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21:16:40

한국인의 식사량

한민족의 식사량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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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먹는 것에 진심인 한국인3. 역사
3.1. 고대3.2. 근세3.3. 근대3.4. 현대3.5. 외국인의 평가3.6. 오늘날 한국의 상황
4. 원인에 대한 추측
4.1. 단백질과 지방의 부족 가설
4.1.1.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았다4.1.2. 단백질이 부족했다
4.1.2.1. 소고기 섭취에 대한 반론
4.2. 기생충 가설
5. 애초에 식사량이 많지 않았다는 반론
5.1. 전근대 대식 문화에 대한 무지5.2. 기타
6. 동사 '먹다'의 다의성과의 관계설7. 여담8. 미디어 자료9.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인의 식사량이 예전부터 유난히 많았다는 이야기에 대한 문서이다.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신체적 조건으로 똑같은 사람임이 분명한 전근대 한국인들이 어떻게 현대인들의 2~3배가 넘는 양의 대식을 했는가 하는 놀라움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대 기록에도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 모두 '한민족은 식사량이 많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 점, 현대에도 주변 국가보다 비교적 많이 먹고있다는 점 등으로 교차검증되어 한민족이 주변 국가보다 식사량이 대체로 많은 것은 객관적으로도 틀림 없어 보인다.

2. 먹는 것에 진심인 한국인

우스갯소리로 나온 말이지만, 실제로 한국인들은 밥을 많이 먹는 것을 좋아하며 타국에 비해 음식을 많이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물론 타국의 경우도 과거엔 영웅이나 장사는 많이 먹는다는 이미지가 있었고, 북유럽 신화의 경우 많이 먹고 많이 마시는 게 영웅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가 전파됨에 따라 서양의 여러 국가들은 음식을 많이 탐하는 것, 즉 식욕탐식칠죄종의 하나로 부정적으로 봐왔다. 프랑스이탈리아처럼 식문화가 발전한 나라조차 음식을 고급스럽게 먹는 것을 선호했지 많이 먹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문화는 현대까지 이어져 지금도 많은 외국인은 음식을 탐하는 행위를 좋게 보지는 않으며, 음식을 지나치게 먹는 사람을 미련하게 보거나 소설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먹보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풍자를 하기도 한다.[1]

그와 반대로 한국인들은 옛부터 음식을 많이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해당 인식이 바뀔 일도 없었다. 후술하겠지만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음식을 많이 먹어왔으며 지금도 그러한 문화가 남아있다. 오히려 과거 어르신들은 아이가 음식을 많이 먹으면 복스럽게 먹는다고 생각했으며, 장성한 어른이 밥을 많이 먹으면 많이 먹고 좋은 데 힘 많이 쓰겠다며 좋아했을 정도였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인식이 바뀌어 지나치게 많이 먹는 사람을 미련하게 보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그건 꼴불견일 정도로 식탐을 부릴 때의 이야기이고 적당한 수준으로 많이 먹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는 한국인은 없다.

그래도 이러한 사실이 와닿지 않는다면 먹방이 어느 나라에서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보자. 물론 먹방이라는 단어가 전 세계에 보급되기 전에도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를 하나의 명사로 정의하는 단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나 만화, 스포츠, 심지어 야동까지 영상에 여러 장르가 있음에도 순수하게 먹는 것 하나만을 장르로 분류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없었기 때문.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다른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을 시작으로 먹방이라는 컨텐츠가 창조되었다.

또한 한국의 음식 배달 역시 세계적인 수준이다.[2] 미국과 유럽 등을 비교하더라도 한국의 음식 배달을 따라잡지는 못한다. 신속한 속도로 새벽까지 음식을 배달하는 나라는 전 세계 중 한국이 독보적이라고 볼만하다.

또한, 거리마다 24시간 편의점이 널려있는데다 안에서 시식도 가능하니 서울 어디를 가더라도 돈이 없어 굶을지언정 음식 파는 곳이 없어 굶는 일은 없다고 보면 된다. 이를 뒷바침 하듯 한국 내 회사 대부분 탕비실과 냉장고가 있다. 어지간한 회사라면 심지어 소규모의 중소기업이라 할지라도 최소 커피정도는 마실 수 있게 간식거리가 구비되어 있으며 좀 잘 마련했다 싶으면 과자나 사탕같은 군것질거리부터 냉장고에 각종 음료와 과일도 마련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반쯤 농담이지만 구직자들이 좋은 회사를 고를 때의 조건 중의 하나가 회사가 얼마나 맛있는 간식을 준비했느냐이다. 그리고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학교의 급식 수준 역시 발전하면서 2020년 기준으로 미국 같은 선진국보다 양질의 식사를 제공한다.[3] 학교나 직장의 장점에 대해 논할 때 급식/구내식당의 밥맛이 좋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메리트를 얻을 수 있을 정도.

이렇게 한국인이 음식에 진심이다보니 많은 한국인이 타인이 쫄쫄 굶는 것을 차마 눈뜨고 못 보는 습성까지 있으며, 굶고 있는 사람을 보면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 일단 밥부터 먹이려고 한다. 생면부지의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밥을 사주거나 음식점 사장님이 공짜로 밥을 준 일화는 한국에서는 굉장히 흔하며 잼버리 사태 당시 대학 기숙사에 머물러있던 외국인 학생들에게 대학생들이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이렇다보니 밥을 굶기는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예를 들어 "나 어제 회사에서 야근했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단순히 '힘들었겠다', '고생했다.'같이 측은한 정도의 반응을 보이겠지만, "나 어제 회사에서 밥도 못 먹고 일했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설령 일당도 제대로 지급되었고 휴식 및 퇴근 시간도 제대로 지켜지는 등 법적으로는 문제될게 하나도 없는 상황임에도 단지 밥을 못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떻게 회사가 사람을 그렇게 나쁘게 대우할 수 있느냐며 기겁하거나 분노하는 반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다 보니 초과 근무를 하게 될 요량이면 회사에서 근무자를 위해 야식을 지급하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 잡혀있다.

그리고 미국이나 다른 서양 국가에서 아침이나 점심을 감자칩이나 샌드위치 등으로 간단하게 떼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 3끼 반드시 밥과 반찬을 챙겨먹는 한국인은 확실히 식사량이 많은 편이다. 만약 회사 동료가 점심으로 과자 한 봉지나 샌드위치 하나로 끼니를 때운 것을 봤다면, 아마 당신은 회사 동료가 일이 바빴거나 결혼 등을 앞두고 다이어트를 빡세게 한다고 생각하지 정량이 그 정도일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이나 다른 국가들의 비만률이 한국보다 월등히 높은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이 그렇게 많이 먹는데도 살이 상대적으로 덜찌는게 신기할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한국에 방문한 외국인들이 한국인은 그렇게 밥을 많이 먹는데 왜 살이 안찌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한 외국인이 진지하게 궁금증을 담은 영상을 올렸는데, 분명 한국에 음식점이랑 편의점은 넘처나는데 왜 한국인이 살이 안찌는지 모르겠다며, 미국이나 한국이나 쓰는 재료는 똑같은데 왜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영상을 올렸다.##

3. 역사

3.1. 고대

파일:안악3호분 부엌 일부.png
파일:무용총 접객도 밥그릇.jpg
안악 3호분(357 AD) 벽화의 일부. 무용총 접객도(5세기)의 일부.
현재 쓰는 일반적인 밥그릇의 크기는 350g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690g, 고려 시대에는 1,040g, 고구려 시대에는 무려 1,300g의 밥그릇이 발굴되었다. 고구려 벽화를 통해서도 옛 선조들이 대식가였음을 알 수 있는데, 상단에 첨부된 표 중 좌측 벽화에 있는 여인이 밥을 짓는 시루의 크기와 우측 벽화 속 밥그릇에 수북히 쌓인 밥의 양만 보아도 고구려인들의 식사량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김춘추가 하루에 먹는 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하루에 드시길 3말[4] 9마리를 젓수셨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6말, 술이 6말, 그리고 꿩이 10마리였다.[5][6] 성 안의 시장 물가는 베 1필에 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하였다. ─ 삼국유사
실로 어마무시한 식사량이다. 거기다 이렇게 군주가 밥을 많이 먹는데도 탐욕스럽다는 비판을 듣기는커녕, 성군의 시대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면 임금 이하 백성들의 식사량도 많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건 혼자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을 만큼 먹고 남는 것은 아래의 신하들이 나눠먹는 방식이었다. 수라상 문서의 물림상(퇴선) 관련 내용이 있다.

아래에서 언급된 ''은 흰 쌀밥이 아니라 잡곡밥일 가능성이 높다. 쌀밥을 원없이 즐겨 먹는 건 주로 높은 신분에 한정되었다. 삼국시대 한반도의 귀족 계층은 쌀밥을 먹었지만, 평민들은 잡곡밥을 먹었다고 한다.

부여에 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부여는 오곡을 기르기 적합하다."고 적혀 있다. 참고로 중국의 오곡과 한국의 오곡은 다르며 위서 지리지에서 오곡과 쌀을 따로 기록한 만큼 이 오곡에 쌀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지구온난화 이후 조선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해 농사를 짓기 전까지는 벼농사가 오랫동안 되지 않았던 지역이었지만 고구려가 있었던 그 시절은 산업혁명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연 평균기온이 지금과 큰 차이가 나지 않거나 1~2도 정도 높아서 북위 45도인 만주 중부 지역에서도 논농사가 가능했고 동토인 그린란드도 현재처럼 빙하가 녹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기 10세기에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연 평균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린란드는 빙하가 커지게 되었고 만주 지역은 벼농사가 힘든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1300년 전과 지금은 기후가 약간 달랐다.[7]

다만 이러한 대식이 전반적인 생애에 걸친 충분한 영양 공급을 보장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랬다면 조선시대에 이미 현 대한민국의 평균 신장에 이르렀을 것이다. 아래에서 보듯 탄수화물은 정말 원없이 먹었을지 몰라도 단백질이나 지방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나 과거에는 식자재 보존을 위해 염장을 즐겨썼는데 이 시기의 염장이라는건 요즘처럼 짭쪼름하게 간을 하는게 아니라 산더미만한 소금 무더기 안에 식자재를 깊숙히 푹 파묻어버리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요즘 입맛에는 맛을 보기는 커녕 혀가 살짝만 닿는 그 순간 안면 근육들이 모조리 찌그러질만큼 엄청나게 짜게 만들었기 때문에 저 정도 되는 밥이 술술 넘어갔을 것이다.[8]

그리고 실제 한민족의 식사량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근대 이전의 기록의 경우 조금 고려해야 할 부분은 있다. 고대에는 인물의 신분과 능력을 과시할 때 실질적인 지식이나 능력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인의 체구, 외모나 식사량, 주량 등도 그 '능력'에 포함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의 유능한 무장들이 말술을 마시고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도 결국은 '이렇게 술과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힘과 재력이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근황을 살피는 왕에게 밥을 1말에 고기를 10근씩[9]이나 먹고, 한바탕 말을 타고 달렸다던 염파가 그 예.

또 그와 비슷한 의미로 작게는 개인의 부(富)나 권력, 지위, 크게는 국가 전체의 국력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대의 뉴스나 신문기사도 사실과 과장하여 보도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근대 이전의 기록에서 인물이 대식을 했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 인물의 능력과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각색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김춘추도 이런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료 해석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전근대 시대의 역사 전체의 보편적인 요소이다. 21세기의 유튜브나 방송으로 치면, 집이 몇 채에 고급 차가 몇 대고 명품이 많다는 식으로 나왔을 것이다.

3.2. 근세

임진왜란 때 기록한 <쇄미록>이란 책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을 설명했다. 쇄미록에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적었는데, 이것은 현재 먹는 1공기의 2배의 양이다.[10]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것과 관련한 비화가 있었는데,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량을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하니 1달치 정도였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1달만 버티면 왜군들이 물러가리라 생각했는데 고니시 부대의 식사량을 본 밀정이 왜군들의 식사량이 조선군의 1/3정도임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왜군들이 승리를 위해 일부러 식사량을 줄인다고 생각했다고. 물론 왜군들 입장에서는 평소 먹는대로 먹었을 뿐이었다.[11]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낸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을 마신다'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인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입니다'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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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먹는 건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 왕의 일과를 보면, 하루 5~6끼씩은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영조는 대표적으로 소식을 하고 덕분에 장수한 임금인데, 소식을 한 기준이 5끼에서 3끼로 줄이고, 고기 위주의 반찬에서 채식 위주의 반찬과 고단백질 고기를 더한 현대 기준으로 균형 잡힌 식단이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너무 소식한다고 크게 우려했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역대 조선 왕들 중 가장 장수했다.[12][13]

이 많이 보급된 조선 후기에 와서도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의 기록에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적었다. 그나마 수전이 먼저 보급되고 기후 조건상 농사가 활성화된 남부 지방은 경제 조건만 되면 쌀밥을 먹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거꾸로 돌리면, 경제 사정이 안 되어서 쌀이 없으면 잡곡밥을 곁들여 지어 먹어야 했다는 소리다. 헌데 이런 잡곡밥은 먹어도 배가 금방 꺼지는 속성이 있다. 이걸 봤을 때, 큰 밥그릇에다가 엄청난 양의 밥을 먹는 것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고된 농사 일을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현재도 운동선수들은 보통 사람보다 식사량이 많다. 고기뷔페에서는 운동선수 출입을 통제할 정도.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사실 점심이란 아침과 저녁 사이에 먹는 간단한 음식을 가리키는 중국어로, 우리가 흔히 쓰는 딤섬이 바로 점심을 뜻하는 광둥어다.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아침과 저녁 2끼만 먹기가 평상시의 식습관이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 사람들은 하루 2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3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말이 하루 2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아래 항목에 조선으로 파견 온 러시아군 기록에서도 조선인들은 하루 3끼를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처럼 육체적으로 활동하는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상기한대로 점심의 정의에 거의 근접한 식사는 낮것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것이 현대로 넘어오면서 낮것보다는 훨씬 더 푸짐하게 차려먹게 되면서 정규 식사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점심이라는 표현이 자리잡은 것이다.

3.3. 근대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4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그녀의 저서에서 한국인은 매일 4파운드의 밥을 먹는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한국인은 복숭아나 작은 참외 25개를 앉은 자리에서 먹어치우며 한끼에 3파운드의 고기를 먹는것도 보았다고 하였다.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생선, 회, 건어물, 절임류, 조류, 뼈 여러 곡류와 채소, 해초류 등 가리지 않고 잘먹는 잡식성이며 마늘과 고추장, 된장, 간장, 식초, 참기름 등을 사용하며 메밀과 계란을 넣어만든 당면, 잣과 꿀, 밀가루, 설탕, 참깨 등으로 만든 떡도 먹는다고 하였다. #

3.4. 현대

조선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1960년대만 해도 일반인의 사기 밥그릇은 용량이 650cc가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2010년대 현대의 공기밥 밥그릇은 300cc 정도로 2배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그 당시는 밥그릇에 넘치게 고봉밥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밥의 양이 2.5배 정도는 된다. 농부 등 육체노동자가 아닌 도시 사무직 일반인 어른 남자가 매일 사용한 밥그릇이다. 쌀로는 대략 200g 정도이다.

1970년의 한국인 1인당 연간 양곡소비량은 190kg이었고 그중 쌀이 136kg 정도였다. (농가 비농가 합계 평균) 현재는 연간 쌀 소비량이 1인당 60kg 정도로 줄어 들었다. 1일 쌀 소비량은 170g 정도. 공기밥 1그릇은 밥으로 210g, 쌀로는 90g. 칼로리로는 약 300kCal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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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밥상 차림과 밥그릇 크기
종가집이나 제사를 지내는 큰집에 가서 기제사상에 올리는 밥그릇을 보자. 그 크기가 옛날에는 어른용이었다. 요즘 식당에서 공기밥 1그릇 추가하면 주는 용량은 미취학 아이들용이나 돌맞이할 때쯤 되면 선물로 들어오는 아이용 용량과 비슷하다.

못 먹는 이미지가 강한 북한에서도 이런 식의 밥그릇이 있다. 탈북자가 고향의 모습이라면서 감자밥을 하는 영상, 고봉밥이 찍힌 북한 내부 영상 이런 밥이 은근히 배가 차지 않는다고 하며, 실제로 북한에 양념이 별로 없다는 식으로 증언한다. 즉 북한에서는 변변한 반찬이 없어서 밥만 먹어야했다보니 산더미만한 밥을 먹고도 아쉬워서 쩝쩝 댔지만 남한에 와서는 부식이 풍족해져서 밥 먹는 양이 줄어들었다는 것.

70~80년대에는 이러한 식사량을 조절하기 위해 기존의 고봉밥 형태에서 주식의 양이 훨씬 적은 공깃밥(약 200cc급)을 도입해 식당마다 이를 어길 시 단속하게 하는 등 정부에서 규제를 한 덕분에 주식의 양이 크게 줄었다.(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또한 경제의 발전으로 부식 섭취량이 늘어나 식사의 총량은 몰라도 주식 섭취량은 현대의 한민족이 가장 적게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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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1인당 아시아 1위의 육류섭취, 세계 1위의 해산물#섭취, 세계 1위 야채 섭취[14][15]등으로 대식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70년대 1인당 쌀 소비량 136kg에서 현재는 75kg으로 반토막이 나버렸고, 심지어 이 수치는 아시아 평균 쌀 소비량(78kg)에 못 미치는 것이다. 대신 을 많이 먹어 1인당 면 소비량은 9.7kg으로 세계 1위이다.

2018년의 통계자료를 보면 한국의 연간 해산물 소비량은 78.1kg로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비교적 해산물을 많이 먹는 걸로 알려진 일본도 58㎏, 중국은 48.3kg 정도이다. 또 소 돼지 닭 등 육류 소비도 한국은 연간 육류소비량이 52.5kg으로 미국 96.8kg 등이나 OECD 평균 63.4kg에는 못 미치지만 중국 49.8kg보다 많고 일본 35.6kg보다는 훨씬 많다. 한국은 수산물 소비는 세계 1위, 육류도 아시아에선 상위권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육류 소비는 꾸준히 늘고 있다.

3.5. 외국인의 평가

조선시대 실학자성호 이익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에 힘쓰는 건 으뜸이다. 유구국[16]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며 비웃었다."이라 기록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은 조선인들이 먹는 양을 보고 놀라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먹으면 국가 운영은 어떻게 하냐"고 묻기까지 했다.[17]
고기와 채소 술과 과일 등 잡다하게 진열하여 肉蔬酒果襍然陳
둥근 상을 머리 높이 이고와 엄숙히 대접하네 首戴圓柈肅大賓
우습구나! 우리 주방장 요리 솜씨는 부족해도 笑我庖人調劑劣
많이는 먹을 수 있으니 두 사람의 양이나 되네 伊能大嚼量兼人
청나라 백준의 조선 탐방기 봉사조선역정일기中
몽골계 청나라 사신 백준은 비록 조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악평은 했지만[18] 양은 넘치게 받았다고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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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회 독일인 수도자들.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19]의 기록에서도 대식을 하는 조선인들의 일화를 확인할 수 있다.[20]
다식에 대해서는 대신과 평민의 구별이 없다. 조선 사람들은 많이 먹는 것이 곧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며, 식사의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법이 없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신자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 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된 어느 노인은 식욕이 없다 하면서도 5사발을 비웠다. 조선 사람들은 10사발을 감당하는 자를 장사라고 부른다.

를 잡을 일이 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까지 먹는 사람도 있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 한다.

조선의 어머니들은, 아이의 배를 손으로 두들겨 보면서 뱃속이 가득해지는 최후까지 밥을 채워 넣는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 보다가 속이 꽉 찼을 때에 비로소 밥 먹이는 것을 중단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1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21]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인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22]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구한말 조선을 여행했던 오스트리아의 귀족 출신 여행가인 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텍(1854~1918)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조선인들이 대식가라는 점에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내가 일본에 갔었을 때, 일본인들은 자신의 이웃이 자신들보다 3배 가량 더 많이 먹는다고 내게 말했었는데, 나중에 제물포 개항장에 와 보니, 정말로 그랬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일정한 시각에 식사를 하는 반면, 조선인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식사를 하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밥이, 붉은 고추 한 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이웃나라 사람들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 편인데, 엄청나게 많은 고춧가루와 식초, 그리고 양념을 곁들인다.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조선, 1894년 여름 中
영국 출신 여행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선교사 그리피스 존의 여행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한국인들은 보통 한 끼에 3~4인분의 양을 먹어치우며, 그 자리에서 20~25개의 복숭아참외가 없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인들은 보통 일본인들의 2배를 먹는다.
그리피스 존
1890년 한반도를 돌아본 러시아군 베벌리 중령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농민들은 평상시 식사때 밥과 채소로 만든 국, 건어물 등을 먹었는데 매번 대량의 막걸리와 함께 먹었다. 이를 아침, 정오, 자기전 저녁에 3끼를 먹었다.
베벌리 중령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은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인들은 잔치에 가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는다. 잔칫날 많이 먹으려고 전날 굶기도 한다. 반면 일본인들은 잔칫날에 근사한 접시를 늘여놓지만 정작 음식은 쥐꼬리만큼 준다.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23]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중위[24]는 이렇게 기록했다.
오전 10시에 아침상이 들어왔다. 가슴높이까지 올라온 수많은 음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중략)
저녁이 되자 나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 상을 채우고 있는 둥글고 작은 접시에는 10명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음식이 쌓여 있었다.
조지 클레이턴 포크, 은자의 왕국 中
다만 당시 그가 받은 반상은 음식이 17개나 기록되어 있었는데, 밥이나 국, 식초, 김치를 제외하면 11첩 반상으로 거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12첩 반상 수준이어서 이 정도는 조선인 기준으로도 많은 수준임을 감안해야 한다.[25] 실제로 러시아의 외교관 다데슈칼리안 공후 또한 잔치 때 받은 많은 양의 음식을 이렇게 기록하면서 서울의 대신들 밥상보다 반찬수가 많았다고 기록했다.
15분 후 생선, 고깃국, 달걀, 붉은 고추를 넣은 생선, 수수와 완두로 만든 고기만두, 말린 쇠고기, 설익은 밤, 쌀, 꿀, 다시마, 꽃 모양으로 예쁘게 자른 문어 등 14가지의 갖가지 요리가 담긴 상을 두 개나 받았다. (중략) 곧 조선인 관리 일곱 명이 방에 들어와 대접이 변변치 못해 죄송하다고 절하며 사과했다.
다데슈칼리안, 내가 본 조선 中

이러한 일화들은 객관적 측정 자료가 아니라면서 의심을 받곤 하지만 어쨌거나 매우 다양한 외국인들로부터 '밥을 많이 먹는다'라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자만 잘 먹고 나머지는 잘 못 먹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여기 기록된 사람들이 유독 부유층만 관찰하고 서민은 보지 못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북한처럼 외국인을 불러놓고 자기 좋은 곳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26] 당시 조선이 외국인 방문객들을 다 접대해줄 수 있을 정도로 부강한 국가도 아니었기에 외국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어하는 데를 다녔을 것이고, 확률적으로는 일반인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애당초 '밥을 많이 먹는다'라는 게 100% 긍정적인 면모는 아니기 때문에[27] 별로 많이 먹지도 않는데 일부러 좋게 봐주려는 이유로 가짜로 지어내서 쓸 이유도 별로 없다.

3.6. 오늘날 한국의 상황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우 국민의 식사량이 매우 크게 줄었다. 이유는 대한민국이 더이상 농업국가가 아닌 공업 국가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쌀농사 국가에다 척박한 환경에 다산이 기본이였던 대가족 중심인 한반도의 특성상 전국민이 노동력을 부지런히 갈아넣어야 온 가족이 먹고 살 쌀이 나왔던 한반도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먹어야 했다. 하지만 공업 국가는 정시에 움직여야 하므로 식사시간이 길고 잦아서 좋을 것이 없고, 어차피 점점 인구수 감소로 인해 그만큼 소비되는 식량의 요구량도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직장인들의 식사횟수와 시간은 줄어들고 대한민국도 다르지 않다. 그런 영향에다 오랫동안 문치를 높게 취급하고 외모에 대한 엄격함이 강했던 전근대 한반도의 미적 관점이 그대로 전해져,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날씬한 몸매가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는 국민들도 매우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여전히 고된 노동환경에 노출된 3D 직종류 종사자들은 많이 먹는다. 건설현장 함바 같은 곳이 푸짐하게 나오는 것도 이렇게 안주면 노동자들이 일을 못해서이다.

다만 미곡 소비량이 줄어든 것이고 칼로리 소비량 자체는 2011년 이후 3400kcal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2018년 기준 세계 19위의 수치이다. 미곡 소비량이 줄어든 부분을 채운 것이 바로 육류와 어패류 그리고 밀가루이다. 육류 소비량은 몽골이나 카자흐스탄 등 전통적으로 고기가 주식인 국가들을 제외할시 아시아 1위, 어패류, 채소 소비량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고 주식도 쌀 소비량은 줄었지만 인스턴트 라면이 득세하면서 면 소비량은 세계 1위이다. 즉 미곡 소비량이 줄어든 부분을 다른 식자재들을 섭취함으로써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석적인 식사 자체는 줄었을지 모르나 문제는 과음, 폭음을 유발하는 음주 문화로 인한 술 소비량이 높은 편이며,[28] 술을 마시다보면 자연스럽게 식욕에 대한 한계가 해제되기 때문에 덩달아서 과식, 폭식을 하게 되기 때문에 소위 '술배'가 튀어나온 인구의 수도 상당하다. 물론 술배가 튀어나오는 사람이 한국에만 있는건 아니고 세계 어딜가나 있기야 하지만 (특히 보드카를 맹물마냥 퍼마시고 돼지 지방으로 조리한 요리 내지 돼지 지방 그 자체로 만든 요리들을 매끼니마다 섭취하는 동유럽인들) 한국은 이른바 회식이라 하여 이런 행위를 조직적으로, 그리고 잦은 빈도로 행하고 있다는게 특징이다. 물론 젊은 층에서는 이런 회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늘고 있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마음에 맞지 않는 직장 동료 및 상사와 억지로 동석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 뿐 젊은 층 또한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쌓아두고 신나게 삼키고 들이마시는 대식 문화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건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맞는' 이들과 동석하는 자리라면 스스럼없이 대식을 추구하며, 만약 해외 여행 중에 현지 식당에 방문하기라도 하면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쌓아놓고 실컷 먹어치워서 현지 사장님들을 (좋은 의미로) 기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의 식사 문화 자체를 놓고 비교해봐도 한국은 여전히 많이 먹는 편에 속한다. 서양 국가들은 아침에는 빵 한두쪽과 과일 몇조각에 커피 한잔 정도, 동양 국가들은 죽이나 찐빵 몇점에 차 한잔 정도로 가볍게 때우는 경우가 많고 점심에도 서양 국가들은 고작해야 샌드위치 한개나 피자 한조각 정도, 동양 국가들은 만두 몇점이나 국수 한그릇 등으로 간소하게 마치고 저녁만 동서양 가리지 않고 온가족이 집에 모여서 푸짐하게 차려놓고 하루종일 있었던 일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두세시간이 넘도록 차근차근 먹는다. 그런데 한국은 아침식사에서부터 밥 국 반찬이 다 갖춰진 정찬을 섭취하고 점심식사에도 당연한듯이 정찬을 섭취하며, 그 대신 저녁은 좀 가볍게 먹냐 하면 그런 거 없고 저녁에도 다 갖춰진 정찬을 섭취한다. 그나마 아침에는 유달리 푸짐하게 차려먹는 영국이나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미국이 이에 비견할만하나 그런 영국이나 미국조차도 '아침 전용 메뉴/점심 전용 메뉴/저녁 전용 메뉴'가 각각 따로따로 존재하며 어지간하면 그 선을 잘 지키는데 유독 한국만 그런거 없고 모든 메뉴가 아침&점심&저녁(&야식) 겸용이다.[29]

때문에 늘어난 식사량과 서구화된 식문화의 영향 등으로 한국인의 평균 몸무게는 과거와 비교할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30] 이 때문에 현대의 2~30대 청년들과 65세 이상 노인의 평균 몸무게 차이도 상당하다. 2010년대 말을 기준으로 20대~40대 기준 한국인 평균 신장은 남성이 173cm, 20대 중반을 기준으로는 175cm 내외로 일부 유럽 국가들과 동년배에서 비슷한 수치를 보일 정도로 상당히 큰 편이다. BMI 지수 30을 기준으로 한 15세 이상의 비만율도 5.9%로 4.6%로 최하위인 일본 바로 다음일 정도로 상당히 낮다. 다만 일본/미국/영국[31] 등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경우 다른 국가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20~30대가 70대 이상의 노인층을 제외하면 가장 비만율이 낮은 세대이나[32] 한국은 20~30대 젊은층에서의 비만율이 여성에서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서도 매우 낮으나 남성에서는 50대와 60대 중장년층에 맞먹거나 웃도는 수치를 보인다.[33] 때문에 상대적으로 타국에 비해 한국이 상대적으로 연령 및 세대 중 젊은 남성들의 비만 문제가 두드러지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연령별 식습관 차이가 상당하다는 의미이다.

4. 원인에 대한 추측

4.1. 단백질과 지방의 부족 가설

한민족의 식단에서 단백질과 지방 등 고기류가 부족해서라는 가설이 있다.

4.1.1.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았다

18세기 술집에서 술안주로 가장 인기있었던 음식이 생선 요리와 개장국이었으며, 일반적인 술집 손님의 대부분은 서민이었다.(출처) 또한 김동진 저,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같은 책과 조사만 봐도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소를 많이 잡아먹었다. 연 4kg 가량인데 현대 한국인의 연 소고기 소비량이 15kg으로 1985년을 넘어서야 조선인의 연간 4kg을 넘겼다. 먹지 못한 때는 경신대기근 같은 국가적 재난상황 때뿐이었다.

1775년 3월 24일 승정원일기 기사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18세기에 하루에 도축되는 소의 수는 약 천 마리,[34] 1년엔 38~39만마리였다. [35] 또한 1676년 1월 승정원일기에서도 당시 하루에 도축되던 소가 천 마리 이상이라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18세기 중반 조선의 인구는 1800만 수준으로 추정된다는 사실, 그리고 위의 기록들에 나온 소 도살량을 근거로 계산하면 평균적으로 조선인 한 사람이 1년에 소 약 1/40마리~1/50마리를 소비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당시 소 한 마리에서 얻는 고기가 평균적으로 160~170kg 수준이였다는 사실을 대입해서 당시 1인당 연평균 소고기 소비량이 약 4kg이였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 소의 사육 수를 보면 17세기 중반~18세기 후반엔 보수적으로 잡아도 사육되는 소의 수가 백만 마리는 넘어갔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당시 한우의 크기는 주위 국가의 소들보다 더 컸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뭉뚱그려 '식사량이 많았다'라는 것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만 '고기를 많이 먹었다'라는 것은 개개인이 측정하기 어렵다는 부정론의 언급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한 기록(이익, 박제가, 정약용)이나 적게 먹는다고 한 기록(박지원)이나 다 개인적인 자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이익, 박제가, 정약용의 서술은 위에 나온 통계자료들을 통해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지만 박지원의 서술은 이를 뒷받침할 통계적 자료가 없어 신빙성은 박지원이 남긴 기록 쪽이 더 떨어진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전 고대 기록으로도 건강한 시절엔 고기를 많이 먹었음이 기록되어있다. 또한 조선으로 여행온 오스트리아 여행가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역시 조선인들은 주변 나라보다 고기를 많이 먹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영양섭취가 단군이래 가장 우수한 현대 한민족 역시 북한을[36] 제외하면 주변국보다 많이 먹고있음이 현대의 통계상에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양반들의 밥공기 국그릇 크기도 평민들의 것과 같았으며, 양반들은 쌀과 고기 등으로 이루어진 영양식단을 주식으로 삼았음을 볼 때, 영양분 불균형 해소를 위해 평민들이 밥을 많이 먹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냥 습관적으로 많이 먹는 것이고, 신분차이와 가계소득의 차이에 따라 질적인 면만 달랐을 뿐, 무게로 따졌을 시의 양은 거의 차이가 없이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양반 중에서도 원균과 같은 장수의 식사량이[37] 현대 기준 건장한 남성의 3, 4인분치를 때려먹었음을 염두에 둘 때, 보통 양반들의 식사량도 원균보다야 적겠지만, 대부분 상당히 많은 식사량을 소비했음을 간접 추론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해당 가설은 어차피 다른 나라 사람들도 대부분 단백질 섭취를 다 못 했다는 점은 간과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일본만 봐도 육식은 금지여서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알음알음 먹어야했고 결과적으로 한민족보다 단백질을 덜 먹었다.

4.1.2. 단백질이 부족했다

조선은 농업 국가였고 주식도 특히 쌀이었기에 탄수화물 섭취는 그럭저럭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다른 영양소에 비해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다는 주장도 있다. 밀이 쌀보다 70% 정도 많은 단백질을 가지고 있기에[38] 쌀 섭취 국가는 똑같이 주식인 곡물만 섭취하더라도 단백질 섭취에 불리하다. 이는 대식하는 식사 사진에서 유독 밥은 어마어마한 데 비해 반찬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이 근거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족한 영양분을 채우기에 가장 유리한 것은 곡식이었다. 이 때문에 밥을 많이 먹는 것으로 그 영양을 대체 한 것.이는 단백질 지렛대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단백질이 부족한 식사를 이어가게 될 때, 우리 몸은 부족한 단백질 량을 다른 식사로라도 대체해 채우길 원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음식을 먹게 된다고. 동국대일산병원 가정의학과 오상우 교수 역시 1950년 시기를 언급하면서 "당시에는 단백질이 부족해 밥을 많이 먹어야 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30대 얼굴이 급속도로 젊어진 이유 中

3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이니 생선을 단백질 대체재로 쓸 수 있지만, 안그래도 평지가 별로 없고 산지가 많은데다가 조선시대에는 상공업의 발달이 미비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서 생선값이 높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박지원"생선 내장을 바닷가에선 거름으로 쓰는데 서울에선 한 줌에 한 푼이냐"라고 할 정도.[39]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간고등어, 건어물, 젓갈 등...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 충분한 육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과 가장 비슷한 축에 속하는 몽골인의 식단이 몽골 요리에서도 보듯 단백질과 지방이 매우 풍부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인 원래는 그만큼의 단백질을 필요로 하는데 상당히 결핍되어있을 가능성이 있다.[40]

정말로 조선시대 때 저만큼 밥을 먹으면서 단백질 공급까지 풍부했다면 동시대에서 신장이 전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압도했을 것이다. 전근대 시기 조선시대 한국인의 체격을 확인하기는 어려운데, 한국인의 체격이 동시대에 다른 나라를 압도했다는 기록들이 소수 존재하지만 이것은 객관적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고 옛날 조선시대 묻혔던 백골들을 바탕으로 추산해보면 일단 중국은 몰라도 최소한 일본보다는 크다는 결론이 나오기는 한다. 다만 일본은 지금도 우리나라보다 유전적 성장 한계점이 낮으니 당시에 일본보다 체격이 컸다고 해서 단백질 공급이 풍부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위의 기사 자료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비교했을 때 한국인의 신장은 동시대의 서양인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를 통해서 조선시대의 단백질 공급은 그다지 충분하지 못했다는 간접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4.1.2.1. 소고기 섭취에 대한 반론
위에서 '고기를 많이 먹었다'라고 한 일화들은 몇몇 일화일 뿐이다. 조선시대는 500년이나 되는 만큼, 아무리 전반적으로 고기를 못 먹는 시기였다 해도 한해 두해 푸짐하게 육류가 공급되었던 때는 작게나마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 일화만으로 사회 전반의 고기 소비량을 추측하기는 곤란하다.

위의 조선시대의 소고기 섭취량에 대한 계산은 소의 마릿수를 인구수로 나눈 것이다. 여기서 소 1두당 무게를 600kg으로 잡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한우가 그런 것이고 조선시대의 소는 훨씬 무게가 덜 나갔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소 1두의 무게가 200kg이었으니 조선시대에는 그보다 조금 덜 미쳤을 것이다. 여기서 200kg이 다 고기인 것도 아니니 먹을 수 있는 양은 30%로 더 줄어든다. 이를 도체수율(屠體收率)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도체수율이 30%보다도 더 낮았을 수 있다. 여물을 먹고 늙은 소를 도축했던 영향으로 살이 질겨서 먹을 수 있는 부위가 더 적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 도축에 대한 정량적인 기록을 확인해보면 구한말 1909년 기록된 사육두수는 약 63만 마리이고 도축두수는 약 17만 마리였다. 아무리 구한말에 국가 사정이 어려워졌다지만 그래도 인구와 산업이 팽창한 근대 시기인데, 그보다 100년도 전인 1775년도에 38~39만 마리를 도축했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쉽사리 믿기 어렵다. 1920년대가 되어서야 150만 마리가 사육되었고, 30만마리가 도축되는건 40년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상설시장이 부재하고 유통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과거엔 고기가 있다 하더라도 민간에까지 보급되고 소비되는 과정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심지어 소고기를 기껏 구했더라도, 보관 상의 문제로 인해 도축한 고기를 썩기 전에 빠르게 해치워야 했다. 결국 당시 식사의 대부분은 밥과 국, 그리고 절인 채소,김치와 간장이 전부였다.

소고기가 이런 사정이니 소고기 이외의 고기 섭취량은 더 적었을 것이다. 내륙 지방에서 해산물 섭취량은 뻔했을거고, 조선은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개를 잡는 것이 소를 잡는 것보다야 훨씬 만만하긴 했어도 개는 빨리 자라는 편도 아니고 고기가 많이 나오는 편도 아니다. 닭도 지금처럼 많이 기르지도 않았고 다 늙어서야 겨우 잡았다. 계란의 크기는 지금보다 조금 작았으며 지금처럼 매일 하나씩 낳지 않고 나흘에 하나 꼴로 낳았기에 계란도 흔하지 않았다.

4.2. 기생충 가설

조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먹게 된 원인이 기생충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를 끓여 마시는 문화는 불교와 연관이 큰데, 조선왕조의 적극적인 숭유억불 정책으로 물을 끓여 차로 달여먹는 문화가 사라졌다.[41]
식기들은 모두 도자기나 놋으로 만들어서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먹었으며, 한상에 모두 둘러앉아 먹었다. 조선인들은 우리나라(러시아)나 중국, 일본과 달리 차를 많이 마시지 않았다.
V. P 파르네프 대령 1885년
이후 조선인들은 옆나라 중국, 일본과는 달리 우물물이나 계곡물 등을 별다른 처리없이 그대로 마시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기생충에 크게 노출되었다는 연구가 그것이다.[42][43]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음과 같은 오류가 나타난다. 우선, 조선 전에도 많이 먹었다는 사료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삼국시대에 건설한 화장실을 발굴해보면 그 당시 사람들도 기생충에 크게 노출되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가설은 근대 이전에는 한반도 외에 세계 각지에도 기생충이 만연했음을 설명할 수 없다.[44] 한민족보다 적게 먹었다는 중국과 일본도 다량의 기생충이 발견된다. 한민족만 특별히 기생충에 노출된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전근대에는 기생충에 크게 노출되어있고 이는 차 문화와 관련없이 구충제가 보급된 현대에 박멸되었다. 기생충이 박멸된 현대에도 한민족은 주변국보다 많이 먹고 있어 해당 이론만으로는 한민족의 대식을 설명하지 못한다.

5. 애초에 식사량이 많지 않았다는 반론

5.1. 전근대 대식 문화에 대한 무지


사실 당시에는 세계 전 지역에서 하층민들은 아주 많이 먹었다. 농사라는 건 전세계 어딜 가도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농민들이 하루에 약 8파운드(3.6kg)의 감자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중세 영국의 농부는 하루 3,500칼로리에서 4,000칼로리의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출처 출처2 자료에 따라 하루에 1.3kg 에서 많게는 1.8kg 가량의 빵과 200그램 가량의 고기를 섭취했다고 하는데, 하루 두 끼를 먹었음을 감안하면 한 끼에 빵만 무려 600g에서 900g 가까이를 먹은 셈이다. 밥으로 치면 3-5공기를 먹은 것. 더불어 일본 에도시대 서민들의 밥상을 추측하고 재현한 결과에서도 밥 양만 무려 1kg다.출처[45] 위 중세 영국 농부의 한끼 빵 분량이나 한민족이 먹었다는 한 끼 밥 분량과 비슷한 양이다. 일본과의 식사량 비교에서도 도량형 차이 때문에 오해를 낳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시대의 홉은 일본 홉의 1/3 수준이기에 한 끼에 7홉을 먹었다는 조선과 한 끼에 2홉을 먹었다는 일본의 식사량 차이가 20퍼센트 남짓한 수준으로, 식사량이 몇 배씩 차이나진 않았다.

즉, 상류층 입장에선 자국 하류층도 충분히 많이 먹는 것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한 만큼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그나마 유럽에서는 산업화의 영향으로 먹는 양이 줄어든 반면 조선은 그렇지 않아 여전히 하류층이 매우 많은 밥을 먹었으니 그게 더욱 눈에 띄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들을 대식가로 묘사한 서양인들의 기록도 대부분 19세기 기록이기도 하고.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하루에 고기를 5kg씩 먹어치워서 백인들이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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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를 감안해도 이웃 나라 육체노동자들과 비교해도 많이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일본 역시 농부나 상대적으로 힘을 많이 쓰는 직종의 사람들이 조선인과 비교하면 노동강도가 전혀 덜하지 않았음에도 상대적으로 밥을 적게 먹었다는 것이다.

5.2. 기타

조선 후기 농업사를 연구한 논문 중에서는 1인당 곡물 생산에서 특별히 주변국(중국(청), 일본)에 비해서 조선은 우위를 가지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꽤 보인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조선 중기의 경제> 혹은 <조선 후기의 경제>에서 서술한 당시 조선의 기근 및 유랑민의 발생은 큰 골칫거리였다. 식품수급표에 의한 영양 제공량 추정 연구에서 1910년 기준 조선인의 평균 일일 영양 섭취량은 1500kcal 내외로 추정되고 있는데, 여러 가지를 고려하더라도 당대 동아시아를 기준으로도 대식이라고 하기는 다소 애매한 수치이다. 이러한 상황에 맞춰서 해석하려면 역시 "외국인들이 주로 잘 사는 집을 보고 다녔다", "많이 먹는 것이 특징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식의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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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통계에서도 한민족의 칼로리 섭취량을 보면 북한을 제외하면 주변국보다 많이 섭취함을 알 수 있다. 다만 현대 한중일 간의 섭취 칼로리 차이는 30% 정도로, 2배를 상회하는 수준은 아니다. 많이 먹긴 해도 '2배나 많이 먹는다'는 아무래도 좀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동사 '먹다'의 다의성과의 관계설

'먹다'가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 ex) 물을 먹다/마시다
  • 어떠한 마음을 품다: ex) 마음을 먹다
  • 나이가 차다: ex) 나이를 먹다
  • 무언가를 획득하다: ex) 아이템을 먹다
  • 두려움을 느끼다: ex) 겁을 먹다 → 식겁
  • 욕을 듣다: ex) 욕을 먹다.
  • 물품이나 돈을 받다, 수익을 차지하다: ex) 뇌물을 먹다, 먹튀
  • 물이나 습기 따위를 빨아들이다: ex) 먹물을 먹인 붓, 풀먹인 셔츠
  • 어떠한 경기에서 등급이나 점수를 얻다: ex)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 물리적 또는 정신적 타격을 입히거나 당하다: ex) 주먹 한 방 먹여줘, 그놈에게 된통 먹여주고 오라고.
  • 관계를 맺다: ex) 나 걔랑 친구 먹었어
  • 무엇과 같거나 동등하다: ex) 그의 야심은 고래와(과) 맞먹다.
  • 성관계를 하다: ex) 철수가 영희를 따먹었다.
  • 효과가 있다: ex) 이 방법이 잘 먹힌다.
  • 소유권을 주장하다: ex) 이 땅은 내가 이미 먹었다.
  • 소리를 없애다: ex) 이 스피커는 고음을 먹는다.
  • 패배나 실패의 쓴맛을 보다: ex) A는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을 하고 B는 수강신청이 망해서 둘다 이렇게 고배를 마셨다.
  • 곤란을 겪게 하다: ex) 그는 그녀를 골탕먹였다. 그녀는 그에게 크게 엿을 먹은 것이다.

다만 먹는다는 표현을 다양하게 쓰는 건 한국만은 아니다. 먹다(eat)는 단어와 연관된 영어 숙어만 해도 eaten up(~를 사로잡다, ~를 써버리다), eaten into(~를 축내다), eat away/eat through(침식하다), eat at(~를 초조하게 하다), eat humble pie(실수를 인정하다), eat quiche(비열한 짓을 하다), eat the leek/eat dirt(치욕을 견디다), eat someone alive(누군가를 심하게 질타하다[46]) 등등 찾아보면 상당히 많다. 그외엔 한국어에선 마신다는 표현도 쓰인다. 고배를 마셨다는 표현이 그 예. 또한 역시 한국어에선 맛을 들이다, 맛을 봤다는 표현도 쓰인다.

7. 여담

  • 그 기록의 주체들은 관료들이나 선교사[47]거나 외국인들이었는데, 조선생활을 오래 한 외국인의 전문을 읽어볼 경우 '나는 처음에는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한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에 학을 떼었으나, 러시아 등지로 진출한 조선 사람들은 매우 절제하고 아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른 것이 아니라, 관료들로부터 심한 수탈을 당하기 때문에 당할 바에야 그냥 있을 때 먹어치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와 같은 내용으로, 말하자면 선량한 조선 백성들에게는 구시대 정권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고 서구가 들어와 문명의 빛으로 이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필요가 있다고 하는 제국주의적인 주장이었다.
  • 허나 이러한 조선 후기 수탈 강화와 기후 악화에 의해 가용식량이 줄어들어있을 때 한 방에 폭식해 버렸다는 설과 달리, 우리 민족은 쌀농사 위주의 고된 노동환경을[48] 고려하더라도 그냥 많이 먹은 듯하다. 그 근거로 위에 나와 있지만 비슷한 사회였던 주변국(중국, 일본 등)보다 많이 먹었다고, 선교사가 아닌 조선인 스스로의 기록과 중국, 일본 사람들의 기록을 교차검증해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인들의 대식과 식탐은 빈부와 귀천에 관계 없이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조선인들의 가장 큰 결점은 대식이다.



    프랑스 선교사, 샤를 달레 신부
  • 구한말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실학자들도 "이러한 조선의 대식 풍습은 빈부차와 풍흉 유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일반적인 습관이다."라고 기록하거니와 되려 이에 대해 까고 있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내어서라도 많이 먹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기록과 "쌀에 대한 지나친 탐식으로 소갈병(당뇨병)을 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한국인은 서양인에 비해 췌장이 작아서 당뇨에 취약하며, 탄수화물 과다섭취는 당뇨에 안 좋다.
  • 흔히 대식풍습과 관련돼서 거론되건 하는 아랫사람에게 상 물리기라고 해서 왕 수랏상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손님이 오면 상다리가 부러져라 내오는 게 주인의 예의였고 주인이나 손님이나 배가 터져라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잔뜩 먹고도 남도록 음식을 많이 차렸는데 주인과 주빈의 식사가 끝난 후 대궁과 잔반은 양반을 수행해 온 아랫사람들에게 그대로 내려가 그들도 배터지게 먹었다. 이렇게 남은 음식들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신과 하객들의 집으로 옮겨와 집안 식구들과 하인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했다. 나랏님의 은혜와 잔치 주최자의 감사를 고루고루 나누어 맛보는 의미였다.[49] 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에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남의 집 식사에 초대를 받으면 음식을 완전히 먹어치우지 않고 약간은 남겨두는 것이 예의였다.
  • 이러한 사치스러운 식습관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조선 임금도 마찬가지여서 영조 또한 기존의 수랏상에서 반찬 가짓수를 두세 가지로 제한하였고 그마저도 장 종류[50]에 그치는 대단한 검소한 습관을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 덕인지 영조는 역대 국왕들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평균을 놓고 봐도 상당히 장수했다.
  • 실제로 한국 음식이 유달리 염분 면에서 말이 많은 까닭은, 이것이 육체 노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위한 식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원래 전 세계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음식의 염분 함유량이 상당했다. 식품을 장기 보존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서 소금에 절이는 게 그나마 가장 좋은 보존법이였기 때문.[51] 그나마 서양의 경우는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를 개간하면서 식민지로부터 삥 뜯은 식자재를 잔뜩 들여와 식자재가 풍부해지자 장기보존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점차 염분을 줄여나갔지만, 오랫동안 한반도라는 한정된 영토 안에서 식자재를 자급자족해야 했던 한반도는 그 시절 식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아직도 근대 시절 염분 함유량을 유지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다만 이는 현대 서구권의 고염분 식단을 설명하기 곤란한 면이 있는데, 당장 미국이나 유럽패스트푸드(예를 들면 KFC, 파파이스 등)나 과자류(국내에 유통되는 것 포함)를 보면 염분이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스팸도 일반적인 한국인 입맛에는 꽤나 짠 편인데,미국은 염분을 줄였다는 스팸 라이트가 한국의 일반 스팸과 염분 함유량이 비슷하다.
  • 동아시아에서 유독 한국에서만 숟가락을 많이 쓰는 것도 식사량과 연관이 있다는 가설도 있다.
  • 지식스쿨에 의하면 2018년 기준 아시아 국가 중 칼로리 섭취량이 가장 많은 국가 3위가 한국이라고 한다.#

8. 미디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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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그림 '새참'. 그림 속의 인물들이 수저로 퍼먹고 있는 밥그릇 크기를 보라. 이것만 봐서는 '그림이니까 의도적으로 과장한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파일:765787_1430406492.jpg
파일:zlqiJDR.jpg
중인 남자가 밥 먹는 모습이다.[52]
파일:여자식사.jpg
구한말 조선인들의 식사량
파일:bKYvLve.jpg
시대별 밥그릇 비교사진
차이나는 클라스에서의 한민족 식사량 관련 이야기[53]

9. 관련 문서




[1] 기독교 문화 이전과 이후의 대식가 이미지의 괴리로 북유럽 신화의 토르는 영웅이라 많이 먹고 많이 마신다는 서사로 사용되었지만 마블 영화판의 토르에선 유머 코드로 사용되었다.[2] 세종대왕이 초정약수를 배달시켜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미 18세기 조선에서 냉면 배달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면 설렁탕도 나온다. 전화가 들어오고 그 후 중식당이 들어오면서 중화요리 배달 개시.[3] 믿기 힘들다면 지금당장 구글을 켜서 미국의 급식 사진을 보자. 사진 몇 장 만으로 전체를 판단해선 안되지만, 대부분이 부실하다.[4] 쌀 3말은 삼국시대 기준 6kg이다.[5] 식사를 줄였다 해놓고 오히려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 앞의 기록을 '1끼'에 쌀 3말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번역은 이거다. 사실, 식사 횟수를 줄이면 그 대신 끼니당 식사량은 더 증가하는것도 사실이다. 식사를 되도록이면 정해진 시간마다 먹으라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어쩌다 한 끼를 거르면 그 다음 끼니에는 거른 끼니를 벌충하고자 하는 생리적인 욕구 때문에 평소보다 더 먹다 못해 과식을 할 위험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6] 무엇보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평화 기간이 찾아왔으니, 궁중의 식사량 또한 전시의 한정된 군량에 비해서는 풍족해지는 게 당연지사. 따라서 위 대목에서 점심을 거른다고 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처럼 소식이나 간헐적 단식(...)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한낮 동안 정무에 집중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밥을 몰아서 먹기로 했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7] 4군 6진을 개척한 조선왕조 시절과 고구려 시절 만주의 자연환경의 차이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조선 왕조는 고구려 시절과는 달리 농토로 이용하기 힘든 척박한 땅으로 변한 만주에 그렇게 큰 욕심을 내지 않았을 법하다.[8] 현대의 염장 식품들은 사실 '장기 보존'이라는 염장의 원래의 취지에는 부적합하다. 때문에 제품 설명서에 대놓고 냉장 보관을 하라고 적혀있을 정도. 과거의 염장 식품은 그 짠 소금물인 바닷물에 헹궈서 먹어야 할 정도로 엄청 짰다. 없는 집애서 굴비를 천장에 걸어놓고는 두 번 보면 짜다는 말이 남아 있을 정도니까.[9] 춘추전국시대 단위로 한 말은 3L로 현대 기준 대략 밥 15공기 정도이고, 고기 10근은 2.2kg 정도라 현대 기준으로 15인분 정도에 해당한다. 현대 기준으로도 고등학교나 대학교 운동부 남성이라면 회식 자리에서 평균적으로 1인당 이 정도씩 먹는 걸 보았을 때, 한 나라의 장군이라면 이 정도는 한 끼 식사로 충분히 먹었을 것이다.[10] 오늘날의 홉을 생각하면 5배씩이나 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지금 홉의 약 1/3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약 60ml, 지금의 한 홉은 대략 180ml인데, 지금 쓰는 홉은 1902년 일본의 것에 맞추어 개정된 단위인 것. 따라서 지금 한 공기인 210ml에 비교해 볼 때 당시의 7홉은 약 420ml가 된다. 즉, 오늘날 도량형으로 보면 한 끼에 보통 공깃밥 두 그릇씩 먹었다는 뜻이다.[11] 다만 현대 일본에서 재현한 에도시대 서민의 식사를 보면 일본인들도 마냥 소식만 한 건 아니었다. 출처[12] 영조는 오늘날에 봐도 장수했을 정도인 83세까지 살았다. 실제로 조선 왕들 평균수명은 47.1세였는데 사인이 성인병이 특히 많았다. 하지만 독보적으로 83세까지 살았으니 식습관이 나름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13] 단 영조 본인의 항목을 보면 나오지만 영조도 평생을 건강하게 산 것은 아니었고 이런저런 지병과 잔병치레로 고생한 왕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규칙적이고 영양 잡힌 식습관과 더불어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때그때 풀어버리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성격 덕에 스트레스성 병환이 거의 없었다. 동의보감에는 만병의 근원을 화(火)와 그 화를 참아서 생긴다고 썼는데 영조는 그 문제에 있어 자유로웠던 셈이다. 문제는 본인이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애먼 신하들은 물론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는 완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갈궈대서 정신병이 생기는 등 영조와 얽힌 주변 사람들은 매우 피곤한 삶을 살았다.[14] 1인당 마늘 섭취도 1위다.[15] 다만 해산물의 경우 생선소비량은 평범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잘 먹지 않는 어패류,해조류 등이 포함되어있는점은 감안 해야한다.[16] 지금의 오키나와. 다만 오키나와는 토질문제로 쌀농사가 힘들어 쌀밥이 귀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17] 참고로 이여송의 조상은 고려인이다. 이여송의 7대조 '이천년', 6대조 '이승경'은 고려 문벌귀족 출신이였고, 5대조인 '이영'이 고려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원나라로 도피하여 정착한 뒤 원이 멸망하고 명이 건국되면서 그 후손들이 명나라인으로 살면서 이여송으로 계보가 이어진 것이다. 한반도 출신 혈통임에도 한반도인들의 식습관을 보고 놀란걸 보면 그동안 이여송의 가문의 식습관이 중국인의 식습관과 똑같이 변했음을 알 수 있으므로, 한민족의 대식 문화는 사회적인 이유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18] 중국 바로 옆에 붙어있어 교화된 국가이면서 요리는 이렇게 다를 수 있냐고 한탄했다. 다만 한시를 짓고 유교적인 지식은 중국 뺨치게 발달했다고 놀라워했다.[19] 천주교 조선대리감목구 제5대 대목. 1866년 병인박해순교,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이다.[20]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 (Notes pour l`introduction a l`histoire de Coree, Daveluy, 1818-1866)>[21] 지금도 1인 1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닭의 사육이 산업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닭은 씨암탉이거나 노계, 즉 지금 치킨집에 납품되는 수준의 닭보다 육질이 질기고 큰 대형 닭이라고 봐야 한다.[22] 이 부분은 다블뤼 주교 본인이 직접 경험한 사실을 서술한 것은 아니다. 다블뤼는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이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을 직접 만날 수 없었다. 다만 정조와 정약용, 세조와 한명회·신숙주 등의 고사를 살펴보면 크게 틀린 소리는 아닌 듯(...) 참고로 정조가 정약용에게 내린 벌은 대나무 필통(오늘날의 연탄 굵기만한 것이다)에 독한 소주를 원샷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소주라는 것은 현대의 소주를 생각하면 안 된다! 물에 주정을 타 만드는 희석식이 아니라 청주 등을 증류시켜 뽑아낸 독주로 기본 도수가 30도부터 시작이다.[23] 여기에 덧붙여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본인들은 점점 부유해지는데 한국인들은 가난해지는것 같다고 사족을 붙였다.[24] 주한 미국공사관 대리공사로도 복무했다.[25] '음식이 쌓여 있었다.'라는 것은 아마도 고임음식일 것이다. 고임이 높을수록 받는 사람에게 더 예를 갖춘다는 의미이다. 고임음식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다면 환갑이나 칠순잔치를 보면 알 수 있다. 잔치상 맨 앞에 한과, 떡, 대추 등의 음식이 켜켜이 쌓여 올려져 있는 모습이 바로 고임음식이다.[26] 근대 시기 조선은 그 정도로 외국인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을 만한 행정력이 부재했다. 아예 입국시키지 않았다면 모를까 들어오게 해놓고 사람을 붙여서 감시할 만한 여력 같은 것은 없었다. 애당초 그런 게 가능했다면 오페르트 도굴 사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서에서도 보듯 외국 군인 흉내를 내면서 뻗대면 지방 관헌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북한처럼 그렇게 외국인 관광을 통제해도 결국에는 무언가 이상한 면모를 눈치채는 게 보통이다.[27] 오히려 언더우드의 예에서 보듯 '쓸데없이 밥만 축낸다' 식으로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는 사안이다. 또 다른 인용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글에도 조선에 대해 부정적으로 다룬 내용들이 꽤 많은 편이다. 기독교에서 부정적으로 여기는 칠죄종 중 하나가 지나친 식탐(탐욕)이니 많이 먹는걸 안좋게 보는건 당연한 것이다.[28]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알코올 도수 40도 전후의 술들이 인기있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갈수록 알코올 도수가 낮은 술이 메이저가 되는 까닭도 대다수의 다른 국가들에서는 술은 맛과 향을 음미하는 것에 더 집중해서 양은 적당히 곁들여마시는 정도를 추구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질보다는 양을 실컷 들이마시고자 하는 문화 때문에 비교적 덜 독한 대신 그만큼 더 마실 수 있는 술을 선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9] 문제는 이러다보니 식사를 준비하는쪽은 그만큼 식사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에 상당히 일찍 준비에 들어가야 하며, 그나마 점심이나 저녁은 그렇다고 쳐도 아침식사는 새벽에 일어나서 차려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삼시세끼를 꾸준히 정찬으로 준비해야하는 요리 담당은 말 그대로 하루종일 요리만 하고 남는 시간에 가사노동 좀만 하면 하루 일과가 다 끝나버린다. 그나마 냉장고의 보급으로 미리 준비해뒀다가 식사시간에 꺼내서 데워주기만 하면 되므로 준비 부담이 많이 줄었고, 이렇게 먼저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준비해줄 인력이 따로 없는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한국도 아침은 거르거나 간단히 먹는 서구식 아침 문화가 도입되고 있다.[30] 엘리베이터 정격하중의 1인 체중 기준이 65kg에서 75kg로 개정된 것도 기성세대 대비 신세대 남성의 평균 체중이 그만큼 증가한 것과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평균 키가 작았고 체형은 지금보다 더 날씬해서 남성 평균 체중이 60~65kg 정도였고 일반인 기준 70kg만 나가도 건장한, 통통한 체격이라는 인식이 있었다.[31] 일본 후생노동성 보고서, 미국 CDC 보고서, 영국 의회 보고서[32] 이는 연령이 늘수록 기초대사량과 운동량이 떨어지지만 식사량은 노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 정도씩은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33] #[34] 공적으로 도살되는 소가 500여마리, 사적으로 도살되는 소가 500여마리가 넘고 다 합치면 천 마리가 넘는다고 기록되어져 있다.[35] 我國, 內有二十四懸房, 外有三百六十州, 二十六大營及諸小營·諸鎭堡·諸郵官所屠, 已過五百餘首, 京鄕私屠, 又過五百餘首, 則通計一日爲千餘首, 一月爲三萬餘首, 又竝四名日京鄕公私所屠二三萬首, 而一歲爲三十八九萬首矣#[36] 물론 북한도 특권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로인해 극소수라도 비만이 있다고 한다.[37] 군인들은 업무 특성상 칼로리 소모량이 많아서 일반인보다 식사량이 많아야 정상이다.[38] 다만 밀의 단백가는 쌀보다 낮아서 실제 단백질의 효율성은 쌀이 더 높음도 감안 해야한다.[39] 이 말은 북학의에서 박제가도 언급한다. 그나마 서울은 한강이라는 커다란 강도 있고 조금나가면 바닷가지만 중부내륙지방은 살면서 해산물을 구경도 못해봤을 가능성도 높다.[40] 다만 몽골인 문서를 보면 한국인과 가장 유전적으로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과 여진족이고, 한족과 몽골인은 그 다음이라고 한다.[41] 차례도 원래는 이름대로 차를 올리는 제사였으나 숭유억불 정책으로 술을 올리는 제사로 바뀐다. 이름에만 차가 남아있는 셈이다.[42] 조선 후기 한양 도성 내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 원인에 대한 역사 문헌학적 고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대한의사학회, 2013.[43] 조선시대 무덤의 미라와 분변석에서 발견된 기생충알에 관한 연구, 전북대학교, 2009.[44] 한 예로 공중 목욕탕들을 대규모로 지었던 로마인들도 기생충에 많이 감염되었는데, 로마의 목욕탕은 지금처럼 물을 자주 빼는 게 아닌데다 목욕물 안에 들어가 식사나 성관계 및 배설까지 했기 때문에 수질이 더러워 기생충이 많았다.[45] 위 출처의 원문 트위터. 기사에서는 한끼에 이만큼 먹었다고 설명하지만 원 트위터에는 그런 내용이 없으며 다른 기록과 에도 시대의 하급 사무라이가 먹은 쌀의 양도 하루 750g이라고 하는걸 보면 하루에 소비하는 양으로 보는게 더 타당하다. 즉 1050g의 현미밥을 저 부실한 반찬으로 하루 2끼, 혹은 3끼에 나누어 먹은 것. 물론 일본 농민의 하루 식사량도, 사무라이의 하루 식사량도 현대인에게는 쉽게 먹기 힘든 많은 양이다.[46] 비슷하게 한국어에서도 '물어뜯다'라는 표현을 쓴다.[47] 기독교에서는 식탐을 포함한 탐욕을 죄로 여겼다.[48] 항목에도 나와 있듯, 쌀은 타 주식곡물에 비해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높지만, 그만큼 물과 인력을 많이 갈아넣어야 한다.[49] 서구에서도 궁중 연회 시 정량보다 좀 더 많이 준비해 연회가 끝난 뒤 참석한 귀빈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궁중의 식문화가 귀족사회에 전파될 수 있었다.[50] 영조는 고추장일화로 유명하기도 하다.[51] 대표적인 게 서양의 염장고기인데, 이건 그걸 만들어 먹던 서양 사람들 기준으로도 너무 짜서 바닷물에 헹구어서 먹을 정도였다. 그 짜디짠 바닷물로 '헹굴' 정도라면 얼마나 짠 건지는 안 봐도 비디오.[52] 이 사진은 프랑스에서 만든 엽서다.[53] 다만 해당 방송 분량은 식민사관과 민족사학이 두서없이 뒤섞인 끔찍한 혼종으로 취급되고 있으므로 그냥 '한민족은 옛날부터 많이 먹었다'는 부분만 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