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위대 제33 무장척탄병사단 샤를마뉴, 문서명3=무장친위대/부대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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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 | 해체된 사단 |
제33보병사단 {{{#063b94 第33步兵師團}}} {{{#063b94 The 33rd Infantry Divis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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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일 | 1955년 3월 20일(제33예비사단) 1975년 7월 1일(제33보병사단) | |||||
해체일 | 1982년 8월 5일 | |||||
상징명칭 | 번개부대[1]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
상급부대 | 수도군단 | |||||
규모 | 사단 | |||||
역할 | 수도권의 해안 경계 및 김포시 강안 경계 서울특별시 남부, 인천광역시, 경기도 서남부 지역의 향토방위 | |||||
초대 사단장 | 예) 준장 백홍석 (육사 3기) | |||||
해체 전 사단장 | 예) 대장 안필준(육사 12기) | |||||
위치 | 인천광역시 부평구 일신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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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천광역시 부평구를 근거지로 했던 수도군단 소속 사단. 별칭은 번개부대. 1955년 창설되었으며, 1982년 8월 5일 해체되었다.2. 역사
대한민국 육군의 보병 사단. 1955년에 제6군관구사령부 예하 부대로 창설되었지만, 1982년 제17보병사단으로 재창설 되었다.1955년 3월 20일 강원도 양구군 적리(훗날 21사단 구 63연대 자리)에서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 제33예비사단으로 창설되었다. 당시 33사단은 수도권 남부의 향토예비사단이었다. 창설 당시에는 육군본부 직할부대였으나 같은해 인천 부평구로 부대이전하면서 동시에 2군사령부(현 2작사)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에 예속되었다.
당시의 관할구역은 서울특별시 남부와 경기도 서남부(지금의 인천광역시 자치구 지역 포함)로, 지금의 제17보병사단, 제51보병사단, 제52보병사단의 관할구역을 합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옛 수도권 지역 향토사단(30사단, 33사단)에서 각 1대대씩 차출하여 현 수방사 제1경비단의 전신이 되는 수경사 직할부대로 개편된 것 고려하면, 33사단은 간접적으로는 현 수도방위사령부의 아버지라고 할 여지가 존재한다.[2] 하술하지만 이는 5.16 쿠데타 때 동원된 33사단에서 1개 대대 병력을 서울에 잔류, 차출하여 수경사 33대대 → 수경사/수방사 33단으로 개편되었기 때문. 이후 1996년에는 33단이 30단을 사실상 흡수 통합하는 식으로 1경비단으로 개편되었으며, 수방사 제1경비단에는 옛 33사단, 현 17사단의 피가 흐른다고 볼 수 있다.
33사단은 서해안으로 자주 침투하던 무장공비들을 차단하는 데 여러번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현역장병과 예비군 여럿이 전사했다.
김포공항 경비를 담당하던 부대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예하에 김포특정경비사령부를 두었다.
1969년에는 예하 101연대 1대대와 30사단 예하 91연대 1대대가 맞교환되기도 하였다.
1975년에는 제63훈련단(현 55사단)이 창설되면서 한강 이남 수도권 지역에 대한 예비군훈련임무를 그쪽으로 인계하였다.
1976년에는 경기서부 지구에 대한 위수사령부 역할을 수도군단으로부터 인수받았는데, 그것이 사단 정문에 붙어있는 '경기서부지구 위수사령부'의 유래이다.
서울 지역 특히 한강 이남의 위수 및 계엄 임무 담당부대였던 고로 특전사와 수도경비사령부 등과 함께 여러 차례 군사 반란에 동원된 흑역사가 있다.
1961년에는 5.16 쿠데타 당시, 33사단 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 예하 100연대의 유기홍 소령, 101연대의 백대숙, 채희덕 소령, 102연대장 이병엽 대령과 박계성 소령 등이 박정희가 이끈 쿠데타군에 합류에 참여하였고 이들은 33사단장이었던 안동순 준장을 감금하고 협박해 부대를 쿠데타에 동원했었다.
이후 상술했듯 쿠데타를 위해 서울로 출동시킨 33사단 병력 중에서 1개 대대가 원대에 복귀하지 않고 잔류하게 되었고, 수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자 예하로 배속시켜 수경사 33대대가 되었다. 이는 33경비대대가 되었다 33경비단이 되었고, 이후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 된다. 하나회였던 33경비단장인 김진영 대령이 상급자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배신하고 하나회 편을 들어 쿠데타에 가담했기 때문.
거기에 그치지 않고 원 부대였던 33사단은 신군부의 5.17 내란에도 동원된 흑역사가 있다. 1980년 5월 17일 오후 8시 신군부와 육군본부의 지시에 따라 상급부대였던 구 제6관구사령부인 수도군단은 33사단에 101연대 1대대를 현재의 52사단인 100훈련단 작전 통제하에 국가 보안목표였던 국회의사당, KBS에 투입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기 때문.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18일 자정 1대대 2, 3중대에 KBS와 국회의사당에 출동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어, 오전 1시 45분 33사단 101연대 1대대의 대대장 이상신 중령(갑종 197기) 지휘 하에 3중대 소속 장교 3명, 사병 95명이 연대 본부로부터 경장갑차 8대, 사단 전차중대로부터 전차 4대를 지원받아 국회의사당에 진주하며 국회의원들의 진입을 봉쇄했다. 결국 104차 임시국회는 열리지도 못하고 폐회했으며, 신군부의 쿠데타는 성공하고 만다.
사단 본부는 1955년 이래로 17사단이 된 지금까지도 쭉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위치하고 있지만, 특히 과거에는 지금의 부천시인 옛 부천군 소사읍 인근에 있다고 해서 '소사에 있는 33사단'으로 많이 통했다고 한다.[3]
3. 예하부대
괄호 안은 당시 관할구역.(편의상 1975~1978년경)- 제99보병여단[4] (부평권, 부천, 김포)[5]: 당시 연대본부는 지금의 17사단 100여단 자리에 주둔
- 제100보병연대 (수원, 화성, 평택)[6]: 당시 연대본부는 지금의 51사단 사령부에 주둔
- 제101보병연대 (서울 남부, 시흥, 안양)[7]: 당시 연대본부는 안양 석수동(51사단 167연대 옛 주둔지) 주둔
- 제102보병연대 (원인천권)[8]
4. 과거부대
- 김포특정경비사령부
김포공항 경비를 담당하던 사단 예하 사령부. 1978년경 서울 한강 서남부 지역 위수 임무가 100훈련단(현 제52보병사단)으로 넘어가며 그 시기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5. 출신 인물
5.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
역대 제33보병사단장 | |||||
역대 | 이름 | 계급 | 임관 | 비고 | 기타 |
초대 | 백홍석 | 예) 소장 | 육사 3기 | 前 사단장 | |
2대 | 최경만 | 예) 준장 | 육사 2기 | 前 사단장 | |
3대 | 김봉철 | 예) 소장 | 前 사단장 | ||
4대 | 이세호 | 예) 대장 | 육사 2기 | 前 육군참모총장, 제3야전군사령관 | |
00대 | 박정인 | 예) 준장 | 육사 6기 | 前 울산특정경비지역사령부 사령관, 제3보병사단 사단장 | |
00대 | 김윤호 | 예) 대장 | 육사 10기 | 前 합동참모의장, 제1야전군사령관 | |
21대 | 안필준 | 예) 대장 | 육사 12기 | 前 제1야전군사령관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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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5.2. 장교/부사관
5.3. 병
- 성유보 - 언론인
33사단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6. 기타
6.1. 근무환경
6.2. 사단가
7. 사건사고
- 5.16 군사정변
반란군 세력으로 참가.
-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
당시 33사단 예하 향토예비군부대였던 제100보병연대 관할 평택 무기고(現 제51보병사단 제169보병여단)에서 발생한 사건. 사건 자체는 구로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울특별시 서남부 지역에서 이뤄졌지만, 범인들의 무기가 33사단 예하부대에서 탈취된 것. - 5.17 내란
여의도 출동 및 국회 개회 저지 사건
8. 여담
[1] 후신인 제17보병사단이 이 상징명칭까지 가져갔다.[2] 현 수방사는 6.25 전쟁 전후의 수도경비사령부, 수도사단과는 계보가 이질적이며, 제6군관구사령부의 피는 현 수도군단이 이어받고 있다.[3] 한편 당시 30사단은 수색의 30사단으로 통했다. 1980년대부터 현재는 17사단은 부천 송내에 있는 부대로 지칭되는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행정구역상 부평구에 위치하고는 있지만 가장 가까운 전철역이 부천 송내역이라서 그런듯.[4] 제51보병사단[5] 현 17사단 예하 507여단 관할구역[6] 현 51사단 관할구역[7] 서울 남부는 현 52사단, 시흥군과 안양시는 현 51사단 관할구역[8] 현 17사단 예하 507여단 관할구역. 지금의 시흥시, 안산시 지역 해안경계를 담당하기도 했다.[9] 마지막 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