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6 18:56:08

한민족의 식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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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그림 '새참'. 그림 속의 인물들이 수저로 퍼먹고 있는 밥그릇 크기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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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조선인들의 식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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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밥그릇 비교사진

1. 개요2. 상세3. 대식의 근거
3.1. 역사
3.1.1. 외국인의 평가3.1.2. 어휘
4. 단백질이 부족했는가?
4.1. 긍정론4.2. 부정론
5. 여담6. 둘러보기

1. 개요

한민족의 식사량을 역사적으로 분석한 문서다. 대한민국옛날부터 식신의 나라였다는 주장이 많다. 옛날에 조상님들이 쌀 몇 가마[1] 들고 옮기고 했다는 기록을 보면 많이 먹을만도 하다.

다만 근대 이전의 기록의 경우 조금 고려해야 할 부분은 있다. 고대에는 인물의 신분과 능력을 과시할 때 실질적인 지식이나 능력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인의 체구, 외모나 식사량, 주량 등도 그 '능력'에 포함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의 유능한 무장들이 말술을 마시고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도 결국은 '이렇게 술과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한다'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근황을 살피는 왕에게 밥을 1말에 고기를 10근씩이나 먹고, 한바탕 말을 타고 달렸다던 염파가 그 예.

또 그와 비슷한 의미로 작게는 개인의 부(富), 크게는 국가 전체의 국력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기록에서 인물이 대식을 했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 인물의 능력과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각색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아래에 언급할 김춘추도 이런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는 한국사뿐만 아니라 전근대 시대의 역사 전체의 보편적인 요소이다.

2. 상세

역사적 근거에 따르면, 현재 쓰는 일반적인 밥그릇의 크기는 350g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690g, 고려 시대에는 1,040g, 고구려 시대에는 무려 1,300g의 밥그릇이 발굴되었다. 게다가 삼국유사에서 김춘추가 하루에 먹는 양이 엄청나다.
왕은 하루에 드시길 3말[2] 9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6말, 술이 6말, 그리고 꿩이 10마리였다.[3] 성 안의 시장 물가는 베 1필에 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하였다. ─ 삼국유사

부여에 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부여는 오곡을 기르기 적합하다."고 적혀 있다. 참고로 중국의 오곡과 한국의 오곡은 다르며 위서 지리지에서 오곡과 쌀을 따로 기록한 만큼 이 오곡에 쌀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부여는 후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또 7세기 때 발생한 고구려-당 전쟁 때 기록을 보면 만주 지역인 개모성에 양곡 10만 석, 요동성에 양곡 50만 석이 저장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물론 모두 쌀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이 두 성에 있던 곡식의 양은 조선 전체 군량과 맞먹는 숫자였다. 물론 초기 고구려는 산악지대에 있어서 먹을 것이 부족해 이웃 국가들을 약탈하며 먹을 것을 충당했으나 이후 영토가 넓어져서는 농사가 잘 되는 부여의 영토를 확보하면서 풍족하게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에는 만주 지역에선 이모작이 불가능하고 조선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해 농사를 짓기 전까지는 벼농사가 오랫동안 되지 않았던 지역이었지만 고구려가 있었던 그 시절은 연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3~5도 정도 더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북위 45도인 만주 중부 지역에서도 이모작이 가능했고 동토인 그린란드도 실제로는 풀이 뒤덮인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기 10세기에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연 평균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린란드는 동토가 되었고 만주 지역은 벼농사가 힘든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1300년 전과 지금은 기후가 약간 달랐다.[4]

한민족은 현대인과 같이 을 일반적인 밥으로 먹듯이 곡물을 주식으로 섭취했지만 지금과는 달리 쌀밥을 원없이 즐겨 먹는 건 주로 높은 신분에 한정되었다. 삼국시대 한반도의 귀족 계층은 쌀밥을 먹었지만, 평민들은 잡곡밥을 먹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많이 보급된 조선 후기에 와서도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의 기록에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적었다. 그나마 수전이 먼저 보급되고 기후 조건상 농사가 활성화된 남부 지방은 경제 조건만 되면 쌀밥을 먹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거꾸로 돌리면, 경제 사정이 안 되어서 쌀이 없으면 잡곡밥을 곁들여 지어 먹어야 했다는 소리다. 헌데 이런 잡곡밥은 먹어도 배가 금방 꺼지는 속성이 있다. 이걸 봤을 때, 큰 밥그릇에다가 엄청난 양의 밥을 먹는 것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고된 농사 일을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현재도 운동선수들은 보통 사람보다 식사량이 많다. 고기뷔페에서는 운동선수 출입을 통제할 정도.

정리를 하자면 한민족이 옛부터 밥을 현대인에 비해 양적으로 많이 먹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다 쌀밥이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현재 먹는 흰쌀은 옛날에 먹던 쌀도 아니었다. 흔히 '백미'라 부르는 흰쌀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에 완전 정착했다. 이 말인즉, 옛날 조상들이 대식을 했다는 것을 지금 먹는 하얀 쌀밥이 꾹꾹 담겨진 밥 공기로 환산하면 오류라는 소리다.

또한 이러한 대식이 과연 전반적인 생애에 걸친 충분한 영양 공급을 보장했다고 평가할순 없다. 정말로 대식을 허구헌 날 했다면 한민족의 신체사이즈는 이미 2010년대 도달하여 몇 년째 그대로인 남 173~174cm, 여 160cm~161cm를 이미 도달했어야했으나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는 일시적으로 음식이 주어지면 과식하였을지 모르나 실제적으로 그것이 충분한 영양공급을 증명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냉장시설도 없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3. 대식의 근거

3.1. 역사

한민족이 예로부터 대식을 했다는 기록들은 찾아보면 아주 많다. 참고 참고2

임진왜란 때 기록한 <쇄미록>이란 책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을 설명했다. 쇄미록에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적었는데, 이것은 현재 먹는 1공기의 5배의 양이다.(혹은 기록을 보는 관점에 따라 2배정도, 각주 참고)[5]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것과 관련한 비화가 있었는데,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량을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하니 1달치 정도였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1달만 버티면 왜군들이 물러가리라 생각했는데 고니시 부대의 식사량을 본 밀정이 왜군들의 식사량이 조선군의 1/3정도임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왜군들이 승리를 위해 일부러 식사량을 줄인다고 생각했다고.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낸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을 마신다'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인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입니다'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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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먹는 건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 왕의 일과를 보면, 하루 5끼씩은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영조는 대표적으로 소식을 하고 덕분에 장수한 임금인데, 소식을 한 기준이 5끼에서 3끼로 줄이고, 고기 위주의 반찬에서 채식위주의 반찬과 고단백질 고기를 더한 현대기준으로 균형잡힌 식단이였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너무 소식한다고(...) 크게 우려했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사실 점심이란 아침과 저녁 사이에 먹는 간단한 음식을 가리키는 중국어로, 우리가 흔히 쓰는 딤섬이 바로 점심을 뜻하는 광둥어다.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아침과 저녁 2끼만 먹기가 평상시의 식습관이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 사람들은 하루 2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3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이었다. 그러나 말이 하루 2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처럼 육체적으로 활동하는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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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농부 3~4명이서 점심에 잠시 쉴 때 간식거리로 복숭아 25개를 껍질째 우적우적 먹곤 했다고 한다.[6] 이러한 새참문화는 농사나 육체노동을 하는 곳에서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1960년대의 일반인의 사기 밥그릇은 용량이 650cc가 조금 넘는 정도인데 2010년대 현대의 공기밥 밥그릇은 300 cc 정도로 2배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그 당시는 밥그릇에 넘치게 고봉밥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밥의 양이 2.5배 정도는 된다. 농부 등 육체노동자가 아닌 도시 사무직 일반인 어른 남자가 매일 사용한 밥그릇이다. 쌀로는 대략 200g 정도이다.

1970년의 한국인 1인당 연간 양곡소비량은 190kg이었고 그중 쌀이 136kg 정도였다. (농가 비농가 합계 평균) 현재는 연간 쌀 소비량이 1인당 60kg 정도로 줄어 들었다. 1일 쌀 소비량은 170g 정도. 공기밥 1그릇은 밥으로 210g, 쌀로는 90g. 칼로리로는 약 300kCal 정도 이다.

3.1.1. 외국인의 평가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에 힘쓰는 건 으뜸이다. 유구국[7]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며 비웃었다."이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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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회 독일인 수도자들.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8]의 기록에서도 대식을 하는 조선인들의 일화를 확인 할 수 있다.[9]
다식에 대해서는 대신과 평민의 구별이 없다. 조선 사람들은 많이 먹는 것이 곧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며, 식사의 질 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법이 없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신자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 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된 어느 노인은 식욕이 없다 하면서도 다섯 사발을 비웠다. 조선 사람들은 열 사발을 감당하는 자를 장사라고 부른다.

를 잡을 일이 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까지 먹는 사람도 있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 한다.

조선의 어머니들은, 아이의 배를 손으로 두들겨 보면서 뱃속이 가득해지는 최후까지 밥을 채워 넣는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 보다가 속이 꽉 찼을 때에 비로소 밥 먹이는 것을 중단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1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10]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인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구한말 조선을 여행했던 오스트리아의 귀족 출신 여행가인 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텍(1854~1918)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조선인들이 대식가라는 점에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내가 일본에 갔었을 때, 일본인들은 자신의 이웃이 자신들보다 3배 가량 더 많이 먹는다고 내게 말했었는데, 나중에 제물포 개항장에 와 보니, 정말로 그랬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일정한 시각에 식사를 하는 반면, 조선인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식사를 하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밥이, 붉은 고추 한 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영국 출신 여행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선교사 그리피스 존의 여행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들은 보통 한 끼에 3~4인분의 양을 먹어치우며, 3~4명이 앉아 있으면, 그 자리에서 20~25개의 복숭아와 참외가 없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인들은 보통 일본인들의 2배를 먹는다.
그리피스 존

3.1.2. 어휘


'먹다'라는 동사가 아주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 때 식생활은 한민족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 ex) 물을 먹다/마시다
  • 어떠한 마음을 품다: ex) 마음을 먹다
  • 나이가 차다: ex) 나이를 먹다
  • 무언가를 획득하다: ex) 아이템을 먹다
  • 두려움을 느끼다: ex) 겁을 먹다 → 식겁
  • 욕을 듣다: ex) 욕을 먹다
  • 물품이나 돈을 받다, 수익을 차지하다: ex) 뇌물을 먹다, 먹튀
  • 물이나 습기 따위를 빨아들이다: ex) 먹물을 먹인 붓, 풀먹인 셔츠
  • 어떠한 경기에서 등급이나 점수를 얻다: ex)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 물리적 타격을 입히거나 당하다: ex) 주먹 한 방 먹여줘
  • 관계를 맺다: ex) 나 걔랑 친구 먹었어
  • 무엇과 같거나 동등하다: oo 와(과) 맞먹다
  • 정조를 유린하다 : ex) 그 사람 내가 따먹었어
    • oo 주면 먹냐?[11]
...등등, '먹다'는 표현이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특히 맨 마지막 표현의 경우 섹드립 전용 표현으로 일상적인 회화에서는 절대 쓰일 일이 없는 저속한 용례임을 생각해 보면, 한민족에게 '먹다'라는 표현이 가진 의미가 얼마나 넓고 깊게 여겨지는지 알 수 있다.[12]

4. 단백질이 부족했는가?

4.1. 긍정론

조선은 농업 국가였고 주식도 곡물이었기에 탄수화물 섭취는 그럭저럭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다른 영양소에 비해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복날에 고기를 구할 수 없으면 를 즐겨 잡아먹었다든가, 고기 음식 중에 내장을 비롯해 버리는 부위가 없을 정도라는 것, 대식하는 식사 사진에서 유독 밥은 어마어마한 데 비해 반찬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이 근거가 된다.

다른 가설로는 미곡의 저장 방식이 발달하지 못해 저장기간이 길지 못하고, 유통망의 문제로 각 지역에 골고루 분배되지 못하므로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서 칼로리를 비축해두려는 풍조가 만연했었다는 가설과, 이 시기는 노동 및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사소한 용무조차 육체노동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저 정도 칼로리를 축적해둘 수 밖에 없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농경사회였던 시절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별을 불문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금방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먹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3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이니 생선을 단백질 대체재로 쓸 수 있지만, 조선 시대에도 고대 로마만도 못한 도로 사정을 갖고 있었던 한반도 국가 특성상 내륙 지방에서 생선값이 높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박지원"생선 내장을 바닷가에선 거름으로 쓰는데 서울에선 한 줌에 한 푼이냐"라고 할 정도.

특히 조선시대가 600년임을 감안했을 때 한해 두해 푸짐하게 육류가 공급되었던 때는 작게나마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저술은 그런 시기에 남겨진 것일 수도 있다.

정말로 조선시대 때 단백질 공급이 풍부했다면 동시대에서 신장이 전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압도해야하는 것이 맞다. 최소한 그게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유전적 평균 신장 한계점으로 평가되는 남 173~174cm, 여 160~161cm에 도달했어야만 한다.# 하지만 위에 나온 기사 자료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비교했을 때 한국인의 신장은 매우 작은 축에 속했고 유전적 신장 한계점인 174cm, 161cm에는 택도 없이 부족한 키다. 유전적 차이를 가정하더라도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에 비해서 작은 편이다. 특히나 기사에 나온 포르투갈은 그 당시 키는 최소 우리보다 5cm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2010년대 한국인의 평균 키는 남자 기준으로 포르투갈보다 크다.

뿐만 아니라 여성 기준으로 볼 때 평균 키가 큰 최근 100년간 제일 많이 자란 국가 중에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이 시기의 평균 키라는 것은 일제의 수탈로 인하여 줄어든 시기라고 보기 어렵다.# 이제 막 일제의 수탈이 시작된 시기였다. 이 시기의 저신장 및 유전적 한계점 키까지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단백질 공급 및 영양 공급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좋다고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조선 말기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단백질 공급은 굉장히 열악한 실정이었다.

4.2. 부정론

유럽 국가들에도 개고기 요리가 있고, 유목민족 출신이었던 게르만족에서 소시지가 나왔다. 계란도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만약 단백질 섭취량이 부족해서 탄수화물을 많이 섭취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쪽에서 정당한 역사 기록을 찾거나 명시적인 증거를 찾아서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

오히려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다산 정약용의 글, 박제가의 북학의만 봐도 조선 사람들이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13]라며(출처) 차라리 먹으려면 소는 농사를 지어야 하니 중국인들처럼 돼지도 먹고 도 먹으라는 말도 있었던 데다가, 개와 생선만 해도 복날에만 먹은 게 아니라 18세기 술집에서 술안주로 가장 인기 있었던 음식이 생선 요리와 개장국이었으며 일반적인 술집 손님의 대부분은 서민이었다(출처). 또한 김동진 저,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같은 책과 조사만 봐도 조선 왕조 600년 내내 소를 많이 잡아먹었다.[14] 그나마 먹지 못한건 국가적인 전염병이던 우역이 돌았을 때와 경신대기근 정도.

옆 나라 일본 같은 경우, 혼다 마사노부의 '농민은 죽지도 살지도 않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5공 5민, 세금 50%의 가혹한 지배에[15] 육식 금지령으로 서민들은 고기를 거의 못 먹었다는 점과 쌀조차도 충분히 못 먹었다는 점, 육식 금지령에다가 대식을 하기는커녕 소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영양학적으로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 봐도 단백질이 부족해서 대신 탄수화물을 대량으로 섭취했다는 말은 근거가 부족하다.[16][17]

결론적으로 한민족, 우리가 정확하게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조선 사람들이 대식을 한 것은 사실이고, 역사 기록과 유골 분석으로 동시대 다른 나라사람들과의 신장을 비교한 것으로 볼 때, 조선 시대 서민들조차도 동시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절대적인 양은 아닐지언정 상대적으로 봤을땐 단백질 섭취량이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시대 서구와 비교하자면 우유를 먹지 않았으며,[18] 동시대의 중국과 비교했을 때 양은 거의 먹지 않았고 돼지는 먹기는 했지만 소고기에 비해서도 비경제적이라고 여겨졌기에[19] 소비량은 그다지 많지 않아. 주로 개와 닭[20], 생선으로 단백질을 섭취했다.

5. 여담

이러한 대식 문화를 근거로 한국인이 야만스럽고 무절제한 민족이라고 까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한국 역사와 그에 합당한 추론이 아닌 현재의 가치기준으로 판단한 단편적인 기록을 확대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기록의 주체들은 관료들이나 선교사[21]거나 외국인들이었는데, 조선생활을 오래 한 외국인의 전문을 읽어볼 경우 '나는 처음에는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한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에 학을 떼었으나, 러시아 등지로 진출한 조선 사람들은 매우 절제하고 아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른 것이 아니라, 관료들로부터 심한 수탈을 당하기 때문에 당할 바에야 그냥 있을 때 먹어치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와 같은 내용으로, 말하자면 선량한 조선 백성들에게는 구시대 정권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고 서구가 들어와 문명의 빛으로 이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필요가 있다고 하는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주장이었다.

허나 이러한 조선후기 수탈강화와 기후악화에 의해 가용식량이 줄어들어 있을 때 한방에 폭식해 버렸다는 설과 달리 우리 민족은 쌀농사위주의 고된 노동환경을[22] 고려하더라도 그냥 많이 먹은 듯 하다.
조선인들의 대식과 식탐은 빈부와 귀천에 관계 없이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조선인들의 가장 큰 결점은 '대식'이다.
프랑스 선교사, 샤를 달레 신부
구한말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실학자들도 "이러한 조선의 대식풍습은 빈부차와 풍흉 유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일반적인 습관이다"라고 기록하거니와 되려 이에 대해 까고 있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내어서라도 많이 먹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기록과 "쌀에 대한 지나친 탐식으로 소갈병(당뇨병)을 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흔히 대식풍습과 관련되서 거론되건 하는 아랫사람에게 상 물리기라고 해서 왕 수랏상 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손님이 오면 상다리가 부러져라 내오는 게 주인의 예의였고 주인이나 손님이나 배가 터져라 먹는 게 예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잔뜩 먹고도 남도록 음식을 많이 차렸는데 그렇게 남은 음식물은 양반을 수행해 온 아랫사람들에게 그대로 내려가 그들도 배터지게 먹었다. 특히나 궁중이나 민간에서 큰 잔치를 열 때에는 며칠동안 음식물을 엄청난 양으로 미리 준비하기 때문에 정작 잔칫날에는 준비해둔 음식이 모두 굳어버리거나 뻣뻣해져서 먹을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잔치에 온 하객들은 이 꾸드러진 음식을 넣어서 데운 전골[23]과 술 몇 잔을 먹고 돌아가는 것이 다반사였다.[24] 이렇게 남은 음식들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신과 하객들의 집으로 옮겨와 집안 식구들과 하인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했다. 나랏님의 은혜와 잔치 주최자의 감사를 고루고루 나누어 맛보는 의미였다.[25]

이러한 사치스러운 식습관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조선임금도 마찬가지여서 영조 또한 기존의 수랏상에서 반찬 가짓수를 두세 가지로 제한하였고 그마저도 장 종류에 그치는 대단한 검소한 습관을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 덕인지 영조는 역대 국왕들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평균을 놓고 봐도 상당히 장수했다. 이완용 또한 이러한 낭비습관을 지적하면서 식단을 샌드위치로 바꿨다고.

그러나 양반이나 임금들도 통상 하루 2끼를 먹었고(여름은 3끼) 중간에 간식으로 국에 밥 말아서 한두 끼 때우는 게 일반적이었으므로 통설이나 편견과 달리 그렇게 많이들 먹은 건 또 아니라고 한다. 손님이 늘 오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점심이라는 말도 '점(點)을 속(心)에 찍는다'는 말이였고 그 말마따나 굉장히 간소하게 먹었다. 그리고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요새도 노가다판이나 조선소의 함바집[26]이나 식당에서는 식사량을 일반인과 달리 푸짐하게 준다.[27] 확실히 사진에서 나온 저 정도는 좀 많긴 한데, 조선소 같은 육체 노동이 잦은 곳에선 일반인의 2~3배 가량의 식사를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설계직 모임과 생산직 모임이 옆에 붙어서 밥 먹는 양을 비교하면 확실한 차이가 보인다.

실제로 한국 음식이 유달리 염분 면에서 말이 많은 까닭은, 이것이 육체 노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위한 식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원래 전세계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음식의 염분 함유량이 상당했다. 식품을 장기 보존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서 소금에 절이는 게 그나마 가장 좋은 보존법이였기 때문.[28] 그나마 서양의 경우는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를 개간하면서 식민지로부터 삥 뜯은 식자재를 잔뜩 들여와 식자재가 풍부해지자 장기보존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점차 염분을 줄여나갔지만[29], 오랫동안 한반도라는 한정된 영토 안에서 식자재를 자급자족해야 했던 한반도는 그 시절 식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아직도 근대 시절 염분 함유량을 유지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나마 이게 육체 노동이 대다수이던 조선 시대에는 먹는 만큼 다 빠져나가서 문제가 덜했지만 육체 노동이 줄어든 현대에도 같은 양의 염분을 섭취하니 문제가 커진 것.

또 이 같은 대식의 영향 덕분인지는 몰라도 한국인들의 체격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보다 더 큰 편이다. 조선시대 때만 하더라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 유적지인 동래읍성에서 발굴된 조선인 유골들을 분석해 본 결과 16세기 당시 조선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대략 164cm였고 여성의 평균 신장은 대략 153cm였다고 한다. 그런데 에도 막부 시절 일본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55cm 정도에 불과했고 여성은 더 작아서 144cm 정도였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한국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닮지도 않았고 체격이 크고 훨씬 잘 생겼다."고 했으며 당시 한국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3.4cm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이로 볼 때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남성들 평균 신장은 대략 163~164cm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1937년 일제 징병 검사 데이터를 보면 함경도 지역의 경우 평균 신장이 170cm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반면, 일본인들의 경우 1937년 징병 검사 데이터에서도 남성들의 평균 신장이 158~162cm에 불과하였다. 중국인들의 평균 신장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고 지역별로 편차가 큰 편이라 자세하진 않지만 한, 중, 일 동양 3국을 모두 방문한 서양 사람들이 하나같이 한국인들이 중국인, 일본인보다 체격이 더 크다고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대체로 우리보단 좀 작았던 듯하다. 현재도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서 평균 신장이 제일 큰 민족은 한국인이다. 아마 대식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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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가마니는 80kg이다[2] 참고로 쌀 3말은 24kg. 하루에 20kg짜리 쌀 1포대를 먹어치웠던 것이다(..)[3] 때문에 앞의 기록을 '1끼'에 쌀 3말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번역은 이거다.[4] 고려조선압록강두만강을 넘어 옛 고구려, 발해, 부여의 영토를 적극적으로 수복하려 하지 않은 이유가 단순한 국력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기후변화 역시 한 원인이라고 한다. 4군 6진을 개척한 조선왕조 시절과 고구려 시절 만주의 자연환경의 차이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조선 왕조는 고구려 시절과는 달리 농토로 이용하기 힘든 척박한 땅으로 변한 만주에 그렇게 큰 욕심을 내지 않았을 법하다.[5] 이 기록을 두고도 말이 많다. 일단 현대 상식으로는 1끼에 밥 5그릇은 상상이 안 가기 때문에.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재 먹는 흰 쌀밥 1공기와 당시의 밥을 같이 보면 곤란하다. 인터넷 상에 앞에 명시한 쇄미록의 인용 부분에서는 쌀이라고 명시했지만 다 똑같이 붙여넣기한 글이 돌아다닐 뿐이고, 실제 쌀인지 잡곡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덧붙여 모내기가 보급된 시기라든가 당시의 정황을 볼 때 일반 백성이 1끼에 쌀을 저렇게 먹을 만했는지도 의문. 게다가 홉의 단위가 지금과 다르지 않냐는 의문 제기도 있다. 근데 실제로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지금 홉의 약 1/3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약 60ml, 지금의 한 홉은 대략 180ml인데, 지금 쓰는 홉은 1902년 일본의 것에 맞추어 개정된 단위인 것. 따라서 지금 한 공기인 290ml에 비교해 볼 때 당시의 7홉은 약 420ml로, 확실히 많은 양이긴 하나 5-6배에 달하는 양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6]복숭아를 현재의 개량된, 과육이 많은 복숭아와는 거리가 먼 지름 3cm 정도의 야생 개복숭아(돌복숭아)가 아닌가 추증할지도 모르지만 그럴리 없다. 현재 우리가 먹는 개량종은 1900년대 초에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그 이전의 복숭아가 전부 개복숭아였을 거라는 착각 때문에 생긴 오류다. 현재의 복숭아가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인 이유는 그게 가장 생산량이 많고 당도가 높은 등 상품성이 뛰어나기 때문일 뿐 이전에 먹던 복숭아도 크기 자체는 지금의 복숭아와 비슷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에 이미 현재의 복숭아처럼 품종 개량된 복숭아를 먹었다. 하지만 실제 토종작물을 기르는 학자들이나 농부들은 토종참외도 종류가 다양하고 일부는 개량종에 버금가는 크기이기도 해서 단정짓기 힘들다고. 단순히 현대인 기준에서 작은 야생참외를 먹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이미 조선 후기에 참외나 과일을 재배하고 공급하는 체계가 갖춰져있던 상태이기 때문에 야생의 참외라고 단정짓는 것은 역으로 심각한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애초에 이런 기록을 남긴 이들이 전부 서양인들인데 그들이 본 과일이 그렇게 작았다면 그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리가 없다.[7] 지금의 오키나와.[8]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1866년 병인박해순교,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9]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 (Notes pour l`introduction a l`histoire de Coree, Daveluy, 1818-1866)>.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이 부족해 낯선 관습을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10] 지금도 1인 1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닭의 사육이 산업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닭은 씨암탉이거나 노계, 즉 지금 치킨집에 납품되는 수준의 닭보다 훨씬 오래 키워서 덩치가 크고 육질이 질겼다고 봐야 한다. 토종닭을 생각하면 된다.[11] 그냥 직관적으로 대상이 음식일 수도 있고, 위의 의미처럼 이성의 정조일 수도 있다.[12] 다만 먹는다는 표현을 다양하게 쓰는 건 한국만은 아니다. 먹다(eat)는 단어와 연관된 영어 숙어만 해도 eaten up(~를 사로잡다, ~를 써버리다), eaten into(~를 축내다), eaten away(~를 침식하다), eat at(~를 초조하게 하다), eat humble pie(실수를 인정하다), eat quiche(비열한 짓을 하다), eat the leek(치욕을 견디다) 등등 찾아보면 상당히 많다.[13] 현대 스포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소고기를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다. 체력과 지구력을 중시하는 종목에서는 기름기가 많은 돼지고기보다 소고기를 권장하는 데, 힘 쓰는 일이 많은 농민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차범근만 해도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밥만 먹고는 훈련을 감당하기 힘들어 독일인 선수들처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고기를 꾸역꾸역 씹어 체력을 보충했다고 한다.[14] 그런데 많이 먹었다는게 연 4kg다. 당시 기준에서나 농사에 쓰는 소중한 소를 먹으니 너무 많이 먹는다는 소리가 나올 수 있겠지만 현재 한국인들이 소고기만 연 15kg, 다른 고기까지 합쳐서 50kg 이상을 섭취하는 것을 생각하면 영..[15] 일본의 세율은 센코쿠 시대 종결 후 일단은 줄었다. 그리고 막번 체제 하에서도 세율 책정은 번의 재량이었기 때문에 세율은 지역마다 달랐다. 대체로 공식적인 세율은 40%~60%정도로 추정된다. 물론 실제로는 과세기준을 그만큼 낮춰잡았기 때문에 30%정도로 줄었다. 다만, 이 정도만 해도 당시 세계적으로 비견되기 어려울 정도의 중과세다. 우리나라나 중국은 실질적으로 10% 수준의 실효세율을 기록했다. 실제로는 지방 관리들이 떼먹는 잡세들이 많기는 했지만, 일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저세율이었다.[16] 물론 생존은 가능하지만, 이런 수탈이 일본인들의 체격에 영향을 끼친 것 역시 사실이다. 더구나 현재 기준으로 보면 에도 시대 일본인들도 상당히 많이 먹었다. 현재보다 큰 밥공기에 쌀밥을 고봉으로 얹어서 맛깔나게 먹는 모습은 일본 사극에도 종종 나오는 장면이고, 당대에 그려진 일본 민화에서도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일빠들이 "ㅉㅉ, 미련하게 쳐먹어대는 조센징들"이라는 비아냥은 개소리라는 거다.[17] 애초에 단백질이 부족해서 대신 탄수화물을 대량으로 섭취했다는 말에 어폐가 있다. 부족한 단백질을 탄수화물로 채운게 아니라, 곡물에 소량 들어있는 단백질로 채우려고 다량의 곡물을 먹었고 하는게 옳다.[18] 한우우유를 많이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유가 귀했다. 그래서 우유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국왕이나 왕족, 우유소 관청 직원 등으로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나마도 우유를 잘 생산하는 품종이 아니였기 때문에 사람이 우유를 빼먹으면 그만큼 송아지가 먹을 양이 줄어들고 그 말인즉 우유를 덜 먹은 송아지는 더 약하게 자리고 그만큼 농사일을 더 못하며 그만큼 식량 생산량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왕조차도 내키는 대로 마실 수는 없었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보양식의 개념으로나 어쩌다 한 번 먹을 지경이였다(아무리 우유가 귀하다 귀하다 하지만 감히 전하의 목숨값보다 귀할까?). 타락죽 참조.[19] 소는 농사에 쓸모가 있었지만 돼지는 농사에 쓸수가 없던데다가 여름철에는 상하기 쉬웠고, 기생충 문제까지 겹쳐서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같은 맥락에서 이슬람교에서 교리적으로 돼지고기를 금한 건 돼지를 키우기 어려운 여건이 작용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돼지를 먹을 사람은 먹기는 했고 19세기부터는 돼지고기의 소비가 어느정도 늘어나기는 했다.[20] 사실 계란을 얻는 용도고, 실제로는 을 많이 먹었다. 한양에는 생치전, 건치전이 구분되어 있을 정도로 살아 있는 꿩과 가공해서 말린 꿩고기가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냉면 육수도 원래는 꿩고기고,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도 꿩고기가 없을 때 닭을 먹은 것을 빗대어 만들어졌다.[21]독교에서는 탐욕, 특히 식탐을 심한 타락의 행위로 여겼다.[22] 항목에도 나와있듯 쌀은 타 주식곡물에 비해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높지만 그만큼 물과 인력을 많이 갈아넣어야 한다.[23] 이 전골에서 유래한 음식이 열구자탕이다.[24]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여기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25] 물론 이러한 풍습은 한민족만의 독창적 풍습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궁중 연회 시 정량보다 좀 더 많이 준비해 연회가 끝난 뒤 참석한 귀빈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궁중의 식문화가 귀족사회에 전파될 수 있었다.[26] 원래는 飯場집(한국식 한자음으로는 반장집)이나 일본식 한자음으로 함바집이라고 하는 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27]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육체 노동강도가 일반회사 사무직의 4~5배, 공장생산직의 2~3배를 가뿐히 넘기는 수준이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칼로리가 필요하다. 건설노동자의 경우 노가다의 꽃이라 불리는 유로폼 운반과 벽돌운반 업무의 경우 하루 5,400Kcal 이상을 소모한다. 건설직 일과시간에 법적으로 오전 참, 오후 참을 합쳐서 간식시간을 30분씩 주는 걸 법으로 괜히 정한 게 아니다. 또는 군필자들은 훈련병 시절 짬밥을 진짜 위에 구멍 뚫린 마냥 신들린듯 퍼먹어도 살이 찌기는커녕 쭉쭉 빠지는 것을 경험해 봤을텐데 사실 반찬이 정량배식이라 밥만 퍼먹는다, 군대 훈련이 그만큼 칼로리 소모가 높기 때문이다.[28] 대표적인 게 서양의 염장고기인데, 이건 그걸 만들어 먹던 서양 사람들 기준으로도 너무 짜서 바닷물에 헹구어서 먹을 정도였다. 그 짜디 짠 바닷물로 '헹굴' 정도라면 얼마나 짠 건지는 안 봐도 비디오.[29] 이것도 틀린 게, 보존을 위한 염장 처리는 줄었지만, 음식 조리할 때 소금을 팍팍 치는 건 외국도 마찬가지다. 당장 미국이나 유럽패스트푸드(예를 들면 KFC, 파파이스 등)나 과자류(국내에 유통되는 것 포함)를 보면 염분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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