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8 18:44:19

김운용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김(성씨)/목록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이나즈마 일레븐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김운용(이나즈마 일레븐)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대한민국 육군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김운용(군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대한태권도협회의 역대 회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대 채명신
2대 박종태
3대 최홍희
4대 노병직
5대 김용채
6대
7대 김운용
8대
9대
10대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최세창
16대
17대 이필곤
18대
19대 김운용
20대
21대 구천서
22대 김정길
23대
24대 홍준표
25대
26대 김태환
27대이승완
28대최창신}}}
파일:대한태권도협회.png


파일:external/img.seoul.co.kr/SSI_20130331180609.jpg

1. 소개2. 생애3. 부정부패4. 2015년 올해의 스포츠영웅 논란5. 비판6. 반박7. 총평8. 프레이저 보고서9. 태권도 실력10. 협상의 귀재

1. 소개

金雲龍
대구광역시 출신. 1931년 3월 19일 ~ 2017년 10월 3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국제스포츠연맹기구(GAISF) 회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를 지냈으며 1986년부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했다. 1992년에는 IOC 부위원장에 당선되었고 1993년 2월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태권도를 세계화시키고 올림픽 정식종목으로까지 채택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아울러 88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IOC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국제 스포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2. 생애

경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의 서울 점령을 겪었다. 서울 수복 직후 군에 입대하여 미국 육군보병학교로 세 차례 군사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각종 외국어에 매우 능통해 제11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전속부관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를 이끌고 있던 이종우, 엄운규 등에 의해 태권도계로 영입되어 1971년부터 20년간 대한태권도협회장을 역임했다. 1973년 창설된 세계태권도연맹(WTF)의 초대 총재를 맡게 된다. 태권도 명칭을 고안한 최홍희가 정권 인사들과의 불화로 해외로 망명해 창설한 국제태권도연맹[1]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지만, 김운용은 자신의 소통 능력 +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외국어능력 + 정권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전세계적으로 WTF가 주축이 된 태권도 보급에 성공하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쌓게 된다. WTF 창설 이듬해인 1974년에는 국제 태권도 대회인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김운용은 태권도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태권도가 국제스포츠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공인화 작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975년 10월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에 가입하여 태권도가 세계 스포츠계에 정식으로 인정받는 스포츠가 되었다. 이어 1980년 8월에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승인을 받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어 태권도를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시키면서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1979년에는 NOF(국제경기연맹비올림픽종목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닌 스포츠 종목들의 종합 스포츠 대회인 월드 게임의 창설에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는 월드 게임을 관장하는 기구인 국제 월드 게임 협회(IWGA)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그 자격으로 초대 월드 게임인 1981 산타클라라 월드 게임의 개회선언을 하기도 했다.

1986년 대한민국의 유일한 IOC위원이었던 박종규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1986년 IOC 위원이 되었고[2] 아울러 같은 해에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2004년까지 장장 18년간 회장직을 역임했다.

서울올림픽 성공이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1992년 IOC부위원장까지 올랐다. 1994년 9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103차 IOC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태권도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하게 한 역사적 위업을 이루어 냈다.

이런 국제 스포츠계의 명성을 등에 업고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장까지 되면서 국내체육계를 대표하게 되었다. 세계스포츠계에서도 한때 사마란치의 뒤를 이을 차기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까지 했으나 결국 IOC 위원장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 시절 그의 직책은 국기원장, 대한태권도협회장, 세계태권도연맹(WT) 총재,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장,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국제경기연맹비올림픽종목회의(NOF) 의장 등이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수 차례 고사한 끝에 국회의원[3]까지 겸하게 된다.[4]

6개 국어(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창한 외국어 실력에 특유의 친화력과 인맥 쌓기로 스포츠 외교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의 위상을 크게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7년 10월 3일 오전에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7세.

3. 부정부패

30여년 간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끊임없는 부패 스캔들이 나왔다. 김 씨 스스로도 "IOC 위원 중 이익 없이 명분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고 했을 만큼 국제올림픽 위원회가 복마전 양상을 보이는 와중에 대권에 도전하게 되자, 물밑에 있는 개인 비리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김운용이 IOC 위원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커지자,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가, 김 씨의 미국 거주 중인 아들과 관련된 스캔들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 직 사임 압력을 받게 됐다고 보도하는 선공을 가한다. 김운용의 피아니스트인 딸 김혜정(Kim He Jung)씨의 연주회 문제로도 논란을 빚어왔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도 더타임스. 지난 90년 호주 멜버른 시가 올림픽 유치를 준비하던 때 김씨가 멜버른 교향악단과 협연했으며 지난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예술 축제에서도 독주자로 참가했고 솔트레이크시티의 유타 교향악단과 2차례 공연한 대가로 5천달러를 받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김혜정씨가 국제콩쿨 참여시 심사위원을 돈으로 매수한 것도 지적했다.

이런 진흙탕 싸움 와중에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위원장 재임 기간 동안 IOC 부위원장으로 재직하며 2인자로 공인받았으나, 후기 무렵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갈등은 점점 불거진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의 유치 과정에서 뇌물 스캔들이 드러났고, 김운용 본인을 포함한 IOC 수뇌부 전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자 이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사마란치와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던 것이다. 이 건이 결정타가 되어 사마란치는 김운용 대신 자크 로게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지했으며, 김운용은 위원장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김운용 세력은 IOC 내에서 점점 위축되었으며, 특히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대회를 전후로 김운용 인맥이 상당 부분 IOC에서 쇠퇴, 이듬해인 2003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전에서는 김운용 본인까지 완전 몰락하게 되었다.

선거 패배로 휘청거리는 김운용에게 마지막 비수를 가한 건 2003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과정 스캔들로, 모호한 태도를 지적하며,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전에서 밴쿠버에 패배한 후 "동계올림픽 유치 포기 조건으로 IOC 부위원장직 확보", "기자회견 방해", "뇌물수수" 등등 각종 구설수에 오르면서 언론 및 인터넷으로 연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안팎의 공격으로 결국 국내외의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고, 2005년에는 IOC 위원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이 때의 충격으로 투병 생활을 하기도 했다.

2004년 1월 28일에는 배임수재, 횡령 등 각종 비리 혐의로 검찰에 의해 구속수감되었다. 검찰은 구속영장에서 "김 부위원장의 비리는 '횡령 범행의 만물상 수준'"이라며 "세계태권도연맹(WTF) 회장 및 국기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공금 38억4천여만원을 빼낸 뒤 이 같은 개인 용도로 헤프게 썼다"고 지적했다. 또 "이번 검찰 수사와 관련, 변호사 비용도 공금으로 처리했다"고 꼬집었다. 수사 관계자는 또 "김 부위원장은 2001년 11월 국기원 공금 4억원을 WTF에 지원한 것처럼 서류를 꾸민 뒤 IOC 위원장 선거비용과 출장비 등으로 썼다"고 공개했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20040028-00_01123517.jpg

그 후 감옥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단기간에 가석방되어서 그에 관한 논란이 거세지기도 했다. 월간 중앙이 가석방 전에 그의 가석방을 예언하는(?) 기사를 써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4. 2015년 올해의 스포츠영웅 논란

대한체육회는 2011년부터 스포츠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보이고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사람을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하고 있었는데, 2015년부터 나이제한 규정을 없앤 결과, 김연아도 후보가 되었고 인터넷 투표에서 김연아가 1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대한체육회는 김연아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선정위원회에서 탈락시켰으며 나이제한 없앴다며 이게 무슨소리야, 그 대신에 김운용을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김연아를 탈락시킨 것도 납득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김운용이 선정된 것도 기가 막힌 일이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김운용은 세계태권도연맹 후원금 유용 등 업무상 횡령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직과 세계태권도연맹총재직, 국기원원장직에서 물러났으며, 2004년 1월 법원에서 징역 2년에 추징금 7억 9천만원을 선고 받고 복역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2005년 6월 30일 잔여 형기 10개월을 남기고 가석방 되기는 하였지만, 이미 2000년에도 김운용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유치를 둘러싼 비리 의혹으로 곤욕을 치렀고, 급기야 2002년에 대한체육회장과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내놓은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2010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결정하는 투표를 앞두고 IOC부위원장 재도전을 위해 오히려 유치를 방해했다는 논란에 휩싸여 명예훼손 소송까지을 제기하여 구설에 오르기도 하였다.

김운용의 이런 경력을 보면 장관 인사청문회 조차 통과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이런 사람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한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김운용이 IOC부위원장을 사퇴할 당시에 벌어진 여러가지 추태(?)를 생각해보면 그를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하는 것은 국제 스포츠계에서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일인데, 대한체육회는 왜 굳이 김연아를 제외하고 김운용을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하였는지 등등의 의문이 제기되었다.

2016년 하반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11월에는 최순실의 측근 차은택이 주도한 늘품체조 행사에 김연아 선수가 불참했던 것과 관련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12월에는 김연아의 소속사측에서 "늘품체조보다는 2012년, 새누리당이 초청한 행사를 거절한 일이 더 연관있는 듯 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하였다.

5. 비판

김운용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 IOC 위원에 국제스포츠계의 실력자이면서 '2010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새로 들어선 자크 로게 위원장 체제에서 자신의 부위원장직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동계 올림픽 유치를 포기했다는 루머가 끈질기게 돌았다.

둘째, 특히 2010 동계올림픽 유치전 당시에는 투표 전날까지 집요하게 2014년을 노리자면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몰고 갔다.

셋째, 부정부패로 사법처리를 받았으며, 이어서 IOC의 부패스캔들에 연루되어 이미지를 구겼다.

넷째, 아폴로 안톤 오노의 금메달 강탈로 전국민적인 분노가 치솟던 2002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당시 이 문제를 그냥 유야무야 덮어버렸다.

즉,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30년 동안 그의 인맥과 업적을 보고서 수많은 문제를 덮어주다가 더 이상 어찌하기 힘든 수준이 되자 까발려 버렸다는 것이다.

6. 반박

이에 대한 반박 역시 있는데, 마시지 않겠다고 뱉어낸 물도 다시 삼키게 될 수 있다는 요지.

첫째, IOC 부위원장 자리와 대회유치 포기를 맞바꾼다는 발상 자체가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점이다. 해외, 특히 서구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냉정'하다. 나라 밖에서 기반을 쌓고자 하는 사람이 그 정도로 재물과 정치적인 힘 양쪽 다 쥐고자 집착했다면, 아무리 수완이 좋다한들 30년 동안 해외 무대에서 버티기 힘들다.

둘째, 그 때 김 부위원장이 "이번에는 안 되지만 다음 유치 때는 희망이 있다"고 IOC 내부 분위기를 전했던 것을 김진선 강원지사가 자의적으로 해석해 김운용 씨를 비난하는 여론몰이를 한 것이나[5][6] 분위기에 편승한 일부 언론이 당시 경쟁국이었던 캐나다(밴쿠버) 언론의 보도까지 인용해 김운용 씨를 비난했던 것 또한 문제의 소지가 많다.

셋째, 비록 2001년 IOC 위원장 선거 후 주춤한 면이 있긴 하나, 어찌됐든 간에 30년 동안 김 씨가 쌓아올린 국제 스포츠계의 인맥은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인데,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우리가 30년 공들인 것을 스스로 내친 격이 되었다.[7][8]

넷째, 2002년 김동성 사태 당시, 우리 한국 선수단에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보이콧"에 나서자, 대회 운영위원회 및 IOC에서 급히 진화에 나선 적이 있다.[9] 이 때만 해도 뒤에서 받쳐줄 김운용 부위원장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이런 대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후 2004년 양태영(체조), 08년 수영(박태환), 야구(특히 결승전), 12년 펜싱(신아람), 16년 레슬링(김현우) 등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에 분루를 삼켰거나 위기를 겪은 사례가 적지 않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김 부위원장의 부재가 아쉬운 일이다.

7. 총평

정몽준FIFA 부회장과 더불어 한국 스포츠계의 국제 고위간부로 유명세를 떨쳤으나 결국 둘 다 씁쓸하게 퇴장하였다. 하지만, 문대성 선수가 IOC 위원이 되는데 측면지원을 하는 등 아직 국제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 남아있는 듯하다.[10] 그렇긴 해도 정몽준 前 부회장은 비록 실권은 없을지언정 명예부회장으로 무난한 은퇴를 한 것과 다르게, 김운용은 정적들이 거의 뿌리까지 뽑으려 드는 모양새인데다, 애써 후임자로 발탁한 문대성 선수가 국회의원 출마과정에서 오명을 뒤집어 쓰는 악재까지 겹쳤다.

외교관 출신으로 국가적 지원을 잘 받아 태권도의 성장을 이끌어내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부 태권도인은 태권도의 발전방향에 있어서 무도, 격투기적인 면보다는 운동경기 및 보급에 더 치중한 면을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ITF 태권도 측에서는 그를 만악의 근원 취급하며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김운용 이후 이연택 태권도협회장 등의 후임들이 "태권도 용어 공용화 허용"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면 아직은 구관이 명관인 현실.[11] 또 한 가지 명심할 점이, 도올 김용옥이 저서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최영의라는 희대의 무술가를 통해 세계로 발돋음한 가라데와 달리, 듣보잡 국가의 듣보잡 무술에 불과했던 태권도가 가라데와 차별화에 성공하고 심지어 세력을 역전까지 해버린 데에는 일찌감치 국기원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꾀해 태권인의 역량을 총집결했던 김운용의 수완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스포츠가 아닌 순수한 무도를 내세우는 단체 가운데 감히 태권도나 유도의 명성과 규모에 비견할만한 단체가 존재하는지 생각해보자.

8. 프레이저 보고서

프레이저 보고서를 통해 드러난 영문명은 미키 김(Mickey Kim)이다.

프레이저 보고서에서도 Mickey Kim이란 이름으로 몇 차례 언급되는 편. 보고서의 용어사전에서는 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괄호 안의 내용은 레드북에서 나온 국내 번역판의 설명이다.
Kim Un-Yong (Mickey Kim) - Former aide to Kim Jong Pil and counselor at the ROK Embassy; later became aide to Park Choung-Kyu; head of the Korean Tae Kwon Do Association as fo 1978.(김운용 (Mickey Kim) - 김종필의 전 보좌관,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 후에 박종규의 보좌관이 됨. 1978년 현재 태권도협회장)

외교관 경력이 있다는 것은 그가 주미 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을 맡은 것에서 나온 것이다.

9. 태권도 실력

10단이다. 태권도는 유도의 단·급 제도를 받아들여[12] 9단이 끝이지만 태권도협회 회장이면서 IOC 위원으로 태권도 세계 보급에 힘쓴 공로로 명예 10단이 수여됐다.[13][14] '명예' 10단이면 실제로는 태권도를 전혀 배우지 않은 게 아닌가 싶겠지만 2000년대 중반 대구은행장을 지낸 이화언 9단 등 젊었을 때 김운용에게 태권도를 배웠다는 사람들이 있고, 또한 박정희 정권 시절 한때 대통령경호실에서 근무했다는 점, 그리고 주미 대사관 참사관 시절 다른 나라 외교관들 앞에서 격파 시범을 보였다는 일화 등을 감안하면 실제 무술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0. 협상의 귀재

IOC 위원을 장기간 지냈을만큼 협상면에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특히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을 2년 앞둔 1992년 2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가 태권도를 정식 종목에서 배제하자 국내 체육계가 OCA에 영향력이 큰 중국쿠웨이트 등의 몇몇 회원국 체육계에 사절단을 급파하고 태권도 선수가 제법 있는 일부 국가와 공조하는 등의 대응에 나섰는데, 그 와중에 김운용은 셰이크 아마드 OCA 위원장을 전격적으로 초청해 국기원에 데려갔다.

셰이크 위원장은 그냥 태권도를 소개하는 자리이겠거니 하고 별 생각없이 갔는데 김운용이 안내해준 전시관에는 선친이자 초대 OCA 위원장인 파하드 아마드의 여러 사진이 있었다! 파하드는 걸프 전쟁 때 이라크군과의 교전 도중 전사했고 설상가상으로 쿠웨이트 왕궁이 불에 타면서 파하드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죄다 유실되어 그야말로 기억에 의존해야만 떠올릴 수 있었는데, 김운용이 선친의 생전 사진은 물론이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 때의 영상 자료까지 건네줬던 것. 이에 셰이크 위원장은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김운용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고 마침내 히로시마에서 태권도 경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셰이크 위원장이 입국 당시 태권도의 종목 채택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소 직설적인 인터뷰를 할 정도로 김운용과 사이가 제법 막역한 편이었다. 물론 김운용이 선친 파하드와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도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극적으로 사망한 선친을 추억할 수 있는 큰 선물을 김운용이 준비한 덕분에 태권도의 종목 채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도 있다.


[1] 친북 성향으로 기울어진 최홍희가 캐나다에 국제태권도연맹 본부를 두고 전세계적으로 태권도를 보급하자, 박정희 정권에서는 태권도 보급을 남북간의 체제경쟁으로 인식하고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2] 박종규의 사망 직후 5공의 주요 실세들이 IOC 위원직에 탐을 냈고 실제로 전두환 대통령이 그 중에 한 명을 선택하려 했는데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김운용을 선택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여담으로 1986년에는 스위스 IOC 본부에서, 1987년에는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사마란치를 직접 만나 설득했는데, 사마란치는 "김운용 말고는 안된다. 만약 다른 인물을 고집한다면 한국은 IOC 위원이 없는 상태로 1988 서울 올림픽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일방적인 엄포를 놓으며 요지부동. 사실 IOC 위원 임명 권한이 IOC한테 있는 판에 위원장이 직접 김운용을 마음에 들어한 이상 제아무리 전두환이라 해도.....[3]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수 차례 고사했다고 한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을 회고하면서 "세간의 시선과는 다르게 보수적인 인물들이 주변에 많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남북관계 문제에 있어서는 이상주의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4] IOC 위원장 선거 출마가 예상되는 시점부터 미국 언론의 공격이 거세지자, 김대중 대통령이 김 부위원장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5]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둔 것은 당초 2010년 평창군 유치전이 실패하면 2014년 유치전에는 무주군을 밀어주기로 약속이 됐던 것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03년 유치전 실패 후 부각된 '김운용 뒷거래 스캔들'로 "다시 한 번 평창이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으며, 무주 유치전 얘기는 쏙 들어가다시피 했다.[6] 아울러 정부에서 사실상 유치전 참가 자격을 잃어버린 무주 주민들을 달래고자 본래경주시춘천시로 갈 분위기였던 태권도 공원을 무주에 유치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7] 2011년 7월, 남아공 더반에서 경쟁도시 뮌헨(독일)을 38표, 안시(프랑스)를 56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1차 투표만에 개최지 선정을 종결시켜버린 압승을 거두고도, 김진선 강원지사가 부각되지 못하고, 발표자였던 나승연 씨나 김연아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 과연 김 지사의 '겸양' 때문이었을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김 지사는 자신의 추측만으로 우리나라가 30년 가까이 쌓아올린 스포츠 외교 기반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죄를 지은 것이다.[8] 참고로 1996년, "2002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성공적으로 유치한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장은 이때부터 대선에 나설 수도 있는 '잠룡'으로 평가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1988 서울올림픽 당시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박세직자유민주연합 부총재 또한 여당 내외에서 대권 도전 가능성이 있는 유력인물로 주목받기도 했다.[9] 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 김연아 선수(피겨)가 금메달을 강탈당했는데도, "차기 개최국이 논란을 일으킬 수는 없다"는 명분으로 아무 말 못하는 대한빙상연맹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의 기사(댓글까지)를 참조해보시기 바란다. http://sports.media.daum.net/sports/general/newsview?newsId=20140222054404705[10] 문 선수 본인의 처신도 훌륭했지만, 김운용 씨가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을 만나고 예전 '지인'들에게도 지지를 부탁하는 등의 배후에서 힘을 써준 점도 무시 못한다(국회의원 출마를 고사했더라면 문도리코까지는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11] IOC 위원 중 그 누구도 용어 공용화를 언급한 사람이 없었다는데 알아서 긴 꼴.[12] 정확하게는 바둑의 단·급 체계를 유도가 도입했고, 이게 유도와 제휴 관계에 있던 가라테에 이식되었다가, 한국에서 가라테를 태권도로 개조하면서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13] 당시 태권도 수련 인구는 5천만을 훨씬 상회했다(2006년 기준 1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정).[14] 후안 카를로스 1세와 (1994년 IOC 총회에서 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에 큰 몫을 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도 명예 10단이다. 특히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실력으로 (초단에) 입단한 경력이 있는 진짜배기(?) 유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