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9:13:29

인연(수필)

1. 피천득의 수필집2. 해당 수필집에 실린 수필 중 하나3. 관련 문서

1. 피천득의 수필집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신희상

인터넷피천득 시로 떠도는 위의 시는, 사실은 신희상의 시 [인연을 살릴 줄 알아야 한다]의 일부이다.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

수필 입문서로 좋은 책인 피천득의 수필제목이자 그것이 수록된 수필집 제목이 인연이다. 그 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연>, 은전 한 닢 등이 있다. 수필 인연은, 작가가 하숙하던 집의 딸 미우라 아사코(三浦朝子)와의 세 번의 만남과 이별을 그리고 있다.

여담이지만 아사코는, 피천득의 인생에 영향을 준 3명의 여성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2. 해당 수필집에 실린 수필 중 하나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라는 말로 수필이 시작된다.

피천득가톨릭 성심수녀회 한국관구에서 운영하는 대학인 성심여대에 한 학기 출강한 적이 있었다. 서울에 사는 피천득이 강원도 춘천시까지 먼 길을 힘들게 다닌 것은, 성심수녀회 소속인 주매분 수녀(중국인)[1]와 김재순 수녀[2]가 피천득의 집을 방문해 준 것에 대한 예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피천득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아사코' 때문이었다.

17살의 봄, 피천득일본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도쿄의 미우라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미우라 부부에게는 '아사코'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다. 아침(朝)에 태어났다고 해서 '아사코(朝子)'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이것이 아사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아사코는 성심수녀회 일본관구에서 운영하는 가톨릭계 여학교인 세이신 여학원(聖心女學院)의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성심수녀회는 1800년 프랑스에서 창설되어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사업을 하는 수도회로, 일본 세이신 여학원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운영하고 있는 큰 규모의 학교였다.[3][4]

어린 아사코는 피천득을 오빠처럼 잘 따랐고, 피천득도 아사코를 여동생처럼 귀여워했다. 피천득은 아사코에게 동화책을 선물하기도 했고, 아사코는 피천득에게 세이신 여학원을 안내해 주며 자신의 신발장과 실내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피천득이 미우라 부부의 집을 떠날 때, 아사코는 이별을 몹시 아쉬워하며 자신이 아끼던 손수건과 반지를 피천득에게 선물했다. 헤어진 후로도, 피천득은 초등학교 1학년 즈음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면 아사코를 떠올리곤 했다.

세월이 흘러 피천득은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의 미우라 부부 댁을 찾았고, 2번째로 아사코와 만났다. 초등학교 1학년 꼬마이던 아사코는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 3학년이 되어 있었다. 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사코는 피천득과의 재회를 반가워했다. 피천득과 아사코는 문학에 대해 한참 동안 즐겁게 이야기했고, 이번에도 세이신 여학원을 산책했다. 이제 아사코는 더이상 학교에서 실내화를 신지 않는다고 했다. 산책 도중, 아사코는 강의실에 두고 왔던 우산을 떠올리고는 달려가서 챙겨 왔다. 고운 연두색의 우산이었다.

다시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피천득도쿄의 미우라 부부 댁을 찾았다. 그간 일본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했다. 그리고 한국광복, 6.25 전쟁, 남북 분단을 겪었다. 미우라 부부는 피천득을 몹시 반겼지만, 아사코는 더이상 그 집에 없었다. 패전 후, 아사코는 전공을 살려 맥아더 사령부에서 영어 번역 일을 했다. 거기서 만난 일본계 2세 남성과 결혼하였으며, 친정 근처에 따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피천득은 미우라 부부에게 부탁하여, 아사코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사코와 3번째 만남이었다. 아직 30대의 젊은 나이이건만, 피천득이 마주친 아사코는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아사코의 남편은 미국인 같지도 않고 일본인 같지도 않은, 그저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듯한 사람이었다. 피천득과 아사코는 악수도 없이, 절을 몇 번씩 하며 헤어졌다.

피천득은 아사코와의 3번에 걸친 만남과 이별을 추억하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다녀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수필을 마무리한다.

3. 관련 문서



[1] 성심여자중고등학교 초창기 교장을 지내며 프랑스어도 가르쳤다. 기업인 조안 리의 성심여중고 시절 은사이기도 하다.[2]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때 순직한 김재익수석의 누나.[3] 유치원은 폐원되었고, 현재 일본 세이신 여학원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의 과정이 있다. 도쿄뿐 아니라 몇 군데의 지방에서도 세이신 여학원을 운영하고 있다.[4] 현재 한국에서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성심여자중학교성심여자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성심여자대학교는 1995년 가톨릭대학교에 흡수되어 가톨릭대학교/성심교정이 되었고, 성심수녀회가 아닌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에서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