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08:12:00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3px-Image_of_Triangle_Shirtwaist_Factory_fire_on_March_25_-_1911.jpg

1. 개요2. 공장의 위치 및 화재 전 상황3. 화재4. 사고 이후5. 기타

1. 개요

Triangle Shirtwaist Factory fire

1911년 3월 25일 뉴욕 트라이앵글 의류공장에서 일어난 화재. 이 사고로 146명이 사망하고 71명이 부상을 입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유대인들과 러시아, 이탈리아 출신의 가난한 여성 이민 노동자였다.

2. 공장의 위치 및 화재 전 상황

의류공장이 위치한 곳은 워싱턴 플레이스(Washington Place)에 있는 애쉬 빌딩(Asch Building)[1]이었는데 이 빌딩은 10층짜리였고 의류 공장은 8, 9, 10층을 쓰고 있었다.

주로 만들던 품목은 당시 유행하던 여성용 블라우스였고 주 5일제가 없던 시절이라 토요일에도 7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2] 노동자가 자리를 이탈하거나 물품이 도난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근무 시간에는 모든 문을 잠갔는데 이것 때문에 최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말았다.

3. 화재

화재는 4시 40분에 일어났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는데 근무시간이 끝나기 약 20분 전이었다. 불이 난 장소는 8층의 옷감을 재단하는 기계 밑에 있는 잘라낸 천의 남은 부분을 담는 통이었는데 수백 파운드의 천이 담겨 있었고 8층에는 이런 기계가 여러 대 있었기 때문에 8층에 쌓여 있는 천의 무게만도 수천 파운드에 달했다. 그야말로 가연성 물질이 가득했다.

불이 난 원인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담배 꽁초로 인한 발화 또는 옷감을 재단하는 기계의 과열로 인한 발화 두 가지로 추정되고 있다.

불이 나자 8층의 인원은 탈출했고 8층에 있던 회계사는 10층에 전화를 걸어 불이 난 사실을 알렸지만 9층에는 이 사실이 전달되지 않았다. 건물에는 2개의 화물 엘리베이터와 2개의 계단이 있었지만 계단으로 통하는 각층 문은 잠겨 있었고 공장 감독이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불은 굉장히 빠르게 번졌고 9, 10층에 있던 직원들은 옥상으로 올라가 비상계단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비상계단이 부실하게 지어져 있었고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무너져 내렸다. 계단이 무너지면서 20여명의 직원들이 추락사했고 탈출구도 사라져 버렸다.

한편 9층에 있던 다른 노동자들은 화물 엘리베이터를 통해 탈출했다. 엘리베이터는 세 번까지는 움직였으나 이후에는 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의 레일이 뒤틀리면서 운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9, 10층에 갇힌 많은 사람들은 불길을 피할 길이 없었고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등의 무모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당연히 소방차가 도착했으나 당시 소방 사다리가 6층 이상은 닿지 못해서 화재 진화도 어려웠다. 결국 이 화재로 146명이 사망했고 72명이 부상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여성이었으며 10대 후반 소녀들도 많았다.[3]

4. 사고 이후

공장의 공동 경영자였던 맥스 블랑크와 아이작 해리스는 불이 나자 직원들에게 알릴 생각은 하지도 않고 누구보다도 빨리 옥상으로 뛰어올라가 목숨을 건졌다. 결국 살인에 준하는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민사 소송에서는 희생자 한 사람당 75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들 중 맥스 블랑크는 1913년 다른 공장을 운영하다 또 문을 잠근 것이 걸려서 20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 사건으로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권 및 안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고 1913년 뉴욕 주 의회에서는 64가지 조항으로 이루어진 관련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화재에 대비한 각종 안전 시설의 도입을 의무화하고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한 각종 규제가 들어가 있는 법안이었다. 미국의 오래된 건축물들에서 볼 수 있는 건물 외벽의 철제 계단은 모두 이 사건의 후속 대책으로 개정된 소방법에 의한 것으로, 한 건물에 2개 이상의 계단을 설치해야 한다는 법을 이전에 지어진 모든 건물에 소급적용하면서 기존 건물들은 다 이렇게 설치한 것이다. 1960년대 들어 건물 내 방재시설이 발달함에 따라 이 법조항은 폐지되었다.

이 사건 당시 생존자 중 가장 오래 살아 1990년대까지 당시늬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던 로즈 프리드먼 여사(Rose Freedman,1894~2001)는 연도를 봐도 알겠지만 무려 90년이나 지난 2001년에 10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4] 그녀는 당시 17세였으며 또래 친구들을 5명이나 이 참극으로 잃었고 본인도 어깨와 여러 곳에 화상을 입고 큰 부상을 당했는데 이 화상은 죽을 때까지 남았다고 한다. 그녀는 평생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노동조합 설립 운동에도 열심히 나서면서 활약했다. 참극이 벌어진 지 80년이 되던 해인 1991년에 유일하게 살아서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도 '아직도 미국 곳곳에 그때처럼 열악한 건물에서 힘없는 나라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라며 성토했다.

사고가 일어난 건물은 당시에는 Asch Building으로 불렸으며 현재 뉴욕대학교의 Brown Building으로 불리는 대학 캠퍼스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2023년 10월 11일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공개됐다.#

5. 기타

이 사건을 야기한 두 사람 중 아이작 해리스는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 사후세계에서 등장한다. 사망한 주인공이 가게 된 사무실 같은 공간에서 주인공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보통 사망자는 완전히 소멸할 기회와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 채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반복할 기회 둘 중 하나가 주어지는 반면 자신은 영원히 자신의 사무실에 갇힌 채 수많은 사망자들이 수없이 자신의 삶을 되풀이할 때마다 상담을 해 주는 일을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채로 계속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공장 화재사고를 떠올리며 자신 때문에 그 여공들이 죽은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계속 물건들을 도둑질하는 것이 진절머리가 났다고 자기합리화하는 것은 덤.


[1] 1901년 준공. 1916년부터 뉴욕 대학교가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1929년 당시 소유주였던 프레드릭 브라운이 뉴욕 대학교에 건물을 기증하면서 브라운 빌딩(Brown Building)으로 개명하였다. 현재까지 뉴욕 대학교의 도서관 및 강의동으로 사용되고 있다.[2] 주 5일제가 최초로 시작된 건 이 사고 이후의 일이다.[3] 아동노동 착취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던 20세기 초반이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4] 그녀도 오스트리아 출신 이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