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과 |
유과 | 유밀과 (개성주악 · 만두과 · 매작과 · 약과 · 채소과) | 강정 | 다식 | 숙실과 (율란) | 정과 | 과편 | 엿 (조청 · 무술당 · 흑두당) | 당 (옥춘당) |
↑ 한국의 과자 |
1. 개요
사전에서 한과를 검색하면 총칭의 '한과(韓菓)'가 아닌 유밀과의 한 종류인 한과(漢菓)만 나온다. 즉, 지금으로서는 한과(韓菓)란 이름은 표준어도 아니고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표준어로서 새롭게 등재될 가능성은 있다.
대표적인 한과의 종류로는 유밀과, 다식, 정과, 과편, 숙실과, 강정이 있다. 지리적 표시제/대한민국에는 강릉 한과[1]가 등록되어 있다.
2. 유래와 역사
여기에는 인간도 포함되며, 대다수의 영장류 역시 단맛을 선호한다. 잡식성인 개,[2] 여우, 곰도 단 것을 아주 좋아하는 동물이다.[3] 개중 인류는 쌀이나 밀 같이 주식을 만드는 재료에 여러 가지 기호식품을 부재료로 이용해서 과자를 만들어 먹게 되었다. 사회학적으로도 과자를 만든다는 것은 그날그날 끼니만 해결하기에도 여념 없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은 남아도는 곡물로 간식도 만들어 먹는다는 분명한 계급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과자는 먹지 않아도 생활에 지장이 없는 사치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과자를 만들더라도 떡을 치는 것 이상으로 쌀이 많이 필요하며, 하다못해 과자에 단맛을 내는 엿과 조청, 그리고 과자를 반죽할 때 흔히 쓰는 술도 모두 쌀로 제조한다. 가령 조청 3kg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쌀 12kg으로 지은 고두밥과 보리 싹을 틔워서 숙성시킨 엿기름 1kg을 섞어 하루 온종일 숙성시키고, 이튿날을 꼬박 불을 때서 졸여야 한다. 여기에 드는 쌀값과 보리값, 연료비를 차치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일품이 드니 보통 사람들로는 엄두를 못할 지경이다.
감미료인 꿀과 설탕은 근대 이전에 굉장한 사치품이었는데 특히 사탕무가 전래되지 않았던 시기에 열대작물인 사탕수수는 한국에서 재배가 불가능하여 중국이나 류큐, 일본[4] 등을 비롯한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꿀은 자급이 가능했지만 대량생산되기 이전인지라 쌀 수가 없었고 기타 잡곡과 견과류, 과일, 기름이 들어가기 때문에 무슨 한과를 어느 자리에 내놓을 수 있고 없고를 나라 차원에서 지정하고 통제할 정도였으며 양반들도 명절, 조상 제사, 혼례 잔치 때에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는 불교가 융성하여 차 문화와 함께 차와 곁들여 먹는 다과류도 많이 제조하였지만 조선시대는 숭유억불로 인해 이러한 문화가 다소 위축되었다. 제삿상에 차를 올리던 것을 술로 대체했는데 알다시피 술은 달콤한 과자가 아니라 식사류와 주로 마신다. 그러므로 다과류가 주요 역할에서 밀려난 것. 실제로 고려시대 기록에 남은 몇몇 간식류를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이름으로나마 해당 형태를 추측해볼 뿐이다. 예를 들어 쌍화점에서의 쌍화는 흔히 알려진 만두종류 음식이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에서 넘어온 설탕을 사용한 디저트라고 추측하는 주장도 있다. 한자로 '霜花', 서리꽃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왕조시대의 임금을 비롯한 왕족들은 아침, 점심, 저녁, 새벽에 먹는 밤참으로 '다소반과'와 '다별반과'라는 다과상이 나왔기 때문에 매일 식후에 과자와 떡을 먹을 수가 있었다. 수라상의 후식으로 항상 떡과 과자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중의 육처소(六處所)에서 생과, 전과(煎果), 다식(茶食), 죽 따위의 별식(別食)을 만드는 생과방(生果房)이 있었다.
하지만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들어서 그 해 작황이 좋지 않으면 술과 함께 제일 먼저 제조금지 목록에 올랐다. 그만큼 쌀을 많이 잡아먹기도 했고, 백성들이 고통받는데 사치를 경계하는 차원에서 한과의 제조를 금하여 민심을 위로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상술했듯 조선시대 및 그 이전 시대엔 한 끼 식사량이 현대인들 기준으로 이틀치 혹은 그 이상으로 많았으며, 특히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식사량이 더욱 많았다. 이 때문에 한과는 한국 요리에서도 최고급으로 간주되어 제사나 명절 음식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의 고기와 해산물도 한과에 비하면 일상 음식으로 봐도 되었을 정도.
비록 양반들이나 일개 고을의 사또 중 부정부패를 저지른 경우도 있었고 그 때문에 그들 중에서는 고작 자기 생일상이나 술안주로 한과를 올리는 사치를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흉년 때문에 국가로부터 한과 제조 금지령이 내려져도 일단 만들어 먹은 뒤 후에 문제가 생기면 금지령에 대한 전달을 늦게 받았다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려 잘 지켜지지 않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한과는 튀기고 지지고 졸이는 3가지 요리법으로 구분한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민간인 위주로[5] 튀김과자를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상세
한과에서 사용하는 재료는 주로 가을철에 나는 것들로, 서양식 과자나 일본식 화과자에 비하면 덜 단 것이 특징이다.[6] 일본은 사탕수수 재배가 가능한 류큐[7]를 지배하에 두어 상대적으로 설탕을 구하기가 용이했지만 한국은 기후 때문에 사탕수수 재배가 불가능했던 데다가 사탕무도 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탕이 생산되지 않았고, 꿀 생산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단맛을 보충하고자 사용한 당시의 엿과 조청은 오늘날 흔히 쓰는 물엿보다 싱거웠다.근대 이전 옛날엔 길거리 음식으로 어느 정도 대중화된 엿을 제외한 나머지 한과는 먹고 싶어도 자주 먹을 수가 없었고 일부 종류는 먹기는 커녕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애초에 디저트류는 어느 나라나 그랬듯이 만드는 비법이나 요리법이 궁중과 양반가 등 귀족들 사이에서 내려오던 것이 많았기에 평민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8] 그나마 하인들은 주인을 잘 만날 경우 명절이나 제사 등 특별한 날에 주인으로부터 얻어먹을 수도 있었지만 평민들은 귀족 밑에서 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런 것도 없었다. 그나마 인심좋은 양반들이 고을 주민들한테 나눠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인심좋은 양반들도 분배대상이 자기 밑의 하인, 노비까지가 전부인 경우도 많았다. 더구나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들어가는 재료들 자체도 당시엔 고급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쌀을 소모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영조 임금 당시 귀한 쌀을 가지고 술 빚는 데 낭비한다며 금주법을 내려 엄중하게 다스렸을 정도인데 필수식량도 아닌 기호식품에 불과한 한과를 만든다고 쌀을 낭비했다간 처벌받을 수도 있을 일이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유럽, 아랍권으로 이르기까지 어느 나라나 사정이 비슷했다. 상당수 과자들이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기까지 시간도 재료도 힘도 많이 들기에 무지 비싸서 부자나 귀족이 즐겨 먹곤 했었고 동양과 서양에서 달디단 과자들을 차와 함께 즐기던 다례, 티타임 자체가 애초에 상류층에서 유래한 문화임을 생각해보자. 설탕을 생산할 수 있었던 문화권에서 조차 과거에 전통과자는 지배계층의 문화였는데 기후상 설탕을 생산할 수 없는 문화권이었던 옛 한국에서 한과는 지배계층의 문화일 수 밖에 없었다.
갑오개혁 이후로 반상 구분이 사라지고 평민들도 양반들처럼 자체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한과 소비량이 늘었지만 양과자만큼 평상시에도 먹는 과자가 아닌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올리는 특별한 과자라는 인식은 남아있었다. 중국의 경우는 대운하를 확장개통한 이후로 장강 이남으로부터 설탕을 손쉽게 나를 수 있게 되면서 이런류의 먹거리가 어느정도 퍼지기는 했다. 호떡이 대표적인 예인데 만두마냥 속을 넣어서 주식으로 먹기도 하지만 안에 시럽을 넣어 간식용으로 먹기도 하는데 이러한 간식용 호떡이 구한말에 청나라로부터 전해지면서 지금의 한국 길거리음식 호떡이 된 것이다.
4. 종류
용수당이 한과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자세한 건 해당 문서로.4.1. 유과(油果)
자세한 내용은 유과 문서 참고하십시오.4.2. 유밀과(油蜜果)
자세한 내용은 유밀과 문서 참고하십시오.4.3. 강정(羌飣)
자세한 내용은 강정 문서 참고하십시오.4.4. 다식(茶食)
자세한 내용은 다식 문서 참고하십시오.4.5. 숙실과(熟實果)
과실을 그대로 꿀이나 설탕에 졸인 것을 초(炒)라고 하고, 과육을 다지거나 으깬 것을 란(卵)이라고 한다. 찐 밤을 꿀과 함께 졸인 율란(栗卵)과 대추를 꿀이나 설탕에 졸인 다음 사탕처럼 만들어 굳힌 대추초(대추炒)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4.6. 정과(正果)
한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설탕을 사용했기 때문에 한과들 중에서도 특히나 제일 귀했다. 특히 인삼을 절인 인삼정과(人蔘正果)가 가장 귀한 한과였다. 인삼정과의 재료인 인삼은 현대의 반도체에 버금가는 조선 최대의 수출품이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의 독립군 지원세력들이나 조선 시대의 도적들이 군자금을 버는 방법 중 인삼을 판매하는 것이 있었을 정도로 값이 비쌌다. 큰 판매수익을 낼 수 있는 무역품이었기 때문에 이걸로 한과를 만든다는 건 당연히 왕족이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정과는 사실상 왕족이 아니면 구경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설령 귀한 식재료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더라도 양반 중에서도 높은 위치인 경우가 아니면 구경도 하지 못하는 귀한 한과였다. 특히 인삼정과는 왕족들도 매일 먹을 수는 없었다. 인삼 자체가 무역품 중 가장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다만 21세기에는 옛날과 반대로 설탕이 흔해지고 꿀이 비싸져서 꿀로 만들어지는 것이 더 비싸다.
4.7. 과편(果片)
은은하게 과일 향이 느껴질 뿐 크게 상큼하거나 신맛은 없다. 질감은 묵 같다. 괜히 부연 설명할 때 과일묵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네모나게 굳혀 깍둑 썰기하거나 예쁜 틀에 담아 굳히는데, (단단하지 못하고 질퍽한 경우) 가끔 질감에 따라 컵이나 깊은 접시 등에 숟가락으로 떠먹도록 담아내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조리 시 주의사항이 몇 가지 있다.
1. 간단하게 주스를 이용해도 좋지만 과즙이 훨씬 맛이 좋고 신선하다.
2. 조릴 땐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저어준다. 타면 과편에서 쓴맛이 난다. 잘 저어준 과편의 찰기가 더욱 좋아진다.
3. 녹말이 기본이나 젤라틴 또는 한천을 사용해도 괜찮다.
4. 녹두 전분 이용하면 부가적 향이 없고 더 매끄럽게 완성되며 맛도 좋다.
5. 굳힐 때 바로 냉장고에 넣으면 뚝뚝 끊기는 식감이 된다. 따라서 상온에서 굳힌 후 냉장고에 넣는 것이 좋다. 그러면 더욱 탱탱한 식감을 느낄 수 있다.
전통 한과로써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인데 직접 만들어본 사람은 꽤 된다. 네이버 검색 시 결과가 많이 뜨는 편. 조리법이 간단해서 그런 듯한데, 원하는 과일즙을 포함해 재료를 넣고 저으며 끓여 묵 같은 질감으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한국의 전통 디저트이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시판 과일주스부터 파워에이드 같은 이온음료 등 다양한 음료나 키위나 파인애플 같은 외래 과일로도 만든다.
일본의 양갱과 비슷하다. 주로 쓰는 재료가 녹말인지 한천인지 정도가 다르지만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수준. 해방 후 일본인이 남기고 간 공장을 통해 양갱이 먼저 대중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과편이 묻히게 되었다.
4.8. 엿
자세한 내용은 엿 문서 참고하십시오.4.9. 당(糖)
설탕을 여러 모양으로 고형화시킨 것. 사탕, 각설탕, 옥춘당, 팔보당, 온당, 줄병, 원당 등이 있다. 사탕, 각설탕은 해당 문서로. 옥춘당은 그래도 보통 제사상에 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나머지는 시중 슈퍼마켓이나 마트, 재래시장에서 볼 수 없고 불교용품 전문점에 가거나 불교 용품 관련 쇼핑몰에서 인터넷으로 구입할 수 있다.5. 여담
- 2023년부터 국내에서 약과를 선두로 전통한과가 유행 중이다.
[1] 강릉 내에서는 과즐이라 부른다.[2] 강아지용 사료는 고구마를 포함해서 단맛이 나게 만든 물건이라 개들이 질리지도 않고 맨날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단맛에 환장한다는 것.[3] 그러나 육식성인 고양잇과 동물들은 단 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는 고양잇과 동물들이 완전히 단맛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의 시초 가운데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데즈먼드 모리스가 이러한 내용을 그의 저서 '털 없는 원숭이'에서 언급한 바 있다. 간혹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단 음식을 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단지 주인을 따라하는 행동이거나, 그 음식 속 지방 맛을 느끼는 것이다.[4] 아마미 군도에서만 재배가 가능했다. 가고시마는 소빙기였던 당대에는 사탕수수 재배가 불가능했다. 즉 일본 역시 사쓰마 번의 류큐(오키나와) 침공 이전까지는 조선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5] 군인들은 갑과자류나 빵과자류를 더 좋아한다.[6] 물론 현대에는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달달하게 만든 한과도 존재한다.[7] 일본 본토의 최남단인 가고시마 본토 지역이나 오스미 제도는 제주도처럼 지질이 척박해 고구마(조엄이 들여온 고구마도 이쪽에서 재배된 것이다.)와 담배 정도를 제외하면 잡곡 농사도 겨우 지을 정도였다. 괜히 류큐 왕국을 침략한게 아니다.[8] 만약 평민들한테까지 널리 보급되었더라면 평민들도 이러한 디저트류를 접하기가 쉬워졌겠지만 근대 이전 평민들 상당수는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했기에 역시 육류보다 쉽게 접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에서 엿을 제외한 한과들도 유과나 강정, 유밀과 정도는 잔치 때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맛보는 게 가능한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