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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1e31><colcolor=#ffffff> | |||
출생 | 1926년 10월 15일 | ||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대사1리 신사마을[1] | |||
사망 | 2017년 11월 6일 (향년 91세) |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2묘역-443호 | ||
본관 | 파평 윤씨 | ||
재임기간 | 제17대 합동참모의장 | ||
1981년 5월 15일 ~ 1982년 5월 21일 | |||
제23대 국방부장관 | |||
1982년 5월 21일 ~ 1986년 1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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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딸 윤혜정, 윤혜선 | ||
학력 | 문태중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 (졸업) 미국육군보병학교 대위 지휘참모과정 (졸업) 미국육군포병학교 대위 지휘참모과정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국방대학원 (행정학 / 석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 ||
종교 | 개신교 | ||
약력 | 제23대 국방부장관 대한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방직협회 회장 현대정공 상임고문 자민련 특임위원 |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9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2] | ||
1950년 ~ 1982년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합동참모의장 | ||
참전 | 6.25 전쟁 베트남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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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예비역 육군 대장).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참모차장으로 진압군을 지휘했으나 반란군에 유화적인 태도로 진압에 실패했다. 이후 전두환 정부에서 제23대 국방부장관, 제17대 합동참모의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초년기
1926년 10월 15일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대사1리 신사마을에서 태어났다. 문태중학교(1회)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9기)에 입교, 1950년 1월 소위로 육군에 임관했다. 이후 육사 9기 선두주자 중 1명[3]으로 제1야전군사령부 인사처장, 주월사령부 참모장, 제5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1977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해 제3군단장에 임명되었다.제3군단장 재직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다. 이후 공석이 된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당시 육군참모차장 이희성이 임시 직무대리로 차출되고, 윤성민이 후임 참모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부임한지 한 달 정도 된 12월 12일 밤, 하나회 전두환 세력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며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12.12 군사반란이었다.
2.2. 12.12 군사반란
당일 밤, 육군 최고 지휘관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공관에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사조직인 하나회 소속 허삼수 대령(보안사 인사처장, 육사 17기)과 우경윤 대령(육군범죄수사단장, 육사 13기)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상황 분석 후 전두환의 반란임이 명확해지자, 총장 납치 후 자동으로 육군본부 2인자인 윤성민이 육참총장 직무대행이 되었고 윤성민은 진압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4] 급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윤성민은 육군 지휘부를 비상 소집하는 한편, 전방의 지휘를 맡는 제3야전군사령관 이건영, 제1야전군사령관 김학원과 연락해 상황을 알리고, 수도권 부대 지휘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 등과 더불어 반란군을 진압할 방책을 모색하였다. 또한 모든 부대에 부대 장악 및 출동 통제 지시와 더불어 본인의 육성으로만 작전 명령이 내려질 것임을 강조하고, 반란군 지휘소에 가있던 박준병의 제20보병사단에 권익검 소장 등을 보내 부대 출동을 막는 등 초반의 대처는 적절한 편이었다.
이때, 진압군 내에서는 반란은 진압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방법에 따른 의견 차이가 있었다. 기회를 틈탄 북한의 남침 위협이 있는 상태에서 내전을 벌일 수 없으니 최대한 유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의견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병력을 재빠르게 동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초반에는 윤성민 등 지휘부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시간이 경과하자 유혈 사태를 최대한 피하자는 쪽으로 점점 기울어갔다. 마지막까지 강경 진압을 주장한 것은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안종훈 군수참모부장[5] 등의 몇 안되는 일부 장성들뿐이었다.
이는 병력 동원 허가를 내릴 수 있는 국방부 장관 노재현의 적전도피도 일조했다. 옆 공관인 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울리자 지휘부에 연락도 없이 일단 가족과 함께 도주하는가 하면, 이후 진압군 지휘부 벙커에 나타나서도 진압에 대한 명확한 지시조차 내리지 않고 반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혼자 주한미군 지휘부 벙커로 이동했다. 거기다 노재현과 주한미군 지휘부는 북한의 남침 방지가 우선이라며 전방 병력의 이동을 금지했고 이에 진압군의 가용 병력은 미군의 작전 통제를 받지 않는 특전사 여단들과 수경사 병력에 국한되게 되었다. 이 조치는 윤성민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는데, 장관이 금지령을 내려놔 선배들인 야전군사령관(3군사령관 7기 이건영, 1군사령관 5기 김학원)이 병력 동원을 주저하게 되었고, 진압군 지휘관인 윤성민 또한 선배들의 기조를 무시하고 동원시킬만한 결단력이 없었다. 반면 사생결단이었던 반란군은 주한미군의 동의 없이 이동할 수 없는 최전방 병력인 제9보병사단마저 동원했다.
전두환의 충복 박희도 1공수특전여단장(하나회, 육사 12기)이 대한민국 육군본부 점령을 위해 1공수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하려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병력이 없었던 윤성민 등 지휘부는 일단 수도경비사령부로 이동했다. 당시 상황은 사전에 수도권 실병력 지휘관을 하나회로 깔아놓은 반란군에 매우 유리했다. 반란군은 서울에 동원 가능한 특전사 4개 여단 중 1공수(여단장 박희도, 하나회, 육사 12기), 3공수(여단장 최세창, 하나회, 육사 13기), 5공수(여단장 장기오, 육사, 하나회 12기)를 이미 장악했다. 또한 30경비단(단장 장세동, 하나회, 육사 16기), 33경비단(단장 김진영, 하나회, 육사 17기), 수경사 헌병단(단장 조홍, 하나회, 육사 13기)이 반란에 가담함으로써 사령관 장태완의 의중에 반해 수경사령부의 실병력 대부분이 이탈했다. 이에 더불어 유사시 수경사령부에 배속 가능한 서울 근접 3개 사단 (수기사/20사단/26사단) 중 20사단은 사단장 박준병(하나회 12기)이 반란군에 동조 중이었다. 남은 26사단과 수기사단은 보안사 조직을 이용한 반란군의 배후 공작[6]으로 사실상 출동을 포기한 상태였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하나회와 연줄이 없는 갑종 출신 윤흥기 여단장의 9공수였다. 윤성민의 지시를 받아 9공수가 출동하자, 반란군 지휘부는 위기에 빠졌다. 반란군이 출동시킨 1공수보다 9공수가 서울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때 윤성민은 12.12군사반란 당시 진압군 측 최대 실책이라고 여겨지는, 서로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사태를 유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신사 협정을 반란군과 맺은 뒤, 서울을 향해 출동하고 있던 9공수에게 회군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반란군에게 신사 협정은 당연히 기만술이었고, 진압군 9공수가 회군할 때 반란군 1공수는 계속 진격해서[7]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다. 게다가 불안했던 반란군은 한술 더떠 최전방 병력인 9사단(사단장 노태우, 하나회 11기)마저 서울로 동원하며 승기를 굳혔다.
서울에 반란군 병력들이 차곡차곡 진주하는 가운데, 진압군은 사실상 동원 가능한 병력이 없어 승기는 반란군으로 넘어갔고 진압군은 체념 상태에 빠졌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부하인 최세창의 3공수 특전사 반란부대에 체포되었고[8], 수경사로 넘어와있던 윤성민 외 육본 지휘부 역시 전두환의 명을 받은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의 헌병대에게 무장해제되어[9]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같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었다. 이렇게 12.12 군사반란은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다.
2.3. 12.12 군사반란 이후
서빙고 분실로 연행된 윤성민은 놀랍게도 곧 풀려난다. 반란군은 뒷수습을 위해 진압군 지휘부 중 몇 명을 포섭해 화합의 제스쳐를 보이려 했다.[10] 대표적으로 진압군에서 9기 선두주자 윤성민과 문홍구 둘 중 1명을 회유해 강제 예편시킬 김학원 제1야전군사령관[11]의 뒤를 잇게 하려 했다. 둘 중 윤성민이 선택된 것은 영남 출신이 주류[12]였던 것 때문에 호남 출신임으로 지역 안배 생색을 낼 수 있다는 점과 반란 진압 중 보여준 유화적인 태도가 반영되었다.[13]윤성민은 이후 1979년 12월 제1군사령관에 취임한 뒤 대장으로 진급했고, 1981년 5월 15일 제17대 합동참모의장 겸 대간첩대책본부장으로 영전했다. 또한 1982년 5월 21일부터 1986년 1월 8일까지 제23대 국방부장관을 지냈는데, 이는 전두환 정권에서 가장 오랫동안 국방부장관으로 있었던 것으로 실권[14]은 크지 않았다 한들 사실상 전두환 신군부의 일원으로 행동했다.[15] 장관 퇴임 후에는 1987년 5월 1일 한국석유개발공사 이사장에 임명되었고#, 1987년 10월 26일에는 제23대 대한방직협회장에 임명되었다.#
문민정부 시절이던 1996년 6월 27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30부에서 열린 12.12 및 5.18 사건 17차 공판에 증인으로 참석해 12.12 사태에 대해 "비상계엄하에서 일선 주요 지휘관들이 숙소를 이탈해 영장없이 계엄사령관을 연행하고 부대 병력을 동원해 주요 사령부를 강점한 것은 군권을 찬탈하기 위한 명백한 반란행위"라고 말했다. 때문에 당시 신군부 변호인측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실 신군부 입장에선 장관까지 시켜줬는데 뒤통수를 제대로 친 격이니 배알이 뒤틀리긴 했을 것이다. 게다가 국민들 입장에서도 반란 진압도 실패한 주제에 지금까지 신군부 밑에서 잘먹고 지내다가 이제 와서 배신이나 때리는 기회주의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16]
2017년 11월 6일 서울특별시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1세. 11월 9일 오전 9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가 장군 2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가족으로는 부인과 딸 2명이 있었다.
- 윤성민은 훗날 인터뷰에서 패장으로서의 책임은 인정하지만 본인은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정적 패인이었던 제9공수특전여단 회군에 대해 노재현 국방장관, 김종환 합참의장,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17] 등이 전화해 제9공수특전여단 출동을 말렸기 때문이라며 공동 책임론을 제기했고, 당시 육군 지휘부 내에서도 유혈 사태를 피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고 주장했다. 노재현 장관이 주한미군 벙커로 자리를 옮겨가서 지휘에 지장이 많았고, 충정부대인 제26보병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을 동원하려 했지만 노재현 장관과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끝내 동의해주지 않아서 동원하지 못했다고 말했으며, 이후 본인은 책임을 지고 전역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 1995년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겸 성우 최병학이 연기했다.
- 2005년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김호영이 연기했다.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배우 유성주가 연기했다. '민성배'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작중에선 국방장관과 함께 트롤 2호로 분하여 진압군 측에 엄청난 어그로를 시전한다.[18]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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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군번 16040[3] 다른 1명은 12.12 군사반란 당시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으로 이후 강제 예편 당한 문홍구 예비역 중장이다. 윤성민과 문홍구 모두 준장, 소장을 1차로 진급했으며, 차지철 밑에서 경호차장을 지냈던 문홍구가 군단장을 1년 먼저 나가 먼저 중장으로 진급했다. 신군부에서 문홍구와 윤성민 둘 중 누군가를 살릴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당시 유학성과 노태우는 문홍구를 살려 1군사령관직 임명을 주장했으나 황영시와 김윤호는 윤성민을 살려 1군사령관으로 임명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노재헌 장관과 똑같은 포병병과에 출신지가 전라도였기에 지역안배라는 명목이 더해져 윤성민 중장이 제1야전군사령관으로 영전하고 문홍구 중장은 예편당했다.[4] 이 당시는 군령권이 육군참모총장에 있어 실작전 지휘를 할 수 있었다. 현재는 합참의장이 군령권을 행사한다.[5] 육사 9기, 중장 예편.[6] 수기사단장 손길남은 보안사의 만류 공작에 출동을 포기했고, 26사단장 배정도는 부대 보안부대장과 양주를 먹다가 골아 떯어졌다.(...)[7] 당시 반란군측 보안사 부대는 군 통신망을 감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본보다 더 최신 정보를 파악하기 쉬웠다. 그러니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9공수가 회군한다고 연락이 오자 바로 1공수를 유턴시킨 것. 윤성민이 잘못한 것도 단순히 전화로 회군 명령을 내릴게 아니라 직접 사람을 보내서 회군을 시키든지 아니면 대기하다가 낌새가 이상하면 다시 진격하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일단 씹고 9공수를 서울로 불러들이되 시간끌기용으로 육본 수비만 하게 둔다든지 등 도청 위험을 인지하고 행동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8] 이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이 전사한다.[9] 이때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이 총상을 입는다.[10] 제4공화국에서 해당 장면이 나온다. 삐딱한 자세로 윤성민에게 호통을 치던 보안사 수사관이 "윤성민 차장님을 즉시 사령부로 모셔와라, 정중하게 모셔와라"라는 내부 방송을 듣자마자 "차장님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며 사과하는게 압권이었다. 이후 윤성민이 노재현 국방장관과 하나회 수뇌부가 모인 사령부로 가서 "병 주고 약 주는 거냐"라고 하자 전두환이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밝아오는 새 날처럼 우리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일하십시다."라며 회유한다.[11] 수도권 안보 및 정권 안보와 직결된 3군은 반란군의 유학성이 차지하는 한편, 동부전선 전방 병력이 대부분이라 사실상 역쿠데타를 도모할 수 없는 1군의 사령관을 주려 한 것이다.[12] 반란 이후 육군 수뇌부만 봐도 육군 대장급 6명 중 영남 4명, 충청 1명, 호남 1명이었다.[13] 드라마 제4공화국에선 이 점이 반영되어 서빙고 분실로 잡혀간 윤성민이 풀려나서 전두환에게 불려가 1군사령관 직을 권유받고 영전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제5공화국에선 반란군에게 진압되고 허탈한 표정만을 짓는 씬을 끝으로 한동안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국방장관 재직시 노신영 안기부장의 지휘를 받으며 잠시 등장한 게 마지막이었다.[14] 군령과 군정에 빠삭한 군인 출신 대통령들의 시대였기 때문에 합동참모의장직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실권이 생기며, 국방부장관도 당시에는 실권이 그리 크지 않았다.[15] 녹화사업 또한 윤성민 국방장관 재임 시기에 실행되었다.[16] 그나마 반란군 일당을 끝까지 옹호하지 않았다는 게 위안거리다. 아무리 잘해줘도 그때의 하극상은 평생 가슴 속에 남았던 듯하다.[17] 이후 반란군이 신임 육군참모총장으로 추대했고 반란군의 정권 장악 작업인 5.18 민주화운동 강경 진압에 협조한 인물이다.[18] 현실에서도 노재현 국방장관과 윤성민 참모차장이 부족한 행보를 보였는데, 작중에서는 더더욱 멍청하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