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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별 | 대한제국 육군 | 대한제국 해군 | ||||||||
중앙부처 | 원수부 | 군부 | 참모부 | 교육부 | ||||||
황실직속 | 대한제국군 호위대 | 시종무관부 | 동궁배종무관부 | 친왕부 | ||||||
주요 부대 | 대한제국군 친위대 | 대한제국군 시위대 | 대한제국군 진위대 | 대한제국군 헌병대 | ||||||
학교 | 육군무관학교 | 육군연성학교 | 육군유년학교 | |||||||
기타 | 육군법원 | 대한제국군 상무영 |
1. 개요
한자: 陸軍幼年學校육군유년학교는 대한제국군의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열강에서는 사관학교 이전에 유년사관학교를 두어 10대 시절부터 군인 양성에 필요한 것들을 교육하였는데, 유년학교도 이에 해당하였다. 장차 육군무관학교에서 수학할 무관학도를 교육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04년 9월에 대한제국군 교육부가 창설되면서 육군연성학교와 동시에 생기게 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영향으로 군축이 이뤄지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육군유년학교 역시 일본의 육군유년학교의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등 일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작용하였다. [1]
1904년 9월 27일 관보에 육군유년학교의 관제가 게재되었다. 1905년부터 15세에서 18세의 자원자를 받아 교육하였다.
교육기간은 3년이었으며, 학생 숫자는 3학년을 합쳐서 300명 수준이 목표였다. 여름방학은 최대 7주였다.
교육과정을 끝내기도 전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이뤄진 탓에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없다.
2. 구성
육군무관학교가 장성급 장교인 참장, 육군연성학교가 참장이나 정령을 둔 것과 달리 유년학교는 좀 더 급이 낮아서 정령이나 부령을 두도록 되었다.교장에겐 위관급 장교인 부관이 1인 붙었고, 교관은 17명이었다. 교관들이 속한 과를 보면 마술과(馬術科)에 위관급 1인, 문학 및 보통과(文學及普通科)에 10인, 외국어학과(外國語學科)에 6인이 배정되었다. 다른 병과에 비해 더 키우기 어려운 기병의 경우 말에 익숙해지도록 10대 시절부터 가르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생도대 역할을 하는 학도대는 중대장 3명에 휘하에 장교 12명을 두었다. 학도대의 학도 숫자는 중대당 100명이었는데, 3개 중대면 총 300명 규모라 볼 수 있다. 연간 1개 중대 규모의 학도를 받아들였다.
그 외에 군의관과 경리장교인 향관, 의관이 1인씩 배정되었다. 원사급인 특무정교 3인과 조교로 중사 이상의 부사관 29명도 티오에 배정되어 교육을 보조하도록 되었다. 조교 중 부사관 2명은 마술과에 배정되었다.
3. 여담
1905년 7월 24일에 관보에 게재된 학도모집광고에 따르면 시험과목은 한문, 산술(수학), 역사, 지리, 외국어였다.4. 역대 지휘관
4.1. 학교장
- 정령 이병무(李秉武) 육군무관학교장 겸 육군유년학교장 육군 보병 정령 이병무의 본직과 겸직을 면직하였다[2]
- 부령 조성근(趙性根) 육군무관학교장보에 육군 보병 부령 조성근을 보하였다[3]
- 정령 이기홍(李起泓) 육군유년학교장 육군 보병 정령 이기홍에게 휴직을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