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ruby(右派社会党, ruby=うはしゃかいとう)] | 우파사회당 | |
| <colbgcolor=#2aaae6> 영어 명칭 | Rightist Socialist Party of Japan |
| 창당일 | 1950년 1월 16일 |
| 해산일 | 1955년 10월 13일 |
| 활동시기 | 1945년 ~ 1955년 |
| 이념 |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계급투쟁 반대 반공주의[1] 기독교 좌파[2] |
| 성향 | 중도좌파 (당대 기준)[3] |
| 주요 정치인 | 가타야마 데츠[4] 가와카미 조타로[5] 아사누마 이네지로 니시오 스에히로 |
| 정당 | |
| 연관 정당 | |
1. 개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정당이다. 그 외의 시기에는 일본사회당 당 내 우파 계파를 가리켰다.사회당 우파라고도 한다. 정당으로서 의미는 '우파사회당'이라고 하고, 사회당 내에서 우파(온건파)라는 의미는 '사회당 우파'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편이다.
2. 역사
일본사회당의 창당 이후 분열 전까지 당내 주류는 전전 무산운동 내 우파의 계보를 잇는 니시오 스에히로, 히라노 리키조, 미즈타니 조자부로의 일파였다. 이 일파는 창당 및 총선을 지도하여 일본 좌파운동 사상 최초로 정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으나, 히라노 농림대신의 공직추방과 그 일파의 탈당, 당 내 좌파의 지분 요구, 연립내각의 중도 파트너였던 민주당과의 정책대립으로 인하여 파행을 거듭하다, 결국 니시오 본인이 쇼와전공사건에 연루되어 연립내각은 붕괴하였다.그 결과로 실시된 1949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참패하자, 니시오파의 당 지도력이 실추되고 공백이 생기면서 이에 도전하는 스즈키파와 주도권을 놓치 않으려는 니시오파 간에 권력투쟁이 발생하였다. 1950년에 발생한 1차 분열은 당내 포스트를 재분배하는 미봉책으로 무마하였으나,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체결을 놓고 강화조약과 안보조약에 모두 반대하는 스즈키파와 강화조약에 찬성하지만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니시오파 및 가와카미파의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갈라지면서, 결국 서로 분열하여 좌파사회당과 우파사회당으로 갈라졌다. 이 두 정당은 서로 제각기 정통 일본사회당임을 자처했으나, 사실상 별도의 조직으로 갈라진 상태였으므로 이를 좌사당과 우사당, 즉 좌파사회당과 우파사회당으로 구분지어 부르게 되었다.
좌파사회당이 스즈키파와 와다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우파사회당도 구 사대당 중간파를 계승한 가와카미파와 구 사대당 우파를 계승한 니시오파의 연합으로 발생하였다. 가와카미파는 중간파적 입장에서 강화조약 찬성, 안보조약 반대라는 타협안을 제안하여 본디 안보조약에 찬성하던 니시오파의 동조를 이끌어내면서 우파사회당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즉 강화조약 찬성이라는 공통점이 양 파벌을 우파사회당으로 묶어준 것인데, 일단 강화조약이 발효되고 기정사실화되면서 안보조약과 재무장이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본디 안보조약에 찬성이었던 니시오파는 재무장에도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안보조약 폐기에도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반면, 가와카미파는 안보조약을 쟁점화하여 좌파사회당과의 접점을 다시 되찾고자 하였다.
1955년 좌파사회당의 스즈키파와 우파사회당의 가와카미파의 주도로 두 당은 다시 합쳐져서 통일사회당을 재결성했다. 그러나 통일사회당 내에서 당론으로 자리잡은 안보조약 폐기론에 반대했다가 고립된 니시오파는 1959년 사회당을 나와 민사당을 결성했고, 여기에 통일사회당 내의 좌파우위 구도에 불안감을 느꼈던 가와카미파 일부가 가와카미 조타로 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민사당에 합류하였다. 여기에 더해 본디 가와카미파 소속으로 우사당을 지도하였던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통일사회당 합당 이후 스즈키파에 접근하면서, 구 우사당 세력은 사분오열되고, 가와카미 사후에는 2세대 지도자를 찾지 못하고 구성원들이 문자 그대로 하나 둘 자연사하면서 명맥이 완전히 소멸하였다.
통일사회당을 완전히 장악한 스즈키파 또한 분열을 면치 못하였다. 이 분열 과정에서 본디 스즈키파의 행동대장으로서 니시오 일파를 탄핵하여 당의 분열시키는 데에 크게 앞장섰던 에다 사부로는 구조개혁론을 내세우는 등 상대적 '우파'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는데, 에다는 구조개혁론이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개량주의'와는 다르다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기에 구 우사당의 입장과는 궤가 완전히 달랐다. 에다 사후 구 에다파가 무너지지 않고 타나베 마코토 등 당 지도자들을 배출하며 마르크스주의 폐기 등 소위 현실노선을 주도하기는 했으나, 이 시점에서는 '좌파'와 '우파'로서의 구분은 형해화하고 대신 '(사회주의)협회파'와 '비협회파'로 구분하게 된다.
3. 같이 보기
[1] 여기서 말하는 반공은 외교적 의미가 아니라 내부 정치 행태로서 반공을 의미한다. 가령 반미적 아시아주의 성격으로 친중공, 친북 노선을 보이다가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한 아사누마 이네지로도 정작 내치에서는 사회당 좌파의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기반 극좌적 계급투쟁에 반대했고, 사회민주주의 ~ 민주사회주의에 기반한 노동 중심 정치와 복지국가를 지지했다. 다만 민사당으로 이탈한 정치인들은 확실히 외교적으로도 반공주의가 맞긴 하다.[2] 1945년 사회당의 창당멤버인 아베 이소오, 가가와 도요히코와 훗날의 우사당에 소속된 가타야마 데츠, 가와카미 조타로는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영문 위키백과의 기독교 사회주의 항목에 일본사회당이 링크되어 있다.[3] 현재 기준에서는 중도나 심지어 범우파로 볼 만한 정치인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훗날 민사당계로 이어진다.[4] 일본사회당 최초의 총리.[5] 우파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일본사회당 제5대 중앙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