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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푹스

<colbgcolor=#c01100,#000000><colcolor=#ffcc00,#dddddd> 클라우스 푹스
Klaus Fuchs
파일:Klaus_Fuchs_-_police_photograph.jpg
본명 클라우스 에밀 율리우스 푹스
Klaus Emil Julius Fuchs
국적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 망명 →
[[영국|]][[틀:국기|]][[틀:국기|]][국적박탈]
[[동독|]][[틀:국기|]][[틀:국기|]]
출생 1911년 12월 29일
독일 제국 헤센 대공국 뤼셀스하임암마인
사망 1988년 1월 28일 (향년 76세)
동독 동베를린
배우자 그레테 카일존[2]
직업 이론물리학자
종교 불명
최종 당적

1. 개요2. 초창기 생애3. 간첩 생활4. 체포 이후5. 소속 정당6.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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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영국 국적을 가진 소련의 이론물리학자이자 공작원이다. 맨해튼 계획 일부를 소련으로 넘겨 소련의 핵개발에 큰 도움을 주었다.

2. 초창기 생애

독일 제국 헤센 대공국 뤼셀스하임루터회 신부 가정에서 셋째로 출생했다. 사민당에 가입했던 아버지의 사회주의적인 정치 성향에 영향을 받아 라이프치히 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뒤 집안 사정으로 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킬 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 학사를 마친다.

1932년 사민당이 힌덴부르크를 지지함에 따라 독일 공산당에 입당한다. 1933년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 들어가려 했으나 동년에 일어난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숙청됨에 따라 영국으로 망명해서 학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에든버러 대학교막스 보른 지도 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 캐나다 퀘벡으로 포닥을 하러 떠났고, 한스 칼레(Hans Kahle)라는 독일인 공산주의자를 경유시켜 영국으로 도피시키는 과정에서 훗날 자신과 소련을 연결시켜주는 독일인 경제사학자 위르겐 쿠친스키(Jürgen Kuczynski)와 접촉하게 된다.

3. 간첩 생활

칼레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 푹스는 영국의 독자적인 핵개발 계획이었던 튜브 앨로이스 프로젝트에 참가했고, 위르겐 쿠친스키는 푹스를 소련 대사관 국방 참사관 시몬 크레메르(Симон Кремер)와 본인의 여동생이자 소련 정보부 소령인 우르줄라 쿠친스키(Ursula Kuczynski, 가명은 루트 베르너·Ruth Werner)에게 연결시켜 주었다. 푹스는 크레메르·쿠친스키와 같이 활동하며 소련에 포섭되었다.

1943년 트윈-튜브 앨로이 프로젝트가 미국으로 이관되어서 맨해튼 계획으로 발전할 무렵 푹스도 같이 미국으로 넘어갔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연구를 이어나가게 된다. 이즈음 소련 민간 정보부(NKGB)에 가입했다. 그 뒤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로 가서 한스 베테, 리처드 파인만과 친목을 쌓았다. 그리고 이때 플루토늄이 최단시간 안에 임계점에 도달하는 핵분열 에너지를 계산하는 기술 개발이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가 만든 계산법은 지금도 쓰이고 있다.(Fuchs-Nordheim 방법) 이후 1945년 7월 16일에 있었던 트리니티 실험에도 참가했고, 일본에 투하된 리틀 보이팻 맨의 설계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전후 미국에 머물렀을 때에는 크로스로드 작전을 수행했고, 존 폰 노이만을 설득해 수소폭탄의 특허를 등록했다.

그리고 맥마흔 법으로 인해 배신을 당한 영국이 독자적인 핵개발을 개시했다. 미국에 있던 영국 국적의 과학자들을 귀국시킬 때 푹스도 영국으로 갔고, 영국의 핵무기와 원자력 연구소인 AERE(Atomic Energy Research Establishment)에서 부소장 역할을 맡았다. 영국의 핵무기 개발 상황을 소련에 유출시켰지만, 영국에도 미국의 핵무기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영국의 핵무기 개발 속도를 가속화시켰다.

1949년 8월 소련 카자흐 SSR 세미팔라틴스크에서의 핵실험이 이루어진다. 미국은 소련이 불과 4년 만에 미국을 따라잡은 사실에 경악했다. 영국은 한 달 뒤인 9월 클라우스 푹스를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용의자로 연행했고, 집중 심문한 끝에 이듬해 1월 자백을 받아냈다. 미국과 영국 정부의 항의에 소련 정부는 1950년 3월 7일 푹스를 스파이로 활용한 사실이 없다는 짤막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4. 체포 이후

푹스는 영국과 소련의 관계,[3] 영국인이 아닌 독일 국적의 망명자라는 애매한 신분 그리고 영국에 제공한 핵무기 기술 때문에 간첩 혐의 대신 기밀준수 서약 위반 혐의로 14년형을 선고받았고,[4] 그마저도 1959년 모범수로 석방되어 동독으로 추방됐다. 동독에서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의 평전 Atomic Spy를 펴낸 낸시 손다이크 그린스팬(Nancy Thorndike Greenspan)은 "그의 의도는 양대 강국의 전력 균형을 맞춰 핵 억지력을 도모하려던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30 ~ 1932 입당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32 탈당


1932 ~ 1946 입당


1946 ~ 1988 합당

6. 매체에서

6.1. 영화 오펜하이머

배우는 크리스토퍼 데넘.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로스 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 개발의 주역으로 활동했지만, 이후 영화 중반에 공산권의 간첩으로서 맨해튼 계획의 일부분을 소련에게 넘겨버렸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국적박탈] [2] Grete Keilson(1905–1999). 본성은 슈나테(Schnate). 1959년 결혼, 1988년 사별.[3] 영국은 50년대 까지는 소련과 미온적인 관계를 원했다.[4] 이는 포틀랜드 스파이 링의 주범인 소련인 코논 몰로디(Конон Молодый)의 25년과 대비되는 판결이었다. 고든 론즈데일(Gordon Lonsdale)로 알려진 코논 몰로디는 핵추진 잠수함을 포함한 해군무기 유출로 25년형을 받았는데, 푹스는 핵무기 개발 상황을 유출했는데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