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23:46:10

서머 스트리트 다리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사고 당시3. 사고 이후


파일:393 노면 전차.jpg

1. 개요

Summer Street Bridge Disaster

1916년 11월 7일 미국 매사추세츠보스턴에서 발생한 노면전차 탈선 사고.

2. 사고 당시

당시 보스턴은 33대 대선 결과가 궁금해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당시엔 라디오도 얼마 퍼지지 않았고, TV조차 없던 때라 사람들은 신문을 사기 위해 인근 신문회사로 몰려들었다. 사람이 너무 몰려들자 교통 해소를 위해 노면전차 몇 대가 더 투입됐다. 당시 기준으로 16년 된, 393번 열차도 이때 투입됐다. 보스턴 북쪽의 산업 현장에서 일하고 돌아가는 노동자를 태우고 운행을 시작했다. 운전사는 Gerald Walsh 경력은 6개월, 안내원은 George McKeon이었다. 둘 다 이 루트는 처음이었고, 같이 일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전차는 금새 사람들로 가득 차 만원이 됐다. 안의 의자 30개를 다 채우고도 모자라 30명의 승객을 더 태워야 했다. 시간표에 맞추기 위해 Gerald는 전차 속도를 시속 24km까지 올렸다.

그렇게 사람이 꽉 찬 열차가 포트 포인트 수로를 지날 때 쯤, 서머 스트리트 다리를 건널 차례였다. 서머 스트리트 브릿지는 수납교 비슷하게 되어, 다리가 레일을 따라 움직여 배가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다리였다. 다리가 움직이면 차와 전차가 이동하지 못하니 이때는 다리에 철문을 닫아 배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밤에는 철문에 랜턴도 달아 다리가 닫힌 걸 확인할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랜턴 밝기가 가로등 밝기보다 약해 빛이 가려졌고, 그나마 달린 멈춤 신호도 운전사가 보기에 다소 높은 위치에 있었다. 신호는 약 43cm 크기에, 7cm의 글씨로 쓰여있었고, 레일에서 9m 가량 떨어져 있었다. 다리를 닫는 문에선 53m, 다리가 열리는 구간에서는 60m 떨어져있었다. 운전사 Gerald Walsh는 이걸 보지 못했고 그대로 돌진했다.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하고 브레이크 레버를 구부러질 정도로 당겼으나 이미 늦었고, 전차는 문과 충돌, 속도가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자 위기를 감지한 운전사 Gerald는 승객들에게 "뛰어내려!" 하고 소리쳤다. 전차는 그대로 나아가다 열려있는 다리에 얹혀진 채 기울어졌다. 그렇게 기운 전차는 전선과 떨어지며 동력이 끊겨 전기가 안들어와 불이 다 꺼져버렸다. 이윽고 전차는 다리 아래 강으로 추락했다.

그나마 전차가 다리에 얹혀졌을 때 탈출한 사람들, 강에 빠진 뒤에 창문을 깨고 탈출한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운전사와 안내원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안내원 McKeon은 탈출하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했다가 구조됐다. 창문을 깨고 탈출한 사람들은 인근에서 운항중이던 예인선의 선장 Harry Ross가 구명정과 튜브를 던져줘 구조해줬다. 인근에서 사고를 목격한 교통경찰이 신고를 하면서 소방선이 달려와 바다에 빠진 승객들을 구조했다.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던 Nelson McFarlane은 전차서 빠져나오면서 사람 2명을 구조하고 지쳐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밧줄을 근처에서 빌려와 사람들 구조를 도왔다. 사고 소식을 들은 시장은 인근 해군부대에 연락해 배와 크레인을 보내게 했다. 부상자들은 구급차로 인근 시립 병원에 옮겨졌다.

하지만 탈출하지 못한 46명은 결국 사망했다. 이들은 강 밑 수심 9m 아래로 가라앉았다. 생존자는 겨우 15명이었다. 시신은 이후 배와 잠수부들을 통해 한구씩 건졌고, 가장 마지막 시신은 다음해 3월이 되어서야 발견됐다.

3. 사고 이후

운전사 Gerald Walsh는 사고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초행길인데다, 다리가 닫힌 것을 알리는 랜턴이 걸리지 않았고, 멈춤 신호도 다소 높은곳에 있어 운전사가 보기 힘들었다는 판결 하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운전사 Gerald Walsh는 전차 운전에 복귀하지 않고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그는 사고를 낸 것에 트라우마를 느껴 사고 얘기를 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안내원 George McKeon은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사고 자체는 당시 대선 결과에 묻혀서 신문에 크게 오르진 못했다.

전차 자체는 큰 피해가 없었기에 강에서 건져내서 수리 후 계속해서 사용됐으나, 전차 운전수들이 "사람이 죽은 전차다!" 면서 운전을 거부했고, 결국 스크랩 처리됐다.

사고 이후, 멈춤 신호는 좀 더 잘 보이는 위치에, 모든 가동교의 60m 지점에 설치했고, 멈춤 신호와 가동교 사이에 시속 6마일, 약 시속 9km속도로만 움직일 수 있도록 법으로 지정했다.

다리는 현재도 남아있는데, 개선되면서 수납교 형식 시스템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