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21:05:27

보스턴 당밀 홍수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상세3. 이후


파일:보스턴 당밀 홍수.jpg

1. 개요

Great Molasses Flood
1919년 1월 15일 미국 매사추세츠보스턴에서 발생한 사건.

2. 상세

보스턴 529 상업지구 거리에 있는 퓨리티 디스틸링사(Purity Distilling Company)의 창고엔 높이 15 m, 지름 27 m에 달하는 당밀 저장탱크가 있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통짜로 탱크를 만드는 기술이 없다 보니, United States Industrial Alcohol 社는 이 탱크를 강철판에 리벳을 박아서 동그랗게 모으고, 이걸 반복해서 쌓는 식으로 만들었다. 탱크는 최대 200만 갤런, 리터로 환산하면 757만 823리터를 저장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문제는 탱크를 만들 때 기한 내에 만들겠다고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 탱크의 두께가 필요한 수치의 절반에 불과했고, 탱크가 강한지 시험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탱크 제작을 감독한 감독관은 설계도조차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결국 이렇게 대충 만들어진 탱크는 조금씩 샜고[1], 당밀과 색이 같은 페인트로 칠해 가리는 따위 방식으로 넘어가며 4년을 겨우 버텼지만, 여름에 열을 받아 팽창하고, 겨울엔 줄어들고를 반복하다 버티지 못한 탱크가 결국 대형사고를 불렀다.

1919년 1월 15일 오후 12시 30분. 이때 탱크에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수입한 당밀액 230만 갤런(870만 6447리터), 무게로는 약 1만 2천 톤에 달하는 양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는 설계된 저장 한도를 훌쩍 넘는 양이었다.[2] 또한, 사건 전날 보스턴은 영하 17도의 한파를 겪고 있었으나, 사건 당일에는 영상 4도까지 기온이 올랐다. 이 때문에 당밀이 열팽창하면서 탱크에는 굉음과 함께 큰 압력이 가해졌다. 철판을 고정하던 리벳들이 압력을 버티지 못해 튕겨나가면서 균열이 커졌다. 결국 탱크는 균열을 견디다 못해 터졌고, 안에 있던 어마어마한 당밀이 도로로 쏟아졌다. 쏟아진 당밀은 높이 8 m, 너비 49 m에 달하는 파도가 되어 주변의 사람과 말, 차를 휩쓸어버렸다. 사람들은 간신히 전봇대 등을 잡고 버티려 했으나 당밀액의 파도는 버티지 못한 사람들과 온갖 물건들을 휩쓸었다.

휩쓸린 기차는 탈선했고, 소방선 한 대는 3층 건물에 박혔다. 마차가 쓸려 나가면서 말들도 그대로 바닥에 달라붙은 채 죽어버렸다. 건물 14채가 무너졌고 쓸려오는 물건들에 기둥을 강타당한 고가도로가 무너져버렸다. 결코 따뜻하다고 할 수는 없는 영상 4도의 기온 때문에 당밀은 금방 굳었다. 사람들은 끈적한 당밀 늪에 갇혀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었고, 그나마 발만 젖고 끝난 사람들도 여기저기 돌아다닐 적에 발과 신발에서 당밀을 떨어트렸기 때문에 보스턴 시내에 단내가 진동했다고 한다.

당밀이 전부 쏟아진 후, 보스턴 경찰적십자, 미합중국 해군육군이 동원돼 사람들을 구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굳어가는 당밀에 갇힌 채 영상 4도의 날씨에 벌벌 떨었고, 간신히 구조됐다.

결국 이 사고로 21명이 사망하고 150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엔 당밀에 뒤덮인 채 굳은 희생자도, 당밀에 떠밀려 강에 흘러가 익사한 이도 있었다. 강까지 떠밀려 간 사람들은 실종처리되었다가 서너 달 후에야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3. 이후

쏟아져나온 당밀을 치우기 위해 수백 명이 모였다. 하지만 당밀이 너무 끈적끈적해 물 정도로는 소용이 없었으므로, 소금물을 붓고 모래로 문지르는 방법을 택해 조금씩 없애나갔다. 이렇게 전부 없애는데 10년이 걸렸다. 인근 강마저 한동안 당밀 때문에 갈색을 띠었다고 한다.

사건의 주범인 퓨리티 디스틸링社는 처음엔 누군가가 탱크를 테러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내 안전불감증으로 처음부터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회사는 피해자들에게 소송 125건을 당해 사망자당 배상금 7천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보스턴시가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 데 회사는 62만 8천 달러를 지불했다.

사고 장소는 복구 이후 용도변경을 거쳐, 리틀리그 야구장, 보체 경기장등이 포함된 공원으로 재개발되어 '랑고네 파크'라는 이름으로 공원이 되었으며, 공원 인근에 사건 사망자 추모 명패가 설치됐다.

2019년 1월 15일에는 사건 100주기를 맞이해 추모행사가 열렸다.


[1] 이를 눈치챈 마을 주민들 일부는 직원이 있는데도 대놓고 새는 당밀을 받아가기도 했다고 한다.[2] 이런 물량이 있던 이유가 금주법의 전국전 도입 직전에 최대한 술을 만들기 위해서 였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7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7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