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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자유당(1945년)

※ 아래 정보는 해산 당시를 기준으로 함
파일:일본자유당(1945) 로고.png
자유당
[ruby(自由黨, ruby=じゆうとう)] | Liberal Party
<colcolor=#3ec7f7><colbgcolor=#f5f5f5,#2d2f34> 창당일 1945년 11월 9일
해산일 1948년 3월 15일
약칭 자유당, 일본자유당
전신 동교회([ruby(同交會, ruby=どうこうかい)])[1], 입헌민정당(일부)
후신 민주자유당
사상 보수주의
반군국주의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스펙트럼 중도[2] ~ 우익
총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간사장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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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5년 창립된 일본자유당은 일본 제국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지 약 3달 후 하토야마 이치로의 주도로 세워진 전후 최초의 정당 중 하나이다. 현 일본의 집권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직접적 전신이다.

2. 역사

전쟁 이전 일본의 양당 중 하나였던 입헌정우회에서도 보수적인 정통파에 속했던 하토야마 이치로는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도조 히데키의 정국 운용에 불만을 품고 자신과 밀접한 의원 및 1940년 반군연설(反軍演説) 사건 당시 사이토 다카오의 의원직 제명을 반대, 결석 내지 기권한 의원들과 함께 대정익찬회를 탈당해 동교회(同交會)를 결성한 것이 그 시초이다. 비록 동교회는 1942년 총선에서 겨우 9석만의 당선자를 내며 얼마 후 해산되었지만, 동교회에 가입한 인사들이 일본자유당 창설의 주역들이 되었다.

2차대전 종전 일주일 후 도쿄로 돌아온 하토야마는 동교회 출신 인사들을 규합한 후, 아시다 히토시처럼 자신과 같은 입헌정우회 출신, 반군국주의 인사들과 손잡고 새 정당 창당을 준비했다. 원래 하토야마의 구상은 반공, 비 사회주의 계열의 모든 정치세력을 규합한 국민정당이었고, 그래서 노동운동가 출신이자 사회대중당 우파로 분류되던 니시오 스에히로에게도 참여를 권유했다. 그러나 니시오가 일본사회당 참여를 결정하면서 결렬되자, 혁신계열을 참여시키는 것은 포기하고 미키 부키치 등 전직 입헌민정당 출신 정치인이나 이시바시 단잔과 같이 전전부터 반전, 반제국주의를 외쳐온 자유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마침내 1945년 9월 6일, 자신의 측근인 고노 이치로를 간사장으로 선출함으로서 정당이 창설되었다. 11월 9일 공식적으로 창설 인가를 미군정으로부터 받고 자신이 총재에 취임했다.

자유당은 전직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 출신들과 기업가들을 규합해 창설한 전후 첫 보수주의 정당이었으며, '포츠담 선언의 이행'과 '군국주의 일소', '자유로운 경제활동 보장', '사상과 학문의 자유 보장' 등을 기치로 내걸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재무장에 대해서는 전혀 담기지 않았으며 의회민주주의 정착과 경제 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946년 4월 전후 첫 총선인 22대 중원선에서 자유당은 전체 466석 중 141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이에 총재인 하토야마 이치로의 총리 취임이 확실해졌고, 마침내 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히로히토 천황으로부터 내각을 구성하라는 윤지가 내려졌으나, 이 타이밍에 GHQ가 공직 추방령을 내리는 바람에(...) 총리 취임에 실패, 요시다 시게루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결국 요시다가 총리가 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총재에 취임한 요시다가 간사장 고노 등 다른 간부와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인 당 인사를 행하는 바람에 하토야마파 일각에서 요시다를 제명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미키 부키치가 그러면 사회당에게 정권이 갈 우려가 있다며 진정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요시다의 총리 취임 며칠 후 미키도 하토야마처럼 공직 추방령 크리를 먹고 정계에서 퇴출당한다(...).

요시다 취임 이후 내심 하토야마의 후계자 자리를 기대하던 아시다 히토시가 요시다의 총리 취임에 반발하며 뛰쳐나가, 입헌민정당 출신으로 대정익찬회에 가담한 강경 우파 인사들이 창립한 일본진보당을 흡수해 일본민주당을 결성한다. 이 때문인지, 1947년에 치러진 다음 총선에서는 131석을 얻으며 143석을 얻은 일본사회당에 패배해 제2당으로 내려앉는 굴욕을 당한다. 아시다가 이끄는 일본민주당은 124석이나 얻어, 자유당-사회당-민주당의 3당체제가 수립되었다.

비록 제1당은 뺏겼지만 비슷하게 보수주의 정당인 일본민주당과 연정하면 충분히 정권 수립이 가능했고 실제로 일본사회당 총재인 가타야마 데츠도 그렇게 예상했으나, 문제는 요시다와 아시다 사이의 감정의 골이 너무 깊었던 나머지(...) 연정 구성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사회당이 내각을 꾸리게 된다. 그런데 가타야마는 자유당과 민주당 모두에 연정을 제시했으나, 요시다는 일언지하에 거절한 반면 아시다는 가타야마와의 인연 덕분에[3] 덥썩 받아들이고, 사회당-민주당 연정이라는 혁신 정당과 강경 보수 정당 간의 기묘한 연정이 수립된다.

하지만 사회당과의 연정에 반발한 민주당 의원들이 동지클럽(同志クラブ)을 창립하자, 요시다는 반사회당의 기치로 이들과 합당, 민주자유당을 결성한다.


[1] 1941년 하토야마 이치로가 자기 파벌의 입헌정우회의 정통파 출신 정치인들과 함께 反군부, 反도조 내각의 기치로 창립한 중의원 원내회파(한국으로 치면 원내교섭단체)이다.[2] 미키 부키치, 이시바시 단잔 등은 상당히 중도적인 편에 속했다. 자유당 자체가 반군국주의를 기치로 정치인, 관료 등을 끌어모은 거라 스펙트럼이 넓었다.[3] 둘은 대학교 동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