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9 11:19:44

장궁(후한)

운대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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臧宮
(? ~ 58)
1. 개요2. 생애

1. 개요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자소(子昭). 예주 영천군(潁川郡) 겹현(郟縣) 사람이다. 광무제의 천하통일을 도운 운대 28장 중 한명이다.

2. 생애

젊은 나이에 임관하여 현의 정장(亭長), 유요(游徼)를 역임하던 중, 왕망신나라 말기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빈객들을 거느리고 녹림군(綠林軍)의 하강병(下江兵)에 가담해 교위가 되었다. 장궁은 녹림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유수와 출전하여 전장에서 싸운 적이 여럿 있었는데, 유수의 제장들은 장궁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수 또한 과묵하면서도 근면한 장궁이 마음에 들어 친근하게 대하였다.

경시 원년(23년), 녹림군이 옹립한 유현(劉玄)이 낙양에 입성하여 연호를 경시로 개원하였다. 경시제 유현은 유수를 행대사마에 임명하고 하북으로 원정을 보냈다. 이때 장궁은 유수를 따라 하북에 이르니, 유수는 그를 편장군으로 삼았다. 장궁은 유수를 수행해 수많은 전투에 나가 용맹히 적의 진영을 무너뜨리면서 하북 평정에 군공을 세웠다.

건무 원년(25년) 6월, 유수가 하북을 평정하고 황제를 칭하자 시중에 임명되었다가 기도위로 옮겨졌다.

건무 2년(26년), 성안후(成安侯)로 책봉되었다.

건무 3년(27년) 정월, 장궁은 돌격기병대(돌기)를 이끌고 정로장군 채준과 함께 열양(涅陽), 려(酈)에서 경시제의 장수 좌방(左防)과 위안(韋顔)을 격파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 해 4월에는 정남대장군 잠팽의 휘하에 배속되어, 여구(黎丘)를 근거지로 초려왕(楚黎王)을 자칭하던 군벌 진풍(陳豊) 정벌에 따라 나섰다.

건무 5년(29년), 군대를 거느리고 강하(江夏) 지역을 순시하며 대향(代鄕), 종무(鐘武), 죽리(竹里) 4개의 현(縣)을 모두 점령하였다. 광무제는 태중대부 장명(張明)을 보내 장궁을 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건무 7년(31년), 광무제 장궁을 기사후(期思侯)로 다시 봉하였다. 장궁은 이후 출격하여 양군(梁郡)과 제음군(濟陰郡)을 공격해 전부 평정하였다.

건무 11년(35년), 광무제의 명을 받고 중로(中盧)로 나아가 낙월(駱越)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시 잠팽은 공손술의 장수 전융(田戎), 임만(任滿)과 형문(荊門)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공손술군의 방비가 대단하여 잠팽이 고전하였다. 이에 낙월의 월인(越人)들은 공손술과 내응하려 했다. 장궁은 월인을 진압하고 싶었으나 받은 병력이 너무 적어 힘으로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다. 한창 고민하던 와중에 장궁군 진영으로 인근 현(縣)에서 수레 수백 승(乘)을 바치니, 이를 본 장궁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장궁은 밤에 어둠을 이용해 톱으로 성문의 문지방을 자른 뒤, 병사들에게 각자 수레를 끌고 성 주변을 돌게 하여 새벽까지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게 했다. 월인의 척후병들은 성문의 문지방이 잘려나갈 정도로 많은 수레가 왔는데 그 소리가 새벽까지 들리는 것을 보고는 한나라에서 대군을 보낸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하였다. 월인의 우두머리는 두려워 친히 장궁의 진영을 방문해 소와 술을 바치니, 장궁은 그 소를 잡고 술을 내어 잔치를 벌이며 휘하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월인들은 이후로 반란을 꿈꾸지 않았고 낙월 지역은 크게 안정되었다.

동년 3월, 광무제가 조서로 명을 내려 장궁으로 하여금 잠팽을 돕게 하였다. 장궁을 군을 이끌고 잠팽과 형문에서 합류해 그를 도와 공손술군을 공격했다. 격전 끝에 공손술군은 전멸하여 임만이 전사하고 전융은 겨우 목숨만 구해 강주(江州)로 돌아갔다. 잠팽은 주로장군 유륭을 남군태수로 천거하여 형주를 지키게 하고, 장궁과 효기장군 유흠(劉歆) 등을 거느려서 전융을 추격해 익주로 들어갔다. 장궁은 잠팽을 따라 수작산(垂鵲山)을 넘어서 자귀(秭歸)로 나오는 험난한 행군길을 걸은 끝에 강주(江州)에 이르렀다. 하지만 강주성은 무척 견고한데다 성 내에는 식량도 풍족했다. 척후로부터 이를 보고받은 잠팽은 장수 풍준을 남겨 강주의 동향을 살피게 하고, 장궁에게 투항병 5만 명을 주어 부수(涪水)를 통해 평곡(平曲)으로 가게 했다. 그리고 잠팽 본인은 주력을 거느리고 파군(巴郡)을 정벌하러 떠났다.

공손술의 장수 연잠(延岑)은 원수(沅水) 너머로 군대를 집중시켜 평곡에 주둔해있는 장궁을 압박해왔다. 장궁의 병력 자체는 많았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소비되는 식량이 너무 많았고 평곡의 군현(郡縣)들도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심지어 장궁 부대는 항복했던 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보니 전세가 불리한 것을 눈치챈 병사들이 탈영할 마음을 대놓고 드러냈다. 그렇다고 후퇴하면 평곡이 다시 공손술에게 넘어가는 것은 둘째치고 연잠이 곧바로 뒤를 노릴 것이 뻔했기에 발이 묶여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광무제는 이런 장궁의 사정을 알고 말 700 필을 하사하며 잠팽과 합류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말을 본 잠팽은 또다른 계책을 생각해냈다. 그는 밤과 새벽을 틈타 진군한 뒤, 병력 일부를 보내 깃발을 높이 세우고 북을 크게 울리면서 인근 산을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우측에는 보병, 좌측에는 기병을 배치시키고 자신은 배에 올라 군대를 지휘하며 연잠군을 쳤다. 북소리와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우니, 연잠은 얼른 산에 올라가 한나라군이 오는 것을 보고는 공포에 질렸다. 장궁의 보병과 기병들은 혼란의 빠진 연잠군을 좌우로 밀어붙이니, 연잠의 병사들은 원수를 건너서 도망치기 위해 강가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목이 베이거나 익사한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고 강물은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연잠은 전장을 빠져나와 성도(成都)로 도망하였고, 사로잡힌 그의 병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장궁은 연잠이 진영에 남기고 간 보물과 군마를 노획했다.

연잠군을 무찌른 장궁은 승세를 타고 북진하니, 공손술군 10여 만이 항복해왔다. 장궁의 부대가 광한군(廣漢郡)에 이르러 평양향(平陽鄉)으로 진격하자 공손술의 장수 왕원(王元)이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했다. 장궁은 다시 나아가 면죽(緜竹), 부성(涪城), 번(繁), 비(郫)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공손술의 동생 공손회(公孫恢)를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장궁군이 그동안 빼앗은 공손술 세력의 부절(符節)이 5개에 장군의 인수(印綬)는 1,800개였다. 익주 북부를 평정한 장궁은 남하하여 성도성 북쪽에서 대사마 오한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공손술은 마지막 발악으로 친히 군대를 발동시켜 자신은 소락곽문(小雒郭門)으로 나가 오한을 상대하고, 연잠은 함문(咸門)으로 나가 장궁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최후의 발악답게 3번에 걸쳐 한나라군을 상대로 승리하였으나, 그 뿐이었고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여기에 더해 굶주렸던 공손술군이 금방 힘이 빠지니, 오한과 장궁은 이를 기회삼아 맹공을 퍼부었다. 갑작스런 역전에 공손술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공손술 본인은 창에 찔려 황급히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장궁과 싸우던 연잠도 공손술을 따라 성 내로 퇴각했다. 그 날 밤, 공손술은 연잠에게 세력을 넘겨주고 사망하였다. 연잠이 다음 날 아침에 성을 들어 항복하면서 공손술 세력이 마침내 멸망했다.

건무 13년(37년), 장궁이 오한과 함께 개선하여 수도로 귀환했다. 광무제는 장궁을 포함한 모든 공신들의 식읍을 늘려주고 장궁을 찬후(酇侯)로 개봉하였다.

건무 15년(39년), 광무제가 그를 불러 열후로서 봉조청(奉朝請)에 삼고 낭릉후(郞陵侯)로 전봉시켰다.

건무 18년(42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옮겨졌다.

건무 19년(43년), 요사스런 무당 유사(維汜)의 제자 단신(單臣)과 전진(傅鎭)이 요사스러운 소문을 지어내 무리를 형성하고, 원무성(原武城)에 들어가 관리들을 쫓아낸 뒤 장군이라 자칭했다. 장궁은 북군(北軍)과 여양영(黎陽營)의 병사 수천을 거느리고 가서 원무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원무성에는 비축되어 있는 양식이 많아 함락시키기란 매우 힘들었고 아군의 병사들만 죽거나 다쳤다. 광무제는 장궁이 이기지 못할까 염려하여 신하와 제후들을 불러모아 계책을 물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상을 후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동해왕(東海王) 유양(劉陽)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광무제에게 다른 이들을 물려달라 청하고는 말했다.
"비록 요사스런 무당이 우리 군사를 위협하고 있으나, 저들의 기세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며 무리들 중 후회하면서 도망치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단지, 장궁의 포위망이 너무 견고해서 차마 도망을 못 가고 있을 뿐입니다. 포위망을 조금 느슨하게 하여 마땅히 그들이 도망갈 수 있게 한다면 정장(亭長) 한 명만으로도 그들을 멸하기에 족합니다."
광무제는 유양의 진언을 받아들여 장궁에게 포위망을 느슨히 하라 지시했다. 장궁이 이에 따르니, 과연 적의 무리가 흩어져 달아났고 단신과 전진을 사로잡아 참수할 수 있었다. 장궁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광무제는 그를 성문교위로 삼았다가 좌중랑장에 임명하였다. 이후 장궁은 무계적(武谿賊)을 공격해 강릉(江陵)에서 이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건무 24년(48년), 흉노에게 갑작스러운 기근과 전염병이 덮쳐 마침내 서로 분열하였다. 광무제가 장궁을 불러 이들을 어찌 하면 좋으냐 물으니 장궁이 대답하였다.
"5천 기(騎)를 얻어 공을 세우길 원합니다."
광무제가 웃으며 말했다.
"항상 전투에서 승리하는 전략가라도 적의 의중을 알기 어려우니 짐이 더 생각해보겠다."
하지만 광무제는 흉노 혜락시축제 선우의 투항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실상 흉노와 화친하였다.

건무 27년(51년), 마무와 함께 광무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흉노는 이익을 탐하며 예절과 신의가 없어, 자신들이 궁지에 몰리면 머리를 숙이고 안정을 찾으면 침노해오니, 변방은 그 독통(毒痛)에 매번 시달렸고, 중국(中國) 또한 그로 인해 우려했던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 흉노는 사람과 가축이 병들어 죽고 가뭄과 메뚜기 떼의 피해로 땅이 불모지가 되었으니, 저들의 힘으로는 중국의 한 군(郡)도 마땅히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만리(萬里)의 사명(死命)은 전부 폐하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복은 다시 오지 않으며 때는 잃기 쉬운 법일진대, 폐하께서는 정녕 문덕(文德)만 고수하시고 무사(武事)를 등한시 하시렵니까? 장수들을 변방의 요새에 배치시켜 상을 후히 내리는 한편, 고구려, 오환, 선비에게도 알려 흉노의 좌익을 치게 하시고, 하서(河西)의 4군과 천수(天水), 농서(隴西), 강호(羌胡)에서 병력을 일으켜 흉노의 우익을 공격하도록 하시옵소서. 이리하면 불과 수 년 안에 북로(北虜)는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폐하께서 인은(仁恩)을 참지 못하시고 또, 모신(謀臣)들을 의심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해 만세(萬世)에 걸쳐 새길 공(功)을 폐하의 대에 세우지 못하게 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광무제가 조서를 내려 장궁의 상소에 회답하였다.
《황석공기(黃石公記)》에서 이르길,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제압할 수 있고, 약한 것은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柔能制剛 弱能制彊)"고 하였소. 부드러운 것은 덕(德)이요, 굳센 것은 적(賊)이며, 약한 것은 인(仁)으로써 돕는 것이요, 굳센 것은 원망의 굴레를 뜻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예로부터 이르기를, "덕이 있는 임금은 즐거운 것으로 백성을 즐겁게 해주고, 덕이 없는 임금은 즐거운 것으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한다"고 하였소. 백성을 즐겁게 해주면 그 즐거움 오래될 것이나, 군주가 스스로만 즐긴다면 오래지 않아 망하게 될 것이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도모하는 자는 수고를 하여도 득이 없을 것이며, 먼 것을 버리고 가까운 것을 도모하는 자는 편안히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네. 편안한 정치에는 충신이 많고, 힘든 정치에는 난인(亂人)이 많은 법이오. 그래서 옛말에 이르기를, 땅을 넓히는 데 힘쓰는 자는 황량해질 것이고, 덕을 넓히는 데 힘쓰는 자는 강성해질 될 것이라 하였소. 자신이 가질 것만 가져가는 자는 편안하나, 남이 가진 것을 탐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게 될 것이오. 잔멸(殘滅)한 정치는 비록 일을 성사시킨다 하여도 언젠가 반드시 패하게 되기 마련이오. 지금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고 재변(災變)이 끊이질 않아,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저마다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어렵거늘, 어찌 다시 원정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공자께서 가라사대, "나는 계손씨의 근심이 전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병풍 안에 있는 것 같구나(吾恐季孫之憂, 不在顓臾)."라 하였소. 그러니 북적(北狄)이 강성하다면 둔전을 하면서 경비할 것이고 또, 그대의 상소문 중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었소. 만약 천하의 반만 들어서라도 큰 도적을 멸할 수만 있다면 내 어찌 이를 원하지 않겠는가. 진실로 그럴 수가 없으니 지금은 백성들을 쉬게 하는 것만 못하오.
이후로 장궁을 포함한 후한의 장수들은 광무제의 뜻을 이해하여 군대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영평 원년(58년), 장궁이 사망하였다. 시호는 민(愍). 아들 장신(臧信)이 그 작위를 이었고, 그렇게 대가 순조롭게 이어지는 듯 했으나 증손자 장송(臧松)이 어머니와 별거하는 바람에 불효죄로 고발당했다. 당시 황제였던 안제는 장송의 작위와 식읍을 몰수하고 봉국을 없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