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06:41:17

에드워드 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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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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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에드워드 텔러
Edward Teller
파일:EdwardTeller1958_fewer_smudges.jpg
출생 1908년 1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사망 2003년 9월 9일 (향년 95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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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물리학
학력[1]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 (화학 공학 / B.S.) (1927년)
뮌헨 대학교 (물리학 / 중퇴)[2]
라이프치히 대학교 (물리학 / Ph.D.) (1930년)
서명 파일:Edward_Teller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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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2. 생애

헝가리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청년기인 1920년대에 독일로 이주해서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들어 독일에서 유태인 박해가 심화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1940년대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어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에 일조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자 핵분열 기술에 바탕을 둔 기존의 원자폭탄보다 훨씬 강력한 핵융합 무기(즉, 수소폭탄(일명 H-Bomb))의 개발을 옹호하였고, 결국 폴란드 출신의 수학자 스태니슬로 울람과 함께 '텔러-울람' 설계라 불리는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만큼의 높은 온도를 순식간에 만들기 위해 원자폭탄의 에너지를 기폭제로 사용한 방식이었다. 1952년 11월 1일, 텔러-울람 설계로 만들어진 최초의 수소폭탄 '아이비 마이크'가 태평양의 에네웨타크 환초에서 시험 폭발에 성공했다

냉전 시대를 비롯한 일생의 대부분을 통틀어 핵 군비 경쟁에 적극 찬동하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냉전 막바지인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우주 배치형 미사일 방어, 즉 SDI[3]에도 찬성한 바 있다. 2003년에 향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역시 핵무기 개발의 선구자격 인물로 유명한 동시대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핵무기 개발 후 양심의 가책으로 반(反)핵, 평화주의를 주장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

같은 유태인이었지만 오펜하이머가 태어날 때부터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반면, 텔러는 유럽에서 살다가 나치의 박해를 직접 경험하고서 미국으로 망명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텔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나치즘냉전을 계기로 등장한 소련 공산주의 위협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반공주의자였고, 핵무기를 통한 힘의 우위를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4]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이후의 여러 가지 시적인 표현과 매카시즘에 대한 반발로 오펜하이머가 강경한 반핵주의자였다고 보거나 그가 핵 사용을 후회했다는 일각의 시선은 사실과 다르다(영화 오펜하이머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이는 철저히 영화의 원작인'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제 3자의 증언 통해 검증된 묘사들이다. 대표적으로 트루먼 대통령 면전에서"제 손에서 피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와 같은 발언들은 모두 교차 검증된 사실에 입각한 묘사이다).물론 오펜하이머는 어디까지나 원자폭탄보다 더 강력한 무기인 수소폭탄의 개발에 반대했을 뿐이며, 원자폭탄을 폐기해야 한다거나, 그것을 감축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정말로 인류가 만들어낸 무기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무기인 수소폭탄의 위력 그 자체를 경계한 것이며, 그것을 정치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도덕적인 맥락에서 고민한 결과는 아니었다. 그런 고민이 개입되었을 수는 있으나 적어도 대외적으로 그렇게 발언하지는 않았다.

3. 기타

각종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전쟁광 유형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그를 모티브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대표적이다.

최초의 수소폭탄이 터진지 2년이 지난 1954년에는, 일반 자문 위원회에 무려 10기가톤(...)짜리 수소폭탄의 설계를 제안했다. 단순히 아이디어만 제시한 것을 넘어, 기술 실증을 위해 GNOMON과 SUNDIAL이라는 설계도 연구했다.[5]

물리학과응집물질물리학, 화학과물리화학, 무기화학에서 배우는 전이금속 화합물 결정 구조의 왜곡 현상인 얀-텔러 효과(Jahn-Teller effect)를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양자장론의 거장이자, 195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양전닝은 그의 제자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3년작 영화 《오펜하이머》에도 등장한다. 배우는 감독으로 유명한 사프디 형제의 베니 사프디. 실제 역사대로 주인공인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수소폭탄의 개발을 놓고 대립하였으며, 그가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할 때 불리한 증언을 하는 등의 행적이 묘사되었다. 그나마 영화 종반부에 엔리코 페르미 상을 받은 오펜하이머와 화해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6] 다만 청문회에서 남편과 함께 고초를 겪었던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는 여전히 텔러를 경멸하며 시상식에서 그가 악수를 청해도 대놓고 팔짱을 끼고 거부한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연출로 오펜하이머와 텔러가 서로 미소를 지으며 악수하는 사진을 《타임》 사진 기자가 찍기도 하였다. 키티 오펜하이머 역시 페르미 시상식 당시 주변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할 정도로 굳은 태도로 텔러를 대했다. 오펜하이머도 겉으로는 악수하며 그간의 앙금을 털어냈을지언정 텔러에게 받은 상처를 완벽히 떨쳐내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1] Atomic Heritage Foundation 참고.[2]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편입.[3]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뜻한다. 스타워즈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4] 물론 망명 유태인 출신 과학자들 중에서도 이후 반(反)핵, 평화주의로 돌아선 사례는 적지 않다. 맨해튼 계획이 시작된 계기를 마련했던 레오 실라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여기에 포함되었다.[5] 1963년의 연구에 따르면 10기가톤급 수소폭탄이 45km 상공에서 터질시, 반경 400km내의 모든 것이 불탄다고 한다.[6] 실제 역사에서 텔러는 오펜하이머보다 1년 앞선 1962년에 페르미 상을 받았는데, 오펜하이머를 다음(즉, 1963년) 수상자로 추천하여 화해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