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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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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器廠
파일:용산도산.png
황태자 한국 어도항 기념사진첩(皇太子殿下韓國御渡航紀念寫眞帖)에 수록된 1907년 10월 당시 용산 군기창 일대의 모습[1]
창설 1904년 7월 6일
폐쇄 1907년 8월 29일
전신 군부 포공국(砲工局) 기기창(機器廠)
소속 대한제국군
상급부대 대한제국 군부
역할 조병창 겸 정비창
창장 포병 부령 김정우(金鼎禹)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문동 38번지
1. 개요2. 위치3. 명칭4. 책임자5. 역사
5.1. 기기국 기기창
5.1.1. 설치 과정5.1.2. 운영 노력
5.2. 군부 포공국 기기창
5.2.1. 김홍집 내각의 개편 계획5.2.2. 러시아 고문단의 개편 계획5.2.3. 광무개혁기의 확장
5.3. 군기창
5.3.1. 이전 계획 수립과 건설5.3.2. 부지 선정과 용산의 특징5.3.3. 왜 일본과 협조했는가?5.3.4. 운영사
5.3.4.1. 건설 당시의 계획5.3.4.2. 축소와 완공5.3.4.3. 과연 제대로 운영되었는가?
5.4. 폐쇄
5.4.1. 용산 군기창5.4.2. 삼청동 기기창
6. 관련 인물
6.1. 한국인6.2. 외국인
7. 생산 장비
7.1. 총포7.2. 탄약7.3. 기타
8. 군기창 관제
8.1. 1904년 7월8.2. 1904년 9월8.3. 1905년 3월
9. 기타10. 매체에서11. 출처12. 관련 문서

1. 개요

군기창 관제(1905.03)
군기창(軍器倉)은 군부대신(軍部大臣)에게 소속되어 육군(陸軍)에 필요한 병기, 탄약, 기구의 재료, 제조, 수리를 관할한다. 군기창은 경성(京城) 안에 두고 군기창 안에 총포탄환제조소, 화약제조소를 배치한다.


대한제국군조병창이자 정비창. 1904년 7월 설치되어 1907년 8월 29일 해산되었다. 한성 용산에 있었기에 용산 군기창으로도 불린다. 30년식 소총을 생산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한국의 근대적 방위산업의 시초와도 같은 장소이다.

전신은 기기국(機器局) 예하 공장인 기기창이며, 이는 다시 여말선초부터 운영해왔던 관영 군수공장인 군기시(軍器寺)로 역사가 소급된다. 기기창은 1887년 완공된 이래 오랜 기간 종로구 삼청동에 있었다. 1895년 기기국이 폐국된 이후부터 1904년까지는 군부 포공국(砲工局) 예하 조직이었다. 1904년부로 군기창으로 개칭되어 설비를 확충하고 용산구 용문동 일대로 이전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 일본군에 가장 먼저 점령당하여 해체되었다.

용산 시설은 조선주차군이 무기고로 사용하다 1935년부터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공장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6.25 전쟁 당시 미군의 용산 대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전신인 삼청동 시설은 총독부 세균실험실로 쓰이다 중앙방역시험소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일부가 남아 있다.

2. 위치

용산으로 이전하기 전 기기창 시절의 위치는 종로구 삼청동 28번지 일대로, 옛 군기시(軍器寺) 화약고 별창(別倉) 부지이다. 현재 이곳에는 기기창의 부속시설로써 금속을 주조하던 번사창(飜沙廠)이 한국금융연수원 경내에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1934년에 출판된 경성부사 제2권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문서에 따르면 용산 군기창 시절의 위치는 용산구 용문동 38번지 일대이다. 이곳은 오늘날 효창공원앞역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주택 및 빌라 밀집 지역이 되었다.

3. 명칭

1904년 이전, 그러니까 기기국의 산하기관이던 시절부터 포공국 부속시설이던 때까지 삼청동에 위치하던 서구식 군수공장의 공식 명칭은 기기창(機器廠)이었다. 용산으로 이전한 후에는 공식적으로 군기창(軍器廠)이라 개칭되었다. 여기서 군기(軍器)라 함은 무기 등의 군용 기구를 의미한다.

다만 종종 기계창(噐械廠)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중 프랑스와 주고받은 문서철에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언론 등에서 기기창, 기계창, 군기창을 혼용한 경우도 발견된다. 이런 명칭들에서 공통으로 쓰이는 창()이란 한자는 원래 벽이 없는 간이건물을 가리키지만, 점포나 공장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공장'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1904년 이전 언론이나 한국통감부 측에서 남긴 한국 관헌 기록 등에는 북일영 군물제조소(北一營軍物製造所) 또는 단순히 북일영(北一營)이라는 표현도 종종 보인다. 북일영이라는 옛 군영 자리에 설치된 군수공장이라는 뜻인데, 이는 경희궁 무덕문사직동 일대에 있던 옛 훈련도감 소속 병영인 북일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삼청동 시절의 포공국 기기창을 뜻하는 다른 말이다.

일단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삼청동에 위치하던 훈련도감의 본영은 북일영이 아닌 북영(北營)으로 불렸으며, 북일영은 사직동의 군영을 의미하는 것이 맞았다. 때문에 어느 때부터 북영을 북일영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는지는 미상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한제국 선포 즈음부터는 여러 기록들에서 삼청동의 군영을 북일영이라 부르는 모습이 관찰된다.

대표적으로 순종실록부록에는 창덕궁 신선원전을 옛 북일영 자리에 새로 지었다는 1921년 3월 22일자 기사가 있다. 신선원전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기창 번사창과의 거리는 1킬로미터가 안 된다. 또한 1901년 5월 28일자 황성신문에서는 '원동북일영(苑洞北一營)'에서 내대신 이재완이 군수품을 제작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는데, 종로문화원에 따르면 '원동'은 삼청동과 바로 붙어 있는 창덕궁 서편의 원서동 일대를 의미하는 옛 행정구역명이다. 원(苑)이 창덕궁 후원을 뜻한다.# 같은 소식을 전한 제국신문 기사에서는 북일영의 위치를 '원골'이라 하는데 이는 원동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북일영 군물제조소는 사직동 일대에 새로 설치된 군수공장이 아닌, 그저 삼청동 기기창의 다른 이름이라고 봐야 한다. 한편 군물(軍物)은 군수물자를 의미하는 옛말로 군기(軍器)와 대응되며, 제조소(製造所)는 공장(工場)이란 표현이 보편화되기 전에 사용되던 단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단순히 군수공장이라는 뜻이다.

4. 책임자

1880년대부터 1895년까지의 기기국은 총책임자를 총판(總辦)이라 불렀다. 양무운동 중이던 청나라의 정부부처들에서 가져온 관직명으로, 영선사 단장이었던 김윤식박정양을 비롯한 다른 3명과 함께 초대 총판이 되었다. 그러다 1895년 기기국이 폐국된 후 군부 예하에 설치된 포공국의 책임자는 국장(局長)이라 칭했다. 최초의 포공국장은 유혁로였다.

용산으로 이전한 후 1904년 7월 반포된 최초의 군기창 관제에서는 총책임자를 제리(提理)라 불렀다. 직역하면 '이끌어 다스린다'는 뜻이다. 현재도 표준국어대사전에 오직 군기창의 책임자를 뜻하는 용어로 등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일본식 한자어다. 일본 포병공창(砲兵工廠)들의 책임자들을 뜻하는 단어를[2] 그대로 수입한 것. 그러나 2개월 뒤인 9월에는 관리(管理)로 개칭되었고, 1905년 3월의 최종 관제에서 창장(廠長)으로 확정되었다.

창장은 포병 병과의 부령 또는 참령이 역임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1904년 9월 관제까지만 하더라도 참장이나 정령 또는 부령이 제리와 관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최종 관제에서 군기창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총책임자의 계급도 같이 격하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창장은 포병 부령 김정우(金鼎禹)다. 그는 1904년에 참령으로 특별임관하여 창장으로 부임했다.

5. 역사

본 문서에서는 1904년 용산에 군기창이 개소하기 이전 기기국 및 포공국(砲工局) 산하 조직이던 삼청동 기기창의 역사 역시 함께 서술한다. 하나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합하기 때문이다.

5.1. 기기국 기기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기기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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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번사창.jpg
북일영 군물제조소(삼청동 기기창)의 번사창 건물

5.1.1. 설치 과정

전교하기를, "전환국(典圜局)의 조폐창(造幣廠)과 기기국(機器局)의 기기창(機器廠)이 지금 완공되었다. 한 해 동안 수고한 데 대해서 성의를 표시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되니 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한규설(韓圭卨)과 전환국 총판(典圜局總辦) 정낙용(鄭洛鎔)에게 다같이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1887년 10월 29일자 5번째 기사
南奎熙, 以機器局言啓曰, 本局所管春川製藥所新建之役, 極爲浩大, 前府使安昌壽, 幫辦差下, 令該曹口傳下批, 何如? 傳曰, 允。

남규희(南奎熙)가 기기국(機器局)의 이름으로 아뢰기를, “본국(本局) 소관의 춘천제약소(春川製藥所) 신축 공사가 매우 방대하므로, 전(前) 부사(府使) 안창수(安昌壽)를 방판(幇辦, 공사 보조 감독관)으로 차하(差下, 임명)하도록 해당 조(該曹)에 구두로 하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傳曰)에 이르기를, “허락한다.”
승정원일기 고종 26년(1889년) 9월 18일 15/24 기사

1882년 기기국이 설치되었고, 5년 후인 1887년에는 그 예하에 군수공장인 기기창이 설치되어 탄약을 생산하고 총기와 화포를 시험하였다. 기기창은 본래 청나라가 지어 주고 1881년 톈진기기국(天津機器局)에[3] 유학하여 서양기술을 배운 영선사(領選使) 군계학조단(軍械學造團)[4] 출신 조선 기술자들을 통해 운영될 예정이었다. 또한 청은 3만 조선 중앙군을 전부 무장시킬 수준의 군수공장을 건설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1880년 전후로 청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조선 방침을 바꾸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본래 청은 조선을 강화시켜 일본러시아에 대한 방파제로 삼고자 했으나, 내부 토의 끝에 강화된 조선이 독자적인 행보를 걷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조선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와중에 임오군란갑신정변이 벌어지자 청은 조선의 독자적 개화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하며 기기창 건설도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공장 계획의 규모 역시 탄약생산과[5] 소화기 수리만 가능한 소규모로 변경되었다. 그리하여 기기창이 완공된 것은 영선사 파견 6년 후인 1887년이었다.

장소는 군기시(軍器寺) 화약고 별창 자리였다. 군기시는 여말선초 시기부터 운영된 조선의 관영 군수공장으로, 1392년 개경에서 창설되어 한양 천도와 함께 서울로 이전해 들어왔다. 본청은 현 서울특별시청 자리에 있었다.[6] 별창은 삼청동에 있었는데 조선은 군기시를 해산해 기기국에 기능을 이관한 후 그 별창 부지에 해외에서 구매해 온 근대식 공장 설비들을 이식했다. 2년 후인 1889년에는 가평청평천(현 청평면 청평리) 일대에 제약소(製藥所. 화약공장)까지 세워졌다. 1886년 4월 11일자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따르면 이는 조선정부와 계약한 미국인 모스(Morse)의 아메리칸 트레이딩 상회가[7] 주도하여 일본인 오자와 우메지로(小澤梅次郞) 등과 함께 지었다. 한국 근대공업사에 따르면 가평 제약소는 일본의 이타바시화약제조소(板橋火藥製造所)를[8][9] 모델로 했다. 이로써 조선은 비로소 근대군수공업의 첫발을 떼게 된다.

그러나 조선의 인식 부족으로 인해 기기국의 운영에는 한계가 명확하였다. 당시 조선이 기기창 건설에 투입한 자금은 대략 1만 냥에 불과했는데 이는 동시기 청이 양무운동에, 일본이 식산흥업에 투입한 수백만 냥 자금에 비해 너무 작았다. 기기창의 주 동력원으로 쓰기 위해 상하이까지 가서 구매한 크루프제 증기기관은 출력이 고작 12마력에 불과했다. 청의 차관도입 방해로 인한 자금 부족도 문제였는데, 조선은 1887년 미국으로부터 200만 달러를, 1889년 프랑스에서 200만 달러와 타운센드 및 메디슨양행을 통해 200만냥을 도입해 식산흥업 정책에 투입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청나라가 개입해 파토내면서 운영 자금이 부족해진 기기창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출처:]

5.1.2. 운영 노력

파일:공수포법 크루프포.jpg파일:극로백포탄부도 도면.jpg
《공수포법(攻守礮法)》 에 실린 극로백포(克虜伯砲)[11] 삽화. 크루프가 설계한 러시아의 1867년식 28cm 포(28 cm L/20 M67)와[12] 형태가 유사하다. 《극로백포탄부도(克虜伯礮彈咐圖)》 에 실린 크루프 포탄 도면. 우측에 있는 것은 유산탄이다.
파일:서예지신 선반.jpg
《서예지신(西藝知新)》 8페이지에 실린 선반 도면.
(전략)...석탄을 깨끗이 태우고 나면 탄소는 전부 흩어지고 남은 것은 둥글해서 마치 전일의 검은 덩어리와 같은데[13] 진흙은[14] 그대로 함유하고 있으므로 다시 용광로를 설치하여 세번을 거듭 녹여야 한다. 첫 용광로의 방식은 너비가 3장(丈),[15] 높이가 5丈인데 속은 마치 호로병과 같다. 第1圖를 보면, 불회목(不灰木)으로[16] 이면(裏面)을 만들고 회석을[17] 철사(鐵砂)와[18] 배합하여 흙과 함께 넣는데 단 용광로의 형태가 지나치게 높으므로 반드시 산 곁에 건조하여야 쏟아넣기 편리하다. 석탄과 배합된 것은 그리하여 산소를 제거하고 회석과 배합된 것은 진흙을 제거하는데 회석과 진흙은 용광로 안에서 혼합되어 하나의 물질이 되는데 마치 거친 유리같이 되어 가볍기 때문에[19] 부상(浮上)하면 즉시 윗부분에 구멍 하나를 뚫어서 그리로 뽑아내고 철은 무겁기 때문에 밑으로 가라앉으면 역시 아랫부분에 구멍 하나를 뚫어 모형의 안에 받아 넣는다. 이것이 생철(生鐵)이다[20]...(후략)
"태서의 제철법(泰西의 製鐵法)", 한성순보[漢城旬報], 1884.05.15

그래도 조선은 어떻게든 기기국을 제대로 운영해보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한성순보에서는 1884년경부터 '태서의 제철법(泰西의 製鐵法)'과 같이 서양식 제철기술을 소개하는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하였다. <한역 근대 과학기술서와 대한제국의 과학>을 저술한 김연희는 한성순보가 기기창의 제철소라 할 수 있는 번사창(飜沙廠)의[21] 개국에 맞춰 운영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이 기사들을 썼으리라 추정한다.

또 영선사는 서양 기술서적들, 특히 강남기계제조총국 번역관(江南機器製造總局 飜譯館)에서[22] 이봉포(李鳳苞) 등의 중국인들과 존 프라이어(John Fryer) 등의 서양인 선교사들이 함께 한문으로 번역한 책들 역시 수집했다. 대표적으로 《공수포법(攻守礮法)》은 크루프 포의 제작 및 운용 노하우를 집대성한 책이었다.[23] 한편으로는《제화약법(制火藥法)》 및 《폭약기요(爆藥紀要)》 등 서양식 화약포탄 제조법이나 크루프 탄약 제조법인 《병약조법(餠藥造法)》도 들어왔다. 화약제조에 요긴한 근대 화학 서적들이나 증기기관의 원리와 작동방식을 설명한 《기기필이(汽機必以)》, 선반 같은 서양 공작기기나 화학약품 사용법을 담은 《서예지신(西藝知新)》등의 서적들도 주된 수집대상이었다.

이러한 기술 서적들은 영선사 군계학조단이 청나라에 유학하던 도중에 단장 김윤식이 기기창에 들일 각종 기계들과 함께 구매해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880년대 말부터는 주조선독일총영사 헤르만 부들러(Hermann Budler)와 세창양행 사장 카를 볼터(Carl Wolter) 등 조선정부와 인연이 깊은 독일인들이 상하이에서 중국어로 번역된 서양 과학기술 서적들을 구매해다가 박문국 인쇄소에 기증하기도 했다.
17일 맑음.

황귀성(黃貴成)이 염강수(鹽䃨水)[24]·초강수(硝䃨水)[25] 기구를 가지고 나와 안전하게 놓고 방법에 따라 시험하였다. 조한근(趙漢根) 군은 스스로 수뢰포를[26] 제조하여 축전지를 함께 가지고 관(館) 동쪽 연못 안에 포를 놓고 전련(電練)으로 시험하자 떠들썩하게 폭발하며 물이 용솟음쳤는데, 다만 화약이 작아 힘이 크지는 않았다. 윤석정(尹石汀)이 남국총보초(南局總報草)를 보내어 보았고, 남국 총판 왕덕균(王德均) 이 조선 학도의 근태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중략)

... 그 뒤에 동국(東局)에 간 자 1명·병사한 자 1명이고, 지금 이조 참의 김〇〇 등이 장차 물과 토양에 적응하지 못하여 사고가 있거나 미련하여 자질이 부족한 이남수(李南秀)·피삼성(皮三成)·김성손(金聖孫) 등 4명은 이번 달 6일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를 청했던 일은 이미 알린 대로 진해관도(津海關道)가 기록해 놓았고, 현재 직국(職局)에 10명이 남아서 창을 나누어 학습하고 있습니다. 상운과 안준(安浚) 2명은 오로지 전기를 학습하는데, 그 학도들은 열심히 하여 수시로 묻고 기록하여 전기의 이치를 또한 점차 익혀갈 수 있을 것이고, 수뢰를 전기를 끌어 스스로 만들고 시험하여 자못 착오가 없으며, 안욱상(安昱相)은 가장 총명하여 청국 언어가 이미 점차 능통해지고 있으며, 조태원(趙台源)과 두 명은 함께 그림을[27] 배워 이 재주를 최고로 하고자 하는데 본래 쉬운 일이 아니며 오직 기구를 운용하는 일은 이미 경로에 들어섰고, 김성원(金聖元)은 본래 목공으로, 목양(木樣) 제작을 학습하게 하였는데 쉽게 하고 있으며, 박규성(朴奎成)과 한득준(韓得俊), 김원영(金元榮) 등 3명은 기기전창과 기기후창으로 나누어 들어가서 학습함에 이 기술은 매우 번거롭고 세밀한 것이어서 갑작스럽게 잘하게 되지는 못할 것 같으며, 김태현(金泰賢)과 최동순(崔同順) 등 2명은 번사(翻沙)의 용주(鎔鑄)를[28] 학습하는데 다른 기술과 비교하여 자못 학습하기 쉬우며, 입국한지 겨우 2개월 만에 공도(工徒)들이 모두 규율에 따라 학습하고 있고 각 창의 장인들 또한 모두 성심을 다하여 가르치고 있어서 감히 그 구습을 따라 나태할 수가 없고,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조선 관원 윤태준(尹泰駿)이 있어서 매우 엄하게 이끄니 아직 말썽이 난 적은 없습니다. 왕덕균이 윤태준 등과 필담하여 말하기를 서둘러 학습하여 귀국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중요한 것을 택하여 나누어 학습시켜 속히 배워 빨리 귀국하게 해서 서로 전수하여 실제로 이용하게 되어야 할 것이고, 조선국에서 파견해 온 학도와 공장을 각 창에 나누어 들여보내어 마음을 다해 지도하고, 동국에 파견에 들여보낸 공장 학도에 대해서는 허도(許道) 등이 따로 상세히 보고할 것이며, 이러한 내용을 갖추어 상세히 보고하니 대감께서는 살펴서 시행하여 주십시오.

흠차대신태자태부문화대학사직예총독부당일등숙의백(欽差大臣太子太傅文華大學士直隷總督部堂一等肅毅伯) 이(李)께,

광서(光緖) 8년(1882) 3월 15일 이품함후선도(二品銜侯選道) 왕덕균이 올립니다.
톈진기기국에 파견된 영선사 군계학조단의 학습 상황을 기록한 김윤식의《음청사(陰晴史)》 1882년 3월 17일자 기사

영선사 군계학조단원들 역시 청나라에서 어려운 서양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많은 수의 단원들이 교육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거나 심지어 현지에서 병에 걸려 죽기도 했으나, 김윤식의주 등지에서 특별히 뽑은 장인 출신들 중에서는 무기제작기술을 배운 송경화(宋敬和)와 같이 좋은 평가를 받는 이들이 배출되었다. 김태현(金泰賢)과 최동순(崔同順)은 주조 기술을, 조한근(趙漢根)은 전기격발식 기뢰를 제작하는 법을 배웠다. 이들은 한국 최초의 근대 기술자들로 평가받는다.

1889년에는 가평 제약소를 운영할 화약기술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젊고 재능있는 인재들을 뽑아 일본 이타바시화약제조소에 유학보냈다. 각사등록 1889년 음력 02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들은 하술할 안대형(安大亨)을 비롯한 김유식(金有植), 하정룡(河正龍), 김치관(金致寬) 총 4인이었다. 사카지마 유호(鮫島祐寶)라는 일본인 기술자를 제약소 고문으로 초빙하기도 했으며, 일본에 주문한 화약제조기계 57개가 1891년 음력 1월 23일 즈음 인천항에 도착하여 내륙으로 운반하고 있다는 기록도 각사등록에 남아 있다. 삼청동 기기창 본창에는 톈진기기국의 중국인 기술자 4인이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병사 조희연(趙羲淵)으로부터 온 전보에 이르기를, “전 번에 기기국(機器局)에서 총약을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대포의 화약은 어느 곳에 있는 것을 가지고 갔는가? 총약은 탄내(彈內)에서 지고 가라고 하교하였으니 곧 돌려 알리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기기국에서 전보하기를, “총약은 작년에 청주(淸州)에서 온 것이 10통이고 장위영에 있는 것과 청평천(淸平川)에서 만든 총약은 본국으로부터 가지고 왔는데 합 20통이니 탄내에서 지고 왔습니다. 오늘 행군은 금구에 이르러 길을 배로 빨리 걸어 곧바로 태인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번에 강화의 군함편에 보내주는 총약은 어떤 것입니까? 상품(上品)으로 보내주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양호전기(兩湖電記)》 1894년 음력 4월 18일자 기록.

실제로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토벌과정을 기록한 《양호전기(兩湖電記)》의 1894년 음력 4월 18일자 기사 등을 보면 서울의 기기국 및 청평천청주의 제약소들에서 생산한 총약(總藥)을 토벌대에 보급하는 정황이 포착된다. 따라서 제한적이기는 하더라도 실제로 기기창과 그 부속시설들에서 탄약의 생산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2. 군부 포공국 기기창

5.2.1. 김홍집 내각의 개편 계획

1895년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군부관제가 발표되며 기존의 기기국은 혁파되었다. 그리고 기기창의 소속은 군부 포공국(砲工局) 산하로 변경된다. 조선 포공국은 예하에 포병공병 2개 과를 두고[29] 무기 제조와 요새 건설에 관한 사무를 총괄하였다.

당시에 기기창은 청일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어 있었는데, 조선은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896년부터 시설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존의 톈진기기국 청나라 기사들이 아닌 타국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기계창을 일신하고자 하는 계획이 추진된다. 1896년 1월 3일 친일내각은 일본에 군사교관을 요청하면서 기술자로 총공장(銃工長)과 제철공장(蹄鐵工長)[30] 각 1인씩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5.2.2. 러시아 고문단의 개편 계획

파일: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1897년.jpg
친위대 장병들과 러시아군 교관들. 1897년 촬영.
국왕의 요청이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함장 겸 주한 러시아 공사 대리에게 전달되자, 함정의 기술 장교들이 조선에서 유일한 병기창을 시찰했다. 그곳은 일본군에 의해 파괴된 상태였지만, 점검 결과 복구가 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몇 문의 크루프 포와 개틀링 기관총을 수리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6월 30일자 전문에서 베베르 씨는 드미트리 돈스코이 소속의 기계 기술관 렘네프가 조선 정부의 제안을 받아 6개월 동안 병기창 운영을 맡을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나는 7월 5일, 해군성 임시대리 장관에게 전보로 그 내용을 보고하였다.
{{{#!folding [ 러시아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По просьбе Короля, переданной командиру крейсера “Дмитрий Донской” Исполняющего должность Поверенного в Делах, механиками осмотрен единственный в Корее военный арсенал, разоренный японцами оказалось возможным привести его в порядок и приступить к исправлению нескольких Круповских орудий и пулеметов Гатлинга.

Депешею от 30-го Июня Г-н Вебер обратился с ходатайством о разрешении машинному кондуктору Ремневу, команды крейсера “Дмитрий Донской” принять предложение Корейского правительства для заведования означенным арсеналом на шесть месяцев. О таковом ходатайстве я имел честь донести от 5-го Июля по телеграфу Его Превосходительству, Временному Управляющему Морским Министерством.}}}

1896년 7월 21일자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 34.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563/575∼578
...나는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 소속 기술관 렘네프가 정비한 병기창을 직접 시찰했다. 그는 이곳의 설비를 정돈하고, 소총용 탄피를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 놓았다. 다만 이 병기창은 이름만큼의 규모를 갖춘 곳은 아니며, 실제로는 소총을 수리하고 소형 야포 부품을 제작하는 수준의 작업장에 지나지 않는다.
{{{#!folding [ 러시아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Мною также осмотрен арсенал, который приведен в порядок кондуктором Ремневым с крейсера «Дмитрий Донской», и им же установленно производство ружейных гильз. Разумеется этот арсенал лишь более по названию и представляет мастерскую для исправления ружей и небольших поделок для мелких полевых пушек.}}}

일자 불명의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 39.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1, лл.198∼201об.
그러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관료들이 숙청당하면서 일본에 접근하려던 계획은 폐기된 대신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게 된다. 파천 직후 고종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로 민영환을 파견한다. 6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민영환은 러시아 정부와 황제에게 고문단 파견을 요청하였다.[31] 곧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이 공식적으로 파견되어 조선군 친위대의 훈련을 맡았다.

한편 러시아 태평양함대 군함들과 장병들이 속속 조선에 들어오는 가운데 동년 5월 11일에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인천항에 입항한다. 그리고 이 함선의 기술사관이었던[32] 렘네프(С.П. Ремнев)라는 러시아인 기술자가 1896년 6월 30일부로 조선에 채용되어 기기창의 무기 생산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그의 월급은 260달러였다.

참고로 당시 기계창에 렘네프 외에도 50명의 독일인 기술자가 근무하였다는 이야기가 서인한의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 수록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후술할 용산으로의 이전과 프랑스인 기사 50명 도입 계획을 황성신문에서 보도한 것을 서인한이 잘못 기재한 것이다.

어쨌든 당시 러시아군이 기기창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렘네프가 파견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기창의 주요설비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파괴된 상태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러시아인들은 기기창에서 소총크루프 포개틀링 기관총의 수리 및 그 부품 생산 정도는 가능하다고 기록했다. 또한 러시아군이 공여한 베르단용 탄약은 렘네프가 배치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9월부터 생산 중이었던 것이 확인된다.
6. 교관들에게는 현재의 병기창 사업 확대, 군대에 포병용 물자를 공급하기 위하여 군대의 필요에 부합하는 포 제작소 설립, 군대에 군복과 다양한 군 공급물자 및 병사들의 장비를 제공하기 위한 기술제작소 설립, 유럽의 국가들에 현존하는 규칙과 조선의 상황에 맞추어 군대의 식량공급에 대한 규정 작성, 군 복무규정 제정, 병사들에게 의료적 도움을 제공하고 준(準)의사 학생들을 양성하기 위해 유럽방식에 기초한 군병원을 설립하는 것이 위임된다.
교관단에 관한 협약의 주요항목(안)(АВПРИ,ф.150,оп.493,д.7,лл.54-57об.).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물품공장 설립은 한국정부의 재정을 절약하게 할 것입니다. 현재 한국정부는 군복, 현물 급여, 장비 등의 명목으로 일본에 상당히 많은 비용을 초과 지불하고 있습니다. 왕실 경호대에서는 이미 현물 형태로 급여를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대 단위 경리 원칙 위에서 급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마무리 될 때에야 필요한 경비를 정확히 산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직 대대 예산의 규모만을 계획할 수 있었습니다.
총참모부 소속 푸탸타 대령이 1897년 6월 5일(17일) №. 52로 보낸 비밀 보고서 사본(АВПРИ,ф.150,оп.493,д.56,лл.25-27об.).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하지만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이 보기에 이 정도는 매우 불충분했다. 9등관 폴랴놉스키는 기존의 기기창 설비를 확충하는 것 외에도 본격적인 대포공장 및 기타 군용장비들을 생산할 공장 역시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문단장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푸챠타 대령은 한국이 자체적인 군수공장을 두면 해외, 특히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도입하며 생기는 지나친 지출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계획상으로는 병기창 관리 전문기술자 1인, 그리고 병기제작 기술자 2인까지 총 3명의 기술자가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반러적이면서 친일, 친미적 스탠스를 취하던 독립협회의 정치적 공격 및 러시아 내부의 대외정책 변화로 러시아 고문단이 예정보다 훨씬 일찍 귀국하면서[33]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다행이도 기술자 렘네프는 한국에 남았다.

5.2.3. 광무개혁기의 확장

파일:번사창발굴현장2015.jpg
2015년 번사창 일대 발굴현장. 당시 기기국과 연관된 건물 터 1개와 배수로 1개가 발견되었으며, 그 외에는 조선 후기 건물 터 4개와 일제강점기 건물터 2개, 근현대 건물터 1개와 불명의 건물터 1개가 발견되었다.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9. 서울의 발굴현장》 445p
○ 군부에서 총 만드는 기계를 사 올 차로 정위 조신화씨와 공장 김영식과 김석조를 일본으로 보내었다더라
"군부에셔 춍 만드는 긔계를", 독립신문(서재필)[獨立新聞(서재필)], 1898.05.24
열한째, 기국(機局)을 실시하는 문제입니다. 군부에다 포공국(砲工局)을 설치한 것은 원래 포공 기계를 제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몇 해째 하나의 군기도 만들지 못하고 경비만 허비하고 있으며 지금은 폐기되어 일 없는 국(局)이나 다름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나라에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고 군사들에게는 군기가 없어서는 안 되니, 비유하면 인가에서 밥을 지어 먹자면 반드시 가마와 솥, 그릇과 수저를 모두 갖추어야 하고 또 미리 장만해서 자기 집에 두고 써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 기계가 이미 불편해져서 꼭 다른 나라의 기계를 써야 한다면 처음에 다른 나라에서 사다 쓰는 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몇 년 후에는 응당 만드는 법을 배워서 우리가 직접 본떠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국을 설치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들어낸 군기는 어떤 것이며 군기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배워서 성공하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막중한 군대 기물을 걸핏하면 다른 나라에서 사들이는 데만 매달린다면 한편으로는 군사 기밀이 누설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에 수모를 당하게 되며, 혹시라도 불화가 조성되어 관계가 끊어지는 날에는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총(銃)은 애초에 잘 만드는 사람이 없다 해도 탄환(彈丸)으로 말하면 그전에 친군영(親軍營)의 회룡총(回龍銃)과[34] 오늘날 각 부대의 모슬총(毛瑟銃)의[35] 탄환은 우리나라 장공인(匠工人)들이 모두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지금은 어찌하여 만들지 않고 무역에만 매달리는 것입니까? 해당 부서에 엄히 신칙하여 우선 모든 탄환을 모두 자체로 만들어 쓰게 하며 쇠를 불려서 총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은 차례로 만드는 법을 배워 자체로 만들어 쓰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육군참장 백성기(白性基)가 올린 상소문 중 11번째 조항. 고종실록 1900년 4월 17일자 기사 중에서 발췌.

대한제국으로 칭제하고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이 철수한 후에도 기기창 생산 능력 강화 시도는 이어졌다. 1898년 5월 경에는 조신화 정위를 비롯한 3인이 일본으로 가서 총기 생산장비를 구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확장 계획이 자꾸 부침을 겪었던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당시 포공국과 기기창의 운영실태는 매우 처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0년 4월 육군참장 백성기가 작심하고 올린 상소문에서 그 실태가 드러나는데, 외국인 기사(렘노프)를 고빙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무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특히 백성기는 마우저 소총 탄약 정도는 기술자들이 충분히 만들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체 수입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군수공업의 육성을 주장했다.

심지어 각사등록 근대편의 1902년 기사에 따르면[36] 기계창은 총인약(葱仁藥)[37] 14궤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일찍이 러시아인 고문단의 보고서에서 렘네프의 주도로 시설을 정비하며 소총을 수리하고 탄환을 무리없이 생산하는 것으로 묘사되던 기기창의 정상적인 운영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셈이다. 청일전쟁과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비롯한 여파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되나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전략) 6. 포공국은 포병과 정령 또는 부령이 국장이 되고, 포병과(砲兵課)와 공병과(工兵課) 두 과를 두어 사무를 분장한다.

7. 포병과는 포병 병과의 영관이 과장이 되어 1) 병기·탄약 관련 사항, 2) 병기 재료의 제조 및 저장 관련 사항을 맡는다.

8. 공병과는 공병 병과의 영관이 과장이 되어, 1) 요새·보루·포대 관련 사항, 2) 보병 장비·재료 관련 사항, 3) 통신·교통 관련 사항을 맡는다.
관보 제1683호, 광무 4년(1900년) 9월 19일

어쨌든 당시 백성기가 올린 위 상소문은 많은 부분이 받아들여져 헌병육군법원 등이 창설되는 등 여러 개선을 이끌어냈다. 약 5개월 후인 1900년 9월 경에는 군부관제가 개정되어 포공국 포병과의 업무가 보다 명확하게 규정되었다.

기기창 생산능력의 강화 시도도 이어졌다. 백성기가 상소문을 올릴 즈음인 1900년 3월에는 군부에서 이덕문을 일본에 파견해 기기창에 사용할 설비를 구매하려 했으며 두 달 뒤 외부대신 박제순이 대포 제조 기계 구매를 위해 일본 공사와 접촉하기도 했다. 한편 양상현의 논문 <대한제국의 군제 개편과 군사 예산 운영>에 따르면 1901년부터는 프랑스군 기술자 페이외르(Payeur)와 루이(Louis)가 추가로 고용되었다.[38] 프랑스인들이 고용되자 러시아가 계약위반이라 항의하였으나 문제는 오래지 않아 해결되었다.

당시 북일영, 즉 기기창을 총괄한 인물은 완순군 이재완이었다. 일본 측에서 기록한 이재완의 이력에 북일영에 군기창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까지 감안하면 그가 주도하여 공장 영역을 상당히 넓힌 듯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재완의 자택 역시 기기창과 매우 인접한 가회동 91번지에 있었다.[39]
軍物製造時에 句管던 內大臣 李載完氏가 苑洞北一營으로 各大官을 請야 所造軍器를 更히 試驗얏다더라

군용품을 제조할 때 그 일을 총괄하던 내대신(內大臣) 이재완(李載完) 씨가 원동(苑洞) 북일영(北一營)으로 여러 대신들을 초청하여, 그곳에서 제작한 군기를 다시 시험하였다고 한다.
"軍物更試", 황성신문[皇城新聞], 1901.05.28

기록에 따르면 원수부 총장 이하 각료들이 무기 시험을 참관하기도 했다. 당시 시연된 무기 중에서는 대포 외에도 화전(火箭)과 용운갑(龍雲甲)이라는 장비도 있는데, 이를 보도한 황성신문의 묘사에 따르면 각각 고폭약 탑재 로켓무기와 방탄복으로 사료된다. 이듬해인 1902년에는 북일영에서 대포 2문을 생산하여 포대영에서 시험발사하다 사고가 난 기록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일본인 상인들과의 거래 기록도 황성신문에 남아 있다. 1901년 12월 28일 미야자키 요타로(宮崎佳太郞)라는 상인은 북일영에 18,000원 상당의 황동주석 덩이들을 (아마도 무기 생산용 원료로) 판매했으며,[40] 1902년 6월 9일에는 진고개 일대의 한 일본인 상인이 증기 보일러와 기계류를 판매했다. 군물제조소는 1903년 10월에는 42,917원의 값을 치르고 탄피 기계를 추가 구매한다.

그러나 그래서 이 시기 기계창에서 생산된 장비들의 종류 및 수량과 품질이 어떠한지, 또는 실제로 군에 제식채용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로도 한국군은 계속해서 무기들을 해외에서 수입했다. 1902년 영국으로부터 빅커스 야포 12문과 맥심 기관총 6문을, 1900년에는 프랑스로부터 그라 소총 1만정을, 1901년 3월에는 일본으로부터 아리사카 30년식 소총 1만 정과 탄약 100만발을 구매했다. 최대규모의 수입은 1903년 프랑스와의 무기계약으로, 그라 소총 6만 2천 자루를 2차례에 나누어 구입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 기계창의 생산 능력이 확대되고는 있었다 한들 유의미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던 러일전쟁 직전 1904년 1월 13일, 렘네프와 페이외르를 비롯한 러프 양국 기술자들은 공장에서 해임된다. 사유는 군물을 직접 제조하는 것보다 외국에서 도입하는 것이 더 싸다는 것이었다. 이미 용산 군기창의 설치에 착수했음에도 왜 이러한 사유를 대며 이들을 해임했는지는 불명이다.

그로부터 5일 후에는 당시 한국 세관에서 근무하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이[41] 기계 수리를 명목으로 북일영을 비롯한 여러 곳의 대포 기계들을 멋대로 수거해가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908년 6월 기사에 따르면 이 기계들은 정확히는 대포 포좌(砲座)였다. 이것들은 서소문 선혜청에[42] 보관되어 있다가 군대가 해산된 후인 1908년에야 회수된다.

5.3. 군기창

파일:용산시가도.jpg
<용산시가도(1927)>. 가운데 흐르는 만초천[43] 기준으로 서쪽은 구용산, 동쪽은 신용산으로 나뉜다. 경인선 동쪽, 남산자락 아래 신용산 일대의 거대한 부지는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와 제20사단이 주둔하던 용산기지이다. 현 용산공원.

하단의 철도가 어지럽게 얽힌 곳은 용산역과 철도공작창(현 용산서울코어 부지)이다. 그리고 용산역과 용산기지 사이에 길게 뻗어 있는 현 한강로동, 즉 신용산 일대의 시가지에는 재조선 일본인들의 생활공간이 몰려 있었다.

5.3.1. 이전 계획 수립과 건설

⊙移廠經費 三淸洞所在 器械廠을 龍山으로 移建 經費 六千元 請求은 前報에 記얏거니와更聞 則 該移建費가 六十萬元이오 且該技師 法人이 軍物製造 次로 工匠 五十名을 法國에 雇用 터인每名 每朔에 俸給 二百元式으로 豫筭얏다더라

⊙공장 이전 경비
삼청동에 있던 기계창을 용산으로 이전 건설하는 데 드는 경비가 6천 원이라는 요청이 있었다고는 앞서 보도한 바 있으나, 다시 들은 바에 따르면 그 이전 건설 비용은 60만 원이고, 또한 해당 기술자 법인은 군수품 제조를 위해 장인 50명을 프랑스에서 고용할 예정이며, 각 인원에게는 매달 200원씩 급여를 지급하는 것으로 예산을 세웠다고 하더라
황성신문 1901년 8월 12일
(44) 프랑스에서 職工50명을 고용한다는 風說에 관한 報告

機密第87號
韓國 정부가 새로 兵器製造所를 건설하고 프랑스에서 직공 50명을 고용할 계획이 있다는 내용의 풍설이 전해져 여기서 발행되는 ≪皇城新聞≫에도 이 일이 게재되었습니다. 만약 과연 이와 같은 계획이 실행될 수 있을지 本 공사는 목하 한국의 재정으로 보거나 또 그 실정에 있어서도 이번의 대계획은 그렇게까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으므로 확정되기 전에 이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主務大臣 李址鎔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대답에 의하면, “종래의 병기국 건물은 너무 협소하여 새로 건축할 필요가 있으므로 고용기사 프랑스인 파이어 (砲兵大尉)에게 건축 설계를 시켰더니 그가 設計案 2통을 작성했는데 (李容翊의 주문에 의하여 대설계안을 특별히 첨부하였다고 한다) 첫 번째 것은 비용 약 15만 圓이 필요하고 기계와 건물 모두 소규모로 軍器를 수선할 목적에 지나지 않으며, 두 번째 것은 비용 약 60만 圓이 필요하고 기계와 규모 모두 굉장히 큰 것으로 군기 제조에 충분할 것이다. 단 이에는 프랑스 職工 50명을 고용할 필요가 있다고 신청하였다. 아마 50명 고용 운운하는 풍설은 이에 기인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정부와 황제의 의견은 당장 대설계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필경 15만 圓의 소설계에 그치고 당분간은 군기를 수선하는 정도의 준비에 만족하는 것으로 확정된 상황이다.”라고 합니다.
혹시 이 기회에 잘못 전해질 것을 걱정하여 다짐하기 위하여 이 점 보고합니다. 敬具.

1901년 8월 27일
林 公使
外務大臣 曾禰荒助 殿
1901년 8월 27일자 주한일본공사관 문서.
문제는 이렇게 공장이 확장되는데도 삼청동 계곡 일대의 공장부지가 상당히 협소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1901년부터 대한제국은 공장 이전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당시 부쩍 가까워지고 있던 프랑스에 먼저 접근한다. 최초 설계안은 기기창 수석기사였던 프랑스군 포병 대위 페이외르가 작성했다. 계획안은 총 2가지였는데 하나는 무기 수리 정도만 가능한 15만원의 소형 계획안이었던 반면 다른 하나는 이용익의 건의로 준비된 60만원 어치, 프랑스인 기사 50명을 고용한다는 초대형 계획이었다. 이 중 대한제국 정부와 고종은 전자를 선택한다.

이는 예산의 압박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서인한의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 따르면 1901년 당시 대한제국 정부 예산은 907만 8682원이며 그 중 군사예산이 372만 4185원으로 대략 41% 정도를 차지했다. 조병창 건설비 60만원은 1901년 군 예산의 6분의 1 수준이다. 또한 1901년 당시에는 그 외에도 지출이 많았다. 진위대들이 대거 신설되고 친위대시위대도 포병과 공병 등 지원부대들을 창설했다. 전국 해안 지역에는 31개소의 해안포대가 건설되었다. 따라서 60만원 어치 조병창은 현실성이 낮았다.
파일:208183_209222_227.jpg
미쓰이 물산(三井物産)의[44] 인천지점 건물. 이들은 1900년 인천에 대기소를 차려 한국에 진출했다. 인천대기소는 대략 1902년쯤에 출장소로 승격했다. 이 건물은 한국 진출 당시 세워진 원래 건물은 아니며, 1930년대에 신축한 것이다. 인천광역시 중구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에 위치하며 현재는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으로 사용 중이다.

사진 출처: 인천투데이
軍部에셔 日本三井物産會社人員에게 鑄銃機械를 購入하야 三淸洞機械倉內工倉을 更히 建築하난 日人이 建築經費로 自擔先備하야 軍物을 製造한 後에 該所入金額은 我政府에 推還하기로 擬議하고 現今 軍部에셔 契約中인 三井會社人員이 逐日來到하더라

군부에서는 일본 미쓰이물산회사(三井物産會社) 인원에게서 총기 주조용 기계(鑄銃機械) 를 구입하여 삼청동 기계창 안에 새로운 공창을 건축하기로 하였다. 이에 일본 측이 건축 경비를 자비로 선부하여 부담하고, 그곳에서 군물을 제조한 뒤에는 그 판매 수입금을 우리 정부에 환급하기로 협의하였다. 현재 군부에서는 그와 같은 내용으로 계약을 진행 중이며, 미쓰이 회사 인원들이 연일 내도(來到) 하고 있다고 한다.
"又此契約",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09.01
본격적으로 군기창 건설이 시작된 것은 이로부터 2년 후인 1903년이다. 김명수의 논문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 연구>에 따르면 이때 프랑스가 아니라 일본과 용산에 군수공장을 짓는 협약을 맺었다. 김명수가 소유한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의 개인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이용익을 통해 한국에 제식물자를 채용하게끔 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일본이 그보다 먼저 군부대신 신기선에게 접근하여 소총 제조 공장 건설 계약과 30년식 소총 라이센스 생산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신기선의 군부대신 임기가 1902년 2월 18일에서 1903년 초[45] 사이였던 것을 감안하면 계약 체결은 1903년 새해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조선총독부에서 1934년에 펴낸 경성부사(京城府史) 2권에서는 군기창 설치비사를 조금 다르게 설명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설립 주체는 신기선이 아닌 이용익인데, 그는 미쓰이 물산 경성지점장 오다가키 스테지로(小田柿捨次郎), 그리고 철도차량을 납품하다 평식원(平式院)에서[46] 도량형 제작기사로 일하고 있던 기술자 이노우에와 합작하여 총기 공장을 지었다.
軍部砲◈局에셔 造銃機械를 日本三井物産會社와 契約고 三十五萬元에 購入은 已記하얏거니와 近聞 則 龍山倉에 機械所를 更設하얏난 該機械가 日間仁港에 到泊◈고 日人이 軍部에 來報하얏다더라

군부 포공국(砲◈局)에서[47] 총기 제조 기계(造銃機械)를, 일본 미쓰이물산회사(三井物産會社)와 계약하여 35만 원에 구입하였다는 것은 이미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 들은 바에 따르면, 용산창(龍山倉)에 기계소를 새로 설치하였으며, 그 기계가 며칠 전 인천항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이에 일본인이 군부에 와서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한다.
"軍械購入",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12.12

1903년 9월 1일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계약은 미쓰이 물산과 이루어졌고, 총기 주조 장비를 도입할 것이 계약에 명시되었다. 1903년 10월 21일 즈음에는 군부대신과 미쓰이 물산 직원이 함께 용산 공장부지를 시찰했다. 12월 12일경 기사에 따르면 계약금은 35만 원이었다. 소요경비만을 놓고 비교하면 페이외르가 제시한 초기안에 비해 규모가 두 배 가량 커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즈음 인천항에는 도쿄포병공창에서[48][49] 가져온 총기제조기계가 도착하고 용산 부지 내에 건설 작업장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건설 총책임자는 이노우에였다.

용산 군기창의 최종적 관제는 1905년 3월 6일 반포되었으며 공장은 같은 달 20일에 완공되었다. 다만 이는 공장 건설 완료 시점으로 보인다. 김명수의 논문에 따르면 생산 설비의 설치가 완료된 것은 그해 8월이었다.

5.3.2. 부지 선정과 용산의 특징

파일:용산시가도(1927) 구용산지역 구한말 공업시설 표기도.png
용산시가도에서 구용산 부분만을 확대하고 주요 시설들에 번호를 매긴 것. 군기창은 지도 중앙 용산마포의 경계 지역에 있는 고지대[50] 동쪽 기슭 8번 위치에 있다. 대도정(大島町)[51] 일대에 표시되어 있는 흙 토(土)자 건물이다.

바로 아래의 7번은 전환국(1900) 공장 부지이다. 6번은 1909년에 세워진 와사공장(瓦斯工場)[52]이며 그 아래 5번은 철도공작창(1905), 4번은 용산역(1900)이다. 9번은 청암동의 제2발전소(1903)이며, 10번은 관립 마포연와제조소(1907)이다.[53] 3번은 궁내부 평식원의 도량형기 공장(1902), 2번은 관립 유리공장(1902) 부지이다. 1번은 선린상업학교로, 1907년 관립 농상공학교의 시설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소장 『서울지도』(2006), 53쪽

부지로 용산이 낙점된 이유는 운영 능력을 일신하고 원료를 더 쉽게 확보하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다. 용산은 1893년 위안스카이가 한양호(漢陽號)를[54] 투입해 항로를 개척한 이래로 인천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증기선들의 집결지가 되어 전통적 수운중심지인 마포나루의 위상을 뛰어넘었다. 중국인일본인 상인들과 거류민들이 이 주변으로 몰려들었음은 당연지사다.[55] 세창양행 등의 서양 상회들도 인천과 용산을 잇는 항로를 운영했다. 1900년에는 경인선을 잇는 한강철교까지 개통했으니, 용산 일대에서는 원료와 기계 등의 필요한 물자들을 조달하기가 매우 편리했다.[56] 실제로 용산에는 이미 1900년 전환국정미소, 1902년 평식원과 유리창[57] 설립되어 대한제국의 근대적 공업단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중에서는 군기창 바로 옆에 있던 전환국의 운영상황을 특히 눈여겨볼 만 한데, 경성부사에 따르면 당시 전환국은 도가니로를 비롯한 금속 용해설비와 압연장비, 100마력 엔진을 장비하고 일본 오사카조폐국(大阪造幣局)으로부터 원료(銅地)를, 오사카제동회사(大阪製銅會社)에서[58] 구리 원료(銀地)를 들여와 백동화를 주조하고 있었다. 그 외 금화 제련도 시험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다시 말해 용산에 이미 구축되어 있는 이 금속 원료 수입 경로는 무기 생산라인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상술한 바와 같이 삼청동 기기창에서 일본인 상인들을 통해 황동을 수입한 것을 감안하면 군기창 역시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용산은 전력 공급도 원활했다. 당시 서울전차를 운영하고 있던 한성전기회사는 기존 동대문 발전소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3년부로 현 청암동 일대 한강변에 225킬로와트 발전기 2대를 들여와 제2발전소를 건설하여 본격적으로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5.3.3. 왜 일본과 협조했는가?

1901년 프랑스와의 군기창 건설 프로젝트가 왜 결국 진행되지 못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김기윤의《타임라인 M 2》에 따르면 당시 델카세 체제를 구성하던 프랑스에 한국이 접근하던 시도가 한계에 봉착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김용구의 《세계외교사》에 따르면 델카세 체제는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가 구상한 외교관계다. 기존의 비스마르크 체제를 극복하고자 했던 델카세는 1898년부터 1905년까지 7년간 외무장관을 역임하며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공고화하고 삼국동맹의 한 축인 이탈리아 왕국을 중립화하며 영프관계를 개선하였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아시아 정책 역시 유럽에서의 델카세 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되었다. 그러나 삼국 협상(Triple Entente)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델카세 체제는 어디까지나 유럽에서 프랑스의 주적인 독일 제국에 대한 포위망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프랑스에게는 대한제국의 안전보장에 적극 나설 이유가 딱히 없었다. 아시아에서 프랑스는 핵심적인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안보를 일본으로부터 보장받으면 족했다.[59]

김기윤에 따르면 이때 한국은 1900년에 구매하고자 했던 그라 소총 계약 역시 폐기하고 대신 30년식 소총을 도입했다. 이는 때마침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군수품 수출을 승인하는 방향으로 외교노선을 변경한 것과도 맞물린다. 당시 일본은 주한일본공사관 주재무관 노즈 시즈타케(野津鎭武) 소좌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국에 자국산 군수물자를 수출함으로써 보급로를 장악하고자 했다.

어찌되었건 확실한 것은 용산 군기창 건설계획은 1901년부터 준비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최초 협력대상국은 프랑스였으나 실제 건설 파트너는 후에 일본으로 변경되었다.

5.3.4. 운영사

파일:용산군기창 엽서.jpg
도암동 고지대에서 용산 군기창과 용문동 일대를 촬영한 사진 엽서. 사진 하단의 굴뚝이 달린 큰 건물이 군기창이다. 촬영시점은 일제강점기이나 정확한 연도는 불명이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5.3.4.1. 건설 당시의 계획
건설 도중인 1904년 당시 관제에 따르면 군기창은 총포, 화약, 탄환, 제혁, 직조 5개 공장을 두고 총포부터 탄약, 피복류 일체를 생산하는 종합군수공장으로 계획되었다. 총포제조소는 말 그대로 무기류, 탄환제조소와 화약제조소는 탄환화약, 제혁소는 기병용 안장과 같은 가죽제 장구류, 직조소는 군복을 생산할 예정이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화약제조소에서는 해군용 화약 역시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1903년부터 대한제국이 양무호광제호를 잇달아 들여오고 러시아와 함께 해군 건설에 나서던 것을 감안하면 이와 맞물려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용산 군기창 건설 이전 군수물자 생산이 삼청동 기계창에서의 무기와 탄약류 생산과 박동 육군피복제조소에서의 군복 제조로 이원화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군기창에 제혁소와 직조소가 설치된 것은 생산라인을 통일하려던 시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05년 9월 1일 시행된 군부령 제3호 제3조에 따르면 군기창장은 제3조 병기·탄약의 구매 및 그 제조·수리에 필요한 물건의 구매 및 수리에 관한 계약을 처리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문서에 따르면 총포 및 탄약 제조에 필요한 특수 성질과 특별 사용 목적이 있는 재료 및 석탄류, 화약 제조 및 화기에 필요한 특수 재료, 용해로용 내화벽돌 및 도가니(坩堝), 총포 및 화약 제조에 필요한 특수 공구에 대해서 예외적으로 수의계약이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대포 생산라인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단 무기생산라인의 명칭이 총포(銃砲)제조소이긴 하나 대포 생산 기록이 실제로 여러 차례 남아 있는 삼청동 기기창과 달리 용산 군기창에서 대포를 생산할 수 있었는지, 또는 실제로 생산했는지는 미상이다. 여러 기록에서 생산품목으로 총기만이 언급되는 것이나 설비를 도쿄포병공창에서 구매해 왔다는 것으로 보아서는[60] 대포 생산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5.3.4.2. 축소와 완공
軍部는 軍物製造機械 購入을 日本 三井物産會社와 契約하고 該 價金 180,000元을 度支部에 移照 支撥하라고 命令書를 발하다.

군부(軍部)는 군물제조기계 구입을 위해 일본 미쓰이물산회사(三井物産會社)와 계약하고, 그 대금 180,000원을 탁지부(度支部)에 이조(移照)하여 지급하도록 명령서를 발하였다.
"機械價發", 황성신문[皇城新聞], 1904.01.20

그러나 운용에는 상당한 부침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1905년 3월 3일 황성신문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1904년 관제에서 명시되었던 군기창 인원 55명이 17명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공장 자체도 기계획된 규모에 비해 크게 축소되어 제혁소와 직조소는 아예 관제에서 사라졌으며 총포와 탄약제조소는 하나로 합병되었다. 화약제조소의 해군 관련 조항도 삭제되었다. 창장의 계급 역시 참장과 정~부령급에서 부참령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본래 35만원이었던 공장 건설비 역시 막상 이노우에의 회고에서는 20만원, 황성신문 1904년 1월 기사에는 설비비가 18만원이라 언급되는데, 이는 페이외가 제시했던 소규모 설계안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는 러일전쟁으로 한국을 장악한 일본의 의중 하에 한국군이 감축되는 과정 속에 군기창 역시 군축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이로부터 한 달 후에는 친위대 2개 연대가 깡그리 폐지되고 시위대 역시 연대 1개와 기병대대 및 포병대대들이 날아갔으며, 진위대 6개 연대는 아예 연대 제도가 폐지되고 7개 대대로 급격히 감편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완공된 군기창은 총포와 탄약만을 생산하는 군수공장이 되었다.

당시 건설이 완료된 용산 군기창의 내부와 장비들을 찍은 사진은 이노우에 요시후미가 찍은 것들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이 사진들은 이노우에의 사진첩을 입수한 김명수가 본인의 논문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 연구>를 통해 공개했다. 다양한 기계들이 도입되어 공장 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본 사진들이 군기창 내 어느 제조공정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선반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총포탄약제조소의 것일 가능성이 그나마 높다.
5.3.4.3. 과연 제대로 운영되었는가?
1903년 군부에서는 총기제조소 설치 의지를 밝히자 이용익과 미쓰이물산회사 경성지점장 오다가키 스테지로, 그리고 이노우에 요시후미 등 3명이 서로 협의해 1903년 10월 17일 현재 서적인쇄회사 뒤편 언덕(대도정 38번지) 기슭에 제총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설비 단계에 그쳐 제조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참고로 이것은 나중에 군기창이라고 하여 이 건물을 일본육군에서 관리하며 화약고로 사용했다.
국역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 861p

군기창이 제대로 운영되어 소총을 실제로 생산하였는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일단 김명수의 논문에 수록된 이노우에의 회고에 따르면 공장은 매일 10정의 30년식 소총과 탄환 3000발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되기는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노우에는 일본에 장악당한 한국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군기창에서 소총 생산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관점을 피력했다. 다만 요시후미는 군기창 건설 직후 한국 곳곳에 일본군 병영을 짓는 업무로 넘어갔기에 군기창의 운영에는 관여한 바가 없다.

한편 1934년에 경성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지역 향토사 서적인 '경성부사' 제2권에서는 용산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군기창의 운영사를 간략히 소개하였으나, 막상 소총의 제조에는 실패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費額請撥
軍部에셔 度支部에 照會되 軍器廠에셔 製作需用에 關 器械를 備置已久나 該廠事業預筭이 不敷之致로 迄未舉製作之役와 該械를 排置而不爲運動기로 全軆生錆야 將至廢棄니 僅少 事業費添筭額을 靳許이다가 製作도 不舉고 器械도 廢止하면 兩失의 害가 添筭의 費보다 不啻倍蓰더러 設廠 本義가 有欠矣라 此不可及今變通이옵기 現此日本三十年式步兵銃三十挺을 製作기로 將爲試甞이온 所需費額은 姑先以本部本廳將校服裝費中으로 二千圓을 撥劃야 軍器廠事業費로 流用이 妥當기 仰佈오니 查照承認야 趕速支撥라얏더라

●비용 청구 요청
군부에서 탁지부에 공문을 보내 이르길, 군기창에서 제작에 필요한 기계들을 이미 오래전부터 갖춰두었으나, 해당 공장의 사업 예산이 부족하여 제작 작업은 아직 시작되지 못했으며, 기계들을 방치한 채 가동하지 않다 보니 전반적으로 녹슬고 폐기될 상황에 이르렀다.

소액의 사업비 추가 예산조차 허락받지 못해 제작도 못하고, 기계도 쓸모없이 폐기된다면 이는 예산 절감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이며, 군기창을 설립한 본래 취지에도 어긋난다.

이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현재 일본 30년식 보병총 30정(挺)을 시험 제작하려 하며, 그에 필요한 비용으로 우선 본부 본청의 장교 복장비 예산 중에서 2천원을 전용하여 군기창 사업비로 돌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니, 이에 공문을 보내니 검토 후 승인하고 신속히 지급하라고 하였다.
1906년 3월 18일자 황성신문 기사[61]
本廠에셔 私役을 特許오니 內外國 僉君子 本廠에 注文시면 多小不拘고 隨請酬應사오니 照亮來議시오 諸(器械, 銃, 彈)新造或修理 大韓京城西署 龍山軍器廠 告白

본 공장에서는 사적인 주문도 특별히 허용하오니, 국내외 모든 신사 여러분께서는 본 공장에 주문하시면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요청에 따라 성실히 응하여 제작 및 수리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협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종 기계류, 총기, 탄환 등의 신조 및 수리 – 대한 경성 서署 용산 군기창 공고
1906년 4월 24일 대한매일신보 광고기사[62]

한편으로는 시설이 가동되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들도 몇몇 존재한다. 1906년 기사에 따르면 완공 이후로도 공장이 예산 부족으로 한동안 가동되지 못했다가 1906년 3월이 되어서야 소총 시험 생산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도가 성공하였는지는 후속 기사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본 기사로부터 한 달 뒤인 4월부터 민간인 대상으로 소총과 탄약 판매 및 수리를 시작하며 한동안 대한매일신보에 여러 차례 광고를 내기도 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광고에는 총포와 탄약 외에도 각종 기계류의 수리 또는 신규 제조 서비스까지 제공함이 언급된다.[63]
本廠에셔 工匠三十人을 募集스니 工業에 嫺熟 人은 本月內로 龍山軍器廠으로 來
軍器廠 告白

본 공장(군기창)에서 기술자 30명을 모집하오니, 공업에 숙련된 사람은 이번 달 안으로 용산 군기창으로 오시오.
– 군기창 공고
1907년 7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채용공고[64]
1906년 12월 4일 황성신문 기사에 기록된 광무 11년 세입세출 총예산에 따르면 군기창 총 예산은 17,667원이었다. 이 중 '사업비'가 7,449원이 지출된 것으로 언급되어 일단 어떻게든 운영이 된 것은 확인된다. 또한 생산능력을 점차 확대하려 하였는지, 1907년 7월 18일부터는 숙련 기술자 30명을 추가 모집하는 공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다.

5.4. 폐쇄

5.4.1. 용산 군기창

파일:경성부명세신지도 구용산.jpg
1914년 출판된 <경성부명세신지도(京城府明細新地圖)>의 구용산 일대 모습. 가운데 대도정(大島町) 일대에 사각형 박스가 그려져 있고 병기창(兵器廠)이라고 표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소장『서울지도』(2006), 107쪽
문제는 구인공고를 낸 그 다음 날 바로 황제 고종이 강제퇴위당했다. 이에 한성부의 민군이 격분하면서 퇴위 반대 운동이 격심하게 벌어졌다. 시위혼성여단의 일부 부대들은 정변을 시도하고 시민들 역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친일 각료들의 집을 불사르면서[65] 한성 일대는 혼란에 휩싸였다.

위협을 느낀 일본은 곧바로 대한제국군 해산 준비 작업을 신속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군기창은 기술인력 충원은 고사하고 한국군 해산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군기창이 점령당한 시점은 7월 20일이었다. 군기창의 채용공고 역시 7월 20일을 마지막으로 신문에서 사라진다.
[交戰 후의 市中 상황]

三日 午後一時三○分[66]
丸山 警務顧問[67]
古谷 秘書官 殿[68]

해체된 병력이 京城에 잔류하는 자는 물건을 사거나 혹은 주막에서 술을 마시며 불온한 모습이 없음. 1. 어제 아침 鍾路의 상점을 열게 한 이래 시내에 폐점하는 자 없음. 왕래교통은 평일과 다를 바 없이 극히 정숙함. 2. 통감 각하의 배려에 의해 육군대신으로부터 회송하신 총기 600挺은 7월 31일 용산병기창(龍山兵器廠)에 도착하였음. 200挺도 이 날 즉시 수령하여 일시 同廠에 보관을 의뢰했음.
1907년 8월 30일자 통감부문서 "忠北道內 義兵來襲에 관한 永同駐在署의 報告 轉電 件". 동년 동월 3일 전보 부분 발췌
(118) [한국 경찰용 총기와 탄약 수령 件]

往電
明治四十年八月五日 午後二時一○分 發[69]
統監[70]
寺內 陸軍大臣[71]

한국 경찰용으로 회부한 연발기총(連發騎銃) 1,000정과 탄약 10만 발은 어제 용산 병기지창(龍山 兵器支廠)에서 수령을 마쳤음. 후의에 감사드림.
1907년 8월 5일자 통감부문서 "한국 경찰용 총기와 탄약 수령 件"

이때부터 군기창은 일본군의 무기고로 전락한다. 남대문 전투 직후인 8월 2일자 통감부문서를 보면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보낸 800정의 총기를 군기창에 보관했다. 3일 후인 8월 5일 통감부는 군기창에 보관된 1000정의 연발 기병총(連發騎銃)을 한국 경찰에 지급하였다. 앞서 일본이 보관한 800정을 뺀 나머지 200정이 군기창 생산분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1906년부로 시험생산을 시도한 것은 30년식 보병총이지 30년식 기병총이 아니기 때문.

어찌되었건,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군기창은 동년 8월 29일날 헌병사령부 및 지원대와 함께 해산되었다. 며칠 뒤인 9월 5일날 융희 원년 칙령 제13호를 통해 군기창 관제가 폐지된다. 이후 군기창 직원들은 폐지된 전직 육군법원 및 무관학교 관헌들과 함께 합동하여 정부에 퇴직금을 요청하기도 했다.

1908년 1월 1일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조희연이 이끌던 흥공단(興工團)이라 하는 일종의 공업육성단체가 군기창의 기계류와 시설들을 인수하여 쓰기 위해 정부에 매각을 요청하였다. 동년 1월 28일에는 전환국의 후신인 탁지부 인쇄국이 군기창 시설을 빌려 사용한 기록이 있다. 확실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당시 용산의 탁지부 소속 용해부가 화폐정리사업의 일환으로 백동화상평통보 등의 구화폐를 수거해 녹여 주괴로 만들어 판매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작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인접한 군기창 시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군기창에 남은 마지막 물건으로 추정되는 탄약 2,600개는 동년 2월 19일 인천항으로 옮겨져 일본 선박에 실려 오사카로 수송된다. 이 기사를 마지막으로 한국의 군수공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8년 육군병기공창이 설립될 때까지 역사에서 사라진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에 두 곳의 조병창을 세우긴 했다. 1920년 평양에 설립된 조선병기제조소와 1941년 가동을 시작한 인천육군조병창 제1제조소가 그것.
파일:대경성정도 용산군기창.jpg
1936년 출판된 <대경성정도(大京城精圖)>의 구용산 일대 모습. 우상단 용문동 일대에 군기창 건물이 그대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옆에는 육군용지(陸軍用地), 옛 병기지창(旧 兵器支廠)이라 쓰여 있다.

바로 아래에는 서적인쇄사(書籍印刷社)라고 표기된 전환국 청사가 보인다. 총독부 인쇄국 및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원 소재지이기도 하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소장『서울지도』(2006), 68쪽

군기창 건물 자체는 한동안 일본군이 사용하다가 인쇄소로 쓰이기 시작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옛 전환국 청사에 있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1935년부로 군기창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고 들어왔다고 한다.#[72]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조선총독부 인쇄국을[73] 1923년부로 개편한 회사로, 조선 엔채권 그리고 각종 관찬 출판물들을 인쇄하는 업무를 수행했다.[74]

해방 이후 6.25 전쟁 당시인 1953년에 만들어진 서울도시계획가로망도(서울都市計劃街路網圖)에도 군기창 청사가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도는 그저 옛 지도들을 참조해 묘사했을 뿐, 이 시점에서 군기창 부지는 1950년 7월의 용산 대폭격으로 이미 소실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미국 극동공군북한군이 이용가능한 주요 시설들을 폭격으로 파괴했는데, 한반도 철도의 핵심 허브 역할을 하는 용산역과 철도 수리 및 생산 시설인 공작창이 있는 용산은 서울시 내에서도 가장 우선적인 타겟이었다.

조선서적출판회사는 오폭당한 것이 아니었고 주 폭격 목표 중 하나였다. 서울 함락 직후 북한은 한국은행 청사와 이곳 조선서적출판회사를 장악하고는, 이들에 보관되어 있던 막대한 양의 미발행 지폐들을 이용해 당시 한국 화폐였던 조선은행권을 대량으로 발행했다. 비인가 화폐를 유통하여 대한민국의 경제를 붕괴시키고자 시도한 것. 따라서 남한과 미국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를 막아야 했다.
1950년[75] 7월 16일 용산 대폭격 기록영상.
1950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었던 시기 미 공군에 의한 용산 지역 폭격은 용산의 철도시설과 조차장과 공작창을 파괴함으로써 북한군의 보급선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용산에는 당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공장이 위치해 있었고, 일제강점기부터 병기 창고가 위치하고 있었다. 아울러 효창공원 언덕에 있었던 고사포진지 역시 폭격대상이 되었다.
박태균. (2021). 장소에 깃든 서울의 전쟁 기억. 국제.지역연구, 30(3), 105-129.
...8월 7일 현재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서울의 시설로는 포병대 무기고, 용산역, 해방촌, 육군본부, 조선서적 출판회사, 포병학교, 삼각산 군 보급창이다...
4. “Conditions in Seoul”, Information Report, 15 Sept 1950, CIA.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의 전갑생 교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용산폭격을 기록한 미국 중앙정보국 문서에 조선서적출판회사가 폭격으로 소실되었다는 언급이 남아 있다.# 또한 군기창 부지 바로 북쪽의 도원동 4-3번지에 있는 도원동교회 역시 1950년 당시 한 차례 폭격으로 전소되었다가 새로 지었다고 홈페이지에 밝히고 있어, 당시 구용산 일대 전체가 폭격으로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용산 군기창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 있었더라도 이때 폭격과 함께 최종적으로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5.4.2. 삼청동 기기창

파일:두묘 생산을 위한 송아지 선별.jpg파일:두묘 생산을 위한 송아지 처치.jpg
좌측 사진은 1915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예하 세균검사실(細菌檢査室)로 사용되던 당시의 번사창 일대 모습이다. 백신 생산을 위해 송아지들을 선별하고 있다.

우측 사진도 같은 장소다. 두묘(痘苗), 즉 천연두 백신인 우두약의 원료를 생산하기에 앞서서 선별된 송아지들을 처치하는 모습이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소장 『ANNUAL REPORT』

용산 군기창으로 주요 생산라인이 이전한 후 1910년까지 삼청동 기기창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는 자료가 부족해 알기 힘들다. 일단 1905년부터 육군연성학교육군무관학교, 그리고 육군유년학교가 부지에 들어온 후 훨씬 넓은 면적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해 3월 화약 절도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 한동안 무기고의 기능은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7월 해산 전야의 고종 퇴위 반대 운동 당시에 군사학교[76] 학생들이 가담하여 탄약을 옮겼는데, 이는 무기고와 군사학교들이 같은 시기에 인접해 있었다는 증거로 파악된다.

일부 설비들은 1907년 말까지도 남아 있었는지, 두 개의 민간단체가 삼청동 기기창의 설비 인수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나는 상술한 흥공단으로, 1907년 12월경 일부 기계를 불하받았다.[77] 이듬해인 1909년 9월경에는 윤치성 주도로 해산군인들이 모여[78] 공업을 일으키기 위해 설립한 대한공업회에서 기기창 건물을 사무실로 쓰기 위해 탁지부에 문의하기도 했다. 그러다 무관학교마저 폐지되고 나서 삼청동 기기창은 1910년 경술국치 직전 내부로 이관되었으며, 두묘제조소(천연두 백신 제조소)가 들어섰다. 이후 조선총독부가 인수하여 세균실험실로 사용하다 해방을 맞았다.

6. 관련 인물

6.1. 한국인

파일:김정우 포병부령.jpg
군기창장 포병부령 김정우
9품 박희달은 진위 제2연대 제1대대 육군 군의로 임명되며, 판임관 3등으로 보임되었고, 10월 1일자로 군기창 부관리로 보임되었다.
육군 포병 부령 이민섭은 군기창 부관에 보임되었으며, 육군 포병 참령 민영원은 군기창 검사관에 보임되었다.
또한 육군 포병 참령 이민식은 군기창 검사관에 보임되었으며, 육군 보병 부위 박두영은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에 소속되며 동시에 군기창 검사관을 겸임하였다.
육군 3등 사계 백학진과 육군 1등 군사 백남복은 군기창 급여 담당으로 보임되었고, 육군 3등 군의 김명식은 군기창 의관에 보임되었다.
육군 포병 참령 김정우, 육군 포병 정위 안대형, 박덕수는 군기창 제조소장에 보임되었다.
전 기술자 한욱은 정2품에 해당하는 서조임관 2등으로 군기창 제조소장에 임명되었고, 전 기술자 송경화는 서조임관 6등으로 군기창 제조소장에 임명되었다.
6품 장용식, 9품 박승헌은 군기창 기술사로 서임관 5등에 임명되었고, 육군 포병 참위 홍완식, 5품 왕종식, 6품 김태석, 9품 현기, 배영복, 조희석은 군기창 기술사로 서임관 6등에 임명되었다.

九品朴凞達 任鎭衛第二聯隊第一大隊陸軍軍醫補叙判任官三等 十月一日補軍器廠副管理
陸軍砲兵副領李敏變○補軍器廠副官
陸軍砲兵叅領閔泳瑗○補軍器廠檢査官
陸軍砲兵參領 李敏軾○陸軍武官學校學徒隊附陸軍步兵副尉朴斗榮 兼補軍器廠檢査官
○陸軍三等司計白鶴鎭 陸軍一等軍司白南福 補軍噐廠餉任
○補軍噐廠醫官 陸軍三等軍醫金明植
○陸軍砲兵叅領金鼎禹 陸軍砲兵正尉安大亨 仝朴德秀 補軍器廠製造所長
○任軍器敞製造所長叙奏任官二等 前技師韓 旭
○任軍器廠製造所長敍奏任官六等 前技師宋敬和
○六品張容植 九品朴承憲 任軍噐廠技師奏任官五等
○陸軍砲兵叅尉洪完植五品王鍾植 六品金台錫 九品玄 琪仝裴永福 仝曹喜錫 任軍器廠技師叙泰任官六等
- 1904년 11월04일 황성신문에 발표된 용산 군기창 인사 목록[79]
군기창과 연관된 군인들은 기기창을 관할하던 군부 포공국 포병과원들이 특히 많았다. 한편 기술인력들은 당시 대한제국에서 최고의 경력을 쌓았던 기술자들과 장인들이었다. 다만 이하 서술한 인원들이 한날한시에 근무했던 것은 아니다. 구한말에는 인사이동이 지금보다 훨씬 활발했다.

이하 이력들은 대한제국관원이력서와 관보, 근대신문 아카이브 등에서 발췌했다는 점을 밝힌다.
  • 고위 관헌
    •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
      왕족으로, 사도세자의 현손이자 고종의 사촌이다. 1900년대 초 평식원 설치와 삼청동 기기창에서의 군수품 제조를 총괄했다. 당시 궁내부 내대신. 그의 기기창 관련 활동은 연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

      다만 황성신문에 그가 북일영을 총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이 "십수 년 전 일청(일본·청나라) 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소총을 연구·발명하고, 북일영에 군기창을 만들어 만일의 국가 변란에 대비하는 등 식견이 뛰어났다", "雷九矢를 창조하고 北一營을 만들어 國錢 수백 元을 낭비하였다."고 평가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깊게 관여한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훗날 조선귀족 작위를 받고 친일파가 된다.
    • 이용익(李容翊)
      고종의 최측근이자 내장원경으로서 광무개혁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1904년 1월 당시 군부대신. 광무개혁기에 프랑스러시아와 함께 여러 광산 및 관립 공장들의 개발과 설립을 추진했다.

      군사적으로는 육군피복제조소장을 겸임하며 군복 생산을 감독한 바 있으며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회고에 따르면 1903년에는 러시아의 군수물자를 한국군에 채용하고자 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페이외 대위의 용산 군기창의 설계시안 제작에도 관여하였으며, 경성부사에 따르면 일본과 합작하여 군기창 건설을 주도했다.

      군기창의 운영에 이용익이 얼마나 관여하였는지는 연구가 미진하여 밝혀지지 않았으나, 러일전쟁 중반에 그가 일본 측에 납치당해 일본으로 압송당한 것을 생각하면 운영에는 많이 관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보성전문학교를 세우곤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한다.
    • 신기선(申箕善)
      1902년 2월 18일 ~ 1903년 초 군부대신.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회고에서 일본 측이 군기창 건설과 30년식 소총 라이센스 제공을 위해 접촉한 대상으로 언급된다. 그 외에 그가 군기창에 관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연구가 미진하여 밝혀지지 않았다. 1909년 사망.
  • 군부 포공국 주요인물
    • 구의조(具懿祖)
      보병참령, 군부 포공국 포병과장. 자세한 이력은 항목 참조.
    • 정우창(鄭禹昌)
      포병참령, 군부 포공국 포병과원. 자세한 이력은 항목 참조.
  • 용산 군기창의 주요 실무진
    • 김정우(金鼎禹)
      포병부령, 군기창장. 독립운동가 김경천과 공병부령 김성은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자세한 이력은 항목 참조.
    • 송경화(宋敬和)
      군기창 제조소장. 1882년에 영선사 군계학조단 출신으로 청나라에서 근대기술을 배워온 한국 1세대 기술자 중 하나이다. 자세한 이력은 항목 참조.
    • 한욱(韓旭)
      군기창 제조소장. 위 둘과 달리 조폐국 쪽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 역시 1862년생으로 나이가 적지 않았고, 1890년 일본 오사카조폐국 철공장에서 유학 후 귀국했다.[80] 전환국에서 한동안 일하다 군기창으로 들어왔다.

      젊지만 재능과 포부가 있어 시도한 일마다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는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81] 다만 훗날 조선총독부에서 지방 군수를 역임하기도 하는 등 친일 노선을 걷게 된다.
    • 이경필(李敬弼)
      군기창 제조소장. 상당히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1854년생으로, 10대 중반이던 1868년부터 오군영 중 하나인 금위영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초석과 화약을 만들어오던 장인 출신이다.

      기기창에 채용되어 일하다가 1902년에는 면화약 및 총인화약(蔥仁火藥) 제조법을 습득,[82] 1903년 관립 박람회 군물 부문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당시 그가 출품한 것은 그가 발명한 신공법으로 제작한 화약이었다. 그리고 이 경력을 바탕으로 농상공부 기사에 임명됐다가 군기창으로 왔다.
    • 안대형(安大亨)
      포병 정위, 군기창 제조소장. 출생 일자는 불명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1889년 일본으로 파견한 4인의 관비 유학생[83] 중 하나이다. 그는 당시 도쿄포병공창 산하의 이타바시화약제조소에 파견되어 화약제조법을 익히고 1891년 귀국, 가평의 청평천 제약소에서 일했다.

      관보에 따르면 1894년부터 야전으로 보내졌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는 별군관으로 해주에 파견되었으며 을미개혁으로 서구식 군제가 본격 도입된 1895년 6월에는 참위 계급을 받아 구식군대를 재편한 신설대 예하 공병대 제1대대에 배치되었다. 이듬해 부위로 진급했으며 1897년에는 친위 제1연대 1대대 예하 중대장직을 역임했고, 1898년 대구지방대에 배치되어 적어도 1902년까지 진위 3연대 1대대에서 복무했다.

      1904년 11월경 포병 병과로 전속되어 정위로 진급, 오랜 야전 생활을 마치고 군기창으로 돌아왔다.
    • 김유성(金有聲)
      군기창 제조소장. 역시 출생일자 미상이다. 농상공부 기술보조 출신으로, 1900년에 도일하여 오사카의 오카모토 철공소(岡本鐵工所)에 취직해 기술을 배웠다. 1907년 2월까지는 관립공업전습소[84] 기술자로 일했다.
    • 김영식(金永植)
      군기창 기술자. 1869년생이며 1898년 도쿄포병공창에서 수학.
    • 손병준(孫秉駿)
      군기창 기술자. 1869년생으로, 1900년에 도쿄포병공창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군기창에서 일했다.
    • 이사범(李士範)
      군기창 기술자. 1859년생. 1897년 기기창 자체에서 질산 제조법을 전수해[85] 길러낸 기술자였다.

그 외 다양한 이들이 군기창을 거쳐갔다.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기술자 백남열(白南說)과 같이 딱히 별다른 학력을 확인할 수 없거나[86] 군수공업과는 무관한 군사학교 및 의학교 등에서 수학한 이들이기에 이하 생략한다.

물론 관원이력에 명시되지 않았을 뿐 상술한 이사범과 같이 기기창 자체에서 견습 제도로 길러낸 기술자들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김정기의 논문 <1880년대 기기국 · 기기창의 설치>에 따르면 1883년 기기국이 설치되던 당시 십수 명의 중국인 기사들이 들어와 기기창 운영을 감독하며 제조방법을 소극적으로나마 교육하기도 했기 때문.

그 외에는 한욱 소장처럼 타 부서에서 경력을 쌓다 건너오거나, 김유성 소장같이 자비유학을 떠나는 등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기술을 실습한 이들도 기록이 누락되었을 뿐 존재했을 가능성이 상존한다.[87]

기술자들 중에는 특히 도쿄포병공창에서 기술을 수학한 이들이 많다. 1885년 이래로 도쿄공창 부속 육군포병공과학교(陸軍砲兵工科学校)에서 일본군의 기술사관들을 교육하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도쿄공창에서 배웠다는 군기창 관헌들 역시 실제로는 이 학교에서 병기공학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다.

6.2. 외국인

파일:페이외르복무문서.jpg
귀스타브 페이외르의 복무 이력서 중 일부.
문서 좌하단에는 제29포병연대 소속으로 한국 파견대장 임무를 완수한 공적으로 1907년 7월 12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하였다고 적혀 있다.

출처: 프랑스 국립기록보관소
이노우에 요시후미를 제외한 이들은 대부분 기기창이 용산으로 옮기기 이전 삼청동 시기에 근무한 이들이므로, 용산 군기창에서 근무한 적은 없다. 그러나 기기창에서 군기창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므로 본 문서에도 기재한다.
  •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푸챠타(Дмитрий Васильевич Путята)
    1896년 들어온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 단장. 1855년생으로, 주로 투르케스탄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중앙아시아 정복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며 커리어를 쌓았다. 그러다 러시아에 방문한 민영환의 제의로 한국에 왔다. 당시 계급은 육군 대령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아관파천기 조선군의 기틀을 잡는 과정에서 조병창 확장 계획을 구상한 바 있다. 그러나 1년 반 후인 1898년 고문단이 대부분 철수하며 그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1902년 아무르 지방 총독이 되었으며 훗날 중장까지 진급했다. 1915년 사망.
  • 렘네프(С.П. Ремнев)
    1896년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이 한국에 들어올 때 따라 들어온 14인 중 유일한 기술자. 러시아 내부 문건에 따르면 이름은 С.П. Ремнев이지만 외국어표기법이 없던 시절이라 기록에는 렘노프, 우렘노프, 우롐노푸, 우렘노푸, 류미노푸 등 다양하게 표기된다. 일본공사관 문서에서는 그의 이름을 라틴 문자로 Remyeff라고, 호러스 뉴턴 알렌은 저서 KOREA: FACT AND FANCY에서 Reminoff라고 표기했다.

    러시아해군성문서에 따르면 본래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의 기계장(машинный кондуктор)으로, 1896년 아관파천 시기에 돈스코이함을 비롯한 러시아군 선발대가 한국에 도착할 때 같이 들어왔다. 이후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계약을 맺고 기기창 기사로 근무했다. 1898년 러시아 군사고문단이 철수한 후에도 한국에 계속 남아 계약을 연장해 가며 1904년 초까지 기기창에서 일했다.
  • 귀스타브 페이외르(Gustave Payeur 裵堯乙[88])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로, 기기창 수석기사로 계약했다. 우렘노프와 마찬가지로 기록에는 파이어, 빠이어, 페이외, 페이에르, 뻬이에르 등 중구난방으로 표기되며 역시 이름은 불명. 상술한 바와 같이 용산 군기창을 최초로 설계한 인물이며, 비단 기기창에서만 일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 당시 한국군 고문으로써 간도 점령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파견될 뻔 하기도 했다. 1904년 초에 해임되었다.

    프랑스 기록보관소에서 보관 중인 그의 복무 이력 카드에 따르면 1863년 베르됭 태생으로, 1881년에 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포병부대들에서 계속 복무하다 1899년 8월 20일부로 소총·포 제조국(Manufactures d’armes et de canons)에 파견 근무하였으며, 이후 잠시 제19포병연대에서 복무하다 1904년 소령 진급하기까지 기록이 3년간 끊긴다. 1901년~1904년까지의 3년간은 한국 문서에서 페이외르의 이름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1907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5등 슈발리에를 수훈하였고 1919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예비역 신분이었다.

    어쨌든 귀국 후에도 한국과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는지 훗날 경술국치가 벌어진 후 김규식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서 활동하다 떠날 때 송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이미 장군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89] 다만 정확히 그가 어떤 활동을 한 인물인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한불관계사의 가교로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인물이다.
  • 레오폴드 루이(Leopold Louis 路易[90])
    페이외르 대위와 함께 들어온 군물조사원. 그 역시 프랑스 육군 장교인데, 호러스 뉴턴 알렌은 그의 이름을 레오폴드라고 기록했다.

    프랑스 국립기록보관소에 저장된 그의 복무이력에 따르면 1860년 12월 2일에 비엔의 퐁세에서 태어났다. 1881년 병사로 입대하여 부사관을 거쳐 1893년에는 병기행정 견습사관(Élève d’ouvrier d’administration d’artillerie)이 되었으며 1901년부터 1904년까지 한국에 있었다.

    귀국 후인 1908년에 병기행정장교로 공식 진급하였으며 1913년 예비역으로 전환, 예비군용 무기고 관리를 맡았다. 1896년 공로훈장을, 191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5등 슈발리에를 수훈하였다.
파일:이노우에요시후미초상.jpg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초상. 1915년 출판된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에 수록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용산 군기창을 건설한 일본인 기술자. 1922년판 대일본인물명감에 따르면 메이지 11년(1878년) 11월 30일 교토 니조 성의 상주저택에서 태어났다. 이후 전기철도회사를 설립하여 전차를 제작해 납품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9년 한국에 들어와 한성전기철도에 전차를 공급했다.

    이후 한국정부가 평식원을 세워 도량형 통일을 추진하자 기사로 발탁되어 공장건설 및 도량형기 제작업무를 총괄했다. 그 후 용산 군기창을 세웠고, 일본군의 한국침략이 가속화되자 곳곳에 일본군 병영을 세웠다. 경술국치 후에는 다시 사업가로 변신하여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1940년에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한국이 해방을 맞은 후인 1947년까지도 살아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2018년에 계명대학교 부교수인 김명수가 논문을 낸 바 있다.

7. 생산 장비

용산으로 옮기기 이전과 이후 모두를 포괄한다.

7.1. 총포

파일:f339dad5d258843fcace1d5d6dc6e3a4.jpg
30년식 소총의 모습.

* 기기창 시기 생산품
* 17발총(十七發銃)
황성신문 1901년 10월 11일자 기사에 언급되는 무기이다. 볼리 건이나 기관총의 일종으로 보이나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총 2문을 제작했다.

* 제원 미상의 대포
최초로 언급되는 것은 황성신문 1901년 5월 27일자 기사로, 용운갑 및 화전과 함께 개발되어 원수부 관헌들 앞에서 시험하였다. 1902년 10월 22일에도 북일영에서 대포를 생산하여 시험하다 유폭 사고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제원 미상의 소총
1880년대~1890년대 기기국에서 소규모로 소총 제작에 나섰다는 기록이 <통기(統記)에> 남아있다. 어떤 모델인지는 불명이다.
  • 용산 이전 이후 생산품
    • 30년식 보병총(불확실)
      三十年式歩兵銃. 일본 육군 중장 아리사카 나리아키라(有坂成章)가 1897년에 개발하여 일본군에 제식체용된 소총이다. 아리사카 소총 시리즈의 첫번째 모델. 한국은 미쓰이와의 계약으로 라이센스 생산을 시도했다. 실제 생산에 성공하였을 경우 한국계 국가가 직접 생산한 최초의 근대 소총이 된다.

7.2. 탄약

파일:external/i69.photobucket.com/3x45.jpg
가장 우측이 .45-70 거버먼트 탄이다. 왼쪽 두 개는 .45 ACP.44 매그넘.
  • 기기창 시기 생산품
    • 퍼커션 캡
      뇌홍을 이용한 초기형 뇌관이다. 동모(銅冒)라고 불렸다.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1886년 8월 25일자 540번 문서에 따르면 상하이 공공 조계의 서양 회사인 아사양행(亞士洋行)에서[91] 제조기계를 사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45-70 Government
      미군의 소총탄약으로, 흑색화약을 사용한다. 을미개혁 이전 조선 중앙군이 주력으로 쓰던 레밍턴 롤링블럭개틀링 기관총 탄환이다. 한편 김기윤의 타임라인 M에 따르면 조선군의 피바디-마티니 역시 이 탄을 사용하는 버전이었다고 전한다. 사실상 제식 소총탄이었다.
    • 11×60mm R
      프로이센이 개발한 게베어 1871과 그 개량형들의 탄약이다. 흑색화약탄이다.
    • 10.75×58mm R
      러시아군이 사용하던 크른카 M1867베르단의 탄약이다. 이것 역시 흑색화약을 사용한다.
  • 용산 이전 이후 생산품
    • 30년식 실포(三十年式実包. 6.5×50 mm SR 아리사카)
      일본이 개발한 30년식 소총의 탄환. 6.5mm 구경탄이며 무연화약을 사용한다.

1901년경 도입한 프랑스제 그라 소총용 흑색화약탄인 11×59mm R Gras를 자체 생산했는지는 딱히 기록이 없으나, 만들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7.3. 기타

  • 기기창 시기 생산품
    • 용운갑(龍雲甲)
      1901년 5월 27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언급되는 생산품으로, 방탄복의 일종이다.
    • 화전(火箭)
      위와 동일한 기사에 언급되는 생산품으로, 로켓무기의 일종이다. 일본이 기록한 이재완의 이력에는 '뇌구시(雷九矢)'라는 이름으로, 제국신문 1901년 5월 24일자 기사에는 '소뇌활'이라는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다. 일종의 다발화전으로 보이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8. 군기창 관제

8.1. 1904년 7월

勅令第十八號
軍器廠官制
第一條 軍器廠은軍部大臣管轄에隸屬야各兵科의所需軍器와彈藥의製造及修理事務擔任事
第二條 軍器廠에左開職員을置事
提理 一人 參將或正領副領
副官 一人 參領或正尉
主計 一人 一二三等軍司
主事 二人 判任
技師 五人 奏任
技手 七人 判任
第三條 提理廠內事務管理고所屬職員을指揮監督事
第四條 副官은提理補佐고事務整理事
第五條 主計廠內一切會計事務掌辦事
第六條 主事上官의指揮承야庶務에從事事
第七條 技師提理의命令을承야技術에關事務掌理事
第八條 技手技師의指揮에服從事
第九條 本令은頒布日로붓터施行事

光武八年七月六日
御押 御璽 奉
勅 議政府參政 沈相薰
軍部大臣 尹雄烈

칙령 제18호
군기창 관제(軍器廠官制)

제1조
군기창(軍器廠)은 군부대신(軍部大臣)의 관할에 속하여, 각 병과(兵科)의 소요 군기(軍器)와 탄약(彈藥)의 제조 및 수리(修理)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

제2조
군기창에는 다음의 직원을 둔다.
제리(提理) 1인: 참장(參將) 또는 정령(正領)·부령(副領)
부관(副官) 1인: 참령(參領) 또는 정위(正尉)
주계(主計) 1인: 1·2·3등 군사(軍司)
주사(主事) 2인: 판임(判任)
기사(技師) 5인: 주임(奏任)
기수(技手) 7인: 판임(判任)

제3조
제리는 창내(廠內)의 사무를 관리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한다.

제4조
부관은 제리를 보좌하고, 사무를 정리한다.

제5조
주계는 창내의 모든 회계사무를 관장한다.

제6조
주사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서무(庶務)에 종사한다.

제7조
기사는 제리의 명령을 받아 기술(技術)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

제8조
기수는 기사의 지휘에 복종한다.

제9조
본령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광무 8년 7월 6일
어압(御押) 어새(御璽) 칙(勅)
의정부 참정(參政) 심상훈(沈相薰)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

8.2. 1904년 9월

第一條軍器廠은軍部大臣管轄에屬야陸軍에需要兵器彈藥器具材料를製造修理며海軍에需要火藥을製造고且製革製絨及軍用革具와被服製의事를掌이라第二條軍器廠은京城에置고廠內에左開製造所를配置이라銃砲製造所彈丸製造所火藥製造所製革所織造所第三條軍器廠의職員은如左이라管理 一人 參將或正領副管理 一人 砲兵正副領副官 一人 砲兵參領或正尉檢査官 二人 砲兵參領或正尉餉官 二人 二三等司計一人 一二等軍司一人醫官 一人 一二三等軍醫主事 三人 判任文官製造所長 五人 各兵科參領或正尉或技師技師 八人 奏任技手 三十一人 判任第四條管理廠內事務를總理고所屬職員을指揮統督며特히工廠建築에關事項을管掌이라第五條副管理管理를補佐야廠內事務를整理이라第六條副官은廠內一般庶務를掌이라第七條檢査官은製造兵器彈藥器具材料及其材料本質의檢査를掌이라第八條餉官은廠內一切會計事務를掌이라第九條醫官은廠內一切衛生事務를掌이라第十條主事上官의指揮를受야文簿記註等事務에任이라第十一條銃砲製造所軍用銃砲를製造修計기爲야置이니所長은砲兵參領或正尉로補고技師二人과技手五人을置야各其任務를分擔이라第十二條彈丸製造所軍用에需要彈丸을製造기爲야置이니所長은砲兵參領或正尉로補고技師一人과技手四人을置야各其任務를分擔이라第十三條火藥製造所陸海軍의需要火藥을製造기爲야置이니所長은砲兵參領或正尉로補고技師二人과技手八人을置야各其任務를分擔이라第十四條製革所製革事務와且軍用에需要革具를製造기爲야置이니所長은各兵科參領正尉或技師로補고技師一人과技手四人을置야各其任務를分擔이라第十五條織造所軍用의需要絨屬織造와被服을製造기爲야置이니所長은各兵科參領正尉或技師로補고技師二人과技手十人을置야各其任務를分擔이라第十六條各所에技師所長에게며技手技師에게各其指揮를受야所務에從事이라第十七條軍用制式의兵器彈藥器具材料軍用을爲야製造外에軍部大臣의許可를經지못면製造을不得이라但他官廳或人民이物品의製造를請托時軍用製造事業에妨害가無을限야應作事를得되軍部大臣의認許를請이라第十八條本官制頒布日로施行이라第十九條光武八年七月六日勅令第十八號軍器廠官制廢止이라

군기창 관제
제1조
군기창은 군부대신의 관할에 속하며, 육군에 필요한 무기, 탄약, 기구, 자재를 제조 및 수리하고, 해군에 필요한 화약을 제조하며, 또한 가죽 가공과 모직물 제조, 군용 가죽 장비와 군복을 만드는 일을 맡는다.

제2조
군기창은 경성(서울)에 설치하고, 그 안에 다음과 같은 제조소를 둔다: 총포 제조소, 탄환 제조소, 화약 제조소, 가죽 제조소(제혁소), 직물 제조소(직조소)

제3조
군기창의 직원은 다음과 같다: 관리(창장) 1명 – 참장 또는 정령, 부관리 1명 – 포병 정령 또는 부령, 부관 1명 – 포병 참령 또는 정위, 검사관 2명 – 포병 참령 또는 정위, 향관(회계담당) 2명 – 2·3등 서계 1명, 1·2등 군사 1명, 의관(군의) 1명 – 1~3등 군의, 주사(문관 행정직) 3명 – 판임 문관, 제조소장 5명 – 각 병과의 참령·정위 또는 기술관, 기술관(技師) 8명 – 준사관급, 기수(기술직원) 31명 – 실무급 판임관

제4조
관리는 창 내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하며, 특히 공장 건축과 관련된 일을 맡는다.

제5조
부관리는 관리의 보좌 역할을 하며, 창 내 업무를 정리한다.

제6조
부관은 창 내의 일반 행정 업무를 담당한다.

제7조
검사관은 제조된 무기, 탄약, 기구, 자재 및 그 자재의 품질 검사를 담당한다.

제8조
향관은 창 내의 모든 회계 업무를 담당한다.

제9조
의관은 창 내의 모든 위생 업무를 담당한다.

제10조
주사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문서, 장부, 기록 등의 업무를 맡는다.

제11조
총포 제조소는 군용 총기의 제조 및 수리를 위해 설치하며, 소장은 포병 참령 또는 정위로 임명. 기술관 2명, 기술직원 5명을 두어 각자의 업무를 분담한다.

제12조
탄환 제조소는 군용 탄환을 제조하기 위해 설치하며, 소장은 포병 참령 또는 정위로 임명. 기술관 1명, 기술직원 4명을 두어 각자의 업무를 분담한다.

제13조
화약 제조소는 육군 및 해군에 필요한 화약을 제조하기 위해 설치하며, 소장은 포병 참령 또는 정위로 임명. 기술관 2명, 기술직원 8명을 두어 각자의 업무를 분담한다.

제14조
가죽 제조소는 가죽 가공 및 군용 가죽 장비를 제조하기 위해 설치하며, 소장은 각 병과 참령, 정위 또는 기술관으로 임명. 기술관 1명, 기술직원 4명을 두어 각자의 업무를 분담한다.

제15조
직조소는 군용 모직물 및 군복을 제조하기 위해 설치하며, 소장은 각 병과 참령, 정위 또는 기술관으로 임명. 기술관 2명, 기술직원 10명을 두어 각자의 업무를 분담한다.

제16조
각 제조소의 기술관은 소장의 지휘를, 기술직원은 기술관의 지휘를 받아 각자의 소임을 수행한다.

제17조
군용 제식의 무기, 탄약, 기구, 자재는군용 목적 외에는 군부대신의 허가 없이는 제조할 수 없다. 다만, 타 부처나 민간인이 제조를 요청할 경우, 군용 제조 사업에 지장이 없는 한 이를 수행할 수 있으나, 군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18조
이 관제는 반포일로부터 시행한다.

제19조
광무 8년 7월 6일 칙령 제18호 『군기창 관제』는 폐지한다.
건설 중이던 1904년 9월 27일 반포된 군기창 관제[92]

8.3. 1905년 3월

●勅令
勅令第二十六号 軍器廠官制
第一條 軍器廠은 軍部大臣管轄에 屬야 陸軍에 需要 兵器 彈藥具 材料를 製造修理함이라
○第二條 軍器廠은 京城에 置고 廠內에 左開製造所를 配置함이라 銃砲彈丸製造所 火藥制造所
○第三條 軍器廠의 職員은 左와 如함이라
廠長 一人 砲兵副參領
副官 一人 砲兵正副尉
一二等軍醫 一人
一二等軍司 一人
主事 三人 判任
製造所長 二人 砲兵參領 正尉 或 技師
技師 二人 奏任
技手 六人 判任
○第四條 廠長은 廠內事務를 摠理고 所屬職員을 指揮統督며 特히 工廠建築에 關 事項을 掌함이라
○第五條 副官은 廠內 一切 庶務를 掌理함이라
(未完)

● 칙령
칙령 제26호 군기창 관제

제1조
군기창은 군부대신의 관할에 속하며, 육군에 필요한 병기·탄약·기구·자재를 제조 및 수리하는 곳이다.

제2조
군기창은 경성(서울)에 설치하며, 창 내에는 다음과 같은 제조소를 둔다: 총포·탄환 제조소, 화약 제조소

제3조
군기창의 직원은 다음과 같다: 창장 1명 (포병 부참령), 부관 1명 (포병 정·부위), 1·2등 군의관 1명, 1·2등 군사(행정장교) 1명, 주사(일반 관리) 3명 [판임관], 제조소장 2명 (포병 참령 또는 정위 또는 기술관), 기술관 2명 [주로 준사관], 기수(기술직) 6명 [판임관]

제4조
창장은 군기창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소속 직원들을 지휘 감독하며, 특히 공장 건축에 관한 사항을 맡는다.

제5조
부관은 창내 모든 일반 행정을 담당한다.

※ (이하 미완)
1905년 3월 6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완공 직전 군기창 관제[93]

9. 기타

  • 군기창과는 별개로 합동 일대에 있던 '대한철공장'이라는 회사에서 군용 총기와 도검을[94] 생산 및 수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시계를 비롯한 각종 기계류를 판매하고 전기도금을 해 주기도 했다. 이 회사는 1903년부터 적어도 1910년까지 운영한 듯한데, 정미의병 와중인 1907년 11월 3일 사장 안 모씨가 일본군에 압송당하고 자택에서 군수품들을 수색당하기도 했다.[95] 그 때문인지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직전 올라온 마지막 광고에는 총기와 도검이 상품 목록에서 빠져 있다.
  • 창장 김정우 이하 주요 군기창 관헌들은 1906년 9월 경 다함께 보창학교 운영기금을 낸 기록이 남아 있다. 김정우가 5원, 송경화와 한욱, 이사범 등은 50전씩 내었다. 보창학교는 강화진위대 대대장 출신 참령 이동휘가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강화도에 세운 민족자본 학교다.[96] 당시 보창학교의 주 운영자금은 보성전문학교와 마찬가지로 고종의 내탕금과 여러 후원자들의 후원금이었다. 보창학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에 보성학교, 보광학교와 함께 '교육의 삼보(三寶)'라 불릴 정도로 꽤나 인정받는 사립학교였다. 현 양도초등학교의 전신이다.
  • 1907년 초 일본은 군기창 뒷산을 매입해 야요이쵸라는 이름의 유곽을 건설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일대의 한국인 묘지들을 유족들의 허락도 없이 마구잡이로 파헤친 후 그 위에 세웠기에 원성이 자자했다. 황성신문 1907년 3월 9일자 기사 참조.
  • 기기창 기술자 출신 중 김창제(金昌濟)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독립협회에 가담해 대략 30개의 사제폭탄을 만들어 정부 시설에 테러를 하다, 제조하던 폭탄이 폭발하여 체포되었다. 1899년 6월 30일자 주한일본공사관 문서 참조.
  • 구한말 당시 '기계창(噐械廠)'이라 불렸던 시설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평양의 숭실학당 부속 공장이었던 '안나 데이비스 기계창(The Anna Davis Industrial Shop)'이 바로 그것이다. 숭실학교 학장 윌리엄 베어드[97] 목사가 기술 및 기독교적 노동윤리 교육을 위해 설립했고, 미국 록아일랜드 조병창 주임 출신의 로버트 맥머트리[98] 장로가 감독했다. 다만 이쪽은 대한제국군과는 관계가 없다.

10. 매체에서

11. 출처

12. 관련 문서



[1] 요시히토 황태자(훗날의 다이쇼 덴노)의 방한 기념 사진첩이다. 중앙의 공장이 당시 일본군 무기고로 사용 중이던 군기창이며, 아래 공사 중인 곳은 일본군 유곽 야요이쵸다. 오른쪽 위 굴뚝은 과거 전환국이 있던 탁지부 인쇄국 건물이다.#[2] 메이지 시대 기준으로 대좌중좌가 보임되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대포 국산화와 제철산업에 크게 기여한 마키노 츠요시(牧野毅) 육군소장은 오사카 포병공창의 제리였다. 그러나 일본 역시 훗날 공창 책임자의 명칭을 창장으로 바꾸었다.[3] 청나라가 1867년에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세운 조병창. 당시 상하이 병공창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근대적 공장이었으나 의화단 전쟁 당시 화재로 파괴됐다.[4] 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란 근대적 군사 기계에 관하여 배우는 것을 뜻한다.[5] 정확히는 동모(퍼커션 캡) 생산.[6] 발굴된 본청 유적은 현재 시청 지하 전시실에 전시 중이다.[7] 참고로 경인선 부설 및 운산 금광 개발에 관여한 그 제임스 M. 모스 맞다. 그의 상회는 훗날 구한말의 주된 서양 무역상인 타운센드 상회가 된다.[8] 1876년에 개소한 도쿄포병공창 부속 화약공장이다. 훗날 육군조병창 화공창(火工廠), 그리고 도쿄 제2육군조병창으로 개편된다.[9] 조사 시찰단의 근대기술 조사담당 요원인 송헌빈이 한국 최초로 근대 화약 및 각종 산성물질 제조법을 배워온 곳이기도 하다. 송헌빈은 후에 농상공부에서 상공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1912년 경술국치 후에는 친일파로 변절한다.[출처:] 김연희의 논문 <영선사행 군계학조단의 재평가>, 배성준의 서적 《한국 근대 공업사》와 서인한의《대한제국의 군사제도》.[11] 극로백(克虜伯)은 크루프의 중국식 음차다.[12] 보통 해안포로 쓰였으나 함포로도 사용되었다. 설계는 크루프가 담당했으나 생산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국영 오부코프 대포공장(Обуховский Завод)에서 했다.[13] 코크스를 의미한다.[14] 불순물을 의미함.[15] 단위의 일종. 1장(丈)은 10척(약 3미터)을 의미함.[16] 석면을 의미한다.[17] 석회석.[18] 사철 또는 철광석을 의미.[19] 슬래그를 의미한다.[20] 선철을 의미한다.[21] 번사(翻沙)는 중국 한자어로 사형주조(Sand Casting)을 의미한다.[22] 강남기계제조총국은 양무운동 시기 상하이에 설립된 청나라의 근대 군수공장으로, 현대 장난조선소의 직접적인 전신이다. 한국사에서는 1932년 사쿠라다몬 의거 당시 이봉창이 사용한 마미 수류탄의 출처로 유명하다. 당시 국부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이 주임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거사에 사용하기 위해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 수류탄을 빼돌렸다.[23] 정확히 말하자면 1875년에 기존의 "극로백포설", "극로백포준심법", "극로백포탄부도", "극로백포탄조법" 등을 한데 엮은 책이다.[24] 염산을 의미한다.[25] 초산, 즉 질산을 의미한다. 식초에 들어가는 초산 즉 아세트산이 아니다.[26] 기뢰.[27] 원문은 화도(畵圖). 뒤집어서 도화(圖畵)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의 미술에 해당한다. 다만 개화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예술이 아니라 설계도를 그리는 제도법이나 도안술 등 실용적 기술들이 주였다.[28] 금속을 녹이고 주조함.[29] 이는 일본 육군의 포병회의(砲兵会議)와 공병회의(工兵会議)와 유사하다. 1876년부로 일본은 육군성 예하에 이 두 회의를 두고 포병 및 공병 기술 연구 및 자문을 맡겼다. 1903년 육군기술심사부(陸軍技術審査部)로 통합되었으며 1919년 육군기술본부(陸軍技術本部)로, 다시 1942년 육군병기행정본부(陸軍兵器行政本部)로 이어진다.[30] 여기서 제철(蹄鐵)은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드는 의미의 제철(製鐵)이 아닌, 편자를 의미한다. 공장(工長)은 장인, 기술자를 뜻한다. 따라서 제철공장은 장제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31] 당시 민영환은 러시아군의 거대한 군수공장들을 시찰하며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는 1896년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의 탄환공장, 포탄공장, 해군공창과 대포공장을 둘러보았다. 다만 긍정적인 감상만 있지는 않았는데, 그는 장차 이 수많은 무기들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겠다며 언젠가는 전부 녹여 농기구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출처는 민영환의 세계일주 여행기인 해천추범(海天秋帆).[32] 원문은 машинный кондуктор.[33] 원래 고문단은 3년 기한으로 내한했으나 1년 반만에 돌아갔다.[34] 레밍턴 롤링블럭 또는 스나이더-엔필드를 의미.[35] 마우저 소총을 의미. 당시 한국에서는 게베어 1871이 쓰였다.[36] 문서명: 기계창에서 필요한 葱仁藥 수입에 관해서 仁川稅司에서 살펴서 판단할 것[37] 각사등록 근대편 1902년 12월 26일 기사에 따르면 총포의 탄환에 쓰이는 작약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38] 당시 두 사람의 입국 비용은 프랑스 군무부가 선 지불했다.[39]북촌한옥마을 일대로, 정독도서관 바로 옆이다.[40] 황동은 예나 지금이나 탄피의 주재료로 쓰이지만, 18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강철보다 취급이 쉬웠기에 야전포의 재료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강철-청동제 야포들이다.[41] 당시 세관 총세무사. 기록들에는 '백탁안(柏卓安)'이라는 이름으로 음차되어 등장한다. 영국과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며 세관을 탁지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타국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을 방해함으로써 한국의 재정적 건전성을 무너뜨린 인물로 악명높다.[42] 서소문 포대영으로 보인다.[43] 일제시대에는 욱천(旭川. 아사히카와)이라 불렸다. 지금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완전히 복개되었다.[44] 당시 기록들에서는 한국식 독음으로 삼정물산이라 표기했다.[45] 1월 30일 철도원 총재 임명. 그러나 후임인 이근택이 정식으로 군부대신이 된 것은 1903년 5월 9일이었다.[46] 도량형기 제조공장이다.[47] 중간이 누락되었으나, 정황상 포공국을 의미한다.[48] 일본의 메이지 신정부가 1871년에 옛 미토 번 영지에 구 막부의 병기공장들을 한데 합쳐 건설한 조병창이다. 관동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어 고쿠라 육군조병창으로 이전하였으며 빈 부지에는 고라쿠엔 스타디움이 들어섰다.[49] 당시 일본에는 도쿄포병공창과 더불어 1879년에 오사카 성에 세워진 오사카 포병공창까지 총 두 개의 조병창이 있었다. 도쿄 조병창이 소화기 위주로 생산했다면 오사카 조병창은 중화기가 주력이었다.[50] 일제강점기에는 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라는 언덕이라 하여 도산(桃山), 즉 모모야마로 불렸다. 현 용산구 도원동산천동, 그리고 마포구 도화동 일대인데, 세 동명 다 도산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51] 일명 오시마마치. 현 용문동 일대다. 경성부사 제2권에 따르면 이는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육군소장의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다. 오시마 소장은 청일전쟁 시기 서울에 최초로 진주한 제9혼성여단, 일명 오시마 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의 지휘관이었다. 당시 오시마의 부대가 주둔했던 곳은 효창원 일대였는데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52] 와사(瓦斯)는 가스를 뜻한다.[53] 연와(煉瓦)는 벽돌을 뜻한다.[54] 100톤, 8노트 속력의 증기선이다. 경성부사에 따르면 청나라가 장강에서 운영할 것을 상정하고 건조했기에 내륙수운에 매우 적합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후 일본이 노획했다.[55] 다만 구용산에 외국인 거주자는 많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마포 일대에 주로 분포했고 일본인들은 남산 북쪽 자락에 모여 있다가 신용산 시가지를 짓고 그쪽에 모여살았다.[56] 반대로 한국에서 수출하는 물자들도 용산을 거쳐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일본 오사카에서는 한국산 콩을 '용산대두'라 부르기도 했다. 출처는 경성부사 2권 842p.[57] 유리 공장이다. 러시아의 기술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58] 1881년 오사카에 설립된 구리 제련소이다. 일본 조폐국은 물론이고 포병공창들에도 원료를 납품했으나, 1899년 스미토모 금속공업에 합병되어 사라졌다.[59] 프랑스와 대한제국의 협력에 대해서는 김명섭의 논문 <유럽의 델카세체제가 대한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관계에 미친 영향, 1898-1905>을 참조하는 것을 권한다.[60] 도쿄 공창은 30년식 소총이 개발된 곳으로 일본 육군의 소화기 생산을 맡았다. 일본군의 중화기 생산은 오사카 포병공창이 전담했다. 따라서 대포생산설비도 들여왔다면 도쿄공창이 아닌 오사카공창 역시 언급되었을 것이다.[61] ChatGPT 번역.[62] ChatGPT 번역.[63] 유사한 사례로 일본의 오사카 포병공창에서는 대포 생산 라인을 이용해 민간용 철제품과 건설자재를 생산한 바 있다.[64] ChatGPT 번역.[65] 이때 특히 이완용의 집과 재산이 송두리째 날아갔고, 그 가족들 역시 분노한 시민들에게 죽을 뻔했다.[66] (1907년 8월) 3일 오후 1시 30분.[67] 경시청 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를 의미.[68] 고타니 비서관 귀하.[69] 메이지 40년(1907년) 8월 5일 오후 2시 10분 발신.[70] 이토[71] 데라우치 육군대신.[72] 전환국 청사는 조선서적이 이전한 후 헐렸다. 대신 체신이원양성소가 그 자리에 건물을 새로 세우고 들어왔고, 1999년 천안으로 이전할 때까지 우정인재개발원이 자리잡았다. 현재는 재개발을 거쳐 KT의 신축 데이터 센터인 KT IDC 용산이 들어와 있다.[73] 총독부 인쇄국의 전신은 대한제국 탁지부 인쇄국이며, 그 전신은 전환국이다.[74] 이듬해인 1936년에 제작된 대경성정도에는 군기창 건물이 멀쩡히 남아 군용부지로 분류되어 있다. 이순우 연구원의 설명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지도에 변동사항이 반영되지 않은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75] 영상 설명에는 1951년이라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오류이며 1950년이 맞다.[76] 어느 학교인지 불명.[77] 일진회 계열 단체였는지, 대한매일신보에서 동년 12월 8일자 사설에서 이들의 기기창 설비 인수를 비꼬듯이 비판하기도 했다.[78] 이 중에는 신규식도 있었고, 한국최초의 조선공학도인 상호도 있었다.[79] ChatGPT 번역.[80] 황성신문 1909년 6월 19일자 기사에는 오사카조폐국에서 금속세공을 실습하고 돌아왔다는 한성미술품제작소의 이행일(李行一)이라는 기술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인물은 다른 기록들에서 한욱 소장과 함께 전환국에서 위원으로 근무했다고 언급된다. 따라서 한욱 소장 역시 이행일이 받은 것과 똑같은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81] 이 평가는 총독부에서 내린 평가일 가능성이 높다.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는 인물에 대한 평가란이 없기 때문.[82] 어떻게 습득했는지는 미상이나 기기창에서 익혔을 가능성이 그나마 높다. 1902년이면 렘네프나 페이외르 등의 외국인 기사들이 기기창에서 기사로 일하던 시절이기 때문.[83]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국비유학생 정도 된다.[84]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85] 질산은 화약의 원료다.[86] 백남열의 경우 무과에 급제하여 경찰로 관직 생활을 하다 군기창 기술자로 들어왔다. 기술교육을 따로 받았는지는 자료가 부족해 알 수 없다.[87] 이런 기록 누락은 자주 벌어지던 일이다. 가령 군복 공장이었던 책응제피소(柵應製皮所) 소장 홍종기(洪鍾起)는 군부 소속 기사였고 1899년부터 1904년까지 책응소를 전담하며 군복을 공급했으나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는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다.[88] 배요을[89] 平和會議에 對한 左右間 終了하엿을뿐더러 와싱톤에 在한 李大統領으로 屢次 召命을 받은 金奎植氏는 事勢에 巴黎를 出發하게 됨애 因하여 八月 六日에 巴黎萬國記者俱樂部에 晩餐會를 開하고 來賓은 法國側으로 衆議院 副議長 뢰(LEBOUCQ)氏와 前韓國砲兵學校敎授 뻬이외르(PAYEUR) 將軍 等이오. 俄國側으로 前憲法會議長 미노르(MINOR)氏와 前駐韓國公使代理 군즈불그(GUNZBOURG)男等이오. 中國側으로 李石曾 博士와 寥總領事 等이오. 此外에 美國人士와 國會代議士 諸氏와 各 新聞記者 等 七十餘名이 會集하여 席上에 李大統領의 祝電 朗讀과 金代表의 報告演說이 有한 後 來賓 諸氏의 懇篤한 祝辭가 有하고 三鞭을 擧하여 자조 大韓獨立萬歲를 嵩呼하엿으며 式場에 交叉한 韓法兩國旗는 輝煌燦爛한 光彩를 發하여 主客의 甚深한 印象을 주어 巴黎外交社會에 意味深大한 會合이 되다. - 歐洲의 우리 事業[90] 로이.[91] 현대 간체자로는 亚士洋行이다. 독일인이 운영하던 회사로 보인다.#[92] ChatGPT 번역.[93] ChatGPT 번역.[94] 광고마다 살짝식 다른데, 다른 일자에 올라온 광고에는 총기와 군도라고 하기도 한다.[95] 통감부가 1907년 8월 이후로 민간인의 총기제조와 소유를 금지했는데, 정황상 이 법률에 걸린 듯하다. 또는 정미의병과 직접 거래하다 들통났을 가능성도 있다.[96] 원래 이름은 육영학교였으나 이동휘가 고종을 배알한 자리에서 '보창(普昌)'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97] 한국명 배위량.[98] 한국명 맹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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