 이전의 이스라엘 영토는 상당히 작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좁은 영토 때문에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위협에 시달렸다. 게다가 영토 형상의 문제상 전선이 조금만 밀리면 임시수도인 텔아비브가 함락돼서 국토가 양분될 지경이었을 정도로 중부 이스라엘 쪽 땅이 취약했다. 이후 6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얻어낸 땅을 합쳐도 남한 크기에 못 미쳤고, 가장 큰 적인 이집트와의 화해 및 현실적으로 인구문제상 관리가 힘든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현재 영토는 남한의 1/5밖에 안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래서 제2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정보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주변국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며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인적 자원의 불리함과 좁은 영토 때문에, 장기적인 소모 방어전에 유리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선제 타격론으로 대표되는 예방전쟁이 군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나세르는 대단한 딜레마에 처해 있었다. 나세르는 수에즈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군사적 대립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중동 각국을 조종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게끔 중재하는 역할을 더 많이 수행했다. 문제는 나세르는 어디까지나 혁명으로 집권한 지도자였고, 중동의 반 이스라엘 감정이 팽배했기 때문에 이집트 청년층은 나세르가 이스라엘 명분만 팔아먹고 실제론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배신했다고 날뛰었다. 여기에 1950년대 후반부터 튀니지의 아흐메드 벤 벨라의 축출을 시작으로 1967년 수카르노의 몰락까지 세계 각국에서 나세르와 친밀한 진보적 지도자들이 몰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나세르는 이를 CIA와 이스라엘이 자신을 노리는 국제적 음모의 연쇄로 여기고 더욱 반미, 반 이스라엘 각을 세우며 심지어 베트콩 대표들을 이집트에 유치하면서 나세르에 큰 관심도 없던 미국을 극도로 분노하게 하는 자책골을 넣었다. 그리고 나세르의 베트남 전쟁이라 불렸던 북예멘 내전도 엉망진창으로 돌아갔고, 이것은 중동 친미 왕정들에게 더욱 어그로를 끌어버렸다.[4] 이러한 나세르의 잘못된 반미 음모론과 위기의식, 이스라엘에 대해 뭐라도 보여줘야 한다는 동기로 인해 나세르는 티란 해협을 봉쇄한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스라엘에선 이를 이집트의 선제공격 포석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는 실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다. 제2차 중동전쟁인 수에즈 전쟁에서 나세르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으로 크게 패하고도 정치적으로 큰 승리를 얻었다. 나세르는 이번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 시위를 통해 강력한 압박을 줌으로써,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이스라엘의 항구로 향하는 선박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집트 공수부대는 대전차 화기, 대공포, 해안포는 배치했지만, 실제 봉쇄에 중요한 기뢰는 전혀 부설하지 않았다. 사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조지려고 전쟁을 일으키려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선제공격하려 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받고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이는 소련에서 제공한 정보였고, 이로 인해 소련이 나세르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는 주장이 강했으나, 정작 소련을 방문했던 안와르 사다트와 소련 수상 코시긴의 대화록이 공개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이제 사장되었다. 코시긴은 일관적으로 이미 이집트는 충분한 정치적,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이스라엘과 싸워서는 안된다고 이집트를 만류하였다. 하지만 서구의 퇴폐 문명에 물든 겁쟁이 시오니스트들은 인종적으로 훨씬 더 월등한 '정신 문명'을 가진 아랍인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망상에 시달리던 아랍 사회의 여론과 압력, 당장에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주접을 떨던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의 호언장담 속에서 나세르는 이집트의 전쟁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냉정하게 인식했던 유일한 지도자임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 조치로 나가게 되었다. 나세르는 수면 아래에서 이스라엘과 협상을 시도했으며 이스라엘 선박들이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국기를 내리는 관행을 이스라엘이 재확인해준다는 다소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이집트의 움직임에 대해서 블러핑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침공하려 한다는 정보 자체야 미국과 소련 정보 당국의 오해에 불과했고, 그러한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이집트의 병력 배치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집트의 선빵 준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조금만 잘못 했다간 지중해 앞바다에 온 국민이 몸을 던져 죽는 수도 있는 판국이었고 주변국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결코 녹록하게 대처할 수도 없었다. 앞선 2차 중동전쟁도 이스라엘에서 나세르가 아랍의 결집을 위해 이스라엘을 제물로 삼을 것이 틀림없다고 이스라엘에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세르는 3차 중동전쟁의 전야는 물론이고 2차 중동전쟁의 전야에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원하던 것은 이집트를 맹주로 하는 아랍의 통합이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나세르가 내준 조건을 덥석 물지 않고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국가 대 국가로 나서서 이스라엘 선박 안전 통항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함으로 자신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을 수 없었던 나세르에게는 자승자박의 꼴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이집트군은 예멘에서 벌어지던 왕당파와 살레의 공화파 간의 내전에 정규군 절반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심각한 손실로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5] 또한 당시 공군 원수인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의 무능함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경직된 지휘 체계와 무능력한 아메르로 인해, 이집트 공군은 공습으로부터 전투기를 보호할 셸터 하나도 짓지 못했다. 이 압둘 하킴 아메르는 이미 2차 중동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임박했음에도 모든 보고를 무시한 채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내며 태업을 한 무능의 대명사로서, 그 대가로 이집트는 수에즈 일대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해야 했다. 심지어 이집트의 유능한 장교들은 이스라엘의 군사 전략을 조사하고 중동전쟁의 대세는 장차 선제공격이 될 것이라며 이스라엘이 선제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상부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위에도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지만 나세르는 이집트군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 특히 공군력을 운용하기 위한 조종사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1970년 이전까지는 이집트가 전쟁을 일으킬 여력이 없다는 것을 냉정하게 인식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세르는 질 지도 모르는 전쟁을 먼저 일으키는 자책골을 넣고 싶지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이런 신중함이 더욱 큰 패배를 초래했다.
대(對)이스라엘 압박용으로 시나이 지역에 이집트군을 전개해 놓긴 했지만, 이는 블러핑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과 아랍권 전역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이스라엘을 집중 타격할 것으로 보였던 3국(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들 중에 그나마 이스라엘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요르단으로,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는 대표적인 평화주의자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당시 이집트가 주도했던 언론 플레이에 전(全) 아랍권이 광분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친(親) 이스라엘적 태도를 취했다가는 정권이 위태로운 처지였다. 요르단군은 이집트군의 전쟁 개시에 따라 군사 행동을 하기로 약속해두었기에 다소나마 전쟁 준비가 되어 있긴 했지만, 실제 이집트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요르단의 준비는 헛되었다. 그리고 시리아군은 쿠데타에 가까운 정권 싸움 때문에 이스라엘 공격(혹은 방어)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리아군의 태도는 6일 전쟁 발발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초기 이스라엘에게 기습을 받고도 언론 플레이로 거짓 승리를 보도한 이집트 덕분에 계속 정권 싸움을 하였고, 이집트군의 패퇴 이후에는 다소 방어 준비를 하다가도, UN에 의한 정전 협정이 발효되자 다시 정권 싸움을 벌였다.
이집트 정보부는 해안 봉쇄가 시작되며 이스라엘 내부에서 선제 타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포착했지만, 이 정보 역시 경직된 조직 탓에 상부로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튼 형식적이지만 이집트의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여론은 매우 심각해졌다. 사실 이집트도 '아랍의 소리'란 라디오 방송으로 중동 여론을 선동했는데, 이 방송은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멸망을 부르짖고 있었다. 레비 에슈콜은 중동과 협상하고자 준비하려던 장관을 실각시키고, 이 사이에 선제 타격론파가 정권을 잡아 이스라엘에 동원령을 내렸다.
미국이나 유럽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다만 소련이 문제였다. 소련이 아랍 세력을 지원한다면, 중동의 문제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판국이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소련에게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연막을 쳤고, 다른 아랍 국가들 역시 자신들의 정보를 서로 공유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지난 18년간 불리한 전세를 한 번에 역전시킬 선제 타격론 교리가 연구되어 있었다. 만약 개전 48시간 동안 상대의 공군력을 무력화할 수 있다면, 사막에서의 전쟁은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약 이집트가 먼저 선제 타격을 가해 이스라엘의 공군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영토는 좁고 인구는 적은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 될 꼴이었다. 그리고 레비 에슈콜의 대망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3. 전개
3.1. 이스라엘의 기습 공습과 이집트 공군력의 무력화
* 최초 제1파의 공격이 끝나고, 30초도 안되어서 제2파의 공격대가 기지 상공에 나타났다. 우리는 엄폐된 곳을 찾아서 주변 사막을 정신없이 달렸다. 하지만 이스라엘 기들은 공격을 멈추고 유유히 기지 상공을 선회할 뿐이었다. 아마 제2파의 조종사들은 기지가 다 파괴되었고, 더 이상 공격할 목표가 남아 있지 않은 사실이 믿기지 않은 듯했다.
* 이제 그들에게는 살아 있는 우리 조종사들만이 남은 목표였을 뿐이었다. 그저 권총을 유일한 호신 무기로 지닌 약한 인간인 우리가 이스라엘 공격기들의 유일한 목표였다는 것은 슬픈 코미디였다. 또한 첨단 장비를 갖춘 최신예 전투기의 조종사들이 권총 하나에 의지한 채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뛰어 다녔다는 것은 듣기에도 민망한 모습이었다.
* 제2파 공격대는 기지 상공 도착 5분 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정적이 주변 사막과 파괴된 기지에 감돌았다. 단지 우리 전투기와 기지 시설이 불타는 소리만 들려올 따름이었다.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그들의 임무를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최선의 방법으로 완수했었던 것이다. 그것은 100%의 우리 측 손실과 0%의 이스라엘 측 손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집트 조종사 비르 알 타마다 하셈 무스타파 후세인이 소개한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를 휩쓸었던 느낌.
* 이제 그들에게는 살아 있는 우리 조종사들만이 남은 목표였을 뿐이었다. 그저 권총을 유일한 호신 무기로 지닌 약한 인간인 우리가 이스라엘 공격기들의 유일한 목표였다는 것은 슬픈 코미디였다. 또한 첨단 장비를 갖춘 최신예 전투기의 조종사들이 권총 하나에 의지한 채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뛰어 다녔다는 것은 듣기에도 민망한 모습이었다.
* 제2파 공격대는 기지 상공 도착 5분 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정적이 주변 사막과 파괴된 기지에 감돌았다. 단지 우리 전투기와 기지 시설이 불타는 소리만 들려올 따름이었다.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그들의 임무를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최선의 방법으로 완수했었던 것이다. 그것은 100%의 우리 측 손실과 0%의 이스라엘 측 손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집트 조종사 비르 알 타마다 하셈 무스타파 후세인이 소개한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를 휩쓸었던 느낌.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6] 레이더 기지의 교대시간을 노려,[7]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은 사막에서 1편대당 4기씩 밀집 초저공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 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이던 이집트 공군의 주요 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 폭격을 가했다. 정확한 동시 기습공격에 성공하고자 전투기가 고장이 날 경우 그대로 추락하라는 지침까지 있었을 지경이었다. 선두의 전투기가 고장으로 빌빌대거나 귀환할 경우 공군 전체의 선제공격 계획이 다 꼬여버리기 때문이다.
이집트에겐 악재가 하나 더 겹쳤다. 당시 아메르 원수가 시리아에서 전용기를 타고 복귀하는 중이라 모든 방공 시스템에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다. 상부와 통신도 끊긴 이집트 방공망은 이스라엘 전투기에 아무런 대응을 못 하다가 항공기들과 함께 잔해로 변하고 말았다. 당시 전용기에는 아메르뿐만 아니라 공군 사령관 시디키 마흐무드, 국제첩보국 수장 후사인 알 샤피, 소련 군사 고문단장. 이라크 수상까지 탑승했는데, 아메르는 실수로 대공미사일이 자기가 탄 전용기를 날려버릴까 봐 부들부들 떨었다. 유일하게 카이로 대공방어대만 상부의 침묵을 묵살하고 군법재판 회부를 각오한 채로 자체적인 방어에 나섰고 나중에 무공 훈장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국방장관 샴스 바르단은 잠 자러 집에 가버렸고, 이스라엘 암호를 해독해야 할 마수드 알 주나이디 대령과 공군 작전 사령관 가말 아피피 장군도 죄다 퇴근하고 없었다. 공군 첩보부는 이스라엘 공군이 출격했다고 상부에 보고했지만, 아메르를 추종하던 최고 사령부는 나세르에게 충성하는 공군 장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보고를 무시하였다.
약 3시간에 걸친 폭격으로,[8] 이집트 공군은 항공기 450여 대 중 300여 대를 상실하고, 공군 기지와 레이더 기지 등을 모조리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단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의 80%를 격파된 것이다. 이후 적수가 모조리 사라진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산책하는 기분으로 이집트 영토를 오가며 이집트군을 초토화시키며 돌아다녔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자국영토의 3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 현대전사(現代戰史)의 전설을 써내렸다.
이집트 육군은 이스라엘군의 번개 같은 진격을 받았다. 당시 이집트군은 나세르의 최측근이었던 압둘 하킴 아메르 공군원수 겸 국방장관이 시리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모든 최전선 지휘관들이 아메르를 마중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야 했으므로 지휘공백이 생겼다. 물론 이집트 육군에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제2차 중동전쟁 당시 돌파되었던 구역인 시나이 반도 방면 이스라엘 국경선의 중앙부와 남부에 강력한 병력을 모아두었다. 이들은 해당 방면으로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들어오면, 반격해서 꺾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좁은 남단부 영토를 관통하여 요르단과 연결한 다음,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집트 지휘부는 패닉에 빠졌고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아메르를 영접하기 위해 도열했던 장교들은 서로가 쿠데타를 일으킨 줄 알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권총을 겨누고 대치하는 막장 상황을 치달았다. 가까스로 살아서 카이로에 도착한 아메르와 마흐무드가 이 개판을 수습하였다. 공군력이 소멸하는 뼈를 깎는 타격을 입었지만, 적어도 이스라엘이 선빵을 때릴 것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예측한 아메르 원수는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최고 사령부로 달려들어갔다. 아메르는 자기가 이긴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흥분하며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면서 시리아와 이라크에 이스라엘에 총공세를 감행하라고 지시했으나, 두 나라는 모두 각각 훈련 중, 기술상의 문제로 거부했다.
또한 최고 사령부는 요르단을 꾀어낼 겸 이스라엘이 비겁하게 선빵을 때렸으나 이스라엘 전투기 86대가 격추되었으며 이집트 전투기 손실은 겨우 2대에 불과하다는 낯이 다 뜨거워지는 거짓말을 일삼았다. 오전 11시, 이스라엘의 공격 2파가 날아오자 그것도 다 때려잡아서 무려 161대를 격추시켰다고 감당도 못할 정도로 허풍을 떨었다. 또한 아메르는 요르단에 연락하여 이스라엘 공군의 75%를 소멸시켰고 시나이 반도로 이집트 육군이 진격 중이니 안심하고 이스라엘을 치라는 역대급 사기를 쳤다. 이 말도 안 되는 전황 보고에 흥분한 카이로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하고 이스라엘 타도를 연호하면서 벌써부터 승전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전황 보고에 나세르는 도무지 믿지 못하고 아메르와 공군 사령관 마흐무드를 호출하여 정확한 전황을 파악하려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연락이 닿지 않았다.
유일하게 사태를 파악한 사람은 사다트였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아메르를 방문했을 때 극도로 긴장한 아메르가 자신이 건네는 인사도 못알아듣고 초조해하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으며, 이후 소련 대사 포지다예프에게 이집트 군의 경악스러울 정도의 참패를 전해듣고 멘붕 상태에 빠져서 집안에 칩거해버렸다. 그는 훗날 가짜 승전 보고에 환호하는 시민들을 보고 부끄러움에 견딜 수 없어서 집으로 가버렸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진실을 알아차렸고, 또 그것을 나세르에게 알려줄 사다트가 집에 틀어박히자 나세르는 아메르의 거짓말에 계속 속은 채로 남아버렸다.[9] 아메르가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댄 것은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됐기도 했겠지만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에게 이미 이긴 전쟁이니 빨리 숟가락 얹으라고 꾀어내려는 술책이었던 듯하다. 문제는 이 거짓말에 낚여서 참전한 나머지 나라들도 죄다 탈탈탈 털려버렸다는 것.
3.2. 가자 전선
한편 이집트군을 조지기 위해 탱크 250대와 야포 50문, 그리고 공수부대 여단을 배치하여 강화된 이스라엘 방위군 사단들은 이집트군의 감시를 피해서 한밤중에 몰래 이집트 국경으로 이동했다. 공격 명령이 하달되자, 2차 세계대전과 1, 2차 중동전쟁에서 모두 복무한 베테랑 중 베테랑인 기갑사단장 탈 장군은 "전원 공격하라. 전원 돌파하라. 전원 절대로 뒤나 옆을 돌아보지 말고 전진하라."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집트군은 이스라엘이 국경 북부인 가자 지구가 아니라 국경 남부를 공격하리라 예측하였고 이스라엘군이 병력을 집결시켜도 주공을 속이려는 기만행위라 여겼다. 그래서 슈무엘 고넨 준장의 7기갑여단이 가자 남부를 공격하자 자기네 탱크가 오는 줄 알고 환영했다. 이집트 방어의 주력인 11기갑여단도 이스라엘 공수부대 35여단이 자연 방어물인 모래 언덕을 돌파하는 내내 그게 이스라엘군의 공격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손 놓고 구경만 하였다. 이를 두고 35여단장 라파엘 에이탄 장군은 분명히 하늘이 돕는 게 틀림없다고 환호할 정도였다.물론 처음에야 넋을 놓았지만 결국 정신줄을 잡은 이집트군은 반격에 나서긴 했다. 칸 유니스 전투에서 고넨 장군은 탱크 1기 대대만 가지고 이집트군 방어망을 뚫어보겠다는 모험수를 던졌으나 이집트군은 가지고 있는 중화기를 모조리 꺼내와서 맹렬하게 반격했다. 특히 가자 지구의 군정장관인 무함마드 압드 알 무님 후스니가 지휘하는 2선급 부대였던 팔레스타인 20사단은 거의 죽기 살기로 이스라엘에 맞섰다. 하지만 탈 장군은 어떤 피해를 감수하든지 공격하라고을 지시했고, 4시간 만에 7기갑여단이 칸 유니스 철도 교차로를 점령하였다.
칸 유니스가 점령되자 다음 목표는 라파였는데, 라파에는 이집트군 7사단 산하의 2개 여단이 육군 보병학교장 압드 알 아지즈 술리만 장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이집트군은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진 않았고 이스라엘이 앞세운 패튼과 센츄리온 전차에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한 낙후된 대전자포 66문과 야포 20문으로 무장하였다. 그럼에도 이집트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이스라엘군은 맹렬하게 쏟아지는 이집트군의 포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고넨 장군은 공습과 중포 지원을 요청하여 마침내 이집트 20사단의 저항을 분쇄했고 술리만 장군은 참모진과 함께 전사했다. 술리만 장군이 전사하자 사령관을 잃고 전의가 붕괴된 이집트 병사들이 도주하기 시작하면서 라파도 함락되었다. 라파에서 이집트군은 탱크 40대를 잃었고 사상자 2천 명이 발생했다.
이스라엘군은 알 아리쉬를 방어하던 이집트군 112 보병사단이 이미 달아났을 것으로 생각해 돌격했지만 사실 112사단은 알 아리쉬를 이어지는 지라디 골짜기를 아주 잘 사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집트군은 또 이스라엘군 79 기갑대대를 자기네 군으로 착각하고 그냥 다 보내줘버렸다. 오후 10시에 이르러 시나이의 이집트 군대 행정의 허브인 알 아리쉬를 이스라엘군이 포위했다. 이때까지 28대의 이스라엘 전차가 파괴되었고 93명이 부상당했으며 66명이 전사했다.
한편 2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에 엄청난 피해를 강요했으나 결국 보급품이 다 떨어져서 자발적으로 항복했던 아부 아게일라의 움 카테프 요새는 사디 나기브 장군의 지휘 아래 대포 80문, 탱크 90대, 병력 1만 6천 명으로 아주 잘 방어되고 있었다. 문제는 나기브 장군이 아메르의 술친구로 그저 아메르랑 친해서 임명된 낙하산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맞선 이스라엘 지휘관은 아리엘 샤론으로, 움 카테프의 방어 태세에 대해서 면밀히 연구해온 인물이었다. 움 카테프 요새는 2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이스라엘군은 맹렬한 포병사격을 동반한 보병여단의 야간 우회공격으로 움 카테프 진지를 함락시켰다. 우회하는 샤론의 보병에게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던 이집트군의 포병은 헬기를 타고 후방으로 침투한 공수부대가 타격하여 무력화했고, 움 카테프가 무너지자 공병들이 안전하게 개척한 지뢰지대를 통해 이스라엘군 기갑부대가 아부 아게일라 서쪽과 동쪽에서 포위공격을 가했다. 이집트군은 2천이 넘는 병력이 전사하고 전차 60대를 잃으며 대패했다. 이스라엘군의 전사자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이스라엘군은 이번에는 방어가 취약한 국경 북부에 강력한 충격을 가해 돌파에 성공했다. 이후 이집트군은 아부 아게일라 전투마저 패하면서 시나이 반도의 전군이 포위당할 위험성에 빠지자 패주(敗走)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에 도착하여 시나이 반도를 고립시킨 뒤였다. 이는 이스라엘군이 이 전쟁에서 지면 자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절박감에 상상을 초월하는 고속 공세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어찌나 공세에만 목이 메었는지 전차 부대의 진격속도를 보급대가 못 따라가자 헬리콥터로 급히 물자를 공수했고 전투식량이 떨어지자 보급을 기다리지 않고 장군들도 주스로 식사를 때웠고, 이집트군 포로가 발생하면 생수 하나 던져준 채 그대로 풀어주고 목표를 향해 기동했을 정도였다. 이집트군 방어 거점이 있을 경우 후방 부대에 소탕을 맡기고 그대로 무시하고 수에즈만 보고 달리는 기동 부대도 있었다. 즉,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을 소탕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다간 UN에 저지될 줄을 알기에, 수에즈 운하를 선제 장악해 이집트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시나이 반도의 방어 병력을 포위 섬멸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3.3. 요르단의 참전
한편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을 동시에 상대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요르단 측에서 어떤 공격이 날아오더라도 무시하란 지시를 받았다. 당시 예루살렘엔 셔먼 탱크 50대, 대포 36문, 박격포 27문만 있었고, 탄약 대부분을 이집트 전선으로 보내버린 상황이었다.오전 7시 55분, 공습 경보 사이렌이 텔아비브에 울렸다, 이스라엘은 이것이 오경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요르단의 공격이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이 참전하더라도 1차 중동전쟁 때 많은 아랍 국가들이 그랬듯이 상징적인 포격 몇 발만 하고 끝내리라 예상하였다. 그리고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에슈콜 내각은 후세인 국왕에게 참전하지 말라고 강력히 부탁하였다. 이에 대해서 모셰 다얀 장군은 후세인은 어차피 공격하지 않을 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경고해줄 필요가 없다고 할 정도였으나, 이갈 알론은 반드시 국왕에게 경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미국 국무부, 영국 외무부, 예루살렘의 유엔 감시관인 오드 불 장군을 통해서 요르단에 경고가 전해졌으나, 불 장군은 이것은 명백한 협박이라면서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한편 후세인 국왕은 전군에 전투 태세를 발령했고 8시 50분에 아침 식사 중에 전쟁이 터졌음을 보고받았다. 후세인은 아메르로부터 가짜 승전 보고를 들었고, 전투기 수백 대가 이스라엘로 날아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전투기 수백 대는 귀환하는 이스라엘 전투기들이었으나 요르단은 이집트 공군으로 착각했다. 후세인 1세는 아직 결단을 내리지 않았으나 리야드 장군은 후세인에게 허가도 받지 않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요르단군은 일제히 포격, 공급, 특수부대 투입을 시작하였다. 이는 이집트군이 곧 북상해서 요르단과 합류한다고 상황을 완전히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나세르가 그에게 전화하여, 아메르가 주장한 대로 이스라엘 공군은 파괴되었스니, 유엔 정전령이 내려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점령하라고 부추겼다. 9시 30분, 후세인은 이스라엘에게 복수한다고 대국민 방송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미국 대사 번스가 이스라엘의 경고를 전달하자 "전쟁은 그들이 시작했소. 이제 답장은 공중을 통해 전달할 것이오. 주사위는 던져졌소."라고 묵살했다.
10시부터 요르단군이 M59 155mm 평사포를 텔아비브와 라마트 다비드에 쏘아대기 시작했다. 요르단군 상부는 포병대에 '모든 적'을 쏘라고 지시했으므로 포병대는 군사시설은 물론 민간시설도 닥치는 대로 포격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요르단군의 공습도 시작되었다. 피해는 민간인 1명 사망, 7명 부상에 수송기 하나가 파괴된 것으로 그쳤으나 이스라엘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주 요르단 소련 대사는 후세인의 궁전에서 미국 대사 번스를 만나 누군가 아랍을 막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아랍이 이길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이때부터 요르단은 거세게 공격하여 예루살렘 신 시가지에 박격포 6천 발을 발사했다.[10] 크네세트와 정부 기관들도 공격당했고 요르단은 이스라엘 정부 시설들을 대부분 점령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다. 요르단의 무차별 공격으로 병원과 교회들도 파괴되었으며 시민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은 12시 30분에 즉각 반격에 나섰다. 형편없는 공습을 하고 귀환해 재급유를 하던 암만과 마프라크의 공군기지는 이스라엘의 공습에 9분 만에 초토화되었다. 1시 10분에 있은 2차 공습으로 요르단 공군의 호커 헌터 20대는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의 미스테르는 딱 한 대 격추되었다. 후세인 1세는 집의 정원에서 자기 공군은 물론이고 그와 친분이 있던 파일럿들이 떼죽음당하는 광경을 아들들과 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바스만 궁전도 박살났는데, 만약 후세인 1세가 계속 궁전의 집무실에 있었으면 그의 목숨도 날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광경을 보면서 이집트와의 동맹을 반대했던 후세인의 고문인 와스피 알 탈은 PLO 지도자이며 나세르 추종자로 유명했던 슈크라이에게 "당신네 그 잘난 미그기와 미사일들은 다 어디 간 거야."라고 울부짖었다.
이스라엘은 준비해둔 비밀 신병기인 L 미사일까지 동원하여 요르단군 방공호들을 날려버렸고, 요르단군들은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떨어뜨린 줄로 오해하고 기절초풍해서 앞다투어 항복했다. 11시 40분, 불 장군의 휴전 제의에 이스라엘이 수락하였으나, 요르단 수상 주마는 "우리는 지금 과거의 과오를 씻어낼 가장 성스러운 시간에 직면했다. 우린 지난 수년간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모두 무기를 들고 유대인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라."하는 선동방송을 내보냄으로 이를 거절하는 자책골을 넣었다. 이에 요르단군은 과거 영국 위임통치령 총독부가 있었고, 당시에는 유엔 감시단 본부가 있는 정부 고개를 무단으로 점령했다. 이런 막 나가는 행동에 이스라엘은 요르단군이 예루살렘에 이미 탱크 수백 대를 매복시켜놓기라도 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마침내 에슈콜 내각은 요르단 전선에서 수세적인 태도를 버리고 총공세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이츠하크 라빈은 이미 요르단 공군을 전멸시켰는데 과격하게 나갈 것이 없다고 반박했으나 다얀은 이미 병력에 공세 명령을 내린 후였다.[11] 결국 이스라엘 육군의 반격에 요르단 육군도 개박살이 났다. 비록 패배했으나 요르단군은 매우 악착같이 맞서 싸웠고 특히 '탄약 고개' 전투에서는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요르단 부상병들이 수류탄을 들고 "알라 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자살 돌격까지 감행했다. 전쟁 후 미국 영사관에서부터 YMCA에 이르는 600미터 거리를 죽음의 거리(Simtat ha-Mavet)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압도적 화력 속에서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요르단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6월 6일, 요르단 군부는 예루살렘 구 도시를 제외한 전 지역이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리야드 장군은 후세인 국왕에게 신속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요르단은 멸망할 것이라면서 당장 정전을 맺든지 총퇴각을 지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후세인 1세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대사를 소환하여 자신의 정권이 즉각적인 교전 중지가 없으면 1시간 안에 멸망하게 생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공식적 정전은 곧 항복이나 마찬가지였고, 이집트가 여전히 싸우는데 그랬다간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며 군대도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군대를 물리면 나세르가 다 이겼는데 요르단 때문에 졌다고 덤태기를 씌울 수 있었다. 번스 대사는 요르단은 전쟁 중보다 전쟁 후의 안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솔직하게 평가했다. 심지어 나세르가 요르단 민중에게 후세인을 축출하고 계속 전쟁하라고 호소할 수도 있었다.
이에 후세인은 이스라엘과의 비밀 협상, 혹은 국제적인 제의에 따른 협상이라는 모양새 좋은 탈출구를 모색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요르단군의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저의를 의심하면서 후세인의 비밀 정전 요구 4번을 모두 묵살했다. 미국의 반응도 냉담하였다. 극도로 실망한 후세인에게 나세르는 미국과 영국이 이스라엘 편에서 공격하고 있다는 또다른 가짜 뉴스를 내보내자고 제의하면서 미국만 비난할지 영국도 비난할지를 물었으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런데 영국이 아직도 항모를 가지고 있던가요?"네..
후세인은 영국도 비난하자고 했고, 시리아도 동참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이 대화는 모조리 이스라엘 첩보부에 도청당했고 영국과 미국은 길길이 날뛰었으며 성깔 더러운 린든 존슨은 Big Lie라고 맹비난했다. 다만 나세르의 경우에는 정말로 거짓말을 했다기보다는 이스라엘군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공격 속도에 너무 멘탈이 나가서 분명히 미국 항모 전대가 지중해 앞바다에서 이스라엘 공군을 지원해주고 있다는 정신승리를 하는 것에 가까웠다.
요르단의 절박한 지원 요구에 시리아와 사우디가 요르단을 돕겠다고 했으나 시리아 17 기계화 여단은 오다가 중간에 돌아가버렸고, 사우디 군대는 이스라엘 비행기가 근처에 총알 한 방이라도 쏘면 "우리도 싸웠다!"라고 주장하고 달아나기 위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오로지 이라크군 8 여단만이 실제로 도와줬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당했다.
결국 후세인은 지프를 징발해서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고 웨스트뱅크와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모두 함락되었다.
3.4. 시리아 전선
한편 요르단의 참전으로 머뭇거리던 시리아와 이라크도 참전했다. 시리아 미그 전투기들이 갈릴리 지역을 공습하기 시작했고 이라크 공군도 가세했다. 하지만 시리아는 이스라엘 공습 과정에서 무려 공군력의 3분의 2가 사라졌다.[12] 82차례 출격하여 Il-28 폭격기 2대, MiG-21 32대, MiG-17 23대, 헬리콥터 3기가 이스라엘 방공망과 이스라엘 공군의 반격으로 격추되었고,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드마이르, 다마스쿠스, 사이칼, 마르즈 리알 공군 기지도 모조리 박살났다. 덤으로 시리아 안에 들어와 있던 이라크 공군도 박살났다. 이스라엘 피해는 10대였는데, 파일럿 4명은 전투기와 함께 죽었고 2명은 탈출했으나 시리아 민간인들에게 잡혀 끔살당했다.하지만 시리아 국방장관 하페즈 알아사드는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공군력이 소멸했다고 또 거짓 뉴스를 내보냈다. 시리아 대통령 아타시는 시오니즘과 제국주의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고 텔아비브에서 다 같이 만나자고 또 주접 방송을 내보냈다. 물론 이는 시리아 지도부가 받은 엄청난 충격을 숨기기 위한 허장성세였다. 시리아군 중앙전선 사령관 무스타파 틀라스 장군은 이스라엘군 공습에 죽을 뻔하고 후방으로 도주하였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이후로 그는 금연까지 했다.
그러나 알아사드는 이스라엘에 대한 더 강한 공격을 주장했고 골란 고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라빈은 시리아 공습을 지시했으나, 다얀은 시리아 전선까지 열리면 감당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반격은 하되, 절대 시리아 민가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특히 수도 다마스쿠스를 작전 범위에서 제외했다.
한편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의 방어 상태를 떠보기 위해 키부츠들에 대한 소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T-34까지 앞세워 놓고는 키부츠 농민들의 처절한 반격에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다. 최종적으로 아랍국들 간의 상호 불신과 지휘 체계의 혼란으로 대부분 격퇴당한다. 그러던 와중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더욱 빨리 요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내부 깊숙이까지 진격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으나, 전선에서 싸우던 시리아군 장병들이 그 가짜 뉴스를 보고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 국제사회의 개입보다 더 빨랐다. 결국 그나마 끝까지 남아 있던 기갑부대가 요르단 강에 수장되자 시리아는 지상 공격을 아예 포기했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박살낸 이스라엘은 마지막 남은 골칫거리인 골란 고원 요새에 대한 전면 공격을 결정하고 전력을 투입했다.
웨스트뱅크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을 장악한다는 목표 따위는 개전 시점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않고 있었으나 시리아의 계속된 자폭에 에슈콜 내각은 골란 고원 장악으로 전략을 선회하였다. 골란 고원은 해발고도 500m 바위산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엄폐물도 찾기 힘든 척박한 지역이었다. 거기다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인 땅에 4개 대대가 주둔하며. 두꺼운 1m 철판을 위에 덮는 콘크리트 요새를 짓고 요새 안에는 T-55 서른 대를 넣어놓고, 지뢰와 다중 철조망과 장애물로 감싸놨기 때문에 난공불락이라고 여겼다. 오죽하면 소련 군사 고문단들도 마지노선에 버금가는 강력한 요새라고 했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에도 시리아군의 병력 상실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알아사드는 시오니즘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한편, 아랍 국가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특히 이집트의 지원을 갈망했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처참하게 박살난 이집트라 시리아에 지원을 보낼 여력 따위는 없었다.
이스라엘군은 이 난공불락의 절벽을 전차와 기계화보병이 탑승한 장갑차로 돌파하려 했는데, 골란 고원은 강도가 약하고 자잘히 부서지는 현무암질 산이었기에 전차와 장갑차가 올라가지 못하자, 폭약으로 현무암 바위를 부수고 그 지역을 불도저로 길을 닦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엘리 코헨이 상세히 관찰한 골란 고원에 대한 정보들은 이스라엘군의 요새 점령에 큰 도움이 되었다.[13]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의 포격을 뒤집어쓰며 처절하게 지뢰 지대를 돌파하고 장애물을 개척하느라 장갑차에서 전부 다 내려 차를 밀면서 진격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갑차가 대전차포에 맞고 격파되면 격파된 장갑차를 치워내고 남아 있는 보병들이 돌을 치우며 진격했다. 이리하여 여단 내 사상자 비율이 90%에 육박했으며,[14] 현무암을 부수고 길을 내느라 폭약을 모두 소진해 철조망을 돌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한 중대는 그동안 올라오느라 중대원 중 8명밖에 남지 않자, 부상당한 병사 몇 명이 자신의 몸을 철조망에 내던져 얼마 안 남은 전우들이 지나갈 수 있게끔 길을 만들 정도로 필사적으로 공세를 펼쳤다.[15] 결국 9일 밤, 이스라엘군의 처절한 진격에 결국 수비대 본진이 얼마 안 남은 병력에 뚫리고 골란 고원의 지휘소가 점령되자 날이 밝기도 전에 나머지 진지에 있던 모든 병력이 철수해 버렸고 골란 고원에 이스라엘 국기가 올라갔다. 지금도 이스라엘군의 최정예 부대인 골라니 여단의 신화다.
이를 지켜보던 골라니 여단의 요나 여단장이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란 고원 진지에 이스라엘 국기가 게양되었고 이를 망원경으로 보던 여단장은 통곡했다고 한다.
경악스러운 패전에 시리아 정부는 우선 골란 고원에 살던 시리아인 9만 5천여 명에게 소개 명령을 내렸고, 주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서 피난길에 올랐다. 당연히 드루즈인과 체르케스인은 소개 명령을 무시하고 이스라엘군을 환영했다. 시리아군 지도부는 절망에 빠졌고 시리아군 총참모장 수웨이다니는 유대인들이 곧 다마스쿠스를 조질 것이며 아무도 유대인들을 막을 수 없다고 정부에 경고하였다. 이스라엘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시리아군 장성들은 다마스쿠스를 버리고 앞을 다투어 달아나는 추태를 보였고 이어 내각도 붕괴되어 주요 장관들은 금괴를 챙겨서 모조리 알레포로 달아났다. 다마스쿠스를 방어하는 부대는 고작 정권의 친위 부대였던 70여단 단 하나밖에 없었고 골란 고원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로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점령한 시리아 장교 클럽에서 열린 이스라엘군 참모 회의에서 이스라엘군 북부 전선 사령관 다비드 엘라자르는 2개 사단만 있으면 8시간 만에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킬 수 있으니 다마스쿠스 진공을 허락해달라고 라빈에게 요청했으나, 라빈은 시리아 영토를 더는 점령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3.5. 이집트의 항복
소련은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여기고 나세르에게 즉시 정전 협정을 맺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나세르는 유대인들은 어차피 자기네가 원하는 것을 얻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면서 알제리가 전투기 200대를 보내주기로 했으니 그 전투기로 병력을 재편성하면 된다고 거부했다. 그러나 그 200대 전투기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이집트 지도부는 혹시 이길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혔고, 뭣보다도 패전으로 정권이 붕괴될까 우려했다. 사다트는 나세르에게 아메르를 해임하고 직접 군을 지휘하라고 충고했지만 어쩐 일인지 나세르는 듣지 않았다.한편 아메르 원수는 아직도 이집트 군인 2만 명 이상이 시나이 반도에서 물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음에도 다리를 폭파시키라고 지시했다. 가까스로 수에즈 운하까지 온 이집트 장병들은 파괴된 다리를 보고 충격으로 쓰러졌다. 그나마 그냥 팽개친 것은 아니라서 배를 보내서 병사들을 건져오긴 했다.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서는 자식들을 시나이로 보낸 어머니들이 몰려와서 통곡하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마침내 나세르는 완전히 포기했다. 최고 사령부를 방문한 그는 아메르와 한참 동안 개처럼 싸운 후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뉴욕에 있던 이집트 외무장관 엘 코니는 그간 거짓 승전보만을 받아왔고, 이스라엘의 기만적인 휴전 협상을 거절한다는 의기양양한 연설문을 준비했다가 모든 게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 통곡했다. 이 충격적 패배를 믿을 수 없었던 엘 코니는 이스라엘의 술책임을 의심하여 나세르에게 직접 전화를 했으나 나세르는 패배를 다시 확인해주었다. 엘 코니는 유엔 안보리에 출석하여 정전을 받아들인다고 통고하였다.
6월 9일,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를 도하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들어와서 이집트는 패닉에 빠졌다. 아메르는 나세르에게 전화해서 눈물 콧물을 짜내면서 이제 우린 다 죽었다고 울부짖었고 나세르는 경멸을 금치 못하면서 저런 인간이 사령관이니 이번 전쟁이 망했다고 한탄했다. 국회의장 사다트는 국회의원들을 소집해서 카이로를 사수하기 위한 최후의 결사항전을 준비하는 한편 나세르에게 상 이집트로 피신하여 끝까지 저항을 이끌어달라고 요구했으나, 나세르는 부통령 자카리야를 사령부에 파견하여 이스라엘군의 도하가 거짓 뉴스임을 확인한 뒤였다.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는 나세르에게 하야하라고 압박하면서 하야하지 않으면 군대가 끌어내릴 수도 있다고 쿠데타를 위협하였다. 이미 절망적인 전황에 자살을 고려하던 나세르는 부통령 자카리야 무히에딘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이집트 군 수뇌부 전원도 동반 하야하기로 아메르와 합의하고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집트 국민들이 나세르에게 권좌에 남아달라고 울부짖으며 호소하는 예상 밖의 사태에 나세르만 남았고, 나세르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아메르 원수는 몰락했다.
3.6. 결말
이집트와 시리아가 쌍으로 졸전을 하고, 이스라엘군의 무지막지한 영토 확장 능력에 놀란 국제사회는 즉각 정전을 요구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아랍 세계에서 서방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한 소련까지 압박에 나서자 결국 이스라엘은 정전(停戰)에 응한다. 이때 소련 내 강경파 군부는 실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군부의 계획대로라면 이스라엘에 소련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예정이기도 하였다. 다만 소련 상륙군에 이스라엘의 폭격이 가해지는 즉시 소련의 직접 개입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런 상황이라면 미군 역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즉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16] 다행히 이 계획을 알게 된 소련 수뇌부가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막고 정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사실 소련이 선전하고 다니던 군사 압박 역시 아랍권에 대한 립 서비스였기 때문이다.결국 6월 10일 오후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아랍 3국은
이집트군 전사자는 1만에서 1만 5천 명 정도였으며, 1500명의 장교와 40명의 파일럿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5천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요르단군 피해는 700명이었으며 6천 명의 부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 시리아는 450명이 전사했으며 256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 전사자는 800명 정도였다.
포로는 장성 21명을 포함한 이집트군 5천 명, 시리아군 365명, 요르단군 550명, 소련 군사고문 2명이었다. 이스라엘군은 15명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로 잡히지도 못하고 고문, 처형당한 인원이 상당하다는 말은 많지만 일단 포로로 정식으로 잡히고 나면 꽤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포로 협상에서 아랍 쪽은 훨씬 더 많은 포로가 잡혔음에도 비협조적으로 나왔는데, 이스라엘 측이 아랍 각국에서 핍박받는 아랍 유대인들의 송환과 시리아에서 처형된 엘리 코헨의 유해 송환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집트 포로 대다수는 가난한 농민들 출신이었고, 반면 이스라엘 포로들은 고급 인력이며 장교인 파일럿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는 이스라엘 측에 '농노 새끼들'과 파일럿을 교환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했다. 이스라엘 측은 충격을 금치 못했고 골다 메이어는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이때의 경험이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병력 동원에 있어서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어서 늘 쩔쩔매는 것과 달리, 아랍 국가들은 무제한적으로 국민들을 희생시키고도 그 어떠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는 독재국가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메이어는 아랍과의 진정한 평화는 아랍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병기 손실은 이집트군의 경우 전군의 15%에 해당하는 20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잃었다. 이스라엘이 노획한 이집트 무기만 탱크 320대, 대포 420문, SAM 미사일 포대 2기, 차량 1만대에 해당했다. 요르단은 탱크 179대, 장갑차 53대, 대포 1,062문, 차량 3166대, 2만 정의 총기를 잃었다. 시리아는 야포 470문, 탱크 118대, 차량 1,200대를 잃었다. 전투기에 해당하면 이스라엘은 총 469대의 아랍 비행기를 파괴했으며 공중전에서 격추한 숫자가 50대였다. 이집트 공군의 85%가 소멸했다. 이스라엘 공군의 피해는 36대, 파일럿 18명으로 이스라엘 공군 전력의 20% 정도였다.
그리고 추하게도 아랍 전역에서 분풀이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랍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투옥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포그롬이 이어졌다. 이집트 유대인 4천 명 중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의 랍비 수장들을 비롯해서 800명이 투옥되었고, 시리아와 이라크도 랍비들을 투옥하였다. 리비아, 튀니지에서도 유대인 학살이 이어졌고 수천 명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 추방을 당했다. 이 난장판을 제어한 것은 모로코와 튀니지뿐이었고 나머지 아랍 지도자들은 자국 유대인들을 민중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희생양으로 던져주었고 유엔과 적십자의 개입조차도 막았다. 이러한 제노사이드 이후 살아남은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탈출했으니, 오래 전부터 쪼그라들었던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공동체들은 더욱 축소되었다.[17]
4. 분석 및 결과
6일 전쟁의 발발 원인은 실제 이스라엘의 예방전쟁적 성향도 있었지만[18] 에슈콜로서는 나세르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세르는 언론과 군사적 선계 공격의 가능성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궁지로 모는 정치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선제공격과 승리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이집트의 군사적 위협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와 같은 굴욕(?)을 견뎌낸다면 평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하지만 그러한 인내는 바로 이집트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더불어 이스라엘의 중동 지역 내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나세르 역시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예상도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군의 공세에 이집트군이 어느 정도 방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집트군이 방어를 하는 사이에 국제사회의 중재가 개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제사회의 중재로 정전이 발효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세계에 대한 이집트의 정치, 외교적 선전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니까. 다만 이스라엘군이 예상보다 너무 강했고, 이집트군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능했다 보니,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 전쟁은 요르단의 입지가 이스라엘이나 아랍 측 모두에게 크게 상승하는 영향을 주었다. 물론 요르단도 풍요로운 요르단 강 서안을 날려먹은 데다가 관광 수입 측면에서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상실해서 큰 타격을 입었고(물론 성지 예루살렘 상실이라는 점에서 아랍권 전체에 충격은 되었다), 영토 회복을 위한 모든 노력이 불가능해지는 등의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패전하는 와중에서도 끝까지 가장 잘 싸운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제4차 중동전쟁부터는 이스라엘과도 암묵적인 우호 관계를 맺고, 아랍 측에도 나름대로 군사 지원을 하는 등의 양다리를 걸쳐도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 위치까지 오르게 된다.
이런 위치는 앞서 언급했듯 제3차 중동전쟁 때까지 이스라엘과의 교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아랍 측에게 압박받은 것과는 천지 차이로 달라진 것이다. 물론 이걸로 당시 요르단 GDP 40% 이상을 생산하던 요르단 강 서부 영토의 상실로 인한 영토 축소와 경제, 인구의 대손실을 메꾸기엔 너무 손해지만... 지도에 나온 요르단강 서안 지구가 1967년에 빼앗긴 요르단 영토다. 골란 고원은 돌덩이, 시나이 반도는 사막으로 전략적 요충지지만, 인구, 경제 면에선 큰 도움이 안 되는데,[19] 이 요르단 강 서안 지역 땅은 전략적 요충지, 경제적 요충지라 이후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집트는 자만심과 독재 체제 특유의 경직된 의사 결정 시스템으로 인해 결정적인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련제 무기들을 대량으로 들여와 군사력을 강화한 것은 좋은데 이를 아랍 민족주의와 연계해 정치적으로만 활용하려 했고,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고 자신만만해 한 결과 이스라엘과 전쟁하면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약점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고 결국 이스라엘군에 제대로 허를 찔리게 된 셈이다.
한편 가말 압델 나세르는 종전 3일 뒤 대국민 방송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하야할 것을 표명했지만, 이후 3주 동안 거리로 국민들이 밀려나와 외치는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아우성에 "그렇다면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다시 복귀하겠다." 고 밝히고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나세르의 정적, 이스라엘, 미국 등은 이 같은 과정을 나세르의 정치적 쇼로 분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방장관 아메르는 패전의 책임으로 실각했으며, 이후 자신의 오랜 친구인 나세르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그해 9월 음독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동안 시리아는 골란 고원으로 이스라엘을 내려다 보며 공격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유일한 수자원인 갈릴리 호수에 수작을 부려 상수도 공급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었으나, 전쟁의 참패로 전략적 거점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군사적 균형의 추가 완전히 이스라엘에게 기울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인구가 워낙 적은 이스라엘에서는 6일 전쟁으로 입은 인명피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였던 이스라엘에서 개개인의 시민의 사망은 뼈아픈 정치적 타격으로 다가왔는데[20], 전후 이스라엘은 전쟁 중 전사한 모든 인원을 정리한 자료를 발간하였으며, 골다 메이어는 오리아나 팔라치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들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다는 고통에 지금도 몸부림치고 있다고 아랍과 대화할 필요성을 강변하였다. 하지만 아랍은 이스라엘과 주권국 대 주권국으로 마주앉을 생각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강대국을 통한 조정을 신뢰하지 않고 아랍이 성의를 보이기 이전까진 대화할 수 없다고 완고하게 나갔다. 그리고 압도적인 승리로 인하여 아랍을 조기에 가뿐히 격퇴할 수 있다는 군사적 오만이 지배하게 된 것도 욤 키푸르 전쟁의 역습을 허용하는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지적으로는 6일 전쟁의 엄청난 승리와 가자 지구 및 웨스트뱅크 점령이 장기적으로 이스라엘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는 것이다. 1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해서 얻은 영토는 이스라엘 영토로 병합되어 잔류한 아랍인들에게 시민권이 주어지고 어떻게든 이스라엘 시민으로 동화가 되었지만,[21] 아랍 국가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지위를 결정하기로 한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에서는 군정(軍政)이 유지되고 해당 지역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어떠한 사회권도 누리지 못하고 탄압받는 상황이 계속되었으며 이것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격화 및 군사적 긴장과 극단주의 대두로 인한 이스라엘 민주주의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50년 만에 기밀문서를 공개하여 에슈콜이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핵폭탄 투하 계획을 세웠음이 밝혀졌다. #
전쟁 이후인 1967년 11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전쟁으로 인한 점령지에서 즉각 철수할 것을 주장하는 결의안(242호)을 채택했다. 그러나 에슈콜 내각은 이 결의안을 무시하였다. 1980년대의 전반기에 이르러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 아랍 공화국에 반환한 것을 제외하고,[22] 여전히 점령지들(골란 고원,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지구 등)을 자국의 영토로 삼고 있다.
6일 전쟁 당시 텔 아비브는 이스라엘의 임시수도(1948년~1977년)였다. 국운을 걸고 대승을 거둔 에슈콜 내각은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에 착수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과 정부종합청사와 대법원 및 공안부와 경찰청과[23] 문화복지부처들, 이스라엘방송공단과 이스라엘은행을 차례로 이전했다. 그래서 1977년에 이르면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탈바꿈했지만,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방위기관(국방부와 참모본부, 육해공군청과 국군사령부들), 정보기관 본부(모사드, 신 베트, 아만), 경제산업부처들, 국유기업들과 증권거래소, 대사관과 공사관과 영사관은[24] 여전히 텔 아비브 관구에 있다.
전쟁 도중인 6월 8일에 이스라엘군의 전투기와 어뢰정이 미군 정보수집함 USS 리버티를 공격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이른바 리버티 사건. 이 공격으로 34명이 사망하고 17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함선 자체도 크게 파손당했다. 당시 함장인 윌리엄 로렌 맥고나글(William L. McGonagle)은 본인도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사태를 수습하고 함선을 살렸다. 이 공으로 맥고나글 함장은 명예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임무 자체가 기밀인데다, 미국은 이스라엘과의 외교 문제 때문에 이 사건을 은폐해야 했다. 결국 사건은 한참 뒤에야 알려졌으며 일부 자세한 사안은 아직도 비밀로 취급받고 있다. 맥고나글의 명예 훈장 수여식조차 비밀리에 매우 조촐하게 치러야 했다.
전쟁 과정에서 얼마나 이집트군이 속절 없이 털렸는지 수백 대의 이집트군 전차들이 상태가 온전한 채로 이스라엘군에 노획될 지경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T-55 전차들을 티란으로 개조해 쏠쏠하게 써먹었다.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여파가 있었는데, 아랍의 혁명국가들을 군사적으로 원조하던 소련은 아랍 지도자들이 무기만 챙기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자신의 무기로 무장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에게 복날 개맞듯 박살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25] 6일 전쟁에서 아랍의 대패는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수하르토의 쿠데타와 맞물려 소련의 혁명 수출에 엄청난 타격이 되었다. 흐루쇼프 실각 이후 정치국을 장악한 강경 매파들은 움츠러들었고 브레즈네프는 1968년 프라하 침공을 계기로 당을 완전히 장악하여 서방과의 유화정책에 돌입하였다.
5. 후폭풍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대패는 이후 중동과 이슬람권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쳤다. 이 전쟁에서 추태를 보인 나세르를 비롯한 독재정권들은 국민들의 신망을 완전히 잃어버다. 이러한 실망감은 이들 정권들이 그때까지 기반으로 삼았던 세속적인 아랍 내셔널리즘과 아랍 사회주의 이념이 퇴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문제는 전쟁의 패배로 드러난 세속주의 정권의 무능과 실책에 대한 반감을 등에 업고 아랍 사회주의, 내셔널리즘의 쇠퇴로 인한 빈자리를 채운 것이 바로 그 악명 높은 이슬람주의였다는 것.
당시 일부 이슬람주의자들은 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 연합군의 참패에 대해 "봐라, 저 유대 놈들은 이교도이지만 최소한 그들의 신앙에 대해 철저하니 승리했다. 우리의 독재자들은 신앙심도 없는 세속주의자에 허구한 날 이슬람교 탄압이나 하니 알라의 천벌을 받아서 전쟁에서 유대 놈들에게 개망신이나 당하지."라고 비아냥대기도 했다.[26] 이 이슬람주의는 훗날 이슬람 근본주의로 더욱 흑화하여 이슬람권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쳤다.
6. 여담
- 전설적인 시사만화가로 이집트 태생의 유대인 래넌 루리가 이스라엘군 장교로 참전한 적이 있다. 이후 루리는 1997년 이집트 관영지 알 아흐람지에 만평을 싣기로 계약했으나 이집트 기자연맹은 아랍인을 죽인 루리의 만평을 용납할 수 없다고 대대적으로 항의하였다. 이에 루리는 자신은 후방에 근무한 예비역 장교라서 누굴 죽이지도 않았을뿐더러, 유대인이란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맞섰다.#
- 유리 겔러가 18세에 육군 공수부대로 참전해서 부상을 입었다.
- 주영대사, 주유엔대사, 의전수석비서관을 지낸 외교관 노창희가 6일 전쟁 직전 GATT 연수 수료 기념 수학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연수생들 중 40대 초반인 이스라엘 무역부 과장이 있었는데, 새파랗게 젊은 이집트 외교관들이 전쟁만 터지면 유대인 놈들은 하루면 죄다 지중해로 처박아줄 수 있다고 연일 도발하고 까불었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6일 전쟁이 터지자마자 이스라엘 과장은 즉시 여행을 중단하고 귀국해서 참전하였는데, 그리 까불던 이집트인들 중 누구도 귀국하지 않고 끝까지 여행을 마치는 광경을 보고 다들 한심하게 여겼다고 한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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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 이스라엘 총리까지 역임했다.[2] 즉, UN에서 슬슬 회의를 열고 이스라엘이 더 이상 전쟁을 못하게 압박할 준비를 하려고 할 때 이스라엘군은 목적을 이루고 전쟁이 끝나야 했다.[3]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수에즈 국유화에 멋대로 침공했던 것이었기 때문. 특히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국제적으로 매우 높았던 시기라 이스라엘과 영국, 프랑스는 미소 양국에게 뭇매를 맞고 기껏 힘들게 얻은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는 등 온갖 불이익을 받았으며, 정작 이집트는 어느 정도 피해를 복구하고 지도자인 나세르의 정권만 더욱 단단해졌다. 즉, 졌지만 이긴 상황이 되었다.[4]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싸울 뿐만 아니라 자기 진영 내의 이념 대립으로도 갈등을 벌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주축으로 한 친소 국가,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을 주축으로 한 친미 국가로 나뉘어 전개된 아랍 냉전(Arab Cold War)도 나름 치열하게 벌어졌다. 북예멘 내전은 이런 아랍 냉전이 내전으로 비화된 것이다.[5] 결국 8년에 걸친 내전 끝에, 공화파가 승리하여 왕당파를 몰아내고 북예멘 공화국을 확립하긴 했다만...[6] 이때 이집트군의 레이더망 사각지대를 찾기 위해 계속 초계 비행을 돌려 이집트 공군기들이 대응을 안 하는 공역을 공백으로 판단하는 꼼꼼함까지 보였다.[7] 모사드는 이집트 공군 관계자들의 가족 관계와 레이더병들의 습관까지 조사해 기습의 적기를 노렸다.[8] 미라주 III 전투기들은 폭격 이후에도 계속 이집트 공군 기지를 맴돌며 기관포를 난사했다. 미라주 III의 30mm 기관포는 몇 발만 명중시켜도 이집트 전투기들을 충분히 격파할 수 있는 위력인데, 이집트 공군기들은 이글루도 없이 주기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기 때문에 한번 기관포로 긁으면 대여섯 대가 한꺼번에 '전투기였던 것'으로 변했다. 더구나 미라주는 델타익이라 저공 저속에서 실속할 위험이 큰 기체인데도,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 저공 비행을 하며 기총소사로 이집트 공군을 초토화시켰다.[9] 이때 이스라엘군은 아랍 연합군을 일방적으로 격멸한 것 때문에 UN이 조기 개입할까 염려하여 자기들의 전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두들겨 맞고 있던 이집트 측에서는 이스라엘 공군을 격멸하였고 이집트 공군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하고 있다는 등 화려한 선전을 계속했다. 나세르도 초기에는 주위 아첨꾼들에게 보고를 받다 보니 제대로 된 전황을 파악할 수도 없었으며, 제대로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이집트 국민들은 그대로 선전방송을 믿고 거리에서 나와 이참에 이스라엘을 짓밟자며 열광했다. 이러다 보니 시리아를 포함한 전세계 주요 국가들도 전쟁 초기에는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격파하는 줄로 착각했다. 당시 한국 언론도 이집트의 선전방송에 단단히 낚였다.[10] 주 이스라엘 영국 대사 해도우는 농장과 도시의 인구밀집지역을 무차별적으로 포격했고 요르단이 이스라엘에게 군사적 대응을 하도록 강요하였다고 보고하였으나, 영국 외무장관 브라운은 아랍 국가들의 의견을 의식하여 이를 묵살하였다.[11] 정작 다얀은 각의에서 요르단과의 전쟁에 반대한다고 해서 동석한 장교들은 '이 새끼가 대체 뭘 원하는 거지?' 하고 당황했다.[12] 현대전에서는 병력의 1/3을 잃으면 후방 재편성이 필요한 전투 불능(combat ineffective)으로 판단한다. 이런데 ⅔, 다시 말해 약 66% 전력 상실은 그냥 시리아 공군력 전체가 지워졌다는 소리다.[13] 6일 전쟁이 벌어지기 몇 년 전, 시리아의 기업가 사베트로 위장해 시리아군 국방차관까지 올라간 엘리 코헨이 골란 고원을 시찰할 당시 전선의 시리아군 병사들이 더위에 지친 것을 보고 애국한다는 명분으로 나무들을 골란 고원의 주요 시리아군 진지에 제공했다. 시리아 군부는 병사들을 위한 그늘막이 제공되었다고 흡족해했고 일선 병사들도 좋아했겠지만, 이 나무는 후일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때 심은 나무들이 진지들의 주요 위치를 이스라엘군에 정확히 알려주는 표지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14] 이를 당시 피의 등산로라고 말했다.[15] 여단의 90%가 전멸하는 상황이라 다른 중대도 당연히 100명 중 10명, 9명밖에 남지 않았다. 심지어 어느 중대는 3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16] 가정까지 갈 것도 없이 4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각각 소련과 미국이 지원을 했다.[17] 오늘날 중동과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의 유대인 공동체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모로코와 튀니지 유대인 공동체다. 그 숫자는 각각 약 2천 명, 1천 명으로 나머지 아랍 국가들에서는 수명~수십 명만 살거나 모두 이주해서 말 그대로 씨가 말라버렸다. 단 비아랍 국가로 시야를 넓히면 이란이 8500명으로 가장 많다.[18] 현대 평가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예방전쟁으로 인정받는 전쟁이다. 그 외 양면전쟁을 펼쳐야 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명분을 예방전쟁으로 내세운 경우는 있었지만 이들의 경우는 굳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침략전쟁이다. 아예 전쟁 선포의 명분 그 자체가 예방이면서 동시에 그게 후대에도 인정받는 경우는 이 6일 전쟁만이 유일하다.[19] 다만 당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연간 5억 달러라는 알짜 수익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스라엘군에 의해 이게 단절되면서 이집트 경제는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그래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이집트 정부는 외자를 유치해서 원유를 채굴하는 유전의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20] 메이어는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아랍 독재자들은 계속 거짓말로 민중을 기만하고 자기 국민들을 죽여놓고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고 씹어뱉었으며 아랍인들의 피해는 오로지 죽은 병사들의 유가족만 알 것이라고 신랄하게 논평했다. 물론 아랍 지도자들의 정치적 타격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나세르는 축출 직전까지 갔었다. 시리아에서도 지도부가 교체되었고 요르단도 큰 내홍을 겪었다.[21] 반유대주의적 선전에도 불구하고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들의 대우는 그리 시궁창이 아니다. 차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직 사회 진출도 꽤 활발하며,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사는 사람들에 비할 바도 아니고 이스라엘 시민사회가 그들을 수용하는 태도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대립이 자꾸 극단적으로 변해가면서 악화되는 실정이다.[22] 그러나 사실 현실적인 통치의 어려움보다는 이후 미국의 중재로 친미국가인 이집트와의 외교관계 개선을 위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23] 소방청은 중부 관구의 리숀 레치욘 시에 있고, 교도청은 중부 관구의 람라 시에 있다.[24] 1980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예루살렘 관구에 상주하는 대사급 외교공관들의 철수를 요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78호에 따라 국제사회의 주권국가들 가운데 약 50개국(미국, 러시아, 독일, 체코, 바누아투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행정수도로 탈바꿈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25] 욤 키푸르 전쟁 시점에서 브레즈네프는 닉슨에게 아랍인들은 우리 말을 듣지 않으니 미국과 이스라엘은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는데,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이 블러핑을 친다고 의심했다. 미국은 소련이 위성국들과 피후견국들을 제대로 통제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6]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꼴통 이슬람 성직자가 살라딘에게 우리가 신앙심이 부족해 알라의 천벌을 받아서 십자군에게 패했다며 비슷한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해 살라딘은 우리가 이전까지 패한 이유는 그딴 게 아니라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라 반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