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말기의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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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八月十八日の政變.1863년 8월 18일(음력), 사쓰마 번이 아이즈 번과 협력하여 존황양이파들과 조슈 번 세력을 교토 정치권에서 추방한 사건.
2. 상세
1863년 초의 교토 정세는 존황양이 과격파에게 유리했다. 산조 사네토미를 중심으로 한 존황양이파 공가 세력과 쿠사카 겐즈이, 다케치 즈이잔 등 반막부 하급 사무라이들은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교토 인근에서 서양인 및 막부파, 개국파 인사들에 대한 폭력 및 암살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산조 사네토미가 이끄는 사절단은 1863년 초 에도를 직접 방문하여 에도 막부에 즉각적인 양이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정사총재 마츠다이라 슌가쿠와 쇼군 후견직 히토츠바시 케이키[1]가 이끌던 막부는 산조의 요구에 반발했지만, 대놓고 조정을 반대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양이 요구 자체는 수락하되 시간을 끌고 실제 양이를 위한 행동에는 거의 나서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했다.쿠사카 겐즈이와 의견을 같이하던 강경 양이파가 장악한 조슈 번은 이에 큰 불만을 가졌다. 이들은 막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하고 본인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양이 행동에 나섬으로써 천황의 조정 및 일본 전체를 양이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막부가 명시한 양이 행동 개시일인 5월 10일(음력) 다른 다이묘들은 막부의 신중론에 동의하여 이렇다 할 행동에 나서지 않았지만, 오직 조슈 번만이 인근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서양 함선들에게 포격을 가했다. 고메이 천황은 서양 세력을 불신하는 양이파에 가까웠지만. 조슈 번이 독단적으로 과격행동에 나선 뒤 천황과 조정을 끌어들이려는 것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막부로부터 교토 수호직에 임명되어 교토에 부임한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교토 치안 유지를 위해서는 존황양이 과격파 무사들의 제압이 필요함을 깨달았고, 휘하 아이즈 번 무사들과 신센구미 등 교토의 좌막파 무장 세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어린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츠가 이끌던 사쓰마 번 또한 교토에서 조슈 과격파가 득세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 존황양이 대신 공무합체를 지지하여 막부 및 조정에서 조슈를 몰아내고 사쓰마의 세력을 넓히는 것을 노렸다.
아이즈 번과 사쓰마 번, 교토의 좌막파 세력,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 조정의 공무합체파 인사들은 조슈와 존황양이파를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8월 18일(음력) 행동에 나섰다. 아이즈를 중심으로 사쓰마, 요도 등 여러 번의 병사들이 동원되어 조슈 번병을 황궁 방어에서 제외시키고 교토에서 쫓아냈다. 산조 사네토미 등 존황양이파 공경들은 조정에서 쫓겨나 조슈로 낙향해야 했고, 조슈와의 관계가 깊던 관백 타카츠카사 스케히로는 당장은 자리를 지켰지만 시마즈 히사미츠의 압박으로 12월 관백에서 물러나야 했다. 조슈 번주 모리 가문은 조정에서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교토의 존황양이파는 그 세력이 거의 일소되었다.
이후 정국은 시마즈 히사미츠가 주도하게 되었고, 구 히토츠바시파를 대표하는 인사들인 전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 전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 우와지마의 다테 무네나리, 그리고 쇼군 후견직 히토츠바시 케이키 등이 교토로 상경하여 참예회의를 구성했다. 이는 주요 다이묘들이 막부의 권력을 분점하여 형식적으로 조정을 존중하며 국정을 운영하려는 시도였지만, 히토츠바시 케이키와 시마즈 히사미츠의 갈등으로 참예회의는 곧 와해되고 다이묘들은 다시 낙향하였다. 한편 조슈 번 과격파는 무력으로 교토의 주도권을 탈환하려 시도했고, 이는 금문의 변으로 이어졌다.
[1] 훗날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