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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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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하제일 서울법대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현수막...) 한국제일이라 했으면 자연스러웠을 텐데

1. 개요2. 연혁3. 역사
3.1. 법관양성소와 경성법전3.2. 경성제대 법문학부3.3. 경성법전과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통합3.4. 문리대학과의 강의실 분쟁3.5. 법학과와 행정학과3.6. 사법학과와 공법학과3.7. 법과대학 폐지
4. 학생회5. 여담6. 출신 인물

1. 개요

약칭은 서울법대. 서울대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단과대학이었으며, 2018년 2월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변호사자격 소지자의 대부분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특히 고위층은 그 비율이 엄청나다. 1990년 당시 신임 검사의 49%, 신임 판사의 61%였다. 다만, 그 비율은 근래들어 점점 희석되고 있으며, 2010년 당시 신임 검사의 17%, 신임 판사의 35%만이 서울대 법대 출신일 정도로 줄어들긴 했다.참조

입결은 대한민국 대학 전체에서 세계관 최강자 수준이며, 일반적인 의대는 물론 서울대 의대조차 깨버리던 유일한 비의대 학과이다.[1][2]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낙방하고 같은 학교 내지는 연세대학교 의예과를 합격하는 후덜덜한 사례까지 발견된다[3]. 그러니까 이 학과의 합격통지서가 상위 0.1% 이상의 학업성적을 증명하는 일종의 보증수표였던 셈.[4]

2. 연혁

경성법과대학
1895 법관양성소
1909 한성법학교
1911 경성전수학교
1922 경성법학전문학교
1944 휴교[5]
1946 경성법과대학 학부
경성법과대학 예과
경성법과대학 전문부
경성제국대학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률학과
1927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1937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제1류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서울대학교
1946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1948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률학과[6]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7]
195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1975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1981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법학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
1997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부
2018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폐지

3. 역사

3.1. 법관양성소와 경성법전

1895년 대한제국 정부가 법부 산하에 법관양성소를 설립하였다. 한국에서 근대적인 법학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 서울법대는 법관양성소를 그 기원으로 보고 1895년을 개학연도로 삼고 있다.

법관양성소는 이준 열사,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등을 배출하였으나, 사법권 상실 후 그 기능을 잃고 법학교로 개편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전수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로 그 계통이 이어진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자들은 서기 등 법원직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변호사시험에 응시하여 변호사가 되거나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해 사법관료가 된 사람들이 종종 나오기도 하였다.

3.2. 경성제대 법문학부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가 설립되었다. 경성제국대학 법과는 실무자 양성이 목표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달리, 행정•사법관료 양성과 법학연구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재학생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나 행정과에 응시하였다.

일본 본토의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과 달리 법학부가 아닌 법문학부 체제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학과 단일 학과에서 법률학, 정치학, 경제학 등 지금보다 포괄하는 영역이 넓었다.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법학과 내에서 법률, 정치, 경제, 제 분야에 해당하는 이수코스를 분류하기도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법문학부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도호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과 달리 경제학사 학위과정을 끝내 제공하지 않았고, 경제학 집중과정에 해당하는 법학과 제3류 역시 그 구성이 순수경제학보다는 정책분야에 편중되었다.

3.3. 경성법전과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통합

해방이 되자, 경성법학전문학교는 독자적으로 대학승격을 추진하였고 경성제국대학 역시 일제의 잔재를 떨쳐내고자 경성대학으로 개칭하고 법문학부 법학과를 법학부라는 하나의 학부로서 독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1946년이 되면 경성법학전문학교는 가칭 서울법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부과정, 전문부과정, 예과과정 편입생과 신입생을 모집하는 공고를 낼 만큼 독자적 대학승격운동이 진척을 본 상태였다. 경성대학 역시 법문학부 구성 및 법학부, 문학부의 승격에 있어서는 난항을 겪었으나, 기존의 법학과를 법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로 분과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경성대학 1회 졸업생에게 경제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등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46년 7월 미 군정이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발표하고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대학 법과계통을 '법과대학'이라는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통폐합하기로 결정하면서 각 학교의 독자적인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른바 '국대안 파동'이라 불릴 만큼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한 좌익계열 교수진, 학생의 반발은 격렬하였고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한 9월경이 지나서도 동맹휴학 등 분란이 이어졌으며, 1년이 지난 1947년경에 이르러서야 학내의 혼란은 잦아들게 된다.

3.4. 문리대학과의 강의실 분쟁

경성대학 법문학부 중 법학과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합하여 법과대학이 되었으나, 실제로는 법학과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흡수되는 형태였다. 이로 인해 초대 법과대학 학장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 고병국 교수가 취임하였고 교사 역시 경성법학전문학교가 위치한 청량리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법과대학 측에서는 경성대학 법학과의 몫에 해당하는 만큼 동숭동 교사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보아 동숭동 교사 이전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동숭동 교사를 쓰고 있던 문리과대학 측은 경성대학 법문학부의 온전한 계승은 문리과대학이라는 이유로 강의실 양도를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강의실 사용을 두고 분쟁이 발생하였다. 강의실 분쟁에서는 법대 측이 패하였으나, 동숭동 캠퍼스 근처에 위치한 구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사를 쓰고 있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일부 학과가 공릉동 공과대학 부지로 이전함에 따라 법과대학은 동숭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지금 보면 사소한 문제라 할 수 있겠으나, 각종 회고담에 꽤 비중있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서울대학교 총장 이춘호의 사임을 불러오는 등 그 여진이 컸다. 통합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의 독립성이 여전히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후의 법대 캠퍼스를 문리대 캠퍼스와 합쳐 동숭동 캠퍼스라고도 부르지만, 법대만을 따로 가리킬 때는 낙산캠퍼스라고 한다. 법대 동창회가 운영하는 낙산장학회는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지금의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여자중학교 자리가 그곳인데, 현재도 법대 정문과 법대문방구가 남아 있다.

3.5. 법학과와 행정학과

법과대학 행정학과1948년 신설된 학과로, 이름과 달리 행정학을 가르치는 학과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증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단과대의 소속 학과수에 따라 지원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행정학과를 증설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구제 법학부(우리나라의 법과대학에 상당) 역시 법률학과, 정치학과의 두 체제였고, 경성제대 또한 3개의 류를 둔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단일학과보다는 두 학과를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판단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1959년 행정대학원이 설립되면서 행정학과의 교과과정 및 학칙도 개편되어 1963년도 졸업생부터 행정학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내부의 반발로 교과과정은 복구되었고, 1968년도 졸업생까지는 원하는 자에 한하여 행정학사 학위를 수여하고, 1969년부터는 학과 불문 법학사만을 수여하게 되었다.

종합화 과정에서 행정학은 사회과학에 해당하고 사회과학대학에는 이미 유사학과인 정치학과가 있으므로 행정학과를 폐과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학과는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과 함께 폐지되었다.

경성제대 법학과 제2, 3류 내지 법과대학 행정학과의 유산은 200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법대 전공과목에 정치학, 행정학, 정책학, 외교사, 미시경제론, 거시경제론, 재정학 등이 있었던 것이 그 예. 정치학, 경제학 계열 과목은 2000년대 중반경 교과과정에서 사라졌으나, 대신 정치학과, 경제학부의 유사 과목을 전공선택과목으로 인정하였다.

3.6. 사법학과와 공법학과

행정학과의 인원은 법학과가 전부 수용하였으나, 학사행정상 단일 과에서 법대 정원을 모두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결정적으로 1981년부터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면서, 법과대학 입학 정원은 3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교수회의 결의로 사법학과와 공법학과로 분리되었다.

일단 법학과로 입학하였다가, 2학년에 올라갈 때 사법학과, 공법학과 중에 선택하였다. 두 과의 인원을 거의 같게 나누므로 성적에 따라 '잘리는' 인원이 생길 수 있었다(...). 두 과는 전공필수과목이 조금 다를 뿐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과가 다르답시고 사법학과끼리 공법학과끼리 따로 노는 것도 아니었고...

법학과, 행정학과 시절의 압도적인 법학과 선호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법학과가 공법학과보다 학생들의 선호에 있어 강세를 보였다. 또 때가 때이니만큼 공법학과에는 운동권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8]

1997년 사법학과, 공법학과를 없애고 법학부로 통합하기로 하면서, 96학번부터 양과 구별이 없어졌다. 당시 학부제를 실시하면 예산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법학부로 개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7. 법과대학 폐지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도입되고 서울대가 법전원 인가를 받으면서, 2008년을 마지막으로 법과대학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고 있다. 2018년 전기 졸업식에서 10명이 법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는데 이들이 학사과정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의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 2018년 2월 28일을 기준으로 3명[9]이 아직 졸업을 하지 못한 상태여서, 로스쿨 위탁교육[10]을 통해 학점을 취득케 하여 졸업을 시킬 방침이라고 한다.#

2018년 2월 마지막 졸업식을 갖고 폐지되었다. 명성의 주 요인이었던 법학부[11]는 사라지지만, 법과대학 폐지 이후 기존 법대의 인프라와 교수진은 당연히 전부 법전원 소속으로 옮겨가게 된다. 교수들은 2009년 3월 ~ 2018년 2월의 기간 동안 '법과대학 교수', '대학원 법학과 교수'이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였지만, 법대가 폐지되면서 '대학원 법학과 교수'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만 남게 되었다.

법과대학, 대학원 법학과와 법학전문대학원은 서로가 별개의 조직으로 편제된 것이기에, 일반대학원 법학과는 그대로 존속되어 있다.

그런데 동창회 측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역시 약칭으로는 '서울법전원'이 아닌 '서울법대'를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법전원생들도 과잠바를 보면 서울대 로고 안에 法大라고 쓰고 다닌다(...). 아무래도 '서울법대는 대한민국 최고'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그 명성까지도 물려받고 싶은 듯.[12] 또한 과거 법과대학 동창회에서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출신에게만 동문자격을 주었지만, 법과대학 신입생을 더 이상 뽑지 않게 된 2009년 이후로는 법과대학원 석박사 졸업생,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생, 서울법대 최고지도자과정 수료생 등을 모두 서울법대 동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로스쿨 관련 내용은 서울대학교/대학원/법학전문대학원 문서 참조.

4. 학생회

단과대학 학생회 슬로건 : 살아 있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각 반 및 반 내 학회 배정은 신입생 성명순이었다고 한다.

분반 명칭 : A반, B반, C반, D반.

학생회가(歌)가 있다[13].
1. 동포의 가슴에 동트는 새날 / 살아 살아 일어선 청년학도여 / 하나로 주인되는 해방의 한 길 / 열고 열어 나서자 굴레를 깨고 / 학생회 깃발 아래 내 사랑 법대여 / 온몸으로 난타하라 정의의 종을
2. 그대의 가슴에 날리는 깃발 / 민중의 아들딸 청년학도여 / 자주 민주 통일의 피어린 역사 / 이어서 이루리 사슬을 끊고 / 학생회 깃발 아래 내 사랑 법대여 / 온몸으로 난타하라 정의의 종을

5. 여담

  • 언뜻 보면 그 졸업생들이 법조계를 장악(?)하고 있어 법조카르텔을 이루고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거 없다. 언론지상에 한국 사회의 온갖 마피아(...) 집단이 다 거론되지만(일례로 한국 3대 연고주의 사조직), 서울법대는 그런 것이 거론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 이곳 출신들은 동문의식이 정말 없다시피하다. 자기들끼리도 "모래알 법대"라고 자조한다고. 동문의식이 어느 정도로 희박하냐면, 학교 다닐 때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라면 학번이 위이더라도 선배라고 생각하지 않고 학번이 아래이더라도 후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동기들끼리는 동기 의식이 조금 있다고.[14][15] 그 결과 선후배 간에 똥군기가 없는 대신,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서 밀며' 역시 없다. '김대현 부장검사 후배검사 폭언·폭행 사건'이 후자의 단적인 예인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서울법대 출신이다! 여느 학교 출신이었다면, 다른 아랫사람은 갈굴지언정 동문끼리는 우리가 남이가 했을 텐데, 서울법대 출신끼리는 남 보듯 했다는 것. 이 예에서 보다시피, 이곳 출신들의 동문의식 결여는 사법시험 합격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문서 및 그 출신 인물 문서와 고려대 법대 및 그 출신 인물 문서, 또는 서울대 의대 및 그 출신 인물 문서를 비교해 보면, 2개의 후자들의 문서들의 서술 중 그 학교 출신들이 기고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동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과 달리, 전자의 문서들 중 그 학교 출신들이 기고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서술이 매우 냉랭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절대 우연이 아니다.[16]
  • 고시 합격자를 엄청나게 배출한 과이지만, 정작 고시공부에 대한 지원이 전무에 가까운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어느 재학생 사시 합격자는 합격기에다 '고시공부를 도와 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를 하는 듯한 서울 법대'라고까지 대놓고 적었을 정도(...) 고시반 같은 것은 당연히(?) 그런 거 없다. 법학도서관에 수험서를 비치해 주고(그런데 이는 도서관의 역할상 당연한 일이었다), 열람실을 좀 마련해 주고, 학기를 좀 일찍 마쳐 주는 것 정도가 고시에 대한 지원 아닌 지원이었다. 행정법학자인 모 교수의 경우는 정도가 더욱 심해서(?), 사시 2차 준비 중인 대학원생들도 블록세미나에 끌고 갈 정도였다. 교내에서 하루 종일(!) 하는 블록세미나면 그나마 양반이고, 심지어 자기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에 학생들을 데려간 적도 있다. 그렇게 학생들 고시공부를 방해(?)하는 이유가 걸작인데, 자기도 대학원 다니다가 사시에 합격했기 때문이라고. 2000년대에야 '가이우스 프로그램'이라는 사법시험 모의고사반을 만들었는데, 학생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응시는 해 보지만, 역시나 거기서 출제된 문제는 예상문제에서 제끼게 된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평이 좋지 않았다(...) 어쨌거나 문제의 고시반 아닌 고시반은 법대가 로스쿨로 바뀌고 난 지금도 남아 있다.[17]
  • 대한민국의 법과대학 중 유일하게 로마법 전임교수가 있었다(해당 교수는 2018년 정년퇴직). 박사과정에서 로마법을 전공한 교수 자체는 전국적으로 몇 명 있으나, 대체로 민법 과목 담당으로 되어 있다.
  • 동창회에서 1994년에 《진리는 나의 빛》,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라는 동창생 수상록을 간행한 바 있다(현재 절판). 갓 고교 졸업한 신입생이 멋모르고 읽으면 '훌륭한 선배님들이 좋은 말씀 해 주시는구나'라는 감상이 들게 하는 글들이지만, 정작 필진의 상당수는 출세하기는 했지만 안 좋은 쪽으로 유명세를 떨친 이들이다. 김기춘, 행불상수 등...
  • 최종고 교수가 2013년 정년퇴임을 맞으면서 《서울법대시대: 내가 본 서울대 반세기》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저자의 주관이 상당히 들어가 있지만, 서울 법대의 이모저모에 관한 매우 상세한 보고이다.
  • TV조선의 시사 프로그램인 구조신호 시그널에 서울대학교 법대 출신 최악의 아웃풋ㅠㅠ이 나왔다. 고시촌에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50년을 살면서 돈이 떨어지면 지하철 행상을 하고 있다.
    이 사람의 이름은 김기두(金基斗)로, 1946년 생. 재수해서 서울대학교 법학과 66학번으로 입학했다. 사법고시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시작했는데[20], 2차 시험에서 계속 낙방했고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계속 병역을 연기하다가 거의 30살 가까운 나이에 이등병으로 입대한 후 30살을 넘기고 상병으로 만기전역했다.[21] 그리고 1978년 결혼했는데[22] 아이를 2명[23]이나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부양을 전혀 하지 않고 사법고시에만 매달리다 보니 결국 참다 못한 배우자가 이혼소송을 걸어서 1982년 이혼했다. 이후 가족들과 단절되어 평생을 고시원에서 살았다. 김기두의 아들은 김기두를 아버지 취급조차 안하는데 태어나서 단 한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는데 무슨 아버지냐는 게 김기두 아들의 논지이다. 이후 지하철에서 칫솔장사를 하고 사는데 목욕을 아예 하지 않기 때문에 몸에서 악취가 나서 김기두가 파는 칫솔을 승객들이 거의 안 산다.[24] 이 때문에 구걸을 하러 다니는데 꼭 로펌으로만 구걸을 다닌다. 다름아닌 자신의 대학 동기생들이 변호사로 있는 로펌들이다. 반응은 제각각인데 비서[25]에게 자신은 출근을 안한다고 전하라고 하면서 기피하는 동기생도 있는가 하면 반면 재미삼아(...) 3만원씩 주는 동기생도 있었다. 김기두가 진짜 서울대학교 법학과 출신인것을 증명하듯 구조신호 시그널의 제작진에게 자신의 대학 동기생들이라는 사람들의 이름을 말했는데 이 사람들이 죄다 원로 법조인들이었다. 게다가 반지에 집착한 나머지 손에는 반지를 몇개씩 끼고 다니는데 잘때도 반지를 벗지 않고 24시간 365일 반지를 항상 착용하고 사는 탓에 손가락이 반지로 인해 변형이 생겼다. 그래서 구조신호 시그널의 제작진은 김기두를 도와주기 위해 여러가지 제안을 했으나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몸이 너무 더러워서 목욕을 시켜주겠다는 것도 거절, 가발이 너무 낡아서 새걸로 교체해주겠다는데도 거절, 반지로 인해 손이 망가졌는데도 그런 손에 대한 정밀검사를 해주겠다는데도 거절했다. 결국 박찬종국회의원[26]을 섭외해서 김기두를 설득하려 했으나 막상 만나보니 김기두가 박찬종에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일갈했다.
    이 사람이 무너진 결정적 원인은 군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군대는 무학도 현역병 입영 대상이었으므로 온갖 종류의 저학력자들이 넘쳐나는 곳이었고, 서울대 출신들은 질시를 받아 남들보다 심한 구타 가혹행위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실제 최영오 일병 살인 사건의 범인인 최영오 역시 단지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졸 출신의 고참으로부터 모진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그 고참병을 살해했다.

6. 출신 인물

대한민국에서 법조인을 단연 가장 많이 배출한 단과대학이다. 특히 고위층은 그 비율이 엄청나다. 1990년 당시 신임 검사의 49%, 신임 판사의 61%였다. 그 중에서 대법관의 86%, 검사장급 이상 검사의 68%가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대형 로펌의 경우도 머니투데이에서 2017년에 6대 로펌 인적 구성을 전수조사해 보니, 평균이 '서울 법대 나온 42세 남성'이더라고. 지금은 서오남 # 다만, 그 비율은 근래 들어 점점 희석되고 있다[27].

아래에서 ☆로 표시한 인물은 법조인이나 법학자가 아닌 사람이다. 논란 또는 사건사고 문서가 하위 문서로까지 생성되어 있거나 별도 사건사고 문서의 주역인 인물은 해당 문서를 주기하였다(...)(별도 문서 없는 인물은 번잡을 피하기 위해 제외). '서울법대 출신 유명인이 이렇게나 많았나?'라고 느낀다면 기분 탓이 아니다.[28] 뭔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사람이 많아 보인다면 기분 탓이 아니다.[29]

동창회에서 1993년부터 '자랑스러운 서울 법대인'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뭔가 이상한 사람들도 선정된 것 같아 보인다면 기분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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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하위권 내지 최하위권 의대라면 연고라인 법대/경영대에도 밀릴 가능성이 있지만.[2] 같은 대학교의 의예과를 깨버리는 학과가 있던 대학교는 서울대가 유일했다.[3] 참고로 연세대 의예과는 서울대 의대 다음 가는 전체 한국 의대 중 부동의 2위다.[4] 예를 들면 소위 꼴통, 춘천 트럼프라고 불리는 김진태가 동년배 중에서는 공부로 이길 자가 거의 없다는 거다(...). 애초에 김진태는 사법시험을 21세에 합격한 수재 중의 수재이다.[5] 일제강점기 말기, 태평양 전쟁이 고도화되자 일제는 조선 내의 모든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물자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교육 역시 태평양 전쟁 수행에 필요한 대로 변형시켰으며, 고등교육은 전쟁 시기의 자원을 낭비한다는 명목 하에 극도로 축소시켜버렸다. 이러한 조치로 경성법학전문학교 등 관립 전문학교(구제)는 휴교 상태에 들어가고 사립 전문학교는 조선총독부에서 몰수해 자기네들 입맛대로 통폐합시켜 버렸다.[6] 일반법학전공, 사법학전공, 형사법학전공, 비교법학전공의 세부전공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존재[7] 일반공법전공, 외교학전공의 세부전공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존재[8] 대표적으로 원희룡, 조국, 이정희가 공법학과 출신이다.[9] 07학번 군휴학생 2명, 08학번 재학생 1명[10] 로스쿨 소속으로 신분이 전환된 것이 아니다.[11] 주 요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서울법대' 명성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2] 물론 기존의 약칭을 계속 쓰는 게 현실적으로 편하기는 하지만...[13] 이동민(85학번) 작사, 이헌영(86학번) 작곡.[14] 우병우 사단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15] 동문의식 비슷한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입학 자체를 법과대학으로 한 학생들은 법과대학으로 전과한 학생들과는 확실히 데면데면하고, 법과대학 출신들은 공식적으로는 후배인 법학전문대학원 출신들을 동문이 아니라 '다른 학교(과) 출신들'로 인식한다고 한다. 예시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이다.[16] 이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에서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놈들만 모아 놓으니까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아니냐'라는 추측이 있다(...) 서울대 내에서 밀고 끌어주기가 가장 심한 단과대학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다.[17] 정종섭 교수의 주도로 만들게 되었다고 하는데, 법대만의 모의고사반이어서 졸업생은 응시할 수 있으나 타과 출신은 참여를 불허하였다. 가이우스(Gaius)는 고대 로마의 법학자 이름인데, 매우 개그스러운 사실은, 가이우스라는 사람은 시쳇말로 사법시험에 못 붙어서 지방대 법대 교수를 하던 인물이라는 것이다(...)[18] 물론 이 현상은 법대만의 현상은 아니고 서울대학교의 공통적인 현상인데, 그런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남사스럽다고 여기는 게 교풍 아닌 교풍이다. 법대에서 합격자 축하연을 열어 준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정작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반응은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불문하고 이뭐병에 가까웠다고(...)[19]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합격자 발표를 질리도록 봐왔는지 그 후유증으로 인해서(...)[20] 김기두 본인의 말에 의하면 영어를 아주 잘하면 1차 정도는 무난하다고 했다.[21] 사실 노무현도 이런 인생을 살았었는데 다행히 노무현은 사법고시를 합격했다. 만약 노무현이 그 당시에 사법고시를 낙방했더라면 지금의 노무현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흠좀무한 건 이 사람의 나이. 노무현과 동갑내기이다.[22] 배우자는 아마 서울대학교 법학과라는 무지막지한 학벌에 혹해서 결혼한 모양이다. 배우자 본인이 아니라 장인이 혹했을 가능성이 높다[23] 1남1녀로 누나와 남동생이다.[24] 이 사람이 목욕을 안하는 이유 역시 가관인데 때가 안 나오니까 목욕을 안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왜 몸을 씻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사람이 몸을 씻는 진짜 이유는 몸에서 나는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이다.[25] 대형 로펌 변호사에게는 각자에게 개인 비서가 딸려있다.[26] 변호사도 하고 사회운동가도 하고 경력은 많지만 이 사람의 이력 중 제일 좋은 것으로 표기한다.[27] 2017년 현재 '전체' 2,061명의 검사 중 804명이 서울'대' 출신(39%)이고 '전체' 2,844명의 검사 중 1,581명이 서울'대' 출신(55.6%)다. 사시 합격자 중 설법과 설비법의 비율을 생각해 보면, 저 중 60% 이상은 법대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28] 보다시피, 어지간한 대학교 문서의 그 학교 출신 유명인을 다 합친 것보다도 수가 많다. 이곳 출신 법조인이 워낙 많아서 생기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법조인이나 법학자가 아닌 사람도 의외로 적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29] 법조계의 다수를 점하고 고위층은 비율이 더욱 높다 보니 사법농단 의혹의 장본인들도 대부분 서울 법대 출신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학교 법대나 비법대 출신들이 낫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가령, 위 의혹의 수사를 위한 영장을 모조리 기각하고 있는 허경호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전담판사는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 출신이고, 그러한 영장 기각이 지극히 정당하다고 실드를 치다가 말썽이 나자 돌연 사직한 구민경 서울중앙지법 공보판사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이다. 오히려, 용기 있게 사직서를 제출하여 사법농단 의혹이 폭로된 계기를 제공한 이탄희 판사 역시 서울 법대 출신이다. 결국, 서울 법대 출신들이 수가 많다 보니 그만큼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30] 2010년 2월에 미등록으로 제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