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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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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시위대[1] |
대한제국군 시위대(大韓帝國軍 侍衛隊)는 대한제국군의 부대로, 시위(侍衛)는 모시고(侍) 지킨다(衛)란 뜻으로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황궁과 황실을 경비하는 여단급 근위대였다.
2. 설명
황실경비와 수도방어를 담당한 중앙군 역할을 겸한 대한제국군의 핵심 부대였다. 설립 당시에는 1개 연대 규모였고 이후 2개 연대로 확장한다. 각 연대는 5개 중대가 1개 대대였고 2개 보병대대와 포병대대, 기병대대를 합하여 사각편제를 이루었다. 시위대 창설 당시 군사 고문을 담당했던 제정 러시아식 편제에 가깝다.[2] 현재의 대한민국 국군은 주로 삼각편제를[3][4] 쓰는 편이다.갑오개혁 중이던 1895년 5월에 설치되었고 을미사변 당시에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후 해체되어 친위대로 흡수되었다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식 편제로 재편성되었다. 창설당시는 1연대 2개 보병대대였으나 1897년에는 시위 1대대와 2대대를 합쳐 시위로 개편하고 포병 중대(포대)를 설치하였다. 1900년에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로 확장하고 기병 대대를 설치하여 보병 대대 2개에 포병 1개 대대[5], 기병 1개 대대[6] 등 제대로 된 4각 편제의 형태를 띄게 된다. 군악대(소대급)도 2대를 설치하였고 1903년에는 보병 연대가 2개로 늘어나 총 병력이 5천에 이른다.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서울을 점령한 일본은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의 1차 군축을 단행한다. 친위대 2개 연대, 4개 대대의 4천여 병력은 폐지되고 시위대 2개 연대를 보병만으로 구성된 1개 연대로 축소되었다. 시위연대의 포병대대와 기병대대는 각 1개 중대로 줄여 포병, 기병, 공병을 포함한 시위 혼성 여단으로 편성하였다. 이렇게 2개 연대 5000명의 시위대는 1개 연대 3개 대대 2,513명의 시위 혼성 여단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이후 일본은 1907년 4월에 대한제국군의 2번째 군축을 시행하였다. 대한제국의 군대를 무력화하는 6개의 칙령이 반포되었고 시위 보병 연대는 다시 3개 대대와 그 휘하 4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1907년 8월 1일에 해산되었다. 시위대 1연대 1대대장이었던 박승환이 이 일로 자결하고 해산에 반대한 2개 대대는 일본군에 맞서 남대문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강제 해산 이후 상당수가 의병에 합류하면서 정미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 남대문 전투와 진위대 봉기에서 탈출한 군인들이 들고 나왔던 소총과 탄약은 을사의병으로 들고 일어난 의병들의 화승총에 비해 상당한 전력이 되었다.
한편 2연대 2대대와 기병대대는 일부 남아 1907년 8월 이후에는 황궁 의장(儀裝)과 수비를 임무로 하는 근위 보병대 1개 대대로 644명이 편성되었다. 1907년 12월에는 황실 의장을 임무로 하는 92명의 근위 기병대가 편성되었다. 1909년 7월에는 군부가 폐지되면서 근위 보병대와 근위 기병대는 축소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가 되었고 이후 조선기병대는 1915년에, 조선보병대는 1930년에 해체되었다. 1930년 해체 당시 200여명의 인원이 남았고 이들은 일본군 헌병보조원과 순사보조원이 되었다.
3. 편제
이하 서술하는 편제는 서인한의 "대한제국의 군사제도"를 주된 출처로 함을 밝힌다.3.1. 1897년 3월
고종이 환궁한 지 1개월 후인 1897년 3월 16일,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으로부터 훈련받은 정예 친위대원 800명과 특별히 선발한 200명을 바탕으로 창설되었다. 대대급 규모였는데 러시아군식 편제를 도입하여 휘하에 5개 중대가 있었다. 합계 약 1000명이었다.3.2. 1897년 9월
1897년 9월 30일, 기존의 1개 대대 체제에서 2개 대대 체제로 증편되었다. 아직 연대 편제는 도입되지 않았으며 군부에서 직접 두 대대를 관리했다. 합계 약 2000명이었다.3.3. 1898년 5월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이 철수한 지 대략 2개월 후인 1898년 5월 27일, 연대 편제가 도입된다. 군부가 시위연대를 통솔하고, 시위연대가 대대들을 통솔하는 구조다.3.4. 1899년 11월
보병뿐 아니라 포병과 기병대가 창설되던 시기다. 대략 1898년 7월부터 1899년 11월 3일까지 1년여에 걸친 준비 끝에 포병 1개 중대와 시위기병대대가 창설되었다. 주된 변경점은 1899년 6월 원수부 창설로 상급기관이 군부에서 원수부로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시위 제1연대 병력이 2200명, 시위기병대대 병력이 400명으로 총 2600명이다.3.5. 1900년 12월
전력 증강이 계속된다. 1900년 9월경 보병 제3대대가 증설되고 포병대는 기존의 중대급에서 2개 대대급으로 크게 확충되었다. 다만 야포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해 각 포병중대 예하 소대는 3개로 보병에 비해 갯수가 하나 적었다. 그 외 곡호대, 즉 군악대 2개 대를 각각 연대본부와 시위기병대대에 나누어 배속시켰다. 총원 약 4150명.3.6. 1904년 3월
1902년 10월 30일, 시위대에 1개 보병대대를 추가하고 2개 연대체제로 개편함에 따라 시위 제2연대가 창설된다. 각 연대는 2개 보병대대, 1개 포병대대를 가지게 되었다. 시위기병대대는 여전히 원수부 직속이었다. 이후 1904년 3월 기존에 둘로 나뉘어 있던 곡호대를 합쳐 하나의 군악중대를 1연대 예하에 배속시킨다. 이때가 시위대가 가장 거대했던 시절로 총원 대략 5천에 달했다.3.7. 1905년 4월
러일전쟁의 승기가 굳어져 가면서 일본은 대한제국군의 감축을 강요한다. 우선 1904년 원수부가 폐지되곤 군부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1905년 4월 14일부터는 대대적인 군축이 실시되면서 친위대가 아예 폐지되고 진위대들도 연대 규모에서 대대 규모로 전환되는 가운데, 시위대 역시 크게 축소되었다.시위 제2연대는 아예 폐지되었다. 그나마 1연대는 이름만 일본식으로 살짝 바뀐 후 칙령 제27호에 따라 존속하였고 2연대로부터 1개 대대를 배속받아[10] 외연적으로는 3개 대대 규모로 늘어났다. 보병대대들은 일본군식으로 구조조정되어 5개 중대 대략 1000명 규모에서 4개 중대 830명 규모로 줄어들었다.
기병과 포병 부대는 기존의 대대 규모에서 중대 규모로 크게 축소되었다. 그나마 친위대의 잔재인 공병대는 조금이나마 늘어났지만 크게 의미는 없었다. 또한 이들은 시위대가 아니라 군부 직할부대로 전환되었다.
3.8. 시위혼성여단
최후의 편제다. 항목 참조.4. 대중 매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등장한다. 검은 제복에 붉은 줄무늬, 군모엔 오얏꽃(이화문) 문장이 달린 제복 차림이다. 22화에서 대한제국군 해산을 진행하는 일본군에 무기를 반납하고 보상금으로 겨우 지폐 1장을(...) 받으면서 은사금을 받고 떠나거나 즉결 처형당하든가 양자 선택을 강요당한다. 이에 치욕을 느낀 시위대의 대대장이 자결하고 이를 도화선으로 많은 병력들이 무기고를 탈환, 일본군에 대한 저항을 펼친다. 그러나 화력 차이와 탄약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며 최후까지 교전하다 일본군에 포로로 잡히거나 장렬히 전사한다. 일부는 한성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의병에 합류한다.[1] 1898년 헨리 아펜젤러가 촬영한 대한제국군 시위대의 사진이다.[2] 서인한 저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참고. 최초에 창설된 시위대는 일본식 편제를 따랐으나, 재창설된 시위대는 러시아식 편제를 따랐다.[3] 3개 하급부대가 1개 상급부대를 구성하는 편제. 1차대전 이전에는 사각편제나 시위대 같이 오각편제를 쓰는경우도 있었지만 보급이나 유연성등의 이유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삼각편제가 보편화되었다.[4] 다만 대한민국 육군의 여단은 국방개혁 2.0 이후 5개의 대대로 오각편제를 이루고 있다.[5] 창덕궁 옆의 경우궁에 포대영이란 이름으로 주둔했다.[6] 편제상으로는 그랬지만 군마가 부족하여, 1902년 9월에 1개 기병 중대 규모가 되었다. 1903년에는 2개 중대 규모가 되었다. 실제 완편이 되려면 2년은 더 소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3년에 기병대대의 본부는 외아문,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로 옮겨갔다. 출처: 대한제국기 중앙군 병영 배치와 그 정치적 함의[7] 시위연대에 예속되지 않고 원수부 직할이었다.[8] 시위연대에 예속되지 않고 원수부 직할이었다.[9] 시위연대에 예속되지 않고 원수부 직할이었다.[10] 2연대 1대대인지 2대대인지 불명. 만약 이들이 2연대 1대대라면 원래 1연대에 있다가 2연대로 배속 후 다시 1연대로 돌아온 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