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최종 보직 제15보병사단 부사단장.2. 생애
1932년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 학성리(現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출생. 울산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했다.1960년 경 박정희의 부관을 지냈으며 4.19 혁명 직후인 5월 2일에는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하라는 박정희의 편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전속부관을 지냈으며, 군정 종식 이후 군으로 복귀하여서는 육사 11기의 선두주자로 중령 때 청와대 외곽의 경비를 책임지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을 역임했다. 연대장도 동기 중 가장 먼저 되어 제9보병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다녀왔다.
1967년 8월 17일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이·취임식 후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맨 왼쪽이 전두환 후임 대대장, 맨 오른쪽이 손영길 중령.[1] |
1963년에는 동기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권익현 등과 함께 하나회를 만들었다.[2] 박정희의 부관을 2차례 지내며 4년 넘게 보좌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때문에 육사 11기의 명백한 선두주자였으며 30대대장 직을 전두환이 물려받은데서 보이듯이 당시에는 전두환보다 앞섰다.
승승장구하던 손영길은 별을 단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윤필용 사건에 휘말려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준장으로 강제 예편당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권력 실세였던 윤필용의 참모장이었던 그가 윤필용이 박정희에 대한 역모죄로 숙청당하자 세트로 숙청당한 것. 본인은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당시 자신을 제치려고 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자신을 배신해 그를 모략했다고 주장했다.[3]
1973년 4월 29일 윤필용 사건 관련 재판 당시 사진. 가운데 인물이 손영길 준장. 오른쪽은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 |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으나 1년 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1983년 귀국하여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주선으로 부산 신선대에 미국 PPG사와 합작으로 페인트 제조업체인 동주산업을 설립해 기업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4] 2006년 지분을 합작선인 미국 PPG에 넘기고 사업을 접었다. 여담으로, 5공화국 시절 전두환과 만나기도 했다. 전두환이 큰 도움은 못줬지만 내심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기사
윤필용 사건이 있은 후 38년이 지난 2011년 2월 3일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를 되찾았다. 관련 기사 손영길은 국가배상금으로 받은 5억원 전액을 육군사관학교 발전기금으로 기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