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5 14:32:35

충집

种輯
? ~ 200년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관직은 《정사 삼국지》에서는 장수교위, 《후한서》에는 월기교위로 나와있다.

2. 정사 삼국지

헌제의 어가가 이각, 곽사로부터 탈출해 양정, 양봉, 동승의 호위를 받을 때 단외가 의복과 탈것(服御)을 갖추고 또한 공경이하에겐 재물을 마련하여, 황제가 자신의 영(營)에 오기를 청하였다.[1] 단외는 승여를 맞이하여, 감히 말에서 내리지 못하고는 말 위에서 읍(揖)하였다. 양정과 단외는 틈이 있었는데 시중 충집(种輯)은 본디 양정과 더불어 친했기에, 이에 말하길 “단외가 배반하려는 듯 합니다” 하였고, 헌제가 말하길 “단외 수하들이 맞이하려 왔는데, 어찌 배반한다는 말이오?” 하자 대답하길 “맞이하는 것은 경계에 이르질 않고, 절하는 것은 말에서 내리지 않으며, 그의 기색이 변했으니, 반드시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옵니다.”라 하자, 태위 양표 등이 말하길 “단외는 배반할 리 없음을 신臣등이 감히 죽음으로 보증하겠나이다. 거가가 그의 영으로 행하심이 옳다 여깁니다.”라 하였고, 동승, 양봉은 말하길 “곽사가 지금 또 장수 칠백기(騎)로 와서 단외의 영에 들어갔사옵니다.”라 하여 천자는 믿었고, 드디어 길의 남쪽에서 노숙(露次)하였으니, 양봉, 동승, 양정 등의 공이다. 단외는 오히려 어선(御膳, 임금에게 공급하는 음식)을 공물로 보내고, 백관들에게도 넉넉하게 음식을 공급하니, 끝내 다른 뜻이 없었다.[2]

이후 어가를 호송하는데 세운 공으로 동승, 복완, 종요, 유애 등 10여 명과 함께 열후에 봉해졌다.[3] 동승왕자복이 조조를 죽이는 것을 논의하면서 동승이 믿을 만한 자로 의랑 오석과 함께 추천했으며[4], 장군 오자란과 좌장군 유비 등도 끌어들이게 되면서 이들과 조조를 죽이는 것에 공모했지만 실행하기 전에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유비가 출병하게 되어 실행하지 못하다가 후에 일이 발각되면서 처형되었다.

(후한서 동탁전)[5] 허현을 도읍으로 삼은 뒤부터 권력은 조씨에게 돌아가, 천자를 거느리고 다스리니, 백관은 인원수만 갖출 뿐이었다. 황제조조가 단독적으로 핍박함에 미워하여, 이에 동승에게 은밀히 조서를 내려 천하의 의사(義士)들과 함께 조조를 벌하는 것을 결성하도록 하였다. 동승이 마침내 유비와 더불어 모의를 같이하였는데 미처 펴지 못한 상태에서 유비가 출정하니, 동승이 계획을 바꿔 비장군 왕복(王服), 장수교위(長水校尉) 충집(种輯), 의랑 오석(吳碩)과 더불어 일을 꾀하였다. 일이 새어나가 동승, 왕복, 충집, 오석 모두를 조조가 처벌하였다.

3. 삼국지연의

동승왕자복을 병풍 뒤에 숨겨두면서 동승은 충집을 오석과 함께 자신의 집에 오도록 불렀는데, 허전에서 사냥하던 일을 두고 한을 품었다거나 오석이 조조를 죽여야 한다는 얘기를 하자 나라를 위해 해를 제거하다가 죽으면 무슨 원이 있겠냐고 얘기했다.

그런데 왕자복이 속을 떠보기 위해 병풍에서 나와 너희 둘이 조 승상(조조)를 죽이려 한다면서 자신이 고발하겠다고 하자 분노하면서 충신은 겁을 내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죽어도 한의 귀신이 될 것이라 나라의 역적에게 빌붙은 너보다 낫다고 말했다. 결국 동승이 조서를 꺼내 보여주자 조조 암살 계획에 가담했는데, 발각되어 조조에게 붙잡히면서 동승과 무슨 일을 의논했냐고 추궁하자 아무 일도 없다고 잡아뗐지만 동승의 집을 수색해 조서를 찾아내자 죽임을 당했다.

4. 미디어 믹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자신들을 밀고하겠다는 왕자복을 당당히 마주한다.

창천항로에서는 오자란과 함께 동승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왕자복이 조조의 부하에게 붙잡힌 것을 보고한다.

소설 비열한 성자 조조에서는 한섬이 동승을 급습했고 동승이 야왕현으로 도망가서 장양, 양봉, 거비 등과 연합 전선을 펼쳐 한섬과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보고하는 것으로 나온다.

소설 삼국지 마휴전에서는 마휴동탁 시후 장안을 장악할 때 감옥에 갇혀있던 대신들 중 한 명으로 공달(순유)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면서 마휴에게 감사를 표한다.


[1] 단외, 양정, 동승은 모두 동탁의 부하였다.[2] 후한서 동탁전, 주석 원굉 한기(漢紀).[3] 원굉의 한기에 기록된 호송에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진 명단은 위장군 동승, 보국장군 복완, 시중 정충 丁沖, 충집 种輯, 상서복야 종요 鍾繇, 상서 정부 郭溥, 어사중승 동분 董芬, 팽성상 유애 劉艾, 빙익馮翊 (태수) 한빈 韓斌, 동군태수 양중 楊衆, 의랑 나소 羅邵, 복덕 伏德, 조유 趙蕤 다. 이각에 잡혀 죽은 사성교위 저준 沮儁은 추증하여 홍농태수로 삼았고 의랑 議郎 후기 侯祈, 상서 尚書 풍석 馮碩, 시중 侍中 대숭 臺崇을 꾸짖어 벌을 내렸다.[4] 정사 촉서 선주전에 주석으로 실린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서 동승이 왕자복과 의논하면서 충집과 오석을 자신의 복심(腹心=심복)으로 표현했다.[5] 후한서 동탁전에는 동탁 사후에도 그 부하인 이각, 곽사, 동승 등의 어가쟁탈전부터 최후까지 기록되어 있고 마등, 종건(송건)도 간략하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