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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nity | |
실험 날짜 | 1945년 7월 16일 |
실험 장소 | 뉴멕시코 앨라모고도(Alamogordo) |
실험 횟수 | 1회 |
주도 | 미합중국 육군 |
1. 개요
9,140m에서 촬영한 핵실험 당시의 현장 영상
트리니티 실험(Trinity test)은 미국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핵실험으로, 인류 원자력 시대의 개막을 알린 사건이기도 하다. 이 실험은 맨해튼 계획의 결실로서 실험 당시에는 군사기밀이였으며 대중에 공개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였다. 명칭인 '트리니티(Trinity)'는 삼위일체를 뜻한다.
2. 과정
개발 과정에 대해 자세한건 맨해튼 계획 참고.2.1. 폭탄
트리니티 실험에 사용될 핵무기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폭탄으로, 가젯(Gadget)이라는 코드명이 붙여졌다. 코드명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그냥 물건 또는 장치라는 뜻인데, 이러한 이름이 붙은 이유에는 기밀 누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겉으로 볼때나 실상이나 "폭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괴한 모습이었기[1] 때문이다.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도 원자폭탄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물건, 장치, 심지어는 그냥 '그것(That)'이라고 불렀다.[2]플루토늄 핵폭탄은 주변을 둘러싼 재래식 폭약들(폭축렌즈)이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동시에 폭발하여 그 압력으로 중앙의 플루토늄을 강하게 압축시켜야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 있고, 따라서 주변의 폭약을 정확한 타이밍에 기폭시키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설계의 결과로 가젯의 표면은 온갖 돌출부와 케이블, 기폭장치가 어지럽게 얽혀있는 기묘한 쇠공 같은 모습이 되었다.
철탑에 설치완료된 가젯의 모습.[3]
우라늄 원자폭탄을 실험하지 않은 이유는 플루토늄과는 달리 우라늄 원자폭탄은 상대적으로 원리나 구조가 간단하고, 보다 잘 연구되어 있어 굳이 실험을 통해 작동을 검증할 필요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플루토늄 핵폭탄은 전혀 새로운 구조에다가 기술적으로도 난이도가 높았고, 따라서 검증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위험을 무릅쓰기 힘들었다.
2.2. 장소
보통 실험이 아니라 실험 장소를 선정하는 데도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야 했다. 워낙 강력한 폭탄 실험이니 주변 지형지물 때문에 충격파가 간섭되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 평평한 지형에서 실험해야 했고, 효과를 안전거리에서 육안으로 관측하기 위해 날씨가 좋고 시야가 넓은 장소를 선택해야 했다. 핵분열 생성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목장이나 거주지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했고, 주요 시설이 자리한 로스 앨러모스와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해야 했다. 물론 기밀 유지를 위해 매우 외딴 곳에 위치해야 한 것은 물론이다.이러한 고려 끝에 최종적으로 뉴멕시코의 앨러모고도 공군 기지 북서쪽 사막[4] 한가운데가 최종 실험 장소로 확정되었다.
2.3. 사전 준비
핵폭발에 의한 효과를 예측하고 캘리브레이션을 위해 본 실험 이전에 무려 108 쇼트 톤(미터법으로는 98톤)의 TNT 화약[5]에 1000퀴리(37TBq)의 핵분열 생성물을 섞어 폭발시키는 실험이 진행되었다.[6] 사실 이 실험 이전에는 고작 수 톤의 TNT의 폭발 효과밖에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 수십 킬로톤의 위력을 가질 것으로 예측되는 핵폭탄의 효과를 측정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했고, 따라서 사전에 대형 폭발의 효과를 측정하고 덤으로 방사능 낙진의 확산 양상도 측정하려는 목적이었다.
또한, 만약 가젯이 잘못 작동해 핵폭발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하여 점보라는 이름의 핵물질을 차폐할 거대한 철제 차폐용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핵실험하는데 방사능 오염 같은 걸 신경쓴 건 아니고, 실험이 실패했을 때 소중한 플루토늄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려지는 것을 막고 온전히 회수해서 재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 하지만 정작 실험할 시기가 다가오자 플루토늄 생산량이 충분히 증가해 굳이 실패했을 때 다시 회수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든 동시에 실험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퍼지면서 점보를 사용한다는 계획은 취소되고, 겨우겨우 만들어 수송해놓은 이 194톤짜리 차폐용기는 폭심지에서 700m쯤 위치한 탑에 옮겨져 폭발 위력을 가늠하는 희생양으로 사용되었다.
3. 폭발
트리니티 실험 | |
실험 날짜 | 1945년 7월 16일 5시 29분 45초 |
실험 장소 | 뉴멕시코 앨러모고도 |
사용한 폭탄 | 가젯(Gadget) |
예상 위력 | 0~45㏏ |
실제 위력 | 25㏏ |
폭탄 종류 | 플루토늄 내폭형 핵무기 |
고도 | 지상. 30m 철탑 |
그리고 5시 29분 45초,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공 핵 폭발이 일어났다.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TNT 20㏏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측정되었다. 강렬한 빛이 수 ㎞ 떨어진 산을 낮보다 환하게 비췄고 16㎞ 떨어진 본부에서도 오븐처럼 강렬한 열이 느껴졌다. 버섯구름은 12㎞ 높이까지 솟아올랐으며, 40㎞가 넘는 곳에서도 화구를 관측할 수 있었다. 240㎞ 거리에 있던 사람도 태양과 같은 밝은 빛이 하늘을 환하게 물들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 3㎞ 밖에 있던 한 폐가는 부서져 버렸으며, 충격파는 160㎞ 거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느껴질 정도였다.
각각 폭발 6, 16, 18 밀리초 후 모습
실험 이후 주변에서 발견된 트리니타이트. |
그 후 미국 정부에서는 이 트리니타이트를 정부 재산으로 취급하고 개인이 가져가는걸 금지시켰다. 그러나, 수집가들이 45~46년 경에 와장창 퍼간 건 합법적으로 잘 팔리고 있다. 그렇지만 양은 레어한 편. 당시 미국 원자력 위원회, 현 미국 에너지부가 이 트리니타이트 구덩이를 1953년에 메워버렸기 때문이다. 진품의 경우, 감마선 분광을 이용하면 137Cs과 241Am 지문이 또렷히 나타난다. 하지만 짭이냐 진품이냐를 따질려면 눈과 가이거 계수기가 아닌 더 과학적인, 위에서 말한 감마선 분광법같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 여튼 사진은 진품으로, 약 1㎝ 크기이다. 당연히 핵실험을 했으니 위에서 설명했듯이 방사성 동위원소가 남아있지만, 76년이 다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60Co는 아예 반감기로 사라져서 안전하다. SETI 프로젝트에서도 탐내는 물건으로, '치명적인 위협과 생존전략'에 대한 침묵의 라이브러리 소장품으로 집어넣는다고 한다.
실험 28시간 후 모습. 오른쪽 아래에 동심원이 그려진 채로 있는 작은 검은색 얼룩이 100t 실험으로 인한 크레이터이다.
이러한 소식은 뉴멕시코 전역에 떠들썩하게 퍼졌지만, 정부의 공식 답변은 앨러모고도 공군 기지의 무인 탄약 창고가 폭발했으나 사상자는 없다는 짧은 언급 뿐이었다. 미국 동부 지역에서는 아예 화제조차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된 것은 히로시마에 폭탄이 떨어진 뒤였다.[8]
실험 후에 바닥의 뼈대 일부만 남은 30m 높이의 철탑. 왼쪽의 사람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오른쪽의 사람은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이다. 실험 2달 후에 찍은 사진.
현대에는 실험 현장엔 이 실험을 기념하는 작은 기념탑이 있다. 구글 지도 링크 현장은 방사능 문제로 방문이 허용됐다 금지됐다를 반복하고 있다.
4. 관련 어록
Batter my heart, three person'd God.
내 심장을 두드리소서, 삼위일체의 신이여.
존 던의 홀리 소네츠 (Holy Sonnets) 연작 중 14번째 시의 첫 구절.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역사상 첫 핵실험의 명칭을 짓게 된다.
내 심장을 두드리소서, 삼위일체의 신이여.
존 던의 홀리 소네츠 (Holy Sonnets) 연작 중 14번째 시의 첫 구절.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역사상 첫 핵실험의 명칭을 짓게 된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해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해
5. 기타
방사능 낙진으로 인해 주변의 농가, 특히 소들이 피부에 궤양이 생긴다던지 하는 피해를 입었다.방사능 피폭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실험에 참석한 인물들의 다수가 암투병 끝에 사망했다. 다만 오펜하이머는 그냥 심각한 골초라 그게 더 암의 원인이었으리라 여겨지는 편.[10]
실험을 참관한 뉴욕 타임스 기자 월리엄 로렌스는 과학자가(그것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교육수준을 자랑하는 두뇌들이) 실험에 대비하며 어두침침한 새벽 5시에 선크림을 바르는 것을 보고 괴기스러운 광경이라고 표현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그라운드 제로 30㎞ 밖에서 관찰 실험을 하였는데, 성격답게 눈을 보호하기 위해 나눠준 짙은 검은색 색안경을 냅다 버리고 자동차 유리를 통해 자외선을 막아 맨눈으로 폭발을 관찰하였다. 본인 주장으로는 자신이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사람 중에 유일하게 맨눈으로 폭발을 관측한 사람이라고. 자기보다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들은 폭압으로 바닥에 엎드려야 했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도 파인만 혼자 차에 들어가서 핵폭발을 관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인 오펜하이머에서 재래식 폭약을 이용해 트리니티 실험의 광경을 재현했다고 한다. 본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CG 사용을 자제하고 실제 촬영을 지향하다 보니, 해당 영화의 제작 발표 이후 국내외에서 '혹시 정말로 핵무기를 터뜨려서 촬영할 생각인가?'라는 농담 섞인 추측이 많았다. 다만 CG를 쓰지 않는 실사 촬영을 고집한 것이 오펜하이머에서는 역으로 독이 되었는데, 폭발의 규모가 상당히 빈약해보이는 부작용이 생겼다.[11] 그래서인지 실사와 CG를 혼합하거나 혹은 실제 촬영된 트리니티 실험의 영상을 편집하는게 나았을 것이라는 반응도 있는 편. 다만 작중에서 초반부에 언급했듯이 오펜하이머에서는 오펜하이머를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하는 대사가 있다. 애초에 원작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원자 폭탄이란 '불'을 인류에게 주었다는 의미에서 접근하면 의외로 화염을 강조하는 연출 자체가 그렇게 틀린 연출은 아니게 된다. 즉 의도된 연출일 수 있다는 것.
[1] 아래 사진에서도 보이지만 정밀한 전류를 정확한 시간 내에 흘려야 했기에 전선이 다닥다닥 연결된 난잡한 모습이다.[2] 스티븐 워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황금가지(2005), p. 22.[3]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 중 한명인 돈 호니그(Don Hornig)이다.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명석한 화학자이자 팻맨형 원자폭탄의 뇌관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그는 트리니티 핵실험 당일날 상관이었던 오펜하이머의 즉흥적인 명령 한마디에 폭풍우와 벼락이 몰아치는 실험장 한가운데서 가젯을 지키느라 날밤을 깠다.[4] 화이트 샌즈 사막. 현재 화이트 샌즈 국립공원과 미사일 실험장이 위치한다.[5] 컴포지션 계열 화약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6] 1945.5.7[7] 초록색만 있는게 아니라, 빨간색, 검은색 트리니타이트도 존재한다.[8] 물론 이때 방출된 방사능 물질이 코닥의 X레이 감광필름 공장을 오염시키는 바람에 코닥에서 일하던 줄리안 웹(Julian Webb)처럼 진실을 알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9] 이 말을 듣고 오펜하이머가 "내가 좋아하는 물리학으로 가장 잔혹한 살상무기를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에 휩싸이게 되었다.[10] 사인도 폐암 다음으로 흡연자들 대다수가 걸리는 후두암이라 이 주장에 더 힘이 실린다.[11] 재래식 폭약으로 트리니티 실험의 폭발력(20 킬로톤)을 재현하려면 TNT 폭탄 2만 톤을 모아서 폭발시켜야 하는데 이게 영화 하나 찍자고 하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규모여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