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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 (1989) 悲情城市 | A City of Sadness | |
장르 | 드라마 |
감독 | 허우샤오셴 |
제작 | 구복생 |
각본 | 주톈원 오념진 |
출연 | 양조위, 진송용, 신수분, 고첩, 이천록 외 |
제작사 | 3-H 필름 |
개봉일자 | [[베니스 국제 영화제|]] 1989년 9월 12일 1989년 10월 21일 |
편집 | 랴오칭쑹 |
상영 시간 | 157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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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9년 개봉한 허우샤오셴 감독의 영화. 제목의 '비정'은 인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슬픔을 의미하는 '비정(悲情)'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도 'A city of sadness'다.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직후의 대만을 배경으로 삼아, 대만 현대사의 비극인 2.28 사건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차이밍량의 애정만세와 더불어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2. 등장인물
(1989년 영화로서 한국에서는 중국표준어보다는 한국식 한자발음으로 알려졌으므로 그에 맞춰 표기)- 임문청(林文清) / 양조위 분
: 임아록의 4남 중 막내 아들.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사진사.
- 오관미(吳寬美) / 신수분(辛樹芬)[1] 분
: 문청의 친구인 관영의 여동생으로 간호사.
- 임아록(林阿祿) / 이천록(李天祿) 분
: 임씨 집안의 가장
- 임문웅(林文雄) / 진송용(陳松勇) 분
: 임아록의 4남 중 맏이. 아버지를 모시고 장사를 한다.
- 임문량(林文良) / 고첩(高捷) 분
: 임아록의 4남 중 셋째 아들.
3. 상세
베니스 국제 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아시아 영화로서는 31년만이라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한때 <비정성시>의 황금사자상 수상이 1950년의 라쇼몽 이후 39년만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당시 영화 월간지 로드쇼나 스크린에서도 이렇게 소개할 정도이며 대한민국 개봉판 포스터나 금성비디오 표지에도 39년만의 수상이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이후에 1957년 사티야지트 레이의 인도 영화 《아파라지토》와 다음 해인 1958년에 일본 영화 <무호마츠의 일생>이 황금사자상을 받은 바 있다.
양조위의 대표작 중 하나다.한국 개봉포스터. 열혈남아를 수입한 효자필름에서 수입해 1990년 1월 26일 한국에서 개봉했지만, 상영시간이 길다고 40분이 넘게 잘려나가는 탓에 서울 기준 3만명도 안봐 흥행에선 참패했다. 90년 8월에 금성비디오에서 2부작으로 나눠 비디오 (표지)로 나오면서 잘려나간 부분이 다 나오고 비디오 대여에서는 반대로 꽤 히트를 친 바 있다. 이후 양조위의 인지도에 힘입었는지 2008년 6월 12일에 재개봉했다. 재개봉 당시 서울 관객은 17,608명.
4. 줄거리
매일경제에 실린 정유진(프리랜서)의 지우펀과 비정성시(시간 순서가 혼재되어있고, 생략이 많은 점을 고려하여 읽을 것)를 참조.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이 전해지는 라디오 뉴스가 들리는 가운데 한 아이가 태어난다. 대만이 51년간의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날, 지룽의 부자인 임아록 가문은 장손을 얻는 경사까지 겹쳐 두배의 기쁨을 누린다. 임아록은 네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문웅은 고향에서 아버지 임아록을 모시면서 장사를 하고 있고, 둘째 문상은 의사였는데 일본군 군의관으로 징병되어 필리핀 전선에 간 뒤 소식이 끊겼다. 셋째 문량은 중국에 건너가 일본군에 물자를 대는 장사를 하다가 일본 패전 후 고초를 겪고 미쳐서 돌아온다.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인 넷째 문청은 선량한 인물로 지우펀의 사진관에서 일하고 있다.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정부의 부패는 날로 심해지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국민들은 이중, 삼중고에 시달리게 된다. 문량은 정신불안에서 회복된 후 국민당군을 따라 대만에 들어온 상하이파 폭력조직을 만나 거래를 트면서 마약 밀수에 가담한다. 중국 대륙에서 쌀과 설탕을 수입하던 맏형 문웅의 화물에 이를 섞어 들여오다가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문웅이 노발대발하게 되고 그는 상하이파 조직을 찾아가 격렬하게 따진다. 그러자 문웅이 껄끄러운 상하이파 조직에서는 국민정부에 문량이 일제에 협력했다고 고발하였고 문량은 국민당군에 의해 체포되어 끌려간다. 문량을 구하기 위해 임씨 집안 전원이 나서 문청은 친구 관영을 통해 힘을 쓰고, 문웅은 상하이파 조직을 찾아가 뇌물을 주어 문량을 석방시키지만 이미 이전에 한 차례 고문을 받았던 문량은 친일파 매국노로 몰려 가혹한 고문을 받고 완전히 미쳐버려 다시는 제 정신을 찾지 못한다.
문청의 친구인 대만의 지식인 청년 관영은 해방과 국민당군의 진주를 환영했으나(영화 초반 친구들과 술집씬), 본성인들을 친일파로 몰아 점령군 행세를 하는 국민정부에 대한 반발심을 갖게 된다. 1947년 외성인과 본성인이 충돌하는 2.28 사건이 발생하자 관영은 사건 수습을 위해 타이베이로 떠나 임선생님(林老師)을 모시고 2.28 수습위원회에 참가한다. 이 때 문청이 관영을 따라 타이베이로 가던 중에 외성인에 대한 보복에 나선 본성인들에 의해 우적(友敵) 테스트를 한다. 지나가던 사람한테 대만어나 일본어로 얘기를 걸고 만약 두 언어를 구사를 못 해서 제대로 대답을 못 하면 그 사람을 외성인으로 간주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리는 것이다. 문청이 귀머거리라는 것을 모르는 그들은 문청을 두들겨패려 하는데 관영이 사정을 설명해 구해주고 문청에게 위험하니 지우펀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관영의 친구인 문청까지 본성인들을 친일파로 몰아(문량에 이어 문청까지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제는 귀머거리까지 친일매국노로 잡아가느냐?"고 한탄하는 아버지 임아록의 모습이 압권) 학살하던 국민당군에 끌려가 처형당할 뻔 했으나, 맏형 문웅의 노력으로 간신히 석방되었다. 바로 직전에 불려나간 감방 동료 2명이 총살당하는 소리가 들린 직후 문청이 불려나간다.
일본군으로 출정해 소식이 끊겼던 둘째 문상의 유언이 적힌 혈서와 군화 등 유품이 집에 도착한다. 그가 군의관이었다는 점, 그리고 일제 패망 후 몇 년이 지나서 유서가 전달된 것 정황이나 그 내용으로 봤을 때 연합군 포로대우 등으로 기소되어 B/C급 전범으로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살아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던 가족들은 오열한다. 문웅은 화를 참고집안을 영위하기 위해 상하이파 조직과 만나 친분을 쌓으며 마작을 두고 있던 차에, 문량이 고발당한 데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임씨집안 직원 아가(阿哥)가 화장실에서 상하이파 조직원과 시비가 붙었다가 불의의 습격을 당해 칼에 찔리면서, 그 상사인 문웅도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상하이파 조직 보스가 발사한 권총탄을 심장에 맞고 사망한다.
집안의 비극에 절망함과 동시에 감방에 끌려가 죽을 뻔 하면서 시국에 환멸을 느낀 문청은 반정부 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친구 관영은 2.28사건 수습위원회에 참가했다가 장제스의 학살을 간신히 피해 지우펀의 집으로 돌아왔다가 본격적인 반정부 활동을 위해 산간 지역에 숨어든 상태였다. 감방 동료가 형님에게 전하는 유언을 전달하기 위해 산간지방을 찾아간 문청은 관영에게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나, 관영은 생업에 충실하라고 조언하며 자신의 집안에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려한다며 동생 관미와 결혼해줄 것을 부탁한다. 간호사인 관미는 오래전부터 오빠 친구인 문청을 좋아해왔다. 문청은 이를 거절했으나 맏형 문웅이 사망하여 장례를 치른 후, 관미와 결혼하고 지우펀의 사진관 운영을 통해 관영이 속한 단체에 비밀리에 자금을 대주며 생활한다. 문청과 관미 부부는 아들을 낳고 짧은 행복을 누리지만, 조직이 발각된 관영이 국민당군에 총살된다. 영화에서 본성인들이 일관되게 대만어 혹은 일본어를 쓰는 것과 달리 이때 관영의 산간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국민당군만 표준중국어를 구사한다. 관영의 총살 소식을 들은 문청은 미래를 직감하여 가족사진을 찍고 사흘 후 이를 현상하던 중 찾아온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된다.
마지막은 완전히 늙어버린 임아록과 미쳐버린 아들 임문량 그리고 장손(1945년 8월 15일 태어난 임문웅의 아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장면으로 끝난다. 일제 패망 후부터 2.28 사건 이후까지 대만 근현대사의 평지풍파를 거치면서 지룽의 부호였던 임씨 집안은 아들들을 모두 잃고, 가산까지 빼앗긴 상태가 되어 버린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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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도 100% | 관객 점수 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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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4.0 /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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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90.48% | 별점 4.2 /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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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8.0 / 10 |
이동진 | ★★★★★
데뷔작 이후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던 허우샤오셴의 영화세계가 총집결된 영화로, 허우샤오센을 세계적인 감독으로 만들어준 작품이다.<비정성시>는 개봉 이후 대만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기에 대만사에서도 중요하게 거론된다. 1987년에 대만 계엄령이 해제된 후에 벌어진 2.28 사건을 다룬 것만으로도 과감한 시도였거니와, 대만 정부가 대만어 사용을 탄압하고 표준 중국어를 권장하는 상황 속에서도 대만어로 촬영됐다. 다행히도 <비정성시>는 행정원 신문국[2]으로부터 특례를 인정받아 검열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허우샤오셴은 일본에서 후반 작업을 마친 영화를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했고,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어서 대만에서도 영화제 상영본이 그대로 개봉됐다. 이렇게 <비정성시>가 거둔 성공은 사멸 위기에 처해있던 대만어가 다시 부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출처.
6. 기타
-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에 양조위는 광동어만 쭉 써왔기 때문에 대만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 이러한 이유로 감독은 고심 끝에 양조위의 캐릭터를 벙어리로 만들었다.
- 양조위 본인에게 꽤 각별한 영화인지,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양조위 회고전 '양조위의 화양연화'의 상영작에 이 작품을 넣고 싶었으나 넣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필름 복원 문제 때문으로 추정된다. #
- 허우샤오셴 영화 중 가장 유명한 영화지만, 오랫동안 복원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21년 11월 해상화 복원을 담당한 사람이 밝히길, 판권을 소유한 측에서 복원 작업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고. 2022년 9월 대만에서 33주년 행사에서 리마스터판이 처음 공개되었다. 2023년 2월 말에 대만에서 재개봉되었다.
- 한적한 금광촌이었던 지우펀이 이 영화 때문에 대만에서 관광지로 유명해졌다.
- 사이트앤사운드 설문에서 봉준호가 고른 최고의 영화들 중 한편이다.#
- 공식 각본이 번역 출간되었다.#
[1] 짧은 기간만 활동했으며, 비정성시 외에도 허우샤오셴의 <동년왕사>(1985), <연연풍진>(1986), <나일의 딸>(尼羅河女兒, 1987)에 출연했으나, 비정성시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후 소식이 끊겼다. 2009년 개봉 20주년 기념으로 제작진과 금마장 위원회에서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2] 한국의 방통위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