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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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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 종교관의 특징
2.1. 높은 무종교 비율2.2. 다양한 종교가 공존함2.3. 철저한 정교분리2.4. 현세적 종교관
3. 인터넷에서4. 통계
4.1. 신자 수4.2. 지역별 분포4.3. 단체, 교당, 교직자 현황

1. 개요

대한민국의 종교 현황을 설명한 문서. 신자 수 기준, 개신교, 불교, 가톨릭 순이다.[1]

1.1. 그리스도교

신자 수 기준 대한민국의 최대 종교. 가톨릭을 제외한 개신교 인구만으로도 불교를 제치고 단일 종교로서는 최대 규모의 종교이다.
  • 201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최대 종교이며, 전체 인구의 27.6%가 개신교 신자이다. 아래 통계 서술 참고.
  • 2022년 한국리서치 조사 기준 종교인 수 1위. 전체 인구의 종교인 비율이 49%인데, 그중 31%가 기독교인이다. 정확히는 개신교 20%, 불교 16%, 가톨릭 11%로, 즉 한국에서 종교가 있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 신자인 셈이다. 출처
  • 목회데이터연구소의 2023년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신앙의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개신교는 15%, 가톨릭은 5.1%로 크리스트교 신자 비율은 총 20.1%다. 출처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기독교 문화권 국가들이나, 그 나라들의 식민지였던 나라를 제외하면, 개신교 계열의 종교가 해당 국가의 최대 종교인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대한민국이 그 희귀 사례에 속한다. 대한민국에서 개신교인의 인구는 15%에서 20% 정도 까지로 추정되며, 이는 아시아권에서 기독교 계열 교파들 중 가장 성공적인 정착 사례에 해당한다. 역사적으로 개신교의 경우 구한말 계몽 운동과 민족의 독립운동에 앞장선 종교였으며 독립 이후에도 활발한 사회 구호 및 운동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이후 일본이 자국의 민족 신앙인 불교[2]신토, 그것도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된 국가신토[3] 강요함에 따라 거부감을 느끼던 와중, 이들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 한국 불교와 민족 신앙의 성장세가 주춤한 반면 일본 종교들과 완전히 다른 계통인 개신교에 대한 거부감이 덜했던 것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당시 기독교를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종교로 접했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그 나름의 역사적 및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가톨릭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외부인을 통한 전파가 아니라 자국인이 해외에서 접한 이후 자발적으로 신앙을 전파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매우 크다. 1800년대 말 조선의 신분제 사회 속에서 살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평등을 강조하는 교리에 신선한 충격을 받아 급속도로 퍼져나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하늘(天)을 섬기는 한국 민속 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한몫했다.

아시아 국가에서 교회 밀집도가 제일 높다. 약 2만 5천여개의 교회가 있는데, 아시아 국가에서 숫자상으로 교회가 더 많은 국가는 인도(약 3만 5천여개), 러시아(약 4만여개), 인도네시아(약 7만 6천5백여개) 정도인데, 대한민국이 면적은 좁은데 이들은 면적부터가 넓고, 러시아는 아시아 땅 부분은 인구 밀도부터가 낮으니 대한민국이 밀도가 젤 높다. 물론 이것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순위권이다.[4]

1.1.1.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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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인구 센서스 기준 대한민국의 최대 종교이다. 비교적 최근(00년대)까지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별개로 집산한다는 전제 하에 불교가 최대 종교였으나, 위 인구조사 시기를 즈음하여 불교 인구를 크게 추월하였다. 개신교는 가톨릭보다 늦게 들어왔지만 미국영국, 캐나다, 호주[5]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구한말부터 한국에 집중적으로 선교한 영향이다. 신구교 모두 신자 수 역전은 평양대부흥이 있었던 1907년을 기준으로 개신교가 가톨릭을 역전한 것으로 본다.

한국의 개신교 본산은 해방 전에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이었다.[6] 그러나 해방 이후 공산화된 이북 지역 개신교 신자들이 대거 남하했고,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적극적인 선교로 성장해왔다. 탈북자들의 경우 중국에서 개신교 선교 단체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 종교가 있는 탈북자들은 대다수가 개신교도이다.

대한민국의 개신교가 이렇게 뿌리깊게 자리잡은 이유는 이승만 정부와 미국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지만[7], 사실 개신교는 이승만 집권 시기인 1950년대에도 소수 종교였다. 앞서 가톨릭과의 교세가 역전이 된 구한말에는 1%, 해방 후 50년대에는 3~5%였으나, 구한말부터 꾸준하게 교육과 의료 선교나 근대 문물, 기술 지원 등의 공헌을 앞세워 한국 민중들에게 퍼져나간 것이다.

사실 개신교나 가톨릭의 교세가 신도 수가 지금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오히려 자유당 정권이 망하고 이승만이 쫓겨난 후인 60~80년대 경제성장기부터이다. 이후 한국에서는 유독 "기독교"라는 카테고리가 개신교만을 뜻한다고 오해될 정도로 개신교 세력이 가톨릭을 웃돌게 된다. IMF 경제위기 또한 기독교 인구가 성장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서울 집중 개발 도시정책과 초기 개신교의 기능이었다. 박정희 정권부터 본격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세우고 서울이 경제중심이 되면서 이촌향도가 가속되었고, 지방 농촌에서 몰려온 시골 사람들이 도시 하층민을 형성하면서 이들에게 필요한 기초적인 사회복지와 커뮤니티 기능을 교회가 제공했다. 아직 국가 주도의 복지정책같은 걸 할 수 없던 시절 교회는 미국 교회 자본을 통해 적극적인 복지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이것이 1차적으로 교회에 하층민들을 모으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들도 어차피 타지에 돈벌어서 생존해야하는 처지에 같은 처지 사람들끼리 모일 수 있는 공간이 교회라서[8] 개신교의 교세가 커질 수 있었다. 개신교의 이런 빠른 전파는 산업화가 가속되는 다른 개발도상국들에도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불교나 천주교에서는 보기 힘든 사연이다. 불교는 대부분의 본건물이 산속에 박혀있어 새로운 절을 도심에 세우기 어렵고 승려가 신도에게 직접 간섭하기보단 수행을 통해 스스로 마음의 짐을 풀도록 교리화한다. 천주교는 교황이 임명한 교구장의 감독 하에 성당을 짓고 신부를 파견하기 때문에 성당을 마음대로 늘리지 못하며, 좀더 생활에 천천히 관여하는 접근 방식을 택한다. 반면에 개신교는 목회할 자격이 있는 목사가 공간만 있으면 사람들을 모아서 기도할 수 있는 교회가 주 6일 풀가동엔진처럼 일하다가 쉬는 날이면 뭘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개발도상국 시기 불안에 찬 도시 한국인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마음의 불안을 해소하는 장소이자,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교류하는 커뮤니티의 기능을 대체한 것이다.

커뮤니티 기능은 군사정권이라는 특수한 환경까지 추가되었는데, 농촌계, 반상회, 마을회 같은 과거 한반도 전통의 커뮤니티 기능은 정치적 이유로 박정희 군사정권 때부터 그 기능을 박살 내놓고 이 제도를 반체제 시민 감시 기능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도시인들에게 정기적으로 사람을 만나서 뭔가 할 구실을 만들기에는 동네사람을 찾기보단 가까운 교회가서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기도하다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교류하는 게 가장 무난하고 정치적인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한자 음차 표기이므로 가톨릭이나 정교회 등의 여러 교파들도 엄연히 기독교의 범주 안에 들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상술된 이유로 양자를 잘 구별하지 못하고 '기독교'라고 하면 개신교만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다. 당장 교보문고영풍문고, 알라딘 중고서점 같은 한국의 대형서점의 기독교 관련 서가에서는 해당 관련 서적 분류를 굳이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으로 해놓고 있을 정도. 대한민국 국군에서도 종교를 분류할 때 복음주의 계통 개신교는 '기독교'로, 다른 기독교 계열 교파는 굳이 해당 교파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신교 신자 비율은 90년대에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로는 계속 정체세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증가하는 인구수에 비례해 종교 인구는 줄어드는 와중에 홀로 인구수가 급증했다는 통계 조사도 있었고,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2021년 종교 현황 조사[9]에서 신자의 연령 분포가 비교적 고른 편이며, 청년층에서의 교세는 개신교가 크기 때문에 타 종교에 비해서는 그나마 조금은 나은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고도 하지만 사실 청년층에서는 개신교 교세 따위는 압도할 정도로 무종교(+무신론)의 비중이 높다.

2020년대에는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교세가 크게 꺾임과 동시에, 개신교 계열 극단주의자들이 관련 사건사고를 저질러댄 탓에 사회적 인식도 엄청나게 악화되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신자가 가장 많은 종교라는 위치는 지켰으나, 그 절대치는 대폭락하여 종교 인구의 21%를 차지했던 개신교 교인 비율이 17%로 감소했다. 더불어 무종교인의 종교 관련 호감도 조사에서는 꼴찌인 6%를 기록하였다. 사실 그 이전부터도 개신교는 타 종교 비방, 정치권과의 공공연한 야합, 과도한 전도 행각, 각종 사회적 물의 등으로 항상 비호감 종교 1위 자리를 지켜 왔는데,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그릇된 종교적 신념을 앞세운 패악질이 극단화되어 엄청난 사회적인 공분을 샀다. 원래도 10%로 결코 높다고 할 수 없었던 호감도가 거기서 반토막인 6%가 된 것. 다른 종교들은 딱히 변동이 없거나 오히려 호감도가 소폭 증가하기도 한 와중에 개신교만 급락한 것이다. ##

특히 해당 조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과거 종교가 있었지만 현재는 종교가 없다”고 밝힌 이들인데, 이들 중 과거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이 52%로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타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비방과 혐오를 들이밀며 공격적으로 전도해 머리수만 잔뜩 늘려 봤자 도리어 그 내부에서 개신교의 폐쇄적인 구조와 교조적인 교리 및 닫힌 사회나 다름없는 교단의 적폐에 환멸을 느끼고 개신교를 떠나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아예 무종교 내지 무신론자 혹은 반신론자가 되는 인구가 더 많다는 뜻이다. #[10] 다만 서울 강남 3구나 평창동, 한남동, 성남 분당, 판교, 인천 송도, 부산 해운대, 대구 수성, 경산 등 고소득층이나 중산층들이 밀집되어 있는 대도시권, 신도시, 2030 청년 세대에서는 압도적으로 높은 신자수를 자랑한다.[11]

1.1.2.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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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신자가 생겨났다. 초기에는 신앙이 아닌 철학(서학)의 일종으로 전해졌으나, 이후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자체적으로 가톨릭 신앙이 자리잡은 특이한 사례이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도 이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적극 홍보하고 있다.[12]

이후로는 프랑스 가톨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교부터 시작해 말단 신부까지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부터 조상 제사 거부와 하느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인해 지배층에게 밉보이고 18세기 말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와 갈등하여 병인박해병인양요가 일어나기도 했다. 개항 이후 이러한 박해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 개신교가 들어와 서양식 의술 등으로 굉장히 안정적으로 고위층에게 선교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세에 밀리게 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군사독재 정권 시기에는 진보성향의 개신교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좋은 이미지를 얻어 세력을 점차 늘렸다.

대한민국에서는 인구 대비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동네 곳곳에 교회가 워낙 많아서 가톨릭의 교세가 낮아보이는 것일 뿐,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는 가톨릭 신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보면 5위 수준이다. 한국보다 가톨릭의 교세가 강한 아시아 국가는 필리핀가톨릭 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가톨릭 입장에서 마냥 반길 수 없다. 총인구 감소에 따라 가톨릭 사제나 신자의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신자 증가율은 0.15%인데, 2019년(0.8%)과 2018년(0.9%)에 비해서도 현저히 낮다. 특히 코로나19로 2021년 새신자는 전년 대비 61% 감소했다. #

가톨릭의 전례, 그중 특히 미사가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할 수 있기 때문에 '신자는 늘었는데 미사 참여율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다소 특이한 통계 결과도 있다. #

1.1.3. 정교회

정교회는 앞선 두 종파보다 교세가 훨씬 작다. 구한말인 19세기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궁핍과 기아를 피해 이미 조 · 러 국경을 넘어 러시아연해주 일대에 정착하여 체류하기 시작하였는데, 러시아는 이들에 대하여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러시아 당국의 동화 정책으로 다수의 조선인들이 정교회 세례를 받기도 하였으며, 현재도 러시아 사할린 등에 다수의 한국인 정교회 신자들이 분포해 있고, 몇 명의 고려인 성직자들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목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00년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명령에 의해 한국 선교단이 꾸려져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가 서울에 오면서 정교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러일전쟁일본의 식민정책으로 빛을 보지 못했고 8.15 광복 후 분단과 1950년에는 6.25 전쟁까지 터지면서 안 그래도 어려운 선교가 더욱 열악한 상황으로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냉전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본산은 죄다 제2세계 공산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남한 내 인지도와 이쪽 국가들과의 교류가 바닥을 쳤기 때문.

그나마 1953년 참전용사였던 그리스군 종군사제에 의해 재기를 맞이했고, 1956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에 소속되면서 미국 정교회의 대리관구의 지도하에 선교가 재개되었다. 1970년 대리교구가 재편되어 미국 정교회에서 뉴질랜드 정교회로 소속이 바뀌면서 2004년 3월까지 영적 지도를 받아왔다. 199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시노드에서는 한국 선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한국 정교회 교구 헌장을 승인함으로써 자치권을 얻게 되었다.

정교회가 북유럽, 동유럽 등 구소련 영향권 국가들 사이에 퍼져있던 종교인 관계로 현재에도 한국 정교회의 총 신자 수는 웬만한 중형 개신교 예배당의 교인 수보다도 적은 약 4천여 명에 불과하다. 미국 등 외국의 한인 정교회 신자 공동체 또한 더 큰 개신교 계열 공동체에 밀려 전무한 실정이다. 위에서 조금 언급했지만 공산주의 혁명과 그에 따른 장기간의 냉전으로 인해 러시아 등 정교회의 비중이 큰 동유럽 국가들과는 오랫동안 교류가 단절되었고, 그나마 같은 자유 진영 국가로서 정상적인 교류가 있었던 그리스도 한국전쟁 참전국이자 서방 세계의 우방국이라는 상징성에 비해서 교류의 규모 자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국 및 서유럽 국가들의 공동체와 교류가 활발한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비해 정교회의 확산력은 미미할 수 밖에 없다.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마이너 소리를 듣는 성공회조차도 영국의 국교인 관계로 영미권 국가에 나름 퍼져 있기에 한인교회를 두고 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소련 시절 정교회를 접하고 개종한 고려인 후손들 중 일부가 소련 해체 후 다시 한국으로 귀화한 후 정교회 신앙을 계속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공인들 중에는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고려인 모델 박유리가 정교회 신자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국 정교회는 신자 수를 불리기 위한 직접선교보다는 각종 강연이나 강의, 출판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정교회를 알리는 간접선교를 주로 한다. 또한 정교회 성당을 찾아오는 방문객에게도 신앙을 소개한다. 정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은 다른 기독교 교단에 속했던 사람이나 무신론자 등 배경이 다양한데, 정교회의 전례와 영성에 대해 감동받고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1.1.4. 오리엔트 정교회

위에 언급된 가톨릭·정교회·개신교칼케돈 공의회를 존중하는 이른바 '칼케돈파 기독교'이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배제되었던 비(非)칼케돈파 기독교를 묶어서 오리엔트 정교회라고 부른다.

콥트 정교회가 현재 한국에 사제를 공식 파견하고 공소까지 구성한 유일한 오리엔트 정교회이다. 한국에 콥트 정교회 공동체가 조직된 것은 2010년경인데, 직접적인 설립 이유는 울산부산을 비롯해 콥트교를 믿는 이집트인 노동자들이 조선소 등지에서 근무하면서 조금씩 늘어났고, 마침내 한 콥트 정교회 신자에 의해 서울에 공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사제는 호주 시드니 교구 소속으로, 보통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한국을 방문해 열흘 정도 체류한다. 한국뿐 아니라 대만필리핀, 베트남, 홍콩, 스리랑카, 네팔 등 아시아 국가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국가를 순회하며 각국에 머물고 있는 콥트 정교회 신자들을 만나고 보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제가 한국에 머무르지 않을 때에도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25명~30명, 많게는 50명의 콥트 정교회 신자들을 포함한 오리엔트 정교회 신자들이 모인다.

2019년에는 에티오피아 정교회도 한국에 진출했다. 다만 아직은 자기들만의 성당이 없어서 한국 정교회 성당을 빌려서 그곳에서 성찬예배를 보고 있다고 한다.

1.1.5. 통계 분류의 어려움

한국의 종교 통계는 기독교를 개신교와 천주교로만 나누고 있어 보다 명확한 분류가 어려워지는 문제점이 있다. 2012년 3월 문체부가 발간한 <한국의 종교 현황>의 종교별 단체 현황에서는 정교회를 개신교 단체로 분류하는가 하면[13], 같은 단행본임에도 종교별 법인 현황에서는 한국 정교회 유지재단을 '그 밖의 종교 관련 법인체'로 분류하는 등 혼선을 빚었다.

1.2. 불교

불교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 재위기 전진(오호십육국시대)의 승려 순도(順道)가 전파하여 포교가 시작되었고, 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1천년간 국가 단위에서 밀어주던 종교였다. 왕실과 불교는 깊이 유착되어 있었고, 불교는 국교와 같았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를 때쯤엔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였고, 때문에 조선 건국 이후로는 국교의 지위를 상실하고 숭유억불 정책으로 고려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세가 축소된다. 그러나 조선 때도 불교는 여전히 인기 있는 종교였으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국내에서 결코 소수 종교 수준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또한 한국어에 불교에서 유래된 어휘가 일부 사용되고, 훌륭한 인격자를 흔히 보살에 비유할 정도로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14] 때문에 어느 정도 민족종교적인 색채를 띄기도 한다.

현대에는 해방이후 급속도로 늘어난 기독교에 밀리고 있다. 물론 이는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포교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서 그런 결과이기도 하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조사 결과에 따르면 불교 인구가 처음으로 개신교 인구에 밀리는 결과를 맞게 되어, 불교계에서는 이것을 굉장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장년층을 주요 포교 대상으로 하다 보니, 젊은 세대의 상당수가 사찰을 기피하고 가톨릭개신교 등 서구적 분위기의 기독교를 더 자연스러워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21년 종교현황조사[15]에서 연령별로 다소 고른 비율 분포를 보여주는 개신교에 비해 19~29세 4%, 50대 23%, 60대 이상 28%라는 결과를 보이며 불교 신자의 고령화 현상이 타종교에 비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비율로는 전체인구에서 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인 약 40% 중 약 16% 포인트를 점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한국의 대중 종교라는 이미지가 무너지고 젊은층 포교에 실패했다는 것을 두고 불교의 대중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그리하여 2020년대부터 대중화를 위한 첫 시도가 이뤄졌다.

사실 동아시아 삼국(한중일)에서 불교가 기독교에 비해 수치상 열세로 보이는 현상은 국가적으로 봤을때 유독 한국이 두드러지는 편이다. 심지어 한국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아시아의 기독교 우호지역인 홍콩, 싱가포르, 마카오 모두 불교의 교세가 더욱 높다. 다만 애초에 한국도 불교의 신자가 개신교와 비슷한 만큼, 불교세와 무신교가 강한 동아시아 사회인데다 되려 기독교에 대한 비우호도 증가로 인해 딱히 사정이 엄청나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자가 한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도 안 되는 일본조차도 사찰에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중인데.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고령화와 더불어 사찰 찾는 신도 수가 감소해서 스님들이 투잡을(...) 뛰고 있을 정도다.#

그나마 한국에서 불교는 연령층에 관련없이 가톨릭과 함께 무종교층에게 있어서도 이미지가 결코 나쁘지 않은 종교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이미 개신교에 불교 인구가 밀리기 3년 전인 2012년 당시에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에서 발표한 ‘한국의 사회ㆍ정치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에서 '어떤 종교를 가장 신뢰하느냐'라는 설문에 응답자의 27.1%가 가톨릭을 말했고, 불교는 23.8%로 가톨릭 다음으로 신뢰하는 종교라는 응답이 당시 20대, 30대와 60대 응답자들 사이에 있었다. # 교리가 어렵고, 고리타분하다거나 하는 인식 내지 영향력과는 별개로 불교는 당시의 20대에게도 결코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21년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청년층의 탈종교화 내지 고령화가 두드러진 와중에도 ‘가장 호감을 느끼는 종교’에 대해 묻는 설문에 응답자 20%가 불교를, 13%가 가톨릭으로 대답하는 등 종교 인구 전체의 감소를 놓고 보더라도 무종교 인구에 있어 불교에 대한 이미지는 결코 나쁘지 않다. #

2020년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에서도 불교에 대한 이미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40.9%가 '온화하다', 32%가 '절제를 안다', 27.6%가 '따뜻하다'라는 이미지로 답했다. 불교 하면 국립공원에서의 입장료 문제나 조계종 종정 문제, 태고종과의 갈등 등 문제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단 대척점에 있다고 인식되는 개신교가 국내외에서 꾸준히 사회적, 종교적 논란을 잊을 만하면 꾸준히 일으켜서[16] 어그로를 끌고 있는 점이 아무래도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별로는 경상도인 대구, 부산, 울산, 경북, 경남, 그리고 경상도가 아닌 곳에선 제주도, 강원도에서 불교세가 강한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불교세가 강한 지역들 중 경상도와 강원도는 정치에 있어서 보수가 강한 지역이라는 점인데, 정작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종교로 따졌을 땐 개신교가 제일 많다는 점이다. 물론 불교 신자 가운데서도 진보주의자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개신교 신자 가운데서도 보수주의자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서 일괄 분류는 곤란하다.

1.3. 유교

유교를 종교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성리학 기조가 강했던 조선시대에 사실상 국교이자 유일한 진리로 여겨졌다.[17]

그러나 조선의 멸망과 구한말~일제강점기 외래 종교들의 유입으로 종교로서의 영향력은 사실상 미미해졌다. 종교 관련 설문조사에서 자신을 유교 신자라고 답하는 비율은 많아야 1% 남짓으로 나오며, 대부분 기타 종교들로 묶여서 분류된다.

비록 종교적 의미는 퇴색되고 가족 모임 정도로 여겨진다지만, 여전히 유교식 제사를 지내고 있는 집은 통계에 따라 50~80%까지도 집계된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개신교 등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조차도 한국인인 이상 어느 정도는 유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사실 교회 출석률이 바닥을 찍는 현대 유럽 기독교권 국가에서도 1년에 교회에 한두번 갈까말까한 나이롱 신자들을 기독교 통계에 합산시킨다는 것을 감안하면, 통계에는 무종교로 잡히지만 1년에 한두번 제사는 지내는 한국 인구의 대다수를 유교 신자라고 볼 수도 있다.

1.4. 원불교

한국 민족종교 중 과거 가장 교세가 강했던 것은 20세기 초 인구의 15% 이상이 신자였던 천도교이지만, 천도교가 급속하게 몰락한 후 21세기 현재 기준 가장 교세가 강한 민족종교는 원불교이다. 종교 관련 통계에서도 3대 종교 외의 기타 종교로 빠지지 않고 따로 집계될 때가 많으며 3대 주요 종교 외의 유일하게 군종장교도 3명 배출했다. 수는 적지만 전국 곳곳의 부대에 원불교 교당이 있는 곳도 여럿 보인다. 게다가 여러가지 사회참여로 인지도도 꽤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2년 발간한 <한국의 종교현황> 단행본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 원불교는 전국에 550개 교당과 1,979명의 교직자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2005년 센서스 기준으로 13만여 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1.5. 천도교

전성기였던 1920년대에는 약 300만의 신자를 보유한 명실상부한 주요 종교였다. 당시 인구가 약 2000만이었으므로 이는 비율상 약 15%, 현대 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 비율인 14%보다도 많은 수치이다. 전성기의 교세로만 보면 한국에서 탄생한 민족종교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친일 행적과 신-구파 갈등으로 교세에 큰 타격을 입은채로 분단되었고, 신자의 90% 이상이 북한 지역에 있던 이북 지역 천도교는 해방 후 북한의 공산화로 극심한 피해를 보고 교세가 급격하게 무너져내렸다. 한편, 남한 지역에 있던 천도교는 소위 북한 청교도 청우당과의 관련성 때문에 '빨갱이' 낙인을 받아 교단 보호를 위해 친군사정부 행보를 걸으며 민주주의 운동에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다 결국 낙후된 종교로 남고 말았다. 2015년 센서스 기준 6만 6천여 명으로 집계되며, 비록 적은 수지만 그래도 85년 2만 7천명, 95년 2만 8천명, 05년 4만 5천명에 이어 꾸준하게 높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1.6. 무교(무속신앙)

무속 신앙은 흔히 독자적인 종단을 갖춘 종교로는 여겨지지 않으나 널리 퍼져 있으며 무속에 의지하는 사람도 있다. 더불어 자신이 불교, 유교, 기타 소수종교 등 다른 종교를 믿는 상태에서도 이 무속신앙을 같이 행하는 경우도 있으니 무속신앙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보편적 옛 신앙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다.[18]

'무교'라는 용어는 맥락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장문의 글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잘 쓰지 않고, 무속신앙이라든지 하는 말로 해설해서 말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어에서 장단음 구분이 거의 사라졌고, 그나마도 표기가 없어 글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 보니 과반수를 차지하는 무종교와 동음이의어가 되어 헷갈리기 때문이다.

1.7. 대종교

대종교는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던 등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해서인지 문체부의 2012년 단행본에서 '그 밖의 종교'가 아닌 별개의 항목으로 분리되어 있으나, 실제 교세는 지명도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때 중국 본토까지 신자수를 늘렸으나 나중에 천도교와 함께 탄압당했다가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순식간에 신자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국내에 잔존하던 단군교는 친일 행적으로 해방과 동시에 소리없이 사라졌다.

1.8. 이슬람교

신라 때 일부 무슬림들이 유입된 것을 시작으로 고려~조선 초기까지 '회회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고, 중동인이나 중앙아시아인들이 한반도에 일부 거주하며 국가행사에 참여하거나 쌍화점 같은 고려가요에서 다뤄지는 등 전근대 시기에도 이슬람과의 접촉은 있었으나 장거리 교역이 사라진 조선 중기에 그 맥이 거의 끊겼고, 6.25 전쟁 시기 튀르키예군을 통해 이슬람이 알려진 바도 있으나, 본격적으로 이슬람이 한국에 전파된 것은 70년대다. 중동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1975년 서울중앙성원이 세워진 이래 한국에 11개의 모스크와 42개의 지회를 두고 있다.

한국인 무슬림과 외국인들까지 모두 포함하면 0.3% 정도로 추정되나, 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및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에서 오는 인원들이 다 무슬림인 것도 아니고 반대로 프랑스, 영국 국적의 무슬림들이 한국에 체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은 따로 한국인 무슬림 수를 집계하지 않으며, 비중이 너무 작아 이슬람 인구는 기타 종교로 분류된다. 한국 이슬람교 측도 공식적으로 신도 명부를 관리하지 않는다.[19] 애초에 신도의 90% 이상이 재한 외국인인데, 이들을 제외하고 한국 국민들만 놓고 보자면 6.25 전쟁튀르키예군 주둔의 영향을 받아 개종한 주민들을 기본 베이스로 하였고, 여기에 중동/동남아 관련 전공자나 현지 진출 사업가/노동자, 국제결혼을 통해 개종한 경우 또는 새로 한국 국민이 된 해당 지역 출신 이민자 등 뉴커머들이 간간이 유입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귀화 외국인이나 다문화가정 출신이 아닌 토종 한국인 무슬림들 중 매주 예배까지 참여하며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는 신도의 수는 많아야 500명 남짓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이슬람 교단은 의외로 국가정보원과 같은 정보기관과 관계가 있는 편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한국에 이슬람교가 퍼지게 된 계기는 중동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부터인데, 이때 중동과의 외교 및 대외정보 수집을 위해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가 주도해서 서울중앙성원을 건립하고 국내외 이슬람 커뮤니티와 접촉한 것. '남산'에서 온 인사들이 서울중앙성원에 수시로 드나든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란다.

한국에선 이슬람교는 중동/아랍 계열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하지만 정작 한국 내 무슬림들은 대부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지역이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 출신의 외국계 한국인 및 재한 외국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일본이나 대만 같은 경우는 무슬림 절반 이상이 인도네시아인들[20]인 반면 한국의 경우 한국 내 체류 무슬림들 중 특별히 인구수에서 우위를 점하는 집단이 따로 없다보니 특별히 어떤 재한 외국인 집단이 갑 자리를 차지하는 아니라서 재한 외국인 무슬림 사이의 갈등은 적은 편이다.

이 때문에 의의로 지방 모스크(센터)에는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신도가 상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2010년대 초까지 서울중앙성원에서 인도네시아 출신 이맘이 꾸란 암기와 암송을 잘 못해서 같이 예배 드리던 아랍인들이 짧은 구절 낭송도 왜 자꾸 틀리냐고 컴플레인 거는 경우가 많았다. 아랍인들 중 독실한 무슬림들의 경우 쿠란 책 전체를 통째로 암기한 경우가 많은데, 인도네시아인들의 경우 심지어 모스크 직원인데도 불구 쿠란을 짧은 내용도 잘 못 외운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한 때는 한국 이슬람계가 금전적인 부분만은 굉장히 잘 한국화되어 할랄 음식부터 각종 행사까지 모든 게 비쌌었다. "외국이면 이맘에게 식사 한 번 대접하는 수준의 무료 서비스에 가까운 종교 의식도 수십만 원 상당의 비용을 내야 하며, 이걸 또 단합으로 최소 얼마라고 걸어놔서 어딜 가도 대동소이한 가격을 자랑하는 등 굉장히 비싸서 믿음을 돈으로 사는 한국식 종교관에 극도로 충실했다" 라는 악평을 듣기도 했는데, 이제는 옛날 이야기이다. 2014년 미국-사우디발 유가 치킨 게임으로 국제 유가가 폭락한데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수준이 웬만한 무슬림 국가들을 전부 다 추월하면서 무슬림들의 평균적인 구매력이 여타 한국인들에 비해 많이 낮아진 상황이다. 이제는 할랄 산업에 바가지 씌우기 속된 말로 눈탱이 시도하면 바보 취급 받는다. 이태원 모스크에 정기적으로 예배보는 한국인들에 의하면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걸프 아랍인들 돈을 노리고 무슬림 사칭하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돈 때문에 무슬림 코스프레 하는 사람들이, 괜히 이태원을 어슬렁거리는 대신 유튜브에서 무슬림 코스프레 하는 방향으로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화되어서 돈만 노린다는 말도 어폐가 있는 것이 서울중앙성원에서 00년대 초 인도네시아 출신 이맘 한 명이 거액을 챙겨서 도주한 사례도 보고되었다. 즉 어느 종교 단체든 돈만 들어오고 관리가 안 되면 돈이 안 좋은 쪽으로 줄줄 새기 마련이다.

국내 체류 외국인 무슬림들은 대개 이주노동자로 한국인 일반보다 경제수준, 구매력이 약한 편이고, 엄연히 한국 내 무슬림 인구는 소수라서 보는 눈도 별로 없기 때문에 비할랄 음식을 섭취하거나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다. 할랄 식자재가 더 비싼 것은 아니지만, 지방 공단 지역에서는 구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일단 한국의 무슬림들은 주변의 눈치도 보고 대한민국 내의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인지 종교행사가 있을 때만을 제외하면 대체로 조용히 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주변에 다른 한국인 중에서는 무슬림이 극소수에다가 또 무슬림 사회 내에서는 한국인이 극소수인 이유로(한국 내 무슬림 사회 내에서도 토종 한국인 무슬림은 엄연한 소수이다.) 보통 페이스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락과 근황을 주고 받는 편이기도 하다.

다우드 킴 강간 미수 폭로 해명 논란 등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 내 이슬람계 전반의 이미지를 악화시키며 사리사익을 챙기는 경우가 생겨나면서 한국인 무슬림들 사이에 상당한 우려를 낳고 있다.

1.9. 유대교

최근에는 유대교 회당이 수도권에 생겼다. 주로 한국에 귀화했거나 이민 온 교인들이 믿고 한국인 신자는 별로 없다.

역사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긴 했으나, 근대 이전까지 한국사와 특별히 접점은 없다. 구한말 개항 이후 극소수의 유대인들이 한국에서 거주하기도 했으나, 한국과 유대인/이스라엘이 유의미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스라엘과 공식 교류를 시작한 이후이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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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기타

한국에서는 19세기부터 신흥종교가 활발히 등장하였다. 근대에는 주로 개벽 사상, 단군, 정도령, 미륵 신앙 등에 바탕을 둔 도교 계통의 신흥 종교가 여러 교파를 형성하였다.[22] 특히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라는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바탕으로 창시된 종교가 많은데, 위의 동학이나 대종교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외세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반외세,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반면 교리의 완성도는 다소 부실한 한계를 보인다. 이로 인해 해방 이후 교세가 크게 약화되거나, 증산도, 대순진리회 등의 사이비종교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에 들어서는 개신교 계통 신흥 종교의 활동이 잦은 편이다. 가장 성공한 신흥 종교라 할 수 있는 통일교는 개신교에서 출발했으나 이미 개신교는 물론 기독교 자체와 한참 떨어진 별개의 종교가 된 지 오래고, 신천지하나님의 교회, 기독교복음선교회 등 기독교 계열 신흥종교는 편의상 개신교로 분류해버린다. 수입된 신흥종교로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여호와의 증인, 창가학회, 천리교, 바하이교, 라엘교 등이 대표적이다. 창가학회는 몇 안 되는 불교 계통의 종교이며, 천리교는 아예 도 계통의 종교, 그것도 신토계열 종교이다.

세계 종교 중에서 신도 수로 3위인 힌두교는 한국에서는 매우 생소하며 외국인 신자들의 종교 활동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 해방촌에 '베다 문화센터'가 있는데#, 이곳은 힌두교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설립된 '국제 크리슈나의식 협회'(ISKCON) 계통이라고 한다. 한편 경기도 포천시에 국내에 체류하는 힌두교인들의 사원이 있다.
사실 힌두교의 경우 주로 한국에 거주하는 인도인들 중에 신자들이 존재하지만 그 인도인들 중엔 무슬림도 많은 편이라 아무래도 마이너한 면이 있다. 덤으로 시크교 같은 경우도 보통 유학생들이나 요리사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2. 한국 종교관의 특징

2.1. 높은 무종교 비율

파일:대한민국_종교 분포_2021.png
종교 현황 종교에 대한 인식

서구 기독교 사회나 이슬람 사회 등 종교적으로 경직된 사회에서는 종교가 없는 걸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당장 미국만 해도 정치인이 자신이 무종교인 내지는 무신론자임을 밝혔다간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며, 이 때문에 미국 국회에서 무신론자 의원은 한 기수에 한두 명이 있을까말까하다.[23] 이슬람교에서도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태어난 국가나 민족의 영향을 받아 '신을 잘못된 방법으로 섬기는 사람' 정도로 사람 취급은 해주지만, 종교가 없는 건 인간의 기본인, 자신보다 고차원적 존재인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감사함도 모르고 사는 몰염치한 사고방식이라며 매우 죄악시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이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2021년 한국갤럽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인구의 60%가 종교가 없는, 상당히 탈종교적인 국가다. 즉, 후술할 한국 종교관의 특징을 논하기 전에 그냥 사회적으로 종교의 영향력 자체가 미약하며, 국민들도 종교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세계 정신사적으로 볼때 중국과 함께 국가가 종교의 기능을 완전히 대체한 사회로 꼽힌다. 동아시아 밖으로만 나가면 거의 대부분 국가에서 종교의 경전을 받아쓴 언어가 공용어거나 국어이며 종교가 곧 신앙, 윤리, 규범등 인간의 정신적 판단 기준에 영향을 미치지만, 한국은 언어도 종교와 완전히 분리된 독자적 자국어를 쓰며 신앙, 윤리, 규범의 거의 대부분을 국가가 대체한 상태이다. 신앙의 일부분인 미신적 사상 일부만 무속이라는 형태로 국가가 대체하지 못했을 뿐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들 절대다수는 국가와 한민족이 규정한 신앙, 윤리, 규범을 따르며 이를 교육받아 한국인으로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렇게 정교분리가 아주 철저하게 되어있다보니, 종교는 기존 대형종교건 신흥종교건 국가가 대체하지 않은 무속의 범주를 파고들어 생존하거나, 종교의 기능인 집회를 이용한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서 정서적으로 서로 의지하는 커뮤니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런 정교분리를 해치는 종교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데, 이슬람이 대표적이다. 한국 사회의 이슬람포비아의 경우 단순 이슬람에 대한 거부감, 반감보다는 특히 샤리아같이 정교분리가 이뤄지지 않고 한국인의 생활상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는 상황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는 기독교나 불교 등 타 종파의 경우에도 정교분리를 해칠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서 경계한다는 점에서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이슬람포비아와는 다소 궤가 다르다. 수혈, 병역 등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이 다른 기독교 종파들보다 경멸당하는 것도 "어딜 감히 종교 따위가 국가의 영역인 보건, 국방 정책을 침범하려 하느냐"라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24]

대한민국의 강한 무종교적 경향에는 유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 유교는 신이나 귀신을 섬기는 것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며[25] 현세에서의 자아실현을 중시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유교는 대한민국에서의 무교 우세 현상뿐만 아니라 아래에 기술된 현세적 종교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국가가 종교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한 나라로 꼽히는 중국, 한국이 결국 과거 세계 1, 2위를 다투던 유교 국가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유교 자체는 거의 소멸의 길을 걷고 있지만 유교의 영향만은 현대 한국과 중국의 무종교적 경향으로 깊게 남았다.

무종교 성향은 특히 젊은 층으로 갈수록 강해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고 있다. 2014년 한국갤럽 면접조사를 통해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 보고서에 따르면, 2, 30대의 종교인 비율은 10년 전에 비해 각각 14%, 11% 감소하여 종교 인구의 고령화 현상이 현저하게 드러났다. 젊은층 이탈로 ‘종교 인구’ 비율 줄어 뿐만 아니라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기존 종단, 특히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호감도가 급락했으며 종교가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 역시 크게 주는 등 종교인:비종교인, 중년 이상:청년 이하의 종교에 대한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

이렇게 종교를 믿는 것 자체를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고 성직자들을 헛소리나 퍼트려서 돈 버는 사회에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이라 보는 것 또한 상당부분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이다. 조선시대에는 팔반사천이라 하여 승려, 무당 등을 기생, 광대, 백정 따위와 한 카테고리로 묶어 천민으로 분류했다. 이는 이들이 백성들을 사치, 오락, 주색잡기에 빠지게 하여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유교적 관점에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은 기생을 찾아 매춘을 하거나 광대들의 남사당패 공연을 보거나 백정이 도축한 고기(당시에는 고기가 사치품)를 먹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물론 개인의 여가생활을 존중하는 현대에는 영화를 보건 비싼 음식을 먹건 종교를 믿건 그 자체를 죄악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다수 한국인에게 종교라는 것은 딱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 취미생활"에 불과하다.
종교의 자유에서 종교에 대한 적극적인 우대조치를 요구할 권리가 직접 도출되거나 우대할 국가의 의무가 발생하지 아니한다. 종교시설의 건축행위에만 기반시설부담금을 면제한다면 국가가 종교를 지원하여 종교를 승인하거나 우대하는 것으로 비칠 소지가 있어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제2항의 국교금지·정교분리에 위배될 수도 있다고 할 것이므로 종교시설의 건축행위에 대하여 기반시설부담금 부과를 제외하거나 감경하지 아니하였더라도,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헌법 제20조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가 오로지 종교만을 이유로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법률에 따른 의무를 면제하거나 부과하는 입법을 한다면, 그러한 법률의 주요한 효과는 종교를 장려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될 것이어서, 헌법 제20조 제2항과 배치된다.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보호하거나 우대하는 조치도 무종교의 자유를 고려하면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원칙에 어긋난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종교시설의 건축행위에 기반시설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데도, 종교시설의 건축행위에만 기반시설부담금을 면제한다면 국가가 종교를 지원하여 종교를 승인하거나 우대하는 것으로 비칠 소지도 있다.

출처: (기반시설부담금에 관한 법률 제8조 제1항 등 위헌소원 등 (2010. 2. 25. 2007헌바131, 2008헌바37ㆍ71, 2009헌가1, 2009헌바18ㆍ239ㆍ283(병합))
이 헌법재판소 판례는 무종교 또한 다른 종교와 같은 권리 및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모든 종교에게 동등한 혜택을 주는 것은 무종교의 권리를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대한민국에서는 헌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에서 무종교, 무신론이 완벽에 가까운 보호를 받으며, 실생활에서도 차별을 거의 받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에서는 여신, 갓드립, X느님, 보살 등 종교적 색채가 짙은 단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유행어로 쓰이곤 한다. 물론 순전히 재미삼아 쓰는 것일 뿐, 그 누구도 이것을 특정 종교를 비하하려는 의도를 띤 채 사용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이를 신성모독 운운하며 비판하려 들지 않는다. 코미디언 윤성호뉴진스님이라며 스님 컨셉으로 공연을 하고, 오히려 한국 불교 교단에서는 이것이 불교 홍보에 도움이 된다며 적극 지원한 반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선 신성모독이라는 불교계의 반발이 일어난 사례에서 타국과의 인식 차이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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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다양한 종교가 공존함

한국의 주요 종교인 그리스도교불교는 계통이 완전히 다른데도 엇비슷하게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사례를 찾기 힘들다. 기껏해야 캐나다, 싱가포르 같은 다문화 국가 정도다. 물론 사소한 종교 갈등은 산발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사회 문제로 번지거나 피를 보는 심각한 수준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흥미롭다. 중동 국가들 같았으면 여기저기서 하루에 수십 번씩은 유혈사태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여타 선진국 또한 이러한 종교 분쟁을 오랜 세월을 거쳐서야 겨우 안정화시킨 걸 감안하면 한국의 종교 다양성은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드물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끼리도 얼마든지 친하게 지내고, 회사나 조직에서도 종교 갈등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온 가족이 서로 종교가 다른 경우도 있다! 다만 사회적으로 확실하게 물의를 끼치고 있는 종교에는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수혈 및 헌혈을 거부하고 병역마저 치르지 않으려 하는 여호와의 증인이 대표적이다.

타 종교 시설방문이나 행사참여조차도 거리낌이 없어, 종교행사라도 재미있어보이면 그냥 가고 종교적 음식이지만 맛있어 보이면 그냥 먹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템플스테이인데 원래 일반인에게 사찰을 개방하는 행사지만, 무신론자는 물론 개신교나 천주교신자들까지 와서 사찰을 체험한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비율이 변하는 편이지만 타종교 신자의 비율은 20 % 수준이며, 불교신자는 60 % 근처이다. 종교간 공동 행사도 존재하며, 아예 스님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에서 축하연설을 하거나 반대로 목사가 석가탄신일에 사찰을 찾아가는 경우까지 존재한다. 이렇듯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약한 편이지만, 한국사회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교리를 열심히 지키는 경우는 마찰이 발생한다.

물론 오늘날에도 다른 종교 간에 문제가 아주 안 일어나는 건 아니긴 하다. 예를 들어 종교가 다른 한 쌍의 부모가 종교를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선 결혼을 개인의 일이 아닌 두 가족의 결합으로 여기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이는 제사 거부, 교회 출석 강요 등 두 집안 사이의 생활 방식 충돌을 염려하는 것에 가깝다. '구원받지 못한 비신자와는 결혼할 수 없다', '교리상 반드시 같은 종교 신자와 결혼해야만 한다'와 같은, 순수하게 종교적인 까닭을 내세우는 경우는 독실한 소수의 보수 개신교도 정도밖에 없다. 바꿔 말하자면 이런 부분에 대해 합의가 되어 있다면 교리 부분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많다. 가톨릭만 봐도 교리상으로는 (관면혼을 인정하긴 해도) 가톨릭의 세례를 받은 사람끼리 결혼해 성가정을 이루는 걸 권장하지만, 정작 한국의 주요 종교 중 배우자와 종교 일치율이 가장 낮은 종교는 다름 아닌 가톨릭이다. 신자 수가 두 메이저 종교(개신교와 불교)에 비해 낮고, 냉담자인 천주교 신자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한편 역사적으로도 한반도 국가들은 다양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당장 삼국시대부터도 삼국 모두 유불도 및 토착신앙이 모두 함께 공존하였고, 고대 내내 이런 의식이 이어져 이를 대표하는 사례가 남북국시대최치원도 주장한 바 있는 '유불도의 조화'이다. 중세로 넘어가서도 마찬가지라 중세로 진입하며 기독교 문화가 토착신앙을 대체하였던 유럽과 달리[26] 고려시대의 문벌귀족들은 '현세는 유교, 내세는 불교'라는 식으로 어느 한쪽을 배척하지 않았으며, 혜심도 "유교와 불교는 서로 다르지 않다"(유불일치설)고 말했다. 그나마 종교 탄압(숭유억불, 가톨릭 박해)을 자행했던 조선 역시 주 목적은 유교 중심 질서의 확립을 추구한 것이지, 다른 종교를 아예 박멸하려 드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27]

일단 한국사에서 종교인들이 희생된 일 자체는 적지 않다. 하지만 대개는 정치 문제에 부차적으로 종교 문제가 엮어 일어난 것일 뿐, 종교 그 자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가령 서북청년회는 특정 종교(개신교)가 주축이 되어 유혈사태를 일으키긴 했으나, 이는 종교간 대립이 아니라 세속 정치이념에 종교가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가톨릭 박해 역시 주로 서인남인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에서 이뤄졌고, 황사영 백서 사건은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빼도박도 못 하는 반란이었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종교간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사건이 흔하다. 유럽만 해도 400년도 안 된 과거에 사코 디 로마, 17세기 영국 내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등 굵직한 종교 분쟁이 여럿 일어났다. 이 모든 게 다른 종교간 대립도 아니고 기독교 종파들 간의 싸움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중국에서도 삼무일종법난으로 많은 외래 종교들이 탄압받았으며, 이 때문에 불교 정도만이 당 선종 때 교세를 간신히 회복했고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경교 등은 중국에서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이러한 특징은 분명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적어도 종교를 이유로 사회가 분열하거나, 특정 종교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적 엄숙함을 강조하는 주제에 정작 교리를 깊게 탐구하거나 꼼꼼하게 지키기는커녕 제멋대로 왜곡하는 문화를 가진 나라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한국이 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과 프랑스에서 학교나 국가대표팀에 여러 인종이 고루 섞여 있는 것이 자연스럽듯, 종교가 다양하게 섞여 있는 한국에서 다양한 종교인들이 어우러져 사는 건 자연스러운 장면이라 할 수 있다.

2.3. 철저한 정교분리

대한민국 사회의 이러한 종교 양상은 한국의 정치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의 정치는 세속주의정교분리 성향이 대단히 강해, 특정 종교의 신앙을 강령으로 한 정당 소속 후보가 선거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은 사례가 없다시피 하다.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선자는커녕 제대로 된 표를 받지도 못했고,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중앙불교위원회에서 1명의 당선자를 낸 경우가 전부다. 이마저도 여러 소수정당들이 난립하고 정당정치가 자리잡기 전이였던 극초창기의 일이다. 그 밖의 선거에서도 종교가 판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지지 성향을 뚜렷하게 갈라놓은 사례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에서는 종교적 표현의 (법적인) 자유와는 별개로[28], 세속 권력에 종교 세력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종교를 막론하고 대중들이 매우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무종교인뿐만 아니라 신자들 또한 종교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계에서 조금이라도 특정 종교에 편향된 움직임이 보였다가는 곧바로 여론의 매서운 비판이 쏟아지며, 정치인이나 정당이 특정 종교의 색채를 대대적으로 표방하는 것은 걸림돌만 되지 메리트로 작용하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오죽하면 한국 정치계에서 성공하려면 '기불릭' 신자이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독교로 잘못 불리는) 개신교, 교, 가톨이 대표하는 종교계 전체를 아우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즉 특정 종교에 편향되지 않아야 정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우파 세력들의 경우 보수 우파 세력과 야합하여 미약하게나마 정계에 영향을 끼치는 사례가 있으며, 전광훈처럼 대놓고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종교인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들은 대중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해 극소수의 광신도들이나 정치극단주의자들에게만 지지를 받는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의 당선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소망교회 장로이기도 한 그는 서울시장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었는데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제6공화국 체제에서 치러진 대선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격차로 당선되었다. 그나마도 이명박의 당선은 서울특별시장으로서 보여준 훌륭한 행정 능력이나 참여정부의 실책 등 다른 요인들에 있지, 이명박 본인의 종교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게 중론.

이렇게 종교계의 정치 간섭을 꺼리는 성향은 비록 실질적인 국교가 유교여도 정치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이란은 '시아파의 구세주인 마흐디가 재림할 때까지 이란의 정치는 시아파 율법 전문가들이 맡아 대리로 통치한다'는 걸 명분 삼아 헌법에 국가원수를 시아파 지도자인 라흐바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라흐바르는 선출 과정에 국민이 개입할 수 없고 전문가 회의에서 결정하며 사실상 종신직임에도, 의원내각제나 입헌군주제의 국가원수처럼 상징적인 자리가 아닌, 입법, 행정, 사법권을 전부 가지는 군통수권자이다. 정치에 종교가 개입하는 것을 용인한다면 21세기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통치체제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4. 현세적 종교관

상술했듯 대한민국은 국민의 과반수가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매우 세속적인 국가다. 그 때문인지 종교가 있는 이들마저도 적지 않은 수가 구원이나 해탈 같은 추상적, 내세적 가치보다는 현세에서의 복을 바란다. 당장 수능철에 성당, 교회, 절만 가봐도 잘 알 수 있다. 하물며 종교 시설이 아닌 동네 산에 올라가봐도 바위나 나무 같은 자연물에 소원을 비는 애니미즘적 사고관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까지 있으며, 그중에도 유명한 곳들은 일종의 명소 취급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세주의적 종교관이 속물적이고 부패했다고 꼭 욕 먹을 만한 부분은 아니다. 현세적이라는 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종교 근본주의로 빠질 우려가 현저히 낮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종교 근본주의의 경우 자신들의 교리, 사상 등을 믿고 따르고 맹신하는 대가로 '내세', '환생', '천국' 등에서 보상받는다고 한다. 아니, 애초에 종교 자체가 믿음에 대한 보상을 현세에서 받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애초에 동아시아 한중일은 모두 외래 종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환경적 요인으로 오늘만 사는 사람들의 나라였고 내세관이 없다시피했던 문화권이다. 그러니 아무리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을 해도 현재가 시궁창이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이런 풍토가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빠른 경제재건의 정신적 토대이기도 했다 보니, 애초에 한중일에 들어온 외래종교중 대부분은 한중일의 풍토에 적응해 내세관을 접고 현세를 열심히 살라고 교리의 방향을 정한다. 중국은 2000년 전부터 나라에 망조가 들면 황건적이나 태평천국 따위의 종교적 소요 사태가 기승을 부리던 나라다. 한국이나 일본의 사이비 종교 역시 오늘조차 없는 극빈곤층이나 국가에서 버림받은 소외, 차별당하는 계층, 혹은 그들과는 정반대로 실제 능력에 비해 너무 큰 권력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선택이 뭔가 잘못되어 권력을 잃을 것 같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엘리트들이 거꾸로 사이비종교에 의지하는 극단적인 신도의 양분 성향을 보인다.

이러다 보니 한국에 도입된 대부분의 종교는 세속적이고 기복주의적인 한국인의 종교관에 큰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불교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사회에 거의 완벽히 적응해 유교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게 되었다. 가톨릭도 조상에 대한 제사 의식을 인정했고,[29] [30] 개신교조차 지나치게 기복신앙적이라고 욕먹을지언정 미국이나 아프리카 기독교 국가들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배타성, 호전성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미국의 바이블벨트, 유타 주 같은 곳에선 아직도 타종교인이나 낙태를 집도한 산부인과 의사, 동성결혼 신청을 접수한 공무원 등에 대한 비난이나 테러 등의 행위가 간혹 발생한다.

심지어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기로 유명한 이슬람교튀르키예 등지에 유학 갔다 와서 입교했거나,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 지역 무슬림/무슬리마와의 국제결혼 등의 이유로 입교한 한국인 신자들은 세속적인 편이다. 오죽하면 서울중앙성원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선제적으로 국정원에 신고한다는 소문[31]마저 있을 정도다. 비슷한 예로 한국식 할랄 푸드 도축 문제가 있는데,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라면 절대로 용납되지 못할[32] 할랄 도축 자동화를 밀어붙인 것도 한국 이슬람이었다. 원래는 가축을 도살할 때 독경사가 기도문을 낭독하고 목을 베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냥 도축장에 기도문 녹음본을 틀어놓고 기계로 가축들 모가지를 뎅겅뎅겅 날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신라 말에 크게 유행한 미륵 신앙에서도 보이듯, 한국의 종교는 전통적으로 내세보다는 현세의 행복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한자문화권 전체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여기는 아득한 옛날부터 '입신양명'이 인생의 목표이자 효도의 척도이던 곳이다. 효도의 극의가 세상에 자기 이름을 떨치는 것이라는 얘기는 조선 시대 아동용 교과서인 <사자소학>에도 나온다. 이처럼 한국인들에게 종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입신양명보다 덜 중요한 가치관이거나, 혹은 이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인들이 중동에서 종교를 이유로 테러를 저지르고 전쟁, 학살을 벌이는 이슬람교, 유대교 신자들, 내세에 집착하며 돈 버는 일 대신 명상, 고행 따위에 몰두하거나 가진 재산까지 버리기도 하는 인도의 힌두교, 자이나교 신자들을 보며 "미개하다"고 여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종교는 잘 살기 위해서 믿는 것인데, 종교를 위해서 서로 죽고 죽이거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통을 택하는 것은 본말전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3. 인터넷에서

인터넷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이유 때문인지 현실에 비해 종교적 분쟁이 많이 일어난다.[33] 주로 개신교인과 비개신교인 간의 분쟁이 대부분이다. 기독교인을 자칭한 사이비와 같은 프레임으로 묶여서 죄없는 다수 종파 기독교인들이 이에 휩쓸리는 빈도도 높다. 특히 개신교는 교황 아래 하나로 뭉쳐있는 가톨릭과 달리 각기 다양한 종파가 존재하기에 사이비를 만들기도 쉽다.[34] 다만, 교리를 이유로 소수자를 혐오하는 일부 극우 개신교 세력과 비개신교인 간의 갈등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현실과 가상 사이의 온도 차이는 아무래도 종교는 친한 사람과도 입에 담기가 껄끄러운 면이 있는데 자칫하면 싸움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과 종교에 관해 논쟁할 일도 없고, 결국 익명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서 분쟁이 많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과학이나 타종교 관련 기사나 영상의 댓글 등지에서 자신들의 교리와 성서 구절이 진리라 주장하면서 언쟁을 촉발하기도 하고, 일부 반기독교인들 또한[35] 커뮤니티에서 전혀 상관없는 반종교 자료를 도배질하면서 분탕을 치거나, 무슨 이야기만 하면 그쪽으로 말을 돌리는 등 앞뒤 안 가리고 까서 심하면 커뮤니티의 와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종교 관련 화제는 정치 떡밥과 함께 커뮤니티의 금기로 취급되고 있다.

이슬람 역시 국내 영향력이 워낙 약하기도 하고, 뉴스를 통해 극단주의 단체들의 악명이 알려지면서 인터넷에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가리지 않고 이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다만 현실에서는 애초에 국내 세력이 미미한 이슬람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은 적은 편.

사실 정치 얘기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보다 인터넷에서 정치 논쟁이 훨씬 많이 벌어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이니만큼, 본격적인 종교 간 갈등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36] 실제 DDoS 같은 전자 테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면 그래도 강도는 약한 편이다.

4. 통계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종교인구 통계가 전수집계에서 표본집계로 바뀌었다. 그러나 표본이 전체 모집단의 20%인 1,000만 명이 넘기 때문에 신뢰성은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젊은층의 경우 휴대폰 앱을 이용하여 자진 설문조사를 시행한 경우도 있어서 오히려 신뢰성이 증가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총 64개 항목 중에 딱히 종교만 표본조사만 한 것도 아니며 전수 12개, 표본 52개 항목이다. #

표본집계 항목의 결과는 2016년 12월 공개되었다.

4.1. 신자 수

신자 수
전체 국민 비율 %
조사 연도 종교없음 불교 개신교 가톨릭 원불교 유교 천도교 기타[37]
1985 57.4 19.9 16 4.6 0.2 1.2 0.1 0.5
1995 49.3 23.2 19.7 6.6 0.2 0.5 0.1 0.5
2005 46.9 22.8 18.3 10.9 0.3 0.2 0.1 0.5
2015 56.1 15.5 19.7 7.9 0.2 0.2 0.1 0.3
출처 :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1985, 1995, 2005, 2015)

4.2. 지역별 분포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대전, 광주와 호남 지역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많은 편이고, 부산과 대구 등 영남 지역과 충북, 제주에서는 불교 인구가 많다.[38]

영남 지역과 제주에 불교 인구가 많은 것은 과거의 역사적 배경과 큰 관계가 있다. 영남은 불교 국가였던 신라의 핵심 통치 지역이었다.[39] 더구나 조선 이후에는 영남권 유림의 세가 워낙 막강했던 시기였기에 개신교와 가톨릭 등 기독교의 포교가 원활하지 못했다.[40] 이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인구가 적다고 볼 수 있다. 제주는 20세기에 벌어진 신축민란4.3 사건의 영향이 크다. 가톨릭은 신축민란을 통해 제주도민의 신뢰를 잃었고 개신교는 4.3 당시 보수 기독교계와 결탁한 서북청년회가 제주지역 내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탓에 지역 내 반감이 매우 커졌다.
지역별 종교 분포 %
불교 개신교 가톨릭 종교없음
전국 15.5 19.7 7.9 56.1
서울 10.8 24.2 10.7 53.6
인천 8.8 23.1 9.5 57.9
경기 10.7 23.0 9.0 56.7
강원 16.4 17.5 6.7 58.7
대전 14.0 21.8 7.4 56.2
세종 13.8 19.9 7.9 57.8
충북 16.4 15.8 7.4 60.0
충남 13.8 20.7 6.2 58.7
광주 9.5 20.0 8.6 61.1
전북 8.6 26.9 7.5 55.0
전남 10.9 23.2 5.6 59.3
대구 23.8 12.0 7.7 55.8
경북 25.3 13.3 5.2 55.4
부산 28.5 12.1 5.4 53.1
울산 29.8 10.9 4.2 54.5
경남 29.4 10.5 4.2 55.1
제주 23.4 10.0 7.9 58.0
출처 :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2015)

4.3. 단체, 교당, 교직자 현황

조사년도 2001 2002 2008
불교 단체 96 105 103
교당 20,495 22,072 21,935
교직자 37,001 42,362 49,408
개신교 단체 167 170 125
교당 65,168 60,785 58,612
교직자 125,548 124,310 95,596
가톨릭 단체 1 1 1
교당 1,228 1,258 1,511
교직자 12,561 12,536 14,597
출처 : 문화관광부 종교현황책자(2001, 2002, 2008)

[1] 2015년 인구 센서스 기준.[2]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선종의 분파인 조동종.[3] 다만 국가신토도 기독교식 체계에 맞춰 기존 신토를 변형한 것에 가깝다.[4] 대한민국보다 교회 밀집도가 높은 나라는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정도이다.[5] 성공회의 발상지인 잉글랜드 출신과 장로회의 발상지인 스코틀랜드 출신.[6] 다만 정말 평양 및 한반도 서북 지역(평안도)이 완벽하게 개신교 일색이었는지 이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종교별 인구 분포로 보면, 해방 당시 북한 지역에서 신자 수 280만 명에 달했던 종교는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아니라 천도교였기 때문.# 기독교는 신구교를 전부 합쳐도 불교 신자보다 수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이 세 종교 모두를 합친 인구는 천도교 신자의 인구의 절반도 채 안 되었다. 결국 이북 지역은 기독교의 산지가 아닌 천도교의 세가 강했던 지역인데, 왜인지 기독교 일색의 지역으로 곡해되고 있다. 다만 1936년 신문 기사에 따르면, 비신자들도 일요일을 습관적으로 주일이라고 부르고, '일요일에는 새벽부터 예배당과 성당에서 치는 종 소리 때문에 늦잠 자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는 기사가 있는 걸 보면 다른 지역에 비하면 그나마 교회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기는 했던 듯. 심지어 김일성 자신도 장로교 집사 가문 자식이었다. # 애초에 주체사상 자체가 기독교 교리 체계에 유일신 창조주 야훼 대신 ‘위대한 영도자 수령 어버이’를 집어넣었을 뿐이라는 지적이 있을 정도. #[7]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재미 한국인들과 한국계 미국인들의 종교 역시 개신교가 압도적이다.[8] 향우회,종친회가 이렇게 발전했다.[9]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208[10] 이러니 체감하는 실제 출석교인 수는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그닥 차이가 없고, 대한민국 제1의 종교네 뭐네 수치만 갖고 떠들어 봐야 의미가 없다.[11] 물론 모든 인구가 아닌 '종교가 있는 사람' 중에서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12] 물론 기나긴 박해의 세월에 형태는 기괴하게 바뀌었을 망정 신앙만큼은 버리려 하지 않았던 이들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13] 개신교 성향 단체로 인식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소속되어 있어서일 수도 있겠다.[14] 서양에서는 이 경우 성인(saint)에 흔히 비유한다.[15] #[16] 가장 최근의 일로는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보인 보수 개신교 신자들의 정부 당국의 방역 조치에 대한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방해가 꼽힌다.[17] 숭유억불 때문에 반불교에 초점을 맞추기 쉽지만, 사실 조선왕조의 성향은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ㆍ철학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도 유교적 가치관과 충돌했기 때문에 벌인 것이다. 더욱이 진산 사건이나 황사영 백서 사건처럼 조선의 초기 가톨릭이 위험한 어그로를 많이 끌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 정부가 가톨릭 신자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인식할 당위성이 충분했다.[18] 구미권이 아닌 지역 중에 이런 지역이 꽤 있다. 아이티의 경우도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인데 원시 종교의 일종인 부두교가 혼재된 양상이 꽤 있다. 물론 가톨릭이 아니란 건 아니고, 가톨릭이 맞긴 한데 순수한 신앙은 아니란 것이다.[19]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배교, 이탈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신도 명부를 관리한다고 해서 정확한 자료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20] 80~90% 정도이므로 대다수라는 표현이 더 걸맞을 수도 있다.[21] 이원복은 한국만 유일하게 유대인 세력이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지만, 유대인 자체가 안들어가거나 못들어간 건 아니었다. 통일신라(남북국시대) 및 고려시대, 조선 초기까지 이슬람권 국가들의 상인들과 교류할 때 아랍 또는 페르시아, 위구르 등 이슬람권에 동화되거나 귀속된 옛 이슬람 제국 출신의 일부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들은 옛 한국의 무슬림들처럼 한민족에 동화되었지만. 다만 종교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했던 유대인들이라면 일부는 맞다고도 볼 수 있다(다만 그렇다고 해도 국적이 이슬람 제국이었던데다, 이슬람과는 달리 옛 한국에서는 유대인의 흔적이 남지는 않았다).[22] 동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나라가 망해가면 도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홍건적, 황건적 등.[23] 리처드 도킨스가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인용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선거에서 다른 모든 면이 마음에 들지만 무신론자인 후보에게 투표하겠다는 사람은 다른 모든 면이 마음에 들지만 무슬림인 후보에 투표하겠다는 사람보다도 적었다. 미국의 이슬람 공포증이 심하다 한들 무신론자 혐오만은 못한 것이다.[24] 기독교인들은 똑같은 이단으로 보지만 비신자들에게는 여호와의 증인보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덜 경멸받는 것도 수혈이나 병역 등을 거부하며 '감히' 국가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25] 위의 '유교' 단락에도 기술하였듯이 하늘이나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엄밀히 말해 유교가 아니라 동아시아 민속신앙이다.[26] 물론 유럽도 토착신앙의 영향이 진득하게 남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주류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27] 불교 탄압은 불교 국가였던 고려와의 단절을 해야 할 필요성이 컸던 조선 초기에 주로 시행되었으며 가톨릭 박해 역시 시발점 자체는 반역이었다.[28] 프랑스 등 일부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종교적 표현도 막는 경우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정교분리 문서 참조[29] 사실 정확히 말하면 처음 전래될 때는 제사 의식을 인정했다. 이는 토착 유교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유교에 맞춰주었기 때문이며 애초에 처음 온 선교사들은 대게 황실이나 고위층 등과 접촉한 만큼 유교식 제사의식을 봐왔기에 제사가 우상숭배라고 여기지 않은 반면 나중에 와 백성들에게 전도한 선교사들의 경우는 유교식 의식이라기보다는 기복신앙적인 면이 섞여있는 제사를 봐왔다 보니 서로 의견이 충돌하였고 교황청이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가 나중에는 전자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면 된다.[30] 다만 제사 행위만을 인정한 것이지, '조상신'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까지 인정하면 기독교의 근본 교리부터 다 무너져버리니..[31] 어디까지나 소문에 가깝다. 애초에 서울중앙성원을 비롯한 한국 이슬람 커뮤니티는 그 정도로 통제력이 강하지 못하다. 다만 이런 소문이 돌아도 딱히 이상할 건 없는데, 안 그래도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테러로 국내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시선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데 진짜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한국에 들어와 테러를 저질러버린다면 이미지가 얼마나 바닥으로 추락할지 모른다.[32] 정도는 아니고 튀르키예처럼 어느 정도 세속화된 국가에서는 융통을 발휘하기도 한다.[33] 한국에서 가장 공격받는 종교는 개신교랑 이슬람교. 반대로 시선이 좋은 종교는 불교와 천주교이다. 다만 호감도는 높지만 신자수는 정체되어 있는 상태이다.[34] 모르는 사람은 십자가만 달면 전부 같은 기독교로 오해하는게 실상이다. 초극우 사이비 정치단체로 변질된 사랑제일교회가 가장 대표적으로, 이들이 2020년 8월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을 일으켜 개신교 전체의 평판을 나락으로 실추시켰다.[35] 알다시피 반기독교에는 종교인과 무교인이 있고, 그 중에서도 종교에 부정적인 적대적 무교인과 공존을 추구하는 유화적 무교인이 있고, 그 중에서도 공격적이며(즉, 자신이 적대해도 타인에게는 강요하지 않는게 아니라 강요까지 하는) 적대적인 타 종교/무교인이 이런 떡밥을 돌린다. 개신교인 연예인의 기사나 SNS에 온갖 악플을 쏟아부으며 공격하는 집단도 대체로 이들이다.[36] 단 정치나 이념적 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폭력적으로 진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상호폭행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기도 하고[37] 증산교, 대종교, 이슬람교, 천리교 등 기타 종교[38] 다만 충북은 불교와 개신교의 차이가 많이 나지 않고,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치면 불교를 앞지른다. 게다가 저 조사도 한참 된 2015년 조사이기 때문에 현재는 개신교에게 역전당했을 수도 있다.[39] 물론 이건 어차피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진 한국계 국가는 몽땅 불교국가였고, 그래서 한반도 전체가 불교권이었기 때문에 좋은 설명이 되진 않는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불교가 한창 탄압받을 때도 영남권은 꿋꿋하게 신앙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40] 다만 영남권은 유림의 세가 강했다 해도 조선 중후기 조정의 주류가 된 서인-노론의 학파가 주류였던 건 아니었고 남인의 학파가 유지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