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15:44:20

정갑영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957, #003876, #003876, #002957);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rowcolor=#002957,#fff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에이비슨 오긍선 이영준 최동 이용설
<rowcolor=#002957,#ffffff> 제6대 1957년 연세대학교로 통합
김명선
연희전문학교 교장 · 연희대학교 총장
<rowcolor=#002957,#fff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언더우드 에이비슨 원한경 윤치호 유억겸
<rowcolor=#002957,#ffffff> 제6대 연희대학교 초대 총장 1957년 연세대학교로 통합
백낙준
연세대학교 총장
<rowcolor=#002957,#fff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백낙준 고병간 윤인구 박대선
<rowcolor=#002957,#ffffff>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박대선 이우주 안세희
<rowcolor=#002957,#ffffff>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박영식 송자 김병수 김우식 정창영
<rowcolor=#002957,#ffffff>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김한중 정갑영 김용학 서승환 윤동섭
}}}}}}}}} ||
제17대 연세대학교 총장
정갑영
鄭甲泳 | Jeong Kap-young
파일:정갑영 총장님.jpg
<colbgcolor=#002957><colcolor=#ffffff> 출생 1951년 8월 22일 ([age(1951-08-22)]세)
전라북도 김제시
현직 연세대학교 명예특임교수
대한항공 이사회 의장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학력 전주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 / 학사) (1975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제학 / M.A.) (1981년)
코넬 대학교 (경제학 / Ph.D.) (1985년)
약력 한국은행 행원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경제연구소장
한국산업조직학회장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장
연세대학교 정보대학원장
연세대학교 교무처장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부총장
연세대학교 총장 (제17대 / 2012.2.1.-2016.1.31.)
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금융분과위원장
감사원 감사혁신위원장
종교 개신교[1]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연세대 재임 시절
3.1. 교수 시절3.2. 총장 취임
3.2.1. 국제캠퍼스 이전 추진3.2.2. 백양로 재창조 사업3.2.3. 용재관 철거와 신경영관 건축3.2.4. 구조조정과 행정조직의 효율화3.2.5. 학사제도의 개편
3.3. 임기와 정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 김한중에 이어 17대 연세대학교 총장에 올랐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특임교수로 재직중이다,

2. 생애

1951년 8월 22일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47회)를 졸업하고, 1971년에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1975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입행했고, 산업연구원에 근무하던 중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경제학 석사, 1985년에는 코넬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산업조직론과 국제경제학이다. 국비유학 3기(1979년) 선발자.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85년 귀국한 이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에 부임하여, 2016년 8월 정년까지 근무하였다.

1999년 연세대 경제연구소 소장, 2000년 동서문제연구원장 등을 거쳤고 2004년에는 연세대 정보대학원장과 교무처장을 역임했고, 2006-08년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부총장, 2012-16년 연세대 17대 총장을 역임했다.

2014년 일본 게이오 대학교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2015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교육학 박사를 받았다.
2016년 정년 퇴임이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영국 Routledge에서 발행하는 저명 학술지 Global Economic Review의 Editor를 맡고 있다.

"매경 이코노미스트 상"과 '다산 경제학상"을 수상했고, 한국언론인연합회에서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16년에 정부로 부터 "청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의 산업조직>, <산업조직론>, <미시경제학>(공저), 교양서로 《카론의 동전 한 닢》 (CEO 100인이 선정한 베스트셀러 선정), <열보다 더 큰 아홉>, <나무뒤에 숨은 사람>, 위기의 경제학> 등 다수가 있다.

3. 연세대 재임 시절

3.1. 교수 시절

학교에서 미시경제학, 산업조직론을 강의하였다. 미시경제학은 동료 교수 성백남[2]과의 공저 <미시경제학> 책은 유명한데, 타 미시교과서와 달리 사례가 풍부하다고 한다.
얼마없는 산업조직론 책을 쓰기도 했다.

3.2. 총장 취임

총장 취임 이전 미래캠퍼스 부총장[3]으로 재임, 미래캠퍼스에 전국대학 최초로 RC (Residential College)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기숙사를 추가 신축하여, 신입생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학업을 할 수 있는 기반과 제도를 마련하였다. 성공적인 RC 프로그램 추진으로, 미래캠퍼스 생활 및 학업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 또한, 향후 송도 국제캠퍼스에서 실시된 RC 프로그램 추진의 좋은 벤치마킹이 되었다. 2008년 대학 교회를 완공하고 봉헌하였다.
이밖에도 기숙사 신축과 행정관, 미래관, 원주의료원의 개증축 등 원주 캠퍼스의 획기적인 전기를 만든 여러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2012년 2월 17대 총장에 선임된 정총장은 연세대의 '제3 창학'을 기치로 송도 국제캠퍼스 이전과 RC 실시, 백양로 재창조, 제중학사와 법현학사의 통합신축, 경영관 신축, 공과대학 증축, 이과대학 증개축, 원주의료원의 신증축 등 연세대의 숙원 사업들을 대부분 해결했다. 또한 석학교수의 상시특별채용과 언더우드 국제대학의 증원,글로벌 경쟁력 제고 등을 추진했다. 이러한 성과를 반영하여 연세대는 영국 THE (Times Higher Education)의 명성도(Reputation)평가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80위권(사립대중 21위)에 오르기도 했다.

제3창학은 1885년 창립이후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의 합병이전(1885-1956)을 제 1창학, 합병이후 국제캠퍼스 설립까지를(1957-2011) 제 2창학, 그리고 2012년 이후를 제 3창학으로 구분한 개념이다.

3.2.1. 국제캠퍼스 이전 추진

2011년 말 연세대 총장으로 선출, 2012년부터 본격적인 임기를 시작한 정총장은 2006년 이래로 누가 갈 것인가를 두고 폭탄 돌리기가 이어지고 있던 송도 국제캠퍼스 이전 문제를, 아직 입학하지 않은 2013년 1학년 신입생들을 보내고, 기숙사 교육 등을 통한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는 혁신적 방안으로 추진하였다.[4]. 정 총장의 의도는 적중하여, RC 를 통한 신입생 교육은 연세대의 변화에 많은 기여를 한다. 또한, 2012년 4월 초 당시 총학생회 주도로 모인 이전 반대 항의 집회가 백양로에서 벌어졌지만, 이후 송도캠퍼스 설치 반대 운동은 동력을 상실하였다. 실제 RC는 세계적 명문사립대학에서 대부분 시행하고 있는 선진대학교육으로 미래캠퍼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송도에 도입하여 연세대학교는 국내 최초로 선진형 RC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 총장 시절까지는 정 총장이 미래캠퍼스의 부총장을 역임해서 본인이 미래캠퍼스에서 시행을 먼저 해서 그런건지 몰라도 서울캠 입학홍보자료에 RC 교육이 미래캠퍼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으나 그 이후부터는 미래캠퍼스 이야기는 빠지고 국제캠퍼스에서 시작되었다고 작성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후 국내에서는 POSTECH (포항공대)에서 도입했고, 최근 서울대 총장후보들이 모두 RC를 공약한 바 있다.

교무처장으로 재직시에는 언더우드 국제대학(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를 주도적으로 설립하여 연세대의 글로벌화에 전기를 만들었고, 정보대학원 설립추진 위원장을 맡아 국내 최초로 IT 전문 대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3.2.2. 백양로 재창조 사업

2012년 하반기부터는 연세대 신촌캠퍼스 정문에서 본관 앞까지 이어지는 주도로인 '백양로'의 지하공간을 개발하는 약 3만평이상의 공사를 추진했다. 이 사업은 수십년 동안 학내의 숙원사업으로 많은 총장후보들이 공약으로 제시햇으나 실제로 추진하지는 못하였다. 백양로는 캠퍼스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중심도로로 1일 교통량이 1만여대가 넘고, 차량 공해와 잦은 사고 등으로 주요한 현안으로 남아 있었다. 정총장의 "백양로 재창조 프로젝트"는 초기에 학생과 교수들의 단식과 농성 투쟁을 비롯한 강력한 반발이 있었음에도 2만2천여명의 기부를 바탕으로 강력하게 추진하여 2015년 10월에 완공하였다. 친환경의 새로운 캠퍼스 공간이 조성되어 연세대의 면모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고, 의료원과 공과대학, 백양로의 주차장을 지하로 모두 통합하여 편의성이 크게 증갇었다. 총학생회에서는 그간 오랜 기간 문제가 제기되어 온 자치공간 확충을 백양로 지하공간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했지만, 2015년 하반기 완공된 지하공간의 모습은 2012년 당시 학생사회가 우려했던 바와 똑같이 상업공간과 주차장, 그리고 학생이 아닌 교직원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과 컨벤션 룸이 많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우려의 목소리들을 반영해 현재는 학생들도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으며, 예약만 한다면 학생의 경우 저렴한 가격에 스터디룸을 사용할 수 있다.

특히 공과대학과 백양로 지하, 의료원을 모두 주차장으로 연결하고 많은 편의시설이 들어와 있어 학교와 병원의 만성적인 주차난을 해결하였으며, 지상은 큰 공원과 같은 시원한 녹지공간이 조성되어 캠퍼스의 모습이 완전히 세계적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3.2.3. 용재관 철거와 신경영관 건축

연세대에서는 2010년경부터 용재관을 경영대의 새로운 건축 부지로 삼는 것에 대해 찬반이 다투워왔으나, 재임 기간중에 결국 용재관을 철거하고 신경영관을 건립했다. 당시 경영대는 상경대와 한 건물을 쓰며 만성적인 강의실 부족 사태를 겪고 있어, 공간 확충의 필요성 자체는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 그러나 기존에 존재하는 유휴공간 활용의 효율화를 통해서도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언젠가 지을 경영관이었지만, 총장 개인적으로는 현 용재관 부지의 신축을 고사했다고 한다.[5] 차라리 대우관을 리모델링 및 증축하여 사회과학대학의 건물과 연결하고 종합적인 사회과학 컴플렉스를 대안을 제안했다고 한다. 참고로 과거 대우관 이전 상경대 및 경영학교실단으로 사용하던 백양관의 신증축도 대안으로 고려됐으나, 현재 학부대학과 학내 기관들이 즐비하게 위치하고 있는 공용건물인 점과 결정적으로 백양관 지하에 파워플랜트가 자리잡고 있어 리모델링 혹은 재건축 시 신촌캠 50% 이상의 가동이 중단되기 때문에 해당 대안은 철회됐다. 경영대 신축건물부지로는 과거 목공소가 있던 장소로 확정하고 설계 의뢰가 이루어졌으나, 김한중 총장 재임기간 중에 갑자기 용재관으로 변경하면서 상당 기간 학내 이슈와 갈등이 되었었다.

용재관은 연세대 초대 총장 용재 백낙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7년 건립된 건물로서, 건물의 역사가 깊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축사 면허 1-1호’를 보유한 한국 최초의 건축사 김재철 선생이 설계를 했다는 점과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출신의 소설가이자 올해 9월 25일 침샘암으로 별세한 최인호 씨(68)가 쓴 ‘바보들의 행진’의 무대가 된 곳이라는 점 등 문화사적 의미가 깊은 등록문화재여서 논란이 되었다.[6] 더군다나 철거 몇년전에 용재관은 내부 리모델링을 거쳐 상당히 좋은 계단식 강의실, 회의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경영대의 극심한 고집부리기에 결국 정총장은 경영대학의 원안을 대폭 수정하여 이사회의 결정대로 용재관으로 위치를 양보하되, 건물의 층수와 위치, 건물 외벽, 진출구 등을 기존의 본관, 대강당, 백양로 등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대안을 만들어 경영관을 신축하여, 10년여 이상 현안이 되었던 경영관을 준공하게 되었다.

2016년 현재 경영대 학생과 교직원들뿐만 아니라, 타단과대는 물론 심지어 주변의 이대나 서강대 등 타대생들까지 소문듣고 와서 경영대 도서관을 사용(아닌 애용)한다.

3.2.4. 구조조정과 행정조직의 효율화


국제 캠퍼스에서 신입생 교육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정총장은 구조조정과 행정조직의 효율화를 단행하였다. 신규 교직원의 채용을 억제하고, 행정직급 등을 조정하여 인건비의 절감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제 캠퍼스의 청소 용역, 본교의 비정규직 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정 총장이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백양로 사업과 인력 조정 등을 적극 추진했다는 설도 있었으나, 총장 재임 중 총리직을 포함한 정부 고위직을 수차례 사양한 보도 등을 감안하면, 정치적 야망보다는 수년 째 지속된 등록금 동결로 악화된 재정을 건전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추진되었다는 평가가 더 설득력이 있다. 실제 인력 감축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구조조정을 통한 경비절약의 노력이 추진되었다

3.2.5. 학사제도의 개편


정갑영 총장은 송도 국제캠퍼스의 활성화를 위래 "언더우드 국제대학(UIC)"을 증원하여 보다 많은 학생들이 글로벌화된 학부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과다하게 일반화된 재수강 제도를 개편하여 재수강 횟수를 3회로 제한하는 학사개편을 단행했다. 재수강제도가 보편화된 결과 저학년 학생의 피해가 누적되고, 학사관리가 부실하게 운영되며,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일부 학생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오히려 수강신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성과도 있었다.

3.3. 임기와 정년

2016년초 임기를 마감한 정갑영 총장은 2016년 여름 연세대학교에서 정년 퇴직을 하였다. 지난 20여 년간 총장직선제가 시행된 이후로, 연세대에서 총장 임기를 제대로 마무리하고, 교수사회의 일원으로서 정년 퇴직을 한 경우가 없었다. 거의 30년 만에 연세대에서는 총장직을 마치고, 평교수로서 임무를 다하고, 정년퇴직을 맞이하는 일이 있었다.

한편 연세대에서 총장의 연령에 임기에 관해서는 김한중 총장 재임시에 관련된 이사회 정관 개정을 추진했다. 즉 정관상 교수 및 총장 정년이 65세의 세부 조항을, 기존에는 임기 만료 시까지 65세를 넘기지 않을 사람만 총장 후보로 출마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김한중 총장 재임 시에 이사회에서는 선거 출마 당시에 65세를 넘기지만 않으면 출마할 수 있다고 수정하였다. 이 규정에 따르면 김한중 총장이 연임에 도전할 수 있었으나, 규정을 바꾸는 당사자는 출마할 수 없다는 여론 등을 고려하여, 연임에 도전하지 않았다. 김한중 총장은 2012년 명예퇴직 신청을 하고, 연세대에서 명예퇴임을 하였다.

정갑영 총장은 정년 이후 임기중에 실시했던 백양로 재창조 사업과 송도 캠퍼스의 Residential College 등 많은 사업과 구조개혁 등의 내용을 정리하여 재임 당시의 실처장들과 함께 "대학교육의 혁신"(21세기 북스, 2016)을 출판했고, 재임 중요 연설문을 정리하여 "1461일의 도전"(21세기 북스, 2016)을 발간하였다. 2018년에는 송도 국제캠퍼스의 정착과정과 교육과정을 학부대학 교수들과 함께 정리하여 "미래인재와 대학혁신" (이담북스)를 저술하였다. 정 총장 재임 기간에 실시되었던 많은 혁신과 사업, 구조조정 등은 모두 위 저서에 정리되어 있다.

정갑영 총장은 정년이후에도 명예특임교수로서 2021년 봄학기까지 5년간 송도 캠퍼스의 1학년을 대상으로 "경제학의 이해"와 "세계경제의 메가 트랜드"등을 강의했으며, 산업자원부의 사업재편심의위원회 위원장, (주) 대한항공 이사회 의장, 유니세프 한국위원화 회장 등을 맡아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1]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 장로. 사실 명색이 미션스쿨이고 재단 이사회에도 개신교계가 참여하다 보니 연세대학교에서 고위직을 맡는 교수들은 대개 개신교다.[2] 디백남으로 알려진 교수이다[3] 연세대 전체를 총괄하는 총장 다음 가는 직위인 부총장들 가운데서도 미래캠퍼스를 담당하는 부총장. 즉 독립적인 미래캠퍼스의 특성상 권한과 책임이 부총장 위주로 되어 있음[4] 2006년부터 송도캠퍼스 계약 이후 초기에는 1학년을 보낸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학생 들의 반발로 중단되고, 계속해서 누가 송도로 가느냐가 첨예한 문제가 되어왔다.[5] 용재관의 철거는 경영관 건설 당시에도 최근에 리모델링한 건물을 철거함으로써 생기는 낭비와 용재관의 문화, 건축학적 역사성이 지적되었으므로 충분히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6] 인용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