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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교치


1. 개요 2. 낙랑군의 이동
2.1. 초기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2.2. 모용선비 ~ 북연 시기(313년 ~ 436년)2.3. 북위 - 동위 시기(436년 ~ 550년)
3. 기타

1. 개요

313년 낙랑군미천왕에게 축출된 뒤, 낙랑군 유민이 요서지역으로 이동한 사건이다. 이때 유민들이 이동한 지역을 다시 낙랑군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러한 것을 교치[1]라고 한다. 치소가 여러 차례 이동된 현도군에 비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

이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할 때부터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낙랑군 요서설[2][3]과는 구분해서 봐야한다.

2. 낙랑군의 이동

2.1. 초기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韓(한)은 帶方(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마한), 둘째는 辰韓(진한), 세째는 弁韓(변한)인데, 辰韓은 옛 辰國(진국)이다.
《삼국지》<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韓)조
보통 이것을 인용하는데 여기서 바다라고 말한것이 현재 우리가 말하는 '바다'일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사서에서 막연히 바다海라고 말할때 그것은 큰 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이 문장을 해석할때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짜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고 했는데 말이 되는가? 접했다는 의미는 붙어있다는 뜻이다.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주류사학계는 지형, 지도와 고대사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도 없이 이병도이래의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준 교과서에 모든것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部從事 吳林은 樂浪이 본래 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辰韓 八國을 분할하여 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臣智과 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帶方]太守 弓遵과 樂浪太守 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遵은 전사하였으나 二郡은 마침내 韓을 滅하였다.
《삼국지》<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韓)조 중
남에나라 기록을 읽을때, 기본적으로 갖춰야하는 소양이 있다.
그 기록을 하는 사람들의 속성이 어떤것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춘추시대 공자의 기록을 읽어보면 땅(영토)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땅을 빼앗긴 후에도 현재 자신들의 영역속에 교치를 해서 나중에 보면,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던것 처럼 기록에 남게된다. 그것이 교치의 진정한 의미다. 4~6세기 초반까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북위서의 지형지를 보면 요동군, 낙랑, 요서군 등이
엉뚱한 곳에 교치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있다.

2.2. 모용선비 ~ 북연 시기(313년 ~ 436년)

十四年, 冬十月, 侵樂悢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4년(313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구를 포로로 잡았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5년 봄 정월,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대방군을 침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中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건흥(建興) 원년(313) 4월 요동 사람 장통(張統)은 낙랑(樂浪)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해를 이어 서로 공격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인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서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서 모용외(慕容)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자치통감 권 88 ‘진기’(晋紀)10

313년, 고구려 미천왕은 낙랑군을 침공해 함락시킨 데 이어 이듬해인 314년 대방군까지 공격하게 된다. 당시 낙랑군과 대방군을 지배하고 있던 인물은 장통이라는 인물이었는데, 낙랑인 왕준의 설득으로 모용외에게 투항하면서 낙랑태수로 임명되었다.

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한 후 낙랑군 유민들은 모용외가 다스리는 영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모용외는 이 유민들을 위하여 요서에 낙랑군을 이전시켰다.[4] 이를 교치(僑置)라고 한다. 이 요서의 낙랑군은 이름만 있는 낙랑군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가 존재하는 실재하는 낙랑군이었다.

장통을 시작으로 모용외 시기부터 후연 시기까지 4세기 ~ 5세기에 걸쳐 배외(裴嶷), 국팽(鞠彭), 유선(游鱓)이 낙랑태수로 임명되었다. 또한 조선현(朝鮮縣)의 현령 손영(孫泳)[5]이 확인되는 점으로 볼 때, 명목상 군현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행정적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6]

2.3. 북위 - 동위 시기(436년 ~ 550년)

연화(延和) 원년(432)...9월(九月) 을묘일(乙卯), 가마가 돌아왔다. 영구(營丘), 성주(成周),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현도(玄菟) 6군의 백성 3만가를 유주로 이주시켰다.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延和元年...九月乙卯, 車駕西還. 徙營丘·成周·遼東·樂浪·帶方·玄菟六郡民三萬家于幽州, 開倉以賑之.
-위서(魏書) 권4(卷四) 상(上) 세조기(世祖紀)
북평군(北平郡)은 2개의 현을 거느린다...조선현(朝鮮)은 전후한(二漢)·진나라(晉) 대 낙랑(樂浪)에 속했다가, 후에 없어졌다. 연화(延和) 원년(432년) 조선민(朝鮮民)을 비여에 이사시켜 다시 설치했다.
北平郡...朝鮮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 復置, 屬焉.
-위서 권106 상(上) 지(志) 제5(第五) 지형(地形) 지(志) 상(上) 中
낙량군은 전한의 무제 때 설치했으며 전한, 후한과 진나라 대에는 낙랑으로 불렸으나 후에 바뀌었다 폐지되었다. 정광(520년 ~ 525년) 말에 되돌렸는데 연성(連城)을 치소로 삼고 2개의 현을 거느린다. 호(戶)는 219, 구(口)는 1800이다. 영낙(永洛)[7] 대방(帶方)[8]
樂良郡 前漢武帝置 二漢、晉曰樂浪 後改 罷。正光末復, 治連城 領縣二, 戶二百一十九, 口一千八. 永洛 <正光末置。有鳥山> 帶方 <二漢屬 晉屬帶方 後罷。正光末復屬。>
-위서 권106 地形志 營州.

432년에는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옮겨버렸다. 이때쯤 모용선비가 설치했던 새로운 낙랑군은 쇠락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20년 대 중반[9] 다시 북위에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없어졌고 537년에 또다시 요서의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됐다.

북위 시기 확인되는 낙랑태수들로는 왕장(王萇)[10], 조외(趙隗)[11]가 있다. 그 외에도 낙랑중정(樂浪中正)[12]을 지낸 왕온(王溫)이 있다.[13]

3. 기타

어쨌든 몇차례의 변화는 있었지만 313년 이후의 새로운 낙랑군은 요서에 있던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가 세운 기존의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요서 낙랑군에 대한 기록들을 기존의 낙랑군에 대한 기록인 듯이 왜곡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하기도 한다.
유사 역사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식민사관을 기반으로한 주류사학계인데,
어쩐일인지 주류사학계는 일본의 역사소설인 [일본서기]를 철썩같이 신뢰한다.
자기들의 의견에 반대되면 유사역사학이라는 요상한 단어를 사용해서 비난을 하는데
지도와 역사책의 상호비교, 그리고 상식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편향된 태도를 고수한다.


현재 평양에서 낙랑군의 흔적은 락랑구역에 남아있다. 낙랑에서 이름을 따온 지명인데, 낙랑군 관련 유적이 많이 발굴되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다만 현재의 평양 중심부에서는 다소 떨어져 위치해있고, 또 바로 다음시대인 고구려의 안학궁 유적이 있는 대성구역은 정반대로 평양 동북쪽에 위치해있어 같은 평양이어도 두 유적지는 거리가 멀다.[14]
북한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에 근거를 부여하려고 억지로 만들어낸 용어들을 근거로 1500년 이전의 역사를 짜맞추려는 반도사관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해석중 하나다.
그러나 설령 낙랑이 평양지역에 있었더라도 그것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다. 군과 국돠 구별하지 않으려는 주류식민사학자들의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한편 진서 지리편에 기록된 낙랑군, 대방군의 인구가 각각 6현 3700호[15]와 7현 4900호[* 帶方郡 公孫度置. 統縣七, 戶四千九百. 帶方列口南新長岑提奚含資海冥.
진서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고구려를 침략했던 이세민의 지시로 쓰여진 책이라는 점이다.
정보가 공개된 현재도 어이없는 역사조작을 하는 일본과 중국이
폐쇄적인 사회였던 1500년전에 제대로 썻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다.
이덕일은 313년 이후 낙랑군이 교치됐다는 설이 일제강점기 때 식민사학자가 처음 주장했으므로 이것은 식민사관적 학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낙랑군이 교치됐다는 것은 조선시대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나온 주장이다. 일제 식민사학자가 처음 제기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누가 먼저 제기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고, 방향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실학자라는 사람들역시 중화사관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역사관을 갖지 못했고 그 인식은 지명의위치를 비정할때 치명적인 독소가 되었다.

[1] 僑置. 육조시대에 다른 나라에 빼앗긴 땅 이름을 자국 수중에 있는 땅에다 옮겨 놓음으로써 그 땅이 빼앗기지 않은 것처럼 가장했던 것을 의미한다. (출처: 고려대 중한사전)[2] 윤내현, 이덕일이 이 설을 주장한다.[3] 낙랑군 멸망 및 교치 이후의 기록을 두고 낙랑군은 원래부터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영국의 York와 미국의 New York을 혼동하는 수준의 주장이다.[4] 313년 당시 모용선비가 지배하고 있던 영역은 요서 일대였다. 당시 요동지역은 서진의 잔여세력인 평주자사 최비가 남아있던 상황.[5] 朝鮮令昌黎孫泳帥衆拒趙. 大姓王淸等密謀應趙, 泳收斬之, 同謀數百人惶怖請罪, 泳皆釋之, 與同拒守.樂浪太守鞠彭以境內皆叛, 選鄕里壯士二百餘人共還棘城( 자치통감 권96 晉紀18 顯宗成皇帝咸康 4年[6] 출처: 요서지역으로 옮겨간 낙랑군의 추이(2019), 백산학회, 공석구, p308-310[7] 정광 말년에 설치했다. 오산에 있다.[8] 전후한(二漢)에 속했다가 진나라 대에는 대방에 속했다 후에 폐지되었다. 정괄 말에 다시 속하게 했다.[9] 북위 연호인 정광(520년 ~ 525년) 후기라고 한다.[10] 6세기 전반 조성된 왕온묘지명(王溫墓志銘)에서 확인된다.[11] 수나라의 장군 조재의 조부이다. 아마 북위 말기인 6세기 전반에 역임했을 가능성이 크다.[12] 원문은 연국낙랑중정(燕國樂浪中正)이다.[13] 출처: 요서지역으로 옮겨간 낙랑군의 추이(2019), 백산학보, 공석구, p313-316[14] 낙랑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낙랑토성은 대동강 이남에 위치하며, 안학궁과 대성산성, 평양성 유적은 대동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다.[15]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屯有渾彌遂城 秦築長城之所起.鏤方駟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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