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3 22:22:47

민트센티 요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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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헝가리의 잡지 물트코르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차시 1세 무명용사 어틸러 요제프 라코치 페렌츠 2세 센트죄르지 얼베르트
6위 7위 8위 9위
민트센티 요제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라슬로 1세 코슈트 러요시 쾨뢰시 초마 샨도르
9위 10위
후녀디 야노시 퍼프 라슬로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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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민트센티 요제프
József Mindszenty
파일:József_Mindszenty.jpg
출생 1892년 3월 29일
헝가리 왕국 체히민센트
사망 1975년 5월 6일 (향년 83세)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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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가톨릭
직업 추기경
소속 소속
서명
파일:Signature_mindszenty_jozsef.gif
문장
파일:COA_cardinal_HU_Mindszenty_Jozsef2.svg.png

1. 개요2. 생애

1. 개요

1945년부터 1973년까지 에스테르곰 대주교이자 헝가리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를 지낸 헝가리 출신의 가톨릭 교회 추기경으로 그의 성인 시성은 1993년에 시작되었고,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9년에 그를 가경자로 선포했다.

2. 생애

민트센티 요제프는 신앙심 깊은 농가 출신으로, 어머니의 신앙교육이 그의 성품과 소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등학교를 마친 뒤 1903년부터 솜버트헤이 프레몽트회 김나지움에서 공부하고, 이후 신학교에 진학해 1915년 미케시 야노시 주교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헝가리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에 반대하며 활동하다가 1919년 평의회공화국 시기에 체포되어 잠시 구금되었다. 같은 해 자러에거르섹 본당 주임이 되었고, 호르티 미클로시를 처음에는 지지했으나 이후 정부의 방향과 대립했다. 그는 합법 군주주의(레기티미즘)의 대표적 인물로, 헝가리 왕정 복귀를 지지하며 자라 지방 정치의 핵심적 인물이 되었다. 1924년 노트르담 수녀회를 초청해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 시설과 요양원을 세웠다. 교육과 사회복지, 신앙활동에 헌신하며 지역사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1937년 교황으로부터 교황청 명예사제로 임명되었다.

1942년 8월, 펨 요제프는 독일계 성씨를 헝가리식으로 바꾸기 위해 고향 이름을 따서 민트센티로 개명했다. 그는 편지에서 독일의 선전으로 인해 헝가리가 독일인 국가로 오해받는 것을 막기 위한 애국적 결단이었다고 밝혔다. 1944년 3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베스프렘 주교로 임명되어 3월 25일 대주교 세레디 유스티니아노에 의해 서품을 받았다. 그의 주교 표어는 “Devictus vincit(패배했으나 승리한다)”였으며, 학교와 본당 설립에 힘썼다. 1944년 11월 나치 협력 정권인 살러시 페렌츠 정부가 집권하자 그는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Juramentum non(맹세하지 않는다)”라는 글로 신앙과 교회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는 아포르 빌모시 등과 함께 나치화살십자당의 폭정, 유대인 학살, 전쟁 파괴에 반대하는 서한을 작성해 정부에 제출했다. 헝가리 주교단은 유대인 박해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생명을 걸고 그들을 보호했다. 그로 인해 민젠티와 함께한 주교들은 화살십자당의 표적이 되었고, 그는 1944년 12월 22일 26명의 신부 및 신학생과 함께 체포되어 소프로니케히다 감옥에 수감되었다. 혹한 속에서 눈을 치우는 강제노동 중 병에 걸렸으며, 12월 29일 아포르 주교의 중재로 소프로니의 수도원으로 옮겨져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1945년 4월 1일 소련군이 진입하면서 석방되었고, 4월 20일 베스프렘으로 돌아가 주교직을 재개했다.

헝가리 왕국 붕괴 후에도 민트센티 요제프는 평생 군주주의자로 남았다. 1945년 9월 15일 헝가리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에스테르곰 대주교 겸 헝가리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1946년 2월 21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산토 스테파노 로톤도 성당의 사제로 서임되었다. 교황은 그에게 “이 붉은색이 상징하는 순교를 네가 가장 먼저 겪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산당은 그를 반혁명적 성직자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귀족적 태도와 교회 재산 보상 요구를 이유로 비난했다. 공산 정권의 토지 몰수로 교회는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고, 민젠티는 교회가 국가의 보호를 구하지 않고 오직 신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한다며 교육의 세속화를 강하게 반대했다. 1948년 수도회가 금지되자 공산 독재자 라코시 마차시는 그를 왕정 복귀와 호르티 정권을 지지한 반동 세력으로 몰았다. 1948년 12월 26일 그는 반역과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고, 고문과 폭행 끝에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강요된 자백에는 성 이슈트반 왕관 절도, 합스부르크 왕정 복원, 제3차 세계대전 계획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9년 2월 3일 공개재판에서 민트센티는 일부 사실을 인정했지만 결론은 부정했고, 2월 8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교황 비오 12세는 관련자 전원을 파문하고 성베드로 광장에서 민트센티를 옹호하는 설교를 하며 교회의 자유를 외쳤다. 이후 교황은 「Acerrimo moerore」라는 서한을 통해 그의 고문과 부당한 재판을 공개적으로 규탄했다. 1956년 10월 헝가리 혁명 중 민젠티는 7년여 만에 석방되어 부다페스트로 돌아왔고, 11월 2일에는 반공 봉기를 지지하는 라디오 연설을 했다. 1956년 혁명 말기에 그는 부다 성의 자택에서 외국 사절단을 접견했으며,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던 사제들을 즉시 해임했다.

1956년 11월 4일 새벽, 민트센티 추기경은 부다페스트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해 망명을 요청했고, 예외적으로 이를 허락받았다. 이는 국제법과 미국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정치적 결정으로, 미국이 헝가리 내정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민트센티 사건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단지 인도적 피난처만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대사관 내에서 철저히 감시받으며 외부와의 연락이 제한되었고, 교황청 및 외부 세계와의 서신도 통제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속적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헝가리 상황을 보고하는 편지를 보냈고, 때로는 답신도 받았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1963년 헝가리 정부의 정치범 사면 결정에는 민트센티가 대사관에서 보낸 보고와 조언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헝가리와 바티칸 간의 관계 개선 움직임도 이러한 변화에 기여했다.

민젠티 추기경은 1956년 헝가리 혁명 후 미국 대사관에 피신해 수십 년간 그곳에서 머물렀다. 소련 정보기관은 그를 대사관에서 체포하려는 작전을 준비했으나 미-소 합의로 무산되었다. 1967년, 헝가리 정부는 민트센티가 교황에게 에스테르곰 대주교직에서 사임하도록 압박했으나, 그는 교회 직위 유지와 수감된 사제 석방, 성모의 왕국 성당 복구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1971년, 교황과 헝가리 정부 간 협상 끝에 그는 9월 28일 헝가리를 떠나 로마로 갔으며, 미국과 헝가리 간 외교 관계 정상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교황은 1974년 그의 에스테르곰 대주교직을 공석으로 선언했으나, 민트센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바티칸 지시로 오스트리아 빈의 파츠마네움 신학교로 옮겨 거기서 생애를 마쳤다. 1975년, 건강 악화에도 라틴아메리카의 해외 헝가리 공동체를 방문했으며, 귀국 후 수술 중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5월 6일 83세로 사망하였다. 유언에 따라 마리아첼에 안장되었고, 1976년 에스테르곰 대주교직에는 레커이 라슬로가 임명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 수십 년이 지나 재매장 과정에서 흥미로운 발견이 있었다. 가톨릭 전통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성인의 상태를 나타내듯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유언에 따라 “마리아와 성 이슈트반의 나라 위로 모스크바의 불신의 별이 저물 때, 내 시신을 에스테르곰 대성당 지하 납골당으로 옮기라”는 지침이 있었으며, 1991년 5월 1일 그의 무덤이 개장되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추기경의 시신은 매우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재매장식은 1991년 5월 4일 에스테르곰 대성당에서 수만 명의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으며, 장례 미사와 세속적 추모 행사가 함께 진행된 후, 그의 유골은 에스테르곰 대성당 지하의 대주교 납골당에 최종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