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3 02:00:03

뉴 런던 학교 폭발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뉴 런던 학교 폭발.jpg

1. 개요2. 뉴 런던 학교3. 사고 당시4. 사고 이후

1. 개요

New London School explosion

1937년 3월 18일, 미국 텍사스주 뉴 런던에서 발생한 가스 폭발 사고.

2. 뉴 런던 학교

1930년대엔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뉴 런던 스쿨은 미국에서 부자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학교로 유명했다. 1930년, 텍사스 러스크 카운티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어마어마한 자원이 생겼고, 이 자원을 지역 경제와 교육 활성화에 쓴 결과였다. 학생 대다수는 근처 유전에서 일하는 석유 시추 인부였다. 뉴 런던 학교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는데, 1932년에 약 100만 달러의 거금을 들여 만들어졌다.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합쳐진 형태였는데 넓이는 12 에이커(약 48,562 m2. 평수로는 14,690평)에, 캠퍼스와 실내 체육관, 야외 풋볼 경기장 등이 있었다. 풋볼 경기장은 조명도 있어서 야간 경기도 가능했다. 문제는 경사진 면에 지어지면서 건물 밑에 빈 공동이 하나 있었으나, 사고 직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또 학교를 지으면서 돈을 아끼기 위해 원래 건축가가 생각한 설계를 무시하고, 증기 보일러 시스템 대신, 빌딩 전체에 가스 히터를 설치하기로 했다.

1937년 초반엔 월 300달러의 돈을 아끼기 위해 교육 위원회에서 천연가스 공급 계약을 취소하고 Parade 가솔린 회사의 잔류 가스 라인에 파이프를 설치했다[1]. 이런 관행은 지역 석유 회사에 승인된 것은 아니었으나, 지역에서 몰래 행해지는 일이었다. 문제는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그냥 연결했기 때문에 압력차로 인하여 가스가 관 밖으로 새어나갈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가스가 학교 건물 내로 새어들어왔고, 공기보다 무거웠던 가스는 건물 밑 빈 공동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여갔다. 가스가 무색 무취다보니 학교 내로 스며든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2]. 사고가 있기 전까지 학생들 사이에서 머리가 아프다, 눈이 따갑다는 컴플레인이 몇 번 있긴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3. 사고 당시

1937년 3월 18일 금요일, 500명의 학생과 교사 40명이 다음날 있을 헨더슨에 있던 학교와의 대항전을 위해 학교 내에 모여있었다. 훈련을 위해 당시 수업은 취소됐었다. 문제는 당시 학교 내엔 가스가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는 것. 오후 3시 17분 경, 트레이너 Lemmie R. Butler가 그라인더를 키려고 플러그를 꽂았고, 플러그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가스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은 가스는 순식간에 폭발해, 학교 전체로 퍼져나갔다. 당시 폭발로 인해 생겨난 불기둥 크기만 77미터 정도에 달했다. 폭발은 무려 6.4km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고, 2톤짜리 콘크리트 덩어리가 60m를 날아가 자동차 하나를 깔아 뭉겠을 정도였다. 폭발의 충격으로 건물이 들썩 들리면서 벽이 무너져내렸고, 수많은 학생과 교사들이 콘크리트와 철근 덩어리에 깔리고 말았다.

폭발 15분 후, 폭발로 인해 지역 전화에 엄청난 통화량이 있었다. 당시 PTA 모임이 있었는데,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학부모들이 부리나케 학교로 달려갔다. 지역 주민들과 석유 채굴 인부들은 중장비를 끌고와 폐허가 된 학교에서 콘크리트 더미와 철근 덩어리들을 치우며 구조를 도왔다. 당시 주지사 James V. Allred는 계엄령까지 선포해 텍사스 산림 관리원들과 고속도로 순찰대들을 보내 구조를 돕게 했다. 의사와 구급대들도 근처 Baylor 병원과 달라스의 Scottish Rite 병원, 위치타 폴스, 인근 유전의 석유 시추 인부, 적십자 그리고 근처 루이지애나주 Barksdale의 미공군부대까지 와서 구조를 도왔다. 부상자들은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Tyler의 성 프랜시스 병원은 당시 예정됐던 봉헌식을 취소하고 부상자 치료에 전념했다. 텍사스 주 장의사들은 시체 방부 처리사 25명을 지원보냈다. 밤이 오고 비가 왔으나, 구조작업은 계속됐다. 그렇게 17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잔해 속에서 모든 희생자들을 구조할 수 있었다.
사고로 최소 295명이 사망,[3]최소라 적는다.] 300명이 부상을 입었다. 학생 중에는 겨우 130명만 살아남았다. 희생자들은 화상과 부상이 너무 심해 옷과 개인 물품으로 겨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30 가족이 두 명 이상의 아이를 잃었다.

4. 사고 이후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와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물론이고 아돌프 히틀러까지 해당 사고 소식을 접하고 애도를 표했다.

사고 관련해서 무려 17건의 고소가 오고갔고, 그중 몇몇은 법정싸움으로 번졌다. 하지만, 증거 부족으로 인해 대부분은 법정싸움에서 패배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천연가스에 악취제를 도입하게 됐다.

살아남은 학생 중 30명은 뉴 런던학교가 다시 지어지는 동안 임시학교에서 졸업식을 가졌다.

1998년엔 뉴 런던 박물관이 학교가 있던 자리 근처에 지어졌고, 내부에 사고를 추모하는 자리가 생겼다. 박물관의 첫 큐레이터 Molie Ward는 사고 생존자였다. 근처엔 추모비가 세워졌다.#
[1] 석유를 정제하고 나오는 쓸모없는 가스를 이야기한다. LPG의 일종이기 때문에 공기보다 무겁다.[2] 현대에는 가스가 누출되면 이상한 냄새가 나지만 원래 석유에서 발생하는 가스는 무색 무취다. 폭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냄새나는 물질을 첨가하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이 물질을 첨가한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사고였다.[3] 사망자 수가 너무 많아 아직까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295명의 사망은 제대로 확인되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