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5 20:27:13

고증

1. 개요2. 인터넷에서 잘못 쓰이는 단어
2.1. 창작물에서의 고증2.2. 영어로는?2.3. 고증과 작품성은 비례하는가?
3. 고증만능주의4. 현실적 한계5. 기타6. 고증 완성도7. 관련 문서

1. 개요

考證
고증의 사전적 정의는 '예전에 있던 사물들의 시대, 가치, 내용 따위를 옛 문헌이나 물건에 기초하여 증거를 세워 이론적으로 밝힘'이다.

사전적 정의만을 놓고 본다면 진품명품처럼 골동품이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거나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문헌을 통해 확인하거나, 과거의 경전이나 조각품에 쓰인 내용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울 때 그를 알아보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고증의 예시로 들 수 있다. 사전적 의미의 고증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단어로 고증학을 들 수 있다.

2. 인터넷에서 잘못 쓰이는 단어

'고증하다'는 고전 자료로부터 무언가를 밝혀내는 것인즉 증명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단어 자체가 수동성을 띠기보단 행위자의 주체성이 강하게 동반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유튜브 등지에서 쓰이는 '고증을 지켜내다', '현실 고증' 등과 같은 표현은 잘못된 용례이다. 쉽게 말해 창작물을 실제에 맞게 나타낸 것에는 고증이라는 단어 대신 '반영'이나 '재현'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 조선시대 궁인들의 옷차림을 각종 고문헌을 통해 고증하였다. (O)
  • 경국대전을 통해 고증한 것을 반영하였다. (O)
  • 영화 인터스텔라가 블랙홀에 대한 고증을 잘 지켜냈다. (X)

이는 연극영화학적 용어인 '시대 고증'을 뜻하고 쓰이는 바람에 잘못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증과 시대고증 둘 다 '고증'이 붙지만 엄연히 사전적 정의는 서로 다르며, 고증은 일반 단어이지 연극영화학적 용어가 아니다. 국어사전에 정식 등재된 '시대 고증'의 뜻은 '영화나 연극 따위에서 제재(題材)가 된 시대의 의상, 도구, 장치, 풍속 따위를 바르게 나타내기 위하여 조사하는 일'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 역시 '옛 고'자를 쓰는 만큼 시대고증이라는 용어 또한 과거시대에 대해 사용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즉 미래나 현재에서는 쓰일 수 없다. 미래나 현실에 걸쳐지는 순간 그건 시대 고증이 아니라 '이론 반영', '사실 반영'이라는 말로 적절히 바꿔 써야 한다.

여기까지는 그렇다치고 더 나아가서 아예 가상 설정의 정합성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비약되는 경우까지 있다. 판타지 작품의 영역에서도 위와 같은 고증의 정의가 사용되기도 한다. 마법사들이 비행 마법으로 날아다니는 것을 현실적인 고증에 맞지 않다고 엉뚱하게 비판하는 것은 아니고, 작품을 둘러싼 설정이 얼마나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한다. 즉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의 정합성이 '현실과 얼마나 비슷한지'에 있다면, 현실 배경이 아닌 작품들의 정합성은 '설정과 얼마나 비슷한지'로 대체되어 있으며,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고증이 아니라 작품이 핍진성을 얼마나 잘 확보하고 있는지와 그렇게 핍진성을 잘 확보한 설정에 맞추어 내용이 흘러가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를 따지는 문제로 넘어간다. 즉, 고증 자체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위 같은 오용 탓에 인터넷이나 유튜브 등지에서 고증이라는 단어를 창작물에서,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 상의 역사적, 기술적, 사회적, 혹은 과학적인 상황과 맥락 등을 원리나 실상에 맞도록 올바르게 반영 또는 재현하는 것이라는 확장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이동진 평론가조차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대해 고증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 이는 단어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잘못된 용법이다.

인터넷 이용자를 중심으로 모방사용의 사례가 있고, 일부 언론사 등지에서도 역사 영화나 과학 영화 등을 소개하며 '고증이 잘 되었다', '고증 논란이 있다' 등의 표현을 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 이러한 오용 사례를 접할 기회가 많은 누리꾼들의 주의가 필요하다.

물론 앞서 말했듯 위의 경우도 용어의 의미에 맞지 않는 오남용 사례이므로 이러한 경우는 설정에 맞다/맞지 않다로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

2.1. 창작물에서의 고증

창작물에는 여러 장르가 있고, 어느 장르이건 간에 팬이 항상 존재한다. 그 중에는 비교적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팬들 역시 많다. 가령 밀덕후로 지칭되는 군사 매니아들은 전쟁 영화에서 무기전쟁의 묘사에 매우 민감하다. 사극의 복식이나 제도, 정치적 상황이 허술하면 이번에는 역덕후들에게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독자들의 몰입이 중요한 서사 예술은, 너무 허술한 상황 설정 때문에 독자가 보기에 너무 어색해서 집중이 잘 안 된다면 그만큼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악평을 듣기 마련이다. 고증은 이 점에서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 관객을 상대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일부 매니악한 팬층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의 등장인물이 조선 시대에만 있었던 관청에서 근무하고 있다면, 일반인들은 어색해하거나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역사 전공자나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성가시게 느껴질 것이다. 순문학 같은 장르는 독자층이 폭넓지만, SF, 사극, 원작이 존재하는 작품, 역사 시뮬레이션 등은 그 특성상 한 우물만 판 수용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하며, 심한 경우 매니아층의 지지가 없이는 시장성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장르도 굉장히 많다. 그런 경우 작품의 고증에 대한 논쟁은 팬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는 화두이기도 하다.

전문가 집단이 창작물의 고증을 논하는 경우도 있다. 기황후시청률이 높아지자 역사학자들이 실제 사실을 알리고 잘못 묘사된 부분을 지적한 것, 인터스텔라의 개봉 이후 제작에 참여한 물리학자 킵 손이 인터스텔라 속의 과학을 설명한 책을 낸 것 등이 그 좋은 예시다. 학자들은 대중들과 소통하며 올바른 지식을 전달할 의무가 있고, 각종 창작물의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이 창작과 상상의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사실인 것으로 믿어 버리는 일도 자주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창작물의 고증적 오류를 논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창작자들은 팬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고증을 잘 지켜 어색함을 줄일 필요가 있다. 고증이 낳는 생동감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동시에 잘못된 인식이 퍼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고증 오류를 범한다면 그에 대한 전문가들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창작물은 창작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정확히 하는 것이 좋다. 또한 작품의 성격에 따라서 주의할 점은 천차만별이다. 다큐멘터리와 같이 학술적 성격을 가진 작품은 오히려 오락보다도 정보 전달이 더 주된 목적이므로 잘못된 과학 정보를 포함했다가 큰 봉변을 치를 수 있다. 한반도의 공룡 같은 작품은 사실성이 없는 정도가 지나쳤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다. 트렌디 사극을 표방한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재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윤색하는 것 역시 어지간히 큰 왜곡이 아닌 이상 비난의 대상이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창작물에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역비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역사에 충실한 정통 사극을 내세우는 작품이 정작 시대상의 조명에 소홀하다면? 말할 것도 없이 크나큰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과거 풋풋한 대학 시절을 보냈던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하고자 한다면 그 때의 생활상을 정확히 꿰뚫을수록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처럼 작품에 따라서 고증의 중요도는 크게 달라지며, 고증을 하는 방식과 수용자가 고증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라진다.

따라서 창작자들에게 고증 문제는 애써 만든 창작품을 관객들, 독자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니 이게 왜 이렇지?' 하고 외면을 받지 않도록 완성도를 높이는 면에서도, 잘못된 사회적 인식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2. 영어로는?

한국에서는 주로 '고증'이라는 말로 쓰이지만, 영미권에서는 딱히 '작품에서 나온 묘사가 현실성을 얼마나 잘 반영했는가'라는 의미만 특정적으로 뜻하는 단어는 없다. 그나마 개별 단어로써 가장 비슷한 의미를 가진걸 찾자면 핍진성이라는 뜻의 'Verisimilitude' 정도이다. 하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쓰이는 '고증'이라는 단어에 완벽하게 매칭되는 뉘앙스로 쓰이진 않으며, 이 경우 '현실성'을 뜻하는 realistic 을 쓰기도 하지만[1] 창작물에서의 고증은 보통 '정확성'을 뜻하는 accurate 혹은 accuracy 을 가장 많이 쓰는 편이다.[2] 앞에 특정 단어가 붙어서 각각 과학적 현실성(scientifically accurate / Scientific Accuracy)[3]이나 역사적 현실성(historically accurate)[4]이라고 나뉘어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특별히 '고증 오류'라는 말에 한정적으로 해당되는 영단어 역시 없다. wrong이나 error을 써서 scientifically wrong(과학적으로 틀린 것) 혹은 historical Inaccuracies, historical errors(역사적으로 틀린 것)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한 한국에서는 '고증오류'라고 불리고 있는 쥬라기 월드/고증오류의 "시설의 현실적 안전도 논란"처럼 역사적, 과학적으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이랬어야 한다' 싶은 것들 그냥 inaccurate(부정확성) 이라고 해도 되고 아니면 그냥 간단하게 wrong 이라고만 해도 무난하다. 예시가 바로 그 Everything wrong with (물론 이 경우는 고증오류만 까는게 아니지만) 또한 그냥 "Got Wrong" 정도로 쓰는 것으로 보인다.[5] 사실 이런걸 다 싸잡아 '고증오류'라는 특정적 단어로 붙이는건 한국 뿐이다.

2.3. 고증과 작품성은 비례하는가?

다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증과 작품성은 그 자체로는 인과관계가 없다.

고증은 분명히 작품의 완성도에 영향을 끼치는 한 요소이고, 때로 작품의 평가와 직결되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사회적 의무를 배제하고 완성도 자체만을 따진다면 고증 역시 어디까지나 작품의 한 부분으로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고려하는 사항에 불과할 뿐 일순위로 고려할 이유가 없다.

서사창작물의 기본은 속된 말로 얼마나 미끈한 구라를 풀어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미끈한 구라를 구성하는 것에는 상당히 많은 요소가 포함된다. 우선 분명한 주제의식이 있어야 하고,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개연성 있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극적 합의에 의해 판타지나 심령적 요소, SF 요소가 포함되기도 하지만 이런 요소들조차 처음부터 관객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했거나 극 진행 속에서 받아들일 만한 근거가 주어지지 않은 요소는 개연성을 저해한다.[6] 관객들은 바보나 머저리가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탄탄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좋은 작품'의 1순위 요소는 충실한 고증이 아니라 좋은 스토리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고증을 열심히 고려하면서 창작을 하다 보면 분명히 창작에 도움이 되기는 한다. 스토리가 그만큼 풍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연성'이라는 말을 '그럴 듯하다, 있을 법하다'라고 핍진성과 유사한 것으로 풀이한다면 고증이 섬세할수록 리얼리티가 증가하고, 개연성 역시 크게 증가한다. 그러나 고증이 작품의 질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의 부피를 너무 늘리지 않는 선 안에서만 그러하다. 다시 말해 스토리 라인에서의 고증은 스토리 라인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한해서만 작품의 질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충분한 개연성을 담보할 수 있다면 고증이 없더라도 작품의 질은 우수할 수 있다. 반대로 스토리 라인에 직접 영향이 없음에도 고증에만 집착하거나 고증이 오히려 스토리의 개연성을 저해한다면 고증이 잘 되었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두 번째 요소는 시청각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영상매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를 조합해야 하는데, 저마다 분명한 기능을 가지고 조직된 화면 안의 모든 요소를 '미장센'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시각적 요소에 대한 고증은 '미장센'의 영역이다. 영상매체에 등장하는 총이나 병기, 무기, 복식에 대한 고증 말이다. 그런데 미장센은 전술한 바와 같이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배열된 것을 의미하지 무의미하게 늘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띠돈 패용이 잘 고증된 장면의 띠돈도 연출자가 의도했다면 미장센이지만 의도하지 않았다면 미장센이 아니다. 그것은 비평적으로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 부분이다. 반대로 칼을 손에 들고다니는 그림도 연출자가 의도했다면 미장센이며, 이 미장센이 미학적으로 혹은 영상문법적으로 혹은 개연성 측면에서 왜 허술하고 나쁜 미장센인가를 비평할 수는 있지만 그런 미장센을 연출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각적 고증의 영역도 잘 조직된 미장센의 관점에서 보아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청각적인 부분이 잘 된 고증은 대부분 개연성을 높이고 사실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므로 미장센 안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증이 미흡한 부분도 미장센에 의한 것이라면 '고증이 미흡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이 미장센은 영상미학적으로 왜 허술하거나 효율적이지 못한가, 혹은 이러한 미장센을 만들어낸 의도가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 등에 미루어 옳거나 효율적이었는가를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판타지 작품에나 등장할 법한 갑옷을 등장시켜놓고 한국사의 영광이나 한국 문명의 찬란함 따위를 주제의식으로 내세우고 있다면 "사실을 왜곡한 미장센이 한국사의 영광을 증거하거나 묘사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 옳지 그것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토리를 잘 조직하고 미장센을 잘 구성하는 유능한 스토리텔러, 유능한 연출자라면 고증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반대로 이런 사람들은 고증이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해도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스토리를 조직하는 능력과 미장센을 구성하는 능력이 딸리는 스토리텔러, 무능한 연출자라면 고증을 아무리 열심히 해보았자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 고증은 좋은 작품을 만드는 수단이지 작품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고증덕후라면 좋은 작품이 나오지만 임성한은 고증덕후가 된다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줄리어스 시저는 시대 고증이 잘 되어있다고 하기엔 힘들지만 카이사르와 그를 암살하려는 이들의 심리와 행동이 매우 그럴듯하게 잘 나타나 있어 불후의 명대사들과 함께 위대한 고전으로 남았다. 반대로 삼류 극작가가 로마 공화정 말기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재미있는 연극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쥬라기 공원 역시 마찬가지의 예시다. 또한 완성도라는 개념은 매우 폭이 넓어서, 가령 만화의 경우에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솜씨도 완벽하고 고증 역시 필요한 만큼을 정확히 지키는 작가가 그림을 말도 안 될 지경으로 성의 없이 그린다면 그것도 완성도가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즉 고증과 완성도는 정비례하지 않으며, 고증만으로 작품을 따지기에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그 요소들 중에서도 고증은 완성도의 변방에 자리잡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증에 눈이 멀어서 작품의 다른 구성 요소들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창작물을 내팽개치고 있는 것이며, 생산적인 창작 활동이 될 수 있을 것을 한심스러운 지적 유희에 그치도록 악화시키는 것일 수 있다.

다만 어떤 작가가 고증에 철저했다는 것은 그만큼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이고, 작품을 만드는 데 기초가 되는 중요한 배경에 대한 이해를 원활히 하고 있을 공산이 크기 때문에 고증과 완성도 간에 약한 상관관계 정도는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생판 문외한이 제작을 하는 것보다는 사전 조사가 철저한 제작자가 스스로의 지식을 적절히 활용하는 편이 완성도가 더 높은 작품이 나오기 마련이니 말이다. 물론 설정놀음만 일삼느라 제대로 서사를 전개하는 능력이 부족한 제작자가 수두룩하고, 일부러 고증을 필요한 만큼만 지키고 패스할 부분은 패스하면서도 명작을 뽑아내는 작가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의미한 상관관계라고 보기는 힘들다.

3. 고증만능주의

창작물의 고증에 대해 살피고 창작자들과 생산적인 논의를 한다면 창작자 입장에서는 독자들이 원하는 바를 캐치하게 되어 좋고 수용자들 입장에서는 제작에 의견이 반영되어 몰입감이 배가된 작품을 늘길 수 있게 되어 윈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혹 작품의 가치를 오직 고증에만 두는 사람들도 있다. 고증오류를 지적하는 개인은 그럴 만한 지식도 있고 애정도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매니아 계층의 구성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증덕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엄격하게 반응하고, 고증상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드러내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도 한다.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창작물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미덕에 대해서는 쉽사리 둔감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소설에는 문체가, 연극에는 연출이 중요한 것처럼 표현상의 형식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작품이 가져야 할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 이들은 작품 전체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 지엽적인 부분에서의 고증까지 마구 물고 늘어지지만, 그것이 비평적으로는 아무런 함의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 창작물은 백과사전이 아니고 예술의 영역인데도, 지나치게 고증에 얽매이고 현실성을 따지는 나머지 창의성의 발휘를 억압하는 것이다. 마치 창작물이 현실의 모방에 불과해야 한다는 듯한 플라톤도 아니고 극사실주의 극혐? 오만한 태도는 예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도 완벽한 고증은 불가능하다. 고증은 근본적으로 현실의 재현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창작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재해석의 폭이 가장 좁은 다큐멘터리 장르를 보자. 현실 세계의 전달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된다. 그러나 현실을 완벽히 모사하는 창작물은 존재할 수 없다. 뉴욕 시민들의 하루를 다루는 1시간 반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고 하자. 카메라에 찍힌 내용은 모두 실사 영상이기에 내용에 포함된 내용들은 고증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하자. 이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완벽히 재현한 것인가? 그러나 뉴욕 시민들의 삶을 말 그대로 정확히 재현하려면 그만큼의 시간공간 역시 재현되어야 한다. 즉 뉴욕 시민들의 하루를 오차 없이 모사하려면 뉴욕 전역을 24시간 동안 카메라로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중 일부가 재미가 없어서 덜어낸다면 그 순간 현실의 뉴욕과 다큐멘터리 속의 뉴욕 사이에는 오차가 발생한다. 어떤 종류의 편집이든 하지 않고 창작물을 만들라는 소리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로 허황된 고증이 가능할 리가 없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특히 작품에 등장하지 않은 것들까지 언급해 가면서 '이게 나왔어야 했다'하고 비판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담론에서 무의미해진다. 일제 시대 만주의 독립 운동을 다룬 사극에서 안창호 선생이 등장하지 않고 김좌진 장군만 등장했다면 이것은 잘못인가? 그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했다고 볼 여지가 없는 김구 선생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잘못인가? 아예 만주라는 공간적 배경만을 카메라에 담은 감독의 선택이 잘못인가? 이런 문제는 무한히 소급되며 끝날 여지가 마땅치 않다.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창작자가 전달할 주제 의식을 정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선별해야 한다. 그것이 없이는 예술이 성립할 수 없다. 어차피 현실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이 가능한 것도 아닌데, 잘못 등장한 내용을 바로잡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런 내용은 더 들어가야 한다'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경우 너무 무분별한 의견이 나올 여지가 많다.

뿐만 아니라 고증이 여러 층위로 나누어져 있는 경우에는 충돌할 수 있다. 가령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한 학원연애물 웹툰이 있다고 하면, 고증의 포커스는 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잘 반영했는지에 맞추어져야 독자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당 만화에 맞춤법인 엉망인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는 내용이 있다고 해 보자. 국어 원칙을 제대로 고증하려면 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현행 맞춤법이라는 원리가 판단 준거인 이상 그에 어긋나는 부분은 국어에 대한 고증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틀림없이 커다란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카톡에서까지 표준 맞춤법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며, 학생들은 더욱 그렇기 때문이다. 즉 맞춤법을 준수한다면 국어적 고증은 충족하나 학생들의 생활에 대한 고증에는 완전히 실패해 마치 국어 교과서를 보는 듯한 이상한 장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어 맞춤법 고증을 정확히 하라는 요구는 오히려 방해만 된다. 같은 의미에서 전쟁 영화에서 겁에 질린 군인이 총 쏘는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핵심을 놓친 비판이다. 만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무너지는 인간을 그려내려고 했다면 총 쏘는 법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은 오히려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이런 것을 고증에 어긋난다고 무작정 배척하는 행위는 정작 작품이 말하려고 주제의식은 멀리하고 개별적인 장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어리석은 행위다. 고증에 대한 편집증적인 도착은 오히려 작품을 작품으로 감상하는 것을 방해한다.

특히 같은 수용자들 입장에서도 악질 고증만능주의자들은 아주 짜증나기 마련이다. 고증에 정말 무관심해서 아무 말이나 해도 다 믿는 사람들이 독자의 전부가 아니라, 고증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창작물을 창작물로서 즐길 뿐 그것을 정말 믿을지의 여부는 별개로 볼 수도 있다. 흥미가 생겨서 작품의 배경에 대한 더 정확한 지식을 알고 싶다면 관련 서적을 찾고 검색을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들은 마치 고증이 잘못된 작품의 독자들은 창작물과 현실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제멋대로 판단한다. 재미있게 작품을 잘 보고 있는 사람들더러 잘못된 사실에 빠져선 안 된다며 다짜고짜 계몽주의자 행세를 하는 등 눈치없이 초를 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고증을 지키려는 행위에 대한 반감을 낳을 수 있다.

또한 고증상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이라고 그 분야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으므로, 잘못된 고증이라고 지적을 했는데 오히려 지적하는 사람의 말이 틀리는 경우도 심심찮다. 특히 고증에 대해 지나치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인터넷 등지에서 활발히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정말 권위가 있는 전문가라기보다는 아마추어, 오타쿠의 영역에 해당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신뢰성을 보장할 수 없다.

4. 현실적 한계

<고증오류> 문서의 <현실적 한계> 문단 참고.

5. 기타

케이블채널 tvN에서 고증에 충실히 재현한 렛츠고 시간탐험대라는 프로를 만들었는데, 진짜로 고증 충실했을 뿐인데 다큐멘터리가 아닌 예능이 되어버렸다(...). 다만 이건 애초에 프로그램의 목표가 예능이다 보니 정말로 다큐가 되었으면 곤란했기에 일부러 예능으로 성격을 잡은 것. 이 프로그램의 고증에 힘입어 다른 프로들도 고증도가 높아지면 하고 소망한 고증덕들이 많았다.

파일:gojung2.jpg
어린이 대상 위인전의 경우도 최근에는 고증이 뛰어난 편이다. 보다시피 고구려 왕의 백라관도 고증했고, 신라 왕도 무열왕 때 당나라 복식을 받아들인 후에는 신라 금관을 쓰지 않고 당나라의 복두와 단령을 입은 모습을 고증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인 고증오류까지 고증을 보고, 그것도 연구다. 예를 들면 성경을 바탕으로 한 중세시대의 삽화에서 성경의 배경인 중동이 아닌 유럽인의 복식을 한 그림을 보고 그 삽화의 연대와 시대상을 유추해 낸다. 소설이나 연극도 마찬가지라서, 적벽가에 뜬금없이 조총과 환도가 등장하지만 그냥 고증이 틀렸다고 매도하지 않고 그 당시 조선의 군역제도를 연구한다.

6. 고증 완성도

  • 고증이 많이 이상해진 것들
    한마디로 말해 을 맞은 수준. 한국 사극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게 환뽕이다. 애당초 과거의 사실을 재현하려는 의도 자체가 비뚤어진 애국심 따위로 엇나가 있었던 부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비단 그렇지 않더라도 현재의 문화를 과거에 무리하게 적용시킴으로써 생활상의 제반 물자나 사회상의 분위기가 목적한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여기에 넣는다.
  • 고증이 조금 이상해진 것들
    눈에 띄는 옥의 티가 있는 수준. 불가피하지 않은 부분에서의 고증오류가 있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대체로 생활상의 제반 물자나 사회적 분위기에서의 오류가 여기에 들어간다. 말 그대로 알지 못해서, 어쩌다가 보니 고증상의 오류가 생겨났는데 그것이 이후 눈에 띄게 지적받거나 놀림감이 되어버린 부류.
  • 고증이 상당히 충실한 것들
    극의 내러티브 내 중요한 부분에서 충분한 고증을 보여주고 노력한 수준. 모든 면에서 완벽한 고증을 보여줄 수는 없다. 특히 시각적인 면에서는 고증에 힘을 썼지만 극의 흐름은 실제 역사와 다른 작품들이 좀 있는데, 이는 그것이 엔터테인먼트로써의 가치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극적 구성에서 각색한 부분은 있지만 근본적 지향은 합치되는 부류.
  • 고증에 매우 충실한 것들
    가능한 한 고증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은 수준. 물론 차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가능한 한 모범적인 고증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생활상의 제반 물자, 역사적인 내러티브만이 아니라 그 사회적 이면에 나타나는 시대적 발전 단계와 분위기까지 충분히 감안하여 재현한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 허구지만 고증이 사실처럼 이루어진 것들
    실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문화를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창조해낸 수준. 허구라는 실드를 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놀랍게 느껴지지만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해도 충분히 놀랍다. SF의 경우에는 근미래의 기술혁신을 미리 예언했다든가 하는 게 이런 부류.

자세한 내용은 고증/작품별 고증 완성도 항목 참조.

7. 관련 문서



[1] 예시: How realistic is the physics in Interstellar? (인터스텔라의 물리학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 예시2: How Realistic Is Gravity? (그래비티는 얼마나 현실적인가?)[2] 예시: How Accurate Is 'Genius' To Albert Einstein's Real Life? (지니어스(내셔널 지오그래픽 드라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실제 삶과 얼마나 일치하는가?)[3] 예시: How scientifically accurate is The Martian? (마션은 얼마나 과학적으로 정확한가?)[4] 예시: How historically accurate is Assassin’s Creed? (어쌔신 크리드는 얼마나 역사적으로 정확한가?)[5] 예시: Here's Everything They Got Wrong (and Right) in the Movie Twister / 11 Things The 'Titanic' Movie Got Wrong About The Real-Life Tragedy / 16 things Gravity got wrong (and some things it got right, too)[6] 설국열차를 생각해보자. 관객들 중 상당수가 막판에 열차 문을 부수고 나간다는 제안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는데, 이는 영화가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여기에 동의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 장면 속에서 녹아가는 눈과 얼음이 충분히 제시되었다면 이런 거부감은 느끼는 사람이 없거나, 적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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