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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하생경
미륵대성불경
1. 소개
불교에서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줄임말로 '내세에 성불하여 사바세계에 나타나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보살'이다.인도 파라나국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붓다가 될 수기(受記)를 받은 후 도솔천에 올라갔다고 한다.
미륵은 '사보살(四菩薩)'의 하나인데 사보살은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화경에 나오는 네 보살로 '상행보살(上行菩薩)', '무변행보살(無邊行菩薩)', '정행보살(正行菩薩)', '안립행보살(安立行菩薩)'이고 다른 하나는 태장계 만다라에서 대일여래를 둘러싼 네 보살로 '보현보살(普賢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이다. 미륵은 후자의 사보살로 대일여래를 둘러싼 네 보살 중 미륵보살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이후 56억 7천만 년이 되었을 때[2] 후에 부처가 될 것이라 수기(예언)를 받은 보살들이 거주하는 도솔천에서 이 세상으로 하생(下生)한다고 한다. 미륵은 하생하기 전까지 도솔천(兜率天)의 보살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3] 이 때문에 미륵을 보살이라고도 하고 부처라 부르기도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좀 복잡한데, 미륵삼부경 중 미륵하생경과 미륵대성불경에서는 미륵이 수기를 받고 도솔천에 있다는 미륵불설을, 미륵상생경에서는 석가의 제자 미륵이 미래불이라는 미륵보살설을 따른다.[4] 근데 석가모니를 더 높이는 현 불교계에서는 관습이란 이름으로 그냥 미륵불/미륵보살을 혼용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한 뒤 이루어진 제1차 경전 결집에서 경의 암송을 맡은 아난다에게 당시 장로들이 제기한 아난다의 다섯 가지 잘못 가운데 하나가 "석가모니 부처께 1겁(劫)[5] 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것"이었다. 열반경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는 입멸을 앞두고 "사신족을 닦은 자는 1겁 동안 세상에 머물 수 있다." 하고 아난다에게 넌지시 말한 적이 있는데,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럼 1겁 동안 세상에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아난다가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항변하면서 든 것이 석가모니 부처가 미륵 부처의 존재를 수기(授記)[6]하였다는 것이었다. 석가모니 부처께 1겁 동안 머물러주시라 원하지 않은 것은 그때 마라 파피야스 때문에 마음이 가려져서였기도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께서 생전에 누누히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無常)한 것이니 무언가에 매달리거나 그에 구애받아서도 안 된다"이라고 강조한 것과, 석가모니 부처 자신의 뒤를 이어 미륵 부처가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교화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석가모니 부처께 떠나지 말고 영원히 머물러 달라고 하면 석가모니 부처께서 말한 제행무상의 가르침은 어떻게 되고, 석가모니 부처 이후로 오게 될 미륵불에 대한 예언은 또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륵불이 하생하는 장소는 용화수(龍華樹) 아래라고 한다. 이에 따라, 미륵 부처를 모신 법당을 특별히 용화전(龍華殿) 또는 미륵전(彌勒殿)이라고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보통 불상들과 달리, 미래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반가상이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설법하러 갈 때 움직이기 쉽도록 서 있는 입상이나 걸터앉은 모습의 좌상을 주로 취하고 있다. 여담으로 미륵은 입상으로 표현될 경우 협시보살들에 비해 키가 크게 표현된다.
<미륵하생경변상도>에 그려진 미륵의 모습. 일반적인 불화의 부처의 모습과는 확연히 자세가 차이가 있다.
미륵이 나타나면 이 세상에 그 가르침을 펼쳐 모조리 깨우침의 경지에 들게 해 버린다 하며[7],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미륵은 미래에 나타날 구원자인 셈이다. 이러한 먼치킨적인 스펙 때문에 흔히 석가보다 뛰어난 듯 묘사된다. 때문에 불교가 전파된 나라들, 특히 한국에서는 미륵 신앙이 발달하였으며 심지어 창조주와 동일시되기도 한다.[8]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미륵은 세상이 망할 때가 되어서야 등장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오히려 세상이 혼란할 때 나타난다고 생각되었으며,[9] 이 때문에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이들이 미륵을 사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이며 지금도 삶이 어렵고 불안한 사람들을 상대로 미륵에게 조상을 천도해야 운이 풀린다며 설득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 역사
불교 경전 중 성립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경전 모음집인 숫타니파타에서는 멧떼이야(Metteyya)라는 이름의 학인이 등장해서 붓다에게 질문하는 묘사가 나온다. 멧떼이야는 친구인 띳사(Tissa)와 함께 기원정사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승단에 들어갔는데, 띳사는 사위성에서 붓다와 함께하며 수행했지만 멧떼이야는 숲 속으로 들어가 피부에 대한 다섯 가지 명상 수행을 한 끝에 아라한이 되었다.[10] 그러다 띳사는 속가의 형이 세상을 떠나자 환속했는데, 멧떼이야는 이러한 띳사를 다시 붓다에게 데려와서 그가 가르침을 들을 수 있도록 한다.[11] 어떻게 보면 그는 친구에게 구원자 역할을 한 셈인데, 이 멧떼이야의 이야기가 미륵 신앙의 모티프 중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그밖에도 아지따(Ajita)라는 학인 역시 숫타니파타에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바바리라는 이름의 브라민의 제자였으나 바바리를 대신하여 붓다에게 처음으로 질문하고 감화되어 불제자가 되었다. 질문 순서가 맨 첫째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지따는 바바리의 수제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멧떼이야와 아지따는 일부 불교 수행 공동체[12]에서 동일인물처럼 전승되어, 미륵보살 신앙의 성립에 영감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 전통에서는 현세불로부터 수기를 받은 보살 한 명만이 미래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석가모니로부터 수기를 받은 보살도 존재해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분별설부의 기록을 뿌리로 하는 팔리 삼장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미래불에 대한 전승을 발달시킨 부파에서는 붓다에게 질문을 던졌던 여러 브라민 학인들 중 누군가가 수기를 받았을 것으로 보고, 따라서 경전에 이름이 언급된 주요 브라민 제자들 중 일부를 그 대상자로 지목했으리라는 것이 학자들의 추측이다.
미륵을 표현한 조각상은 기원후 1세기 간다라 지방의 그리스풍 불상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미륵 신앙은 아미타불 신앙의 형성 시기인 기원후 3세기경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역시 간다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성립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극초기의 대승경전 중 하나인 《도간경(Salistamba Sutra)》에서부터 미륵보살이 주요 인물로 등장해서 가르침을 펴는 것으로 묘사된다. 대승의 영향을 이미 많이 받은 상태에서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증일아함경》에서도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의 존재가 묘사된다. 설일체유부의 송본을 모태로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중아함경》 중 '설본경'에서는 석가모니불이 미륵에게 수기를 주는 내용이 나온다.[13]
상좌부의 경전 중 《디가 니까야》의 '전륜왕경'에서는 설본경과 매우 비슷한 서술이 끝부분에 나오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멧떼이야는 단순히 먼 미래에 나타나서 비구들에게 둘러싸여, 붓다의 여러 특징들을 갖추고 법을 설하게 될 존자의 이름으로 묘사될 뿐이다.[14] '설본경'은 '전륜왕경'의 이러한 서술에 살이 붙은 전승이거나, 오히려 '전륜왕경' 쪽이 모종의 이유로 미래불을 굳이 내세우지 않게 된 전승일 가능성이 있다. 일부 상좌부 불교권 국가에서도 미래불 멧떼이야 붓다의 존재에 대해서 믿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다만 멧떼이야 붓다를 기다리거나 신앙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매우 먼 미래에 붓다가 될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3. 한국에서의 미륵 신앙
고구려에서는 이를 반영해서인지 미륵 신앙이 아미타 신앙과 혼재된 모습을 보였다. 군주 차원에서 공공연히 미륵을 자처한 것은 6세기 백제 성왕 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역사적으로 힘든 시기에는 미래불의 도래를 바라는 미륵 신앙이 유행했는데[15]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16], 화랑도[17], 후삼국시대의 미륵 신앙, 고려시대 향도의 매향 활동[18], 조선시대의 후천개벽 사상 등으로 이어졌다.
여담으로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미륵이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 미륵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본래는 이름이 다른 거인신이자 창조신이었으나, 불교의 전래 후 본명 대신 미륵이라고 불리다가 결국 본명은 잊히고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것이라는 얘기.
고려시대에는 호국을 기원하며 국가 단위로 제석을 주불로 하여 재를 올리는 제석궁(제석원)에서 제석재를 올릴 때 미륵불과 관련된 경전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는 물론 미륵불이 가지는 초월자적인 포스의 영향도 있지만, 제석을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설멍한 경전 <섬자경>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19] 물론 그 이전부터 미륵신앙과 토속신앙은 용화향도의 기록에서 보이듯 서로 섞이고 있었다.
4. 미륵신앙과 타 종교 간 비교
이슬람교 시아파의 마흐디 신앙은 미륵 신앙과 흡사한 면모도 있다. 오늘날 시아파가 주류인 곳은 이란이지만 전통적으로 시아파 신학이 발전한 곳은 타지키스탄 일대였다.[20] 타지키스탄 일대는 인도와 거리가 가까워 교류가 많았고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불교 문화권이었으며,[21] 파미르 산맥 일대는 시아 이스마일파의 주요 근거지이기도 했다. 중세 쉬아파 학자들은 힌두 철학과 불교 철학 공부에도 적극적이었는데 특히나 불교 및 힌두교 영향이 농후하다. 한 예로 알리의 초상화가 불교 탱화의 영향으로 이란이나 바레인 등 시아파 국가들에서 그려져 숭배되고 있는데 수니파에선 우상숭배라며 기겁한다. 그리고 드루즈파는 환생 관련한 교리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불교 혹은 마니교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종파로도 추정된다.[22] 드루즈들은 오늘날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거주하지만 드루즈교의 실질적 창시자 앗 다라지는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이스마일파 신학자였다.다만 마흐디라는 개념이 미륵에서 음차된 것이라 카더라 등등의 주장은 근거가 다소 부족하다. 마흐디의 어원은 인도를 뜻하는 아랍어 "히다야(هْدِيّ)"에 사람을 뜻하는 접두사 밈(م)이 붙어서 나온 어휘이다. 시아파와 수피즘에서 기존 불교의 말법 사상 일부를 차용했다 보는 것은 모를까.[23] 시아파 내 여러 종파들은 교단주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사파비야 교단의 이스마일 1세가 자신이 조로아스터교의 신성한 불을 지키는 존재라고 믿고 홍보했던 사실에서 보듯[24] 비무슬림 현지인들도 자기네 종파로 개종시킬 겸 현지인들이 믿는 구세주 신앙을 끌어다 갖다붙이는 일이 적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비교적 많은 이유 관련하여 일본 불교계는 여호와의 증인 특유의 종말론과 휴거 사상이 미륵 신앙과 유사점이 많아 한국인 입장에서 친숙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백련교의 조직 구성과 여호와의 증인 종교 공동체 문화는 모두 외부에게 폐쇄적이고 종말론과 현실부정 이원론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5. 보살? 부처?
참고로 십선도는 이러하다
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불투도(不偸盜):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불사음(不邪淫): 남녀의 도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불기어(不綺語): 현란스러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불악구(不惡口): 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불양설(不兩舌): 이간질을 해서는 안 된다.
불탐욕(不貪欲): 탐욕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부진에(不瞋):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불사견(不邪見): 그릇된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25]
6. 신앙
자세한 내용은 미륵 신앙 문서 참고하십시오.7. 역사 속의 미륵신앙 관련 인물
- 성왕(백제): 궁예보다 먼저 미륵을 자처했는데, 역시 견훤처럼 궁예의 포스에 밀려났다.
- 무왕(백제) : 639년 미륵사를 창건했다. 서동요에 따르면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했다고 하나 최근 발굴에 의하면 사택왕후의 요청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 미시랑: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화랑. 얼굴을 하얗게 분장한 화랑은 단순한 젊은 인재가 아니라 미륵과 동일시되는 종교적 의미도 있었다.
- 궁예: 미륵 신앙을 본인의 이미지에 덧입혀 이용한 대표적인 인물. 그의 주 세력권이었던 철원 등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서는 아예 궁예미륵이라는 이름으로 토착신앙의 신이 되었다.
- 견훤: 하지만 궁예의 포스에 밀려 기억되지 않는다.
- 왕건: 역시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그가 석총대사에게서 미륵의 상징물인 간자를 건네받았다는 전설을 차용한 장면이 나온다.[26] 또한 그가 삼국통일 후 세운 개태사의 주불인 삼존석불은 미륵불상에서 자주 보이는 입상(立像)을 취하고 있고, 전각이 설치된 현재도 전각의 현판을 보면 미륵불을 모신 전각의 이름인 '용화대보궁'으로 되어있다. 다만 학자에 따라 아미타불로 보기도 하며, 2015년 현재는 아예 극락대보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아미타삼존이라고 소개하는 안내판을 놓았다.
사실 후삼국 시대 이전 각지의 호족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면서, 거의 대부분의 호족들은 미륵신앙과 자신을 결부시켰다. 그 당시의 트렌드였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시대에 민간 주도로 만든 한국 특유의 거대 미륵불상이 전국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 포대화상: 당나라 말기 살았던 중국의 승려. 미륵의 화신으로 불렸으며, 그 영향으로 지금도 중국의 미륵불상은 우리나라와 달리 포대화상의 모습(껄껄 웃고 있는 배 나온 뚱뚱한 스님)을 하고 있다. 이 포대화상이 일본화된 것이 칠복신 중 하나인 호테이.
8. 가상매체의 관련 인물
- 마이히메의 미로쿠
- 블랙 베히모스의 미로쿠 샌달슨
- 아키 블레이드의 천라 사천왕 중 지국천 나그시하
- 이누야샤의 미로쿠
- PSYREN의 아마기 미로쿠
- 사가 3 시공의 패자의 이계의 신 미륵
- 사바하의 김제석
- 신들의 사회의 샘
- 원환소녀의 쿠라모토 키즈나
- 나무아미타불: 연대 UTENA의 십삼불의 한 명인 미륵보살
- 갓 오브 하이스쿨의 마이트레야
- 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라키시스 캐릭터 모티브가 미륵불이며, 반가사유상 자세로 그려진 일러스트도 극중에 삽입되어 있다. 최근 연재에서 언급된 그녀의 여신명 자체가 메이트리아(마이트레야) 라키시스이며 어떤 악마족 전체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9. 관련문서
[1] 이란 계통의 종교의 미트라와 관련있다고 여겨진다. 이름이 유사하고, 둘 다 인도이란어파의 신격이라는 점 때문이다.[2]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가 미륵이 불교 전통 수행법인 여섯바라밀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또 미륵의 세상인용화세계는 미륵대성불경에 따르면 착한사람들만 모여있기에 악인들도 다 사라져야 한다. 다만 이 기간에 대해서는 불경이나 연구자마다 엄청난 이견이 있다. 57억 6백만 년설, 56억 7천만 년설, 8만 4천 세설 등이 있었기에 한국의 대표적인 미륵 연구가 이종익은 저서 <미륵성전>에서 이러한 이론들을 바라문교나 고대 인도의 천계 관념이 들어갔기에 부처의 뜻에 위배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참고로 진짜로 이 쯤 뒤엔 태양이 백색왜성이 될 정도로 긴 시간이다. 하지만 연구자마다 다른데 70억년 뒤의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3] 근데 이 부분이 논란이 많다. <미륵상생경>에 보면 이 도솔천의 천주를 미륵이라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화엄경에서는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미륵을 '위대한 대왕'이라 부르는 구절이 있다. 거기다 정작 석가 본인은 전생에 이 도솔천에 있을 때 호명보살이라는 보살이었다.[4] 사실 미래불 미륵과 석가 제자 미륵은 범어 이름이 다르다. 미래불 미륵은 마이트레야, 석가 제자 미륵은 티샤 마이트레야라고 한다. 근데 우리나라 같은 대승불교 문화권에서는 그냥 섞였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미륵불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게, 미륵보살설의 근거 중 하나가 현우경의 바바리품에서 석가가 바바리의 제자 16인에게 미래불에 대한 설법을 하자 미륵이라는 수행승이 자기가 미래불이 되고 싶다 하자 석가가 이를 수락하는 구절이 있다.[5] 천지가 개벽한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이란 뜻으로 매우 길고 오랜 시간을 이르는 말이기에 그냥 가지 말고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시라는 뜻이다.[6] 불교 용어로 부처가 제자 혹은 불자들에게 그들의 수행과 깨달음의 결과를 '인증'하고 그들이 장래에 어떤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한 '예언'을 말한다.[7] 정확히는 처음에 96억, 그 다음 94억, 마지막으로 92억이 설법 한 큐에 깨닫는다고 한다.[8]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무속신화인 창세가를 비롯해 동북아 지역에서는 석가와 미륵이 서로 경쟁을 벌이는 설화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와 관련된 학술서로는 <석가와 미륵의 경쟁담*>이라는 책이 있다.[9] 그런데 오히려 미륵대성불경이나 미륵하생경을 보면 태평성대에 출현하는걸로 되어있다,[10] 원칙적으로 아라한은 더 이상 윤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붓다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붓다의 전생이었던 수메다 존자는 일부러 수다원에 들기를 거부하고 보살행을 자처했다고 전해진다.[11] 띳사와 멧떼이야를 별개의 인물로 보지 않고 띳사멧떼이야라는 동일인의 이름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이 경우 띳사멧떼이야는 후술할 아지따와 마찬가지로 바바리의 제자가 된다.[12] 대표적으로 설출세부. 이곳에서 기원전 2세기 경 정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석가모니의 전기 격인 《마하바스뚜》에서는 멧떼이야와 아지따가 동일인물로 명시되어 있다.[13] 설본경에서는 아지따와 미륵을 별개의 인물로 본다.[14] 다만, 곰브리치 등 불교학자들은 이 경이 니까야 내의 다른 부분과 비교했을 때 문답이 아닌 붓다의 일방적 설법으로 이루어져 있는 등 이질적인 모습이 크기 때문에, 후대에 삽입된 외경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15] 힌두교의 시바 신앙과 같은 불교의 정토 신앙 또한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셋 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때에 특히 유행하며, 주요 신도층이 대부분 현시창인 피지배층인 경우가 많다.[16] 이는 삼국시대 한반도(어느 나라에서 제작되었는지에 대한 논란은 반가사유상 문서 참조)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의 국보 1호를 비롯한 많은 불상들을 낳는다. 이때의 불상은 서서히 한국적 색채를 띠어가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불상으로,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러한 양식이 쇠퇴하고 석굴암 본존불처럼 인상이 넉넉한 불상을 주로 만들었다.[17] 화랑은 신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인력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과 일체화된 존재로도 여겼다. 김유신이 이끈 향도의 이름은 용화향도였고, 삼국유사 등에는 미륵 신앙과 화랑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미시랑 설화가 등장한다.[18] 화랑도 각주에서 보이듯 향도는 미륵 신앙과 연관된 조직으로, 사천 매향비 또한 미륵 신앙을 기반으로 의식이 치러진 흔적이다.[19] 서울대학교 출판부, 안지원 저,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참조[20] 단 오늘날의 타지키스탄은 수니파가 주류가 되었다.[21]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 자체가 험한 히말라야산맥을 바로 넘어간 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을 거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이슬람화되기 전 중앙아시아 불교 유물이 일부 전시돼 있다.[22] 다만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인기가 대단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인간이 환생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들의 환생관이 고대 그리스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23] 다른 한편에서 보면 쿠란이나 사힛 알 부카리, 사힛 무슬림같은 주요 하디스 모음집에는 마흐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및 순니파의 마흐디 개념은 시아파나 수피의 마흐디 개념과 다르게 모호하다는 이유로, 대신 마흐디 신앙이 불교와 힌두교 및 중동 전통 종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개념이라는 주장도 만만치는 않다.[24] 이스마일 1세가 활동했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는 조로아스터교 전통이 강하던 곳이었다. 호람딘 문서 참조[25] 그릇된 견해에는 민주주의도 포함된다. 불교에서는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세상이야말로 정법의 세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26] 하지만 내레이션에서 '이 장면의 근거가 된 설화는 왕건 세력이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