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수도권에서 대(對)정부 전복 시도와 각종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는 부대들이다.2. 설명
과거 5.16 군사정변 이후 수도권에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만으로는 진압이 힘든 쿠데타와 4.19 혁명과 같은 대규모 시위가 서울과 같은 수도권 핵심도시에서 발생할 경우를 상정하여 유사시 수도권에 투입되어 작전을 수행하는 임부를 부여받은 부대들이다. 과거 대한민국 육군에 기계화보병사단이 1개뿐일 때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충정부대에 해당되었다.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국방장관, 육참차장, 3군사령관에게 병력 출동을 요청한 부대가 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었던 이유가 바로 서울 인근에 주둔한 충정부대이기 때문이다.
작전 목적에 쿠데타군을 제압하는 것도 있어 그만큼 강력한 부대들로 편성이 되었지만,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대들이 주 임무에서 차출되어 작전을 수행한다면 그만큼 전력에 공백이 생길 것이다. 당장에 투입되는 3개 기계화보병사단들은 모두 수도권으로 들어오는 주요 길목에 배치되어 북한군의 기갑전력을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전방사단들이다.
3. 해당 부대
작전의 목표가 수도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에서의 쿠데타와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것이다 보니 목록에 있는 수도권 인근 4개 사단[1]은 유사시 수도방위사령관이 배속받아 지휘할 수 있다.- 수도경비사령부(現 수도방위사령부) 예하부대[2]
-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3·5·9공수특전여단 4개 부대[3]
- 제20기계화보병사단(해체 후 각각 現 제8기동사단/제11기동사단으로 분할배속 후 통폐합.)[4]
- 제26기계화보병사단(現 제8기동사단 예하 제73기계화보병여단)
- 제30기계화보병사단(現 제30기갑여단)
- 제33보병사단(現 제17보병사단)
4. 비판 및 논란
4.1. 신군부의 악용으로 본말전도된 역할이 빚은 비극적인 흑역사
애석하지만 해당 부대들은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 속 어떤 시기에서든, 본 목적으로 명시된 대(對)정부 전복세력을 저지하는 임무를 단 한번도 제대로 수행해낸 적이 없었다. 특히 하나회 주도 신군부 휘하에 있었을 땐 두고두고 반대세력 정치 인사나 반독재 성향 국민에 대한 압제의 최일선에서 물리력 담당의 친위대로 악용되어진 흑역사가 있는 부대들이다.[5]결국 당대의 부조리함을 배로 증폭시킨 하나회 주축 신군부 지휘관들이라는 자격 미달의 무능하고도 잔악한 정치군인들이 자신들의 직속 고위 지휘관으로 부임해온 뒤에는 그들에게 왜곡적이면서도 편향된 사상까지 계속해서 강요받고 주입받자, 그대로 폭주하는 반란군의 주먹으로써 스스로 의지를 잃고 변질되고 만 것이다.
우선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대통령 궐석에 의해 내려진 합법적인 계엄령 하에서 적법한 절차까지 밟고 권한대행과 과도정부를 맡은 최규하 정부의 정당한 정무수행 과정을 사사건건 참견하며 불법적인 압력 행사로 계속해서 방해하던 시점부터 이들이 맡았던 역할은 더 두드러지게 된다. 당시 신군부 휘하의 편제를 잘 살펴본다면, '반독재시위 진압 담당-정치공작/정보전 담당' 으로 하여금 두 분야를 양분하는 최정예 직속 부대들을 주축으로 반란군을 운영했다.
그들 중 정치공작/정보전 담당이 중앙정보부를 시녀로 거느린 국군보안사령부라면, 그들에게서 받은 첩보를 통해 체계적으로 서포트를 받아 반독재진영을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유린해온 전투부대들이 바로 반독재시위 진압 담당의 특전사를 필두로 한 충정부대였다.
4.2. 12.12 군사반란 - 5.17 내란까지의 두 번을 연이은 쿠데타 가담
당시 반란의 진압을 맡아야 했던 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지휘부인 육군본부의 애매한 대응을 비롯해서 핵심적으로 군에 출동 명령을 하달시킬 수 있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헌 국방부장관이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세 명의 공식 지휘부가 사실상 하나회 휘하 경호실 병력들에게 고립되어 발이 묶이고, 야반도주 후 잠적하거나, 보안사 측 납치란 세 가지 이유로 공백이 되어버리자 육군참모차장 필두 차상위급 군 지휘관들이 내린 출동준비 상태에서 대기만 하였다.그 와중에 30사단은 결국 보안사의 권유를 가장한 사실상의 협박에 의해서 중간시점부터는 반란군에게 포섭되었고, 특전사의 제1, 3, 5공수특전여단[6]은 오히려 12.12 군사반란의 핵심부대로서 진압군 거점을 기습 제압하는 기동타격조 임무를 수행했던 치욕적인 역사를 남겼다.
특히나 신군부 측이 최규하 권한대행 시기-최규하 정부에 이르는 과도정권에 대한 초법적 정치 개입으로 정당한 정무수행에까지 제동을 건 첫 단추인 12.12 군사반란 당시에도 하나회 주도의 신군부 세력 휘하 충정부대들이 제아무리 정보통신이 크게 제한되며 불합리한 부조리에조차도 맹목적/무조건적인 복종까지 강요받던 시대였다 한들, 위법적인 쿠데타 실행을 위해 내려진 비합리한 출동명령을 어떠한 거부 없이 복종하고 반란군으로서 가담했다. 그를 막기 위한 진압군으로서 반란군에 맞섰던 자국군 부대들에 불법적인 선제 공격을 가한 반란군 측에 의해, 수도권에 위치한 군과 정부의 온갖 주요 시설들에서는 참혹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7]
- 육군참모총장 공관은 최석립과 성환옥, 우경윤 휘하 육군 헌병들이 가세해 주변을 지키던 해병대 헌병 경비대와의 총격을 주고받으며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허삼수가 보안사로 납치하는 작전을 경호했다. 총리공관에선 정 총장에게 날조된 내란방조 혐의를 씌워 납치/고문함과 동시에 최규하 대통령 측의 재가를 요청하던 전두환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돌아간다. 이후에 헌병경호대장이던 구정길 중령이 김진기 헌병감의 명령으로 전두환을 체포하려다가 놓치자, 총리공관을 고명승과 정동호 휘하의 경호실 헌병 병력들이 기습해 구 중령을 포함한 총리공관 측의 전 경비병력들이 무력화당했다.
-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휘하 제1/3/5공수특전여단의 병력들이 각각 국방부/육군본부/육군특수전사령부 본부건물 및 특전사령관 집무실을 습격하면서, 세 여단장들에겐 은인이자 직속 상관이던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총상을 입히면서까지 위법적으로 체포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을 도왔고, 그런 과정 중에는 정병주를 최후의 순간까지 경호한 김오랑 소령도 문 너머를 뚫고 온 총탄에 전사했다.[8]
-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아예 납치당한 정 총장 측과 비슷할 지경으로 상황이 더 답답하면서도 불리한 상태에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처럼 부하들의 배은망덕까지 돌려받고 마는데, 자기 휘하의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과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제30경비단장 장세동과 제33경비단장 김진영까지 자기 편제 상의 중요 관할구역 경복궁 안쪽 뿐만이 아니라 수경사령관 휘하의 전 부대 통제권들이 사실상 모조리 하나회 휘하에 놓여 있었고, 어렵사리 출동시킨 전차부대가 김진영의 방해공작에 되돌아오며 이후에 내린 마지막 출동명령 호소까지 부하에게 만류되자, 통신에 불응하며 수경사에 잠복한 신윤희가 진압군 지휘부 패배 직후 곧바로 들이닥쳐 결국 장태완도 체포당했다.
그렇게 전두환 측의 각종 방해공작부터 신사협정을 가장한 병력 출동까지를 포함하여 갖가지 권모술수들과 주요 시설들에 깔아둔 하나회 소속 지휘관들로 진압군의 지휘체계를 교란함과 동시에 휘하 충정부대들이 들이닥쳐 일방적으로 진압군 병력들을 유린한 끝에, 정치에는 관여치 않는 중립적이고 건전한 자세로서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을 위해 순수히 군인본분을 지켜 솔선수범하던 장교들마저 억울하게 희생되거나, 신군부 측의 쿠데타 성공 이후에 숙청당하면서 보안사에 감금당하여 각종 고문에 시달렸거나 설령 어떤 고문 없이 풀려난 이들도 보안사와 중정-안기부로 이어지는 하나회 휘하의 보안방첩기관들에게 자신들의 소중한 사생활까지 감시당하며 이후에도 철저한 탄압을 당했다.
이후 1단계적인 군권 장악을 끝마친 신군부 수장 전두환이 사법부/입법부/행정부 등 모든 국가기관을 지속적으로 배후에서 위압적으로 협박한 끝에, 결국에는 현직 군 인사가 아닌 문민 인사만이 임명되어야만 하는 중앙정보부장 자리까지 기어이 차지해 '국군보안사령관 및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함으로 임명, 불법적인 국가 공직 자리의 겸직을 시작했다. 그렇게 전두환이 국내의 모든 정보망들을 장악한 뒤로, 충정부대는 무력사용만 없는 위협으로 이제는 정치 전면에까지 전두환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신군부 휘하 충정부대 소속 전투병력과 헌병 등의 병력들을 모조리 국회 건물의 코앞부터 국회 입구 계단 쪽까지 대열을 지어 배치시켜두는 불법점거 및 위협행위를 통한 국정 방해 속에서 5월 17일을 기점으로 내려진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가 위법적으로 발동되는 5.17 내란에 이르기까지의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로 인한 궐석 이후 최규하 정부가 적법히 선포했던 계엄령 하의 군에 유리한 상황을 두 번이나 악용해, 실권 세력인 신군부의 추가적 쿠데타를 겸한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까지 포함하면 충정부대는 무려 두 번이나 쿠데타를 돕게 되었다.
4.3.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끔찍했던 살육폭동 현장의 실행부대
5.18 당시 신군부는 해당 지역에 주둔하는 31사단과 광주 보병학교, 육군기갑학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를 짓밟기 위해 상당한 강도의 충정훈련을 시킨 충정부대[9]들을 투입한다.또한 계엄령 하에서도 전국적으로 군사정권 반대시위가 확산되는 와중, 국가 실권의 찬탈 대부분을 끝마친 전두환은 광주에서도 더욱 시위가 커지는 걸 보자 전국 비상 계엄령 선포 하에서 계엄군 신분만 가질 뿐인 충정부대 소속의 반란군들을 광주에 투입해 광주 시민들을 필두로 일어난 정당성이 있는 민주항쟁을, 어떠한 정당성과 명분도 하나 없는 상태로 국내법을 넘어 아예 온갖 국제법마저도 위반해가면서까지 전례없는 수준으로 폭동적 시위진압을 행했던 건 물론, 가혹/잔악하다 못해 흉폭했던 수많은 살육폭동 행위들로 핏빛 비극을 낳은 현장 실행부대로서 투입되어 무고한 광주 시민들에게 지금까지도 평생 아물지 못할 깊은 상흔을 남기고 말았다.[10]
[1] 이 부대들이 절대적으로 충정부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보병사단이었던 부대들이 기계화보병사단으로의 개편을 거쳐 해체된 부대들도 있기 때문에 작전계획은 목적에 따라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2] 舊 제30·33경비단(現 제1경비단).[3] 현재 제5공수특전여단은 국제평화지원단으로 개편됨. 그 외의 1/3/9여단은 온존. 또한, 필요시 제11공수특전여단도 포함.[4] 제8기동사단 예하론 제60기계화보병여단이, 제11기동사단 예하론 제61기계화보병여단 및 제11기동사단 포병여단으로 제20기계화보병사단 포병여단이 흡수통합.[5] 상술했던 임무를 보면 알겠지만, 야전부대-특수부대를 동반한 합동작전을 관군경 보안방첩기관/정보기관 측 첩보망과도 연계해서 대규모 대간첩작전 등의 국지전이나 전면전부터 폭동 진압까지 이르는 정규전-비정규전 어느 분야도 소화해내서 양동작전을 담당했어야 할, 말 그대로 특수임무부대를 넘어선 준특수전부대 연합체의 성질을 띄는 다목적 부대였다는 것이다. 즉, 어찌 보면 대한민국 육군 주도로 먼저 시작했던 미합중국 합동특수작전사령부의 냉전식 개념이었던 셈.[6] 당시엔 현 국제평화지원단이 5공수여단이었으며 1, 3, 5, 9 공수여단이 충정부대에 해당되었다. 이들 중에선 12.12 당시, 공식적 국군 지휘계통 명령체계를 따라서 충정부대로서 제대로 기능한 것은 9공수여단이 유일했다. 나머지는 죄다 군내 사조직 하나회에 소속된 해당 부대 지휘관들 손에 이미 부대 통제권이 반란 이전 시점부터 모조리 넘어간 상태라 사실상 공식 국군 지휘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7] 하필 야시장비의 보급이 사실상 전무했던 탓에 야간 시야가 전혀 파악되지 못 하는 상태에서 열악함 속에 이어진 서로에게 쏟아낸 총알비에, 양측에 소속된 병사 두 사람이 끝내 꽃다운 나이에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말았다.[8] 심지어 반란군 특전사 전투원들은 현충원이나 고인의 생전 의사에 따른 장지도 아닌 외딴 곳에 김오랑의 시신을 독단적으로 암매장해 모독했고, 정병주가 하나회에게 강제 예편당한 후 특전사령관을 맡은 정호용은 이를 전해듣곤 충격을 받아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 라며 그 자리에서 제대로 꼭지가 돌아버렸다. 즉, 그러한 부분만큼은 그 꼬장스런 정호용조차 납득이 안 갔던 것. 그 요지는, "아무리 하나회 소속 육사 후배가 아닌들, 그래도 우리 정규 육사 후배이고 동문인데 그런 후배를 우리 손으로 죽여놓곤 최소한 군인으로서 예우하며 장례를 치러주긴커녕 외딴 데 대충 갖다 파묻는 이딴 개짓거리가 정녕 같은 육사 정규 기수 초대 선배들이자 군인으로서의 도리냐!" 란 뜻까지 내비치며 상당한 반감을 표출했던 것.[9] 제20보병사단(당시에는 보병사단이었다.), 제 3, 7, 11 공수특전여단.[10] 거기다 계엄 당국 실권세력으로서, 하나회 멤버들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주요 고위인사들은 공식 지휘계통에선 지휘책임 문제 회피를 위해서 다 함께 쏙 빠진 채로 이탈해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회 주도 신군부에서의 첩보와 정치공작을 담당하던 보안사에서 이미 철저히 손을 썼을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한 것임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그것이 보안사가 깔아두었다 판단되는 하나회 및 그들을 후원하는 당국자만이 알 수 있는 별도의 장소에 분리시켜 구축한 비인가된 통신회선 상에서 비공식적인 루트를 타고 내려온 은밀한 명령에 의해 사실상 신군부의 수족이던 충정부대는 신군부 쪽이 임명했던 친선인사 소준열의 전교사령관 부임 전까진 윤흥정 휘하의 전남북계엄분소 측 공식 지시를 끝까지도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