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15:49:34

쇼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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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026><colcolor=#dca600>
일본 제45대 천황
쇼무 천황
聖武天皇
파일:쇼무 천황.jpg
출생 701년
일본 나라현 후지와라쿄
(現 일본 나라현 가시하라시)
사망 756년 6월 4일 (향년 55세)
일본 나라현 헤이조쿄
(現 일본 나라현 나라시)
능묘 사호야마남릉([ruby(佐保山南陵, ruby=좌보산남릉)])[1]
재위기간 제45대 천황
724년 3월 3일 ~ 749년 8월 19일
상황
749년 8월 19일 ~ 756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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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026><colcolor=#dca600> 오비토([ruby(首, ruby=수)])
부모 부황 몬무 덴노
모후 후지와라노 미야코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배우자 코묘 황후
자녀 2남 3녀
종교 불교
관저 헤이조쿄([ruby(平城京, ruby=평성경)])
별호 사미승만(沙彌勝滿)
존호 승보감신성무황제
(勝寶感神聖武皇帝)[2]
한풍 시호 쇼무 덴노([ruby(聖武天皇, ruby=성무천황)])
화풍 시호 천새국압개풍앵언천황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3]
연호 진키([ruby(神亀, ruby=신귀)], 724년 ~ 729년)
덴표([ruby(天平, ruby=천평)], 729년 ~ 749년)
덴표칸포([ruby(天平感寶, ruby=천평감보)], 749년)
}}}}}}}}} ||
1. 개요2. 생애3. 사후4. 이론5. 가족관계6.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45대 천황.

2. 생애

7세 때 아버지인 몬무 덴노가 젋은 나이에 붕어하고, 어머니인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 ?~754,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장녀)는 건강이 약해져 아들 오비토(쇼무 덴노)를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할머니인 아헤가 천황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714년 오비토는 성인식을 치르고 태자가 되었으나 병약하여 그의 고모 히타카가 겐쇼 덴노로 대신 즉위했다. 그후 오비토노 미코가 24세가 되던 해 겐쇼 덴노로부터 양위받아 쇼무 덴노로 즉위하게 되었으며, 후지와라 집안에서 황후를 맞이했는데 이 황후가 코묘 황후였다.

쇼무 덴노는 황태자가 요절한 후 738년 장녀인 아베 내친왕을 황태녀로 삼았다. 쇼무 덴노의 다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4]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딸인 아베가 황태녀가 된 것은 당시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후지와라 집안이 그들의 혈통을 이어받은 황족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5]

쇼무 덴노는 건강문제로 749년 아베 내친왕에게 양위한다는 결단을 내렸는데, 여성 천황이 아닌 남성 천황이 여성에게 양위를 행한 것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로써 최초의 독신 천황인 고켄 덴노가 탄생하게 되었으나, 적계 황통이 아닌 그녀의 즉위는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결국 756년 쇼무 덴노가 붕어하자 고켄 덴노의 정통성 논란과 황위를 둘러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쇼무 덴노의 연호는 '덴표'였다. 이 시기에 유난히 재해가 많이 일어났고, 천연두가 유행했다. 쇼무 덴노는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자주 천도를 행했지만 관료들과 백성들의 반발이 심하여 다시 헤이죠쿄에 복귀했다. 더불어 쇼무 덴노는 국가의 위기를 물리치기 위하여 741년 고쿠분지(國分寺, 국분사) 건립의 조(詔)[6]를 내려 전국 각지에 고쿠분지를 짓도록 했고, 743년에는 대불개안(大佛開眼)의 조를 내려 도다이지에 새로운 청동 대형 불상을 만들도록 하는 등 불교를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건축과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불교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덴표 문화가 탄생했다.

2.1.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

당시 후지와라 집안 사람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맡았던 4형제가 잇달아 병사하자 국정을 카츠라기 왕(葛城王) 즉,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가 맡게 되었는데, 그는 코묘 황후와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였다. 또한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기비노 마키비와 승려 겐보(玄昉)가 중용되면서 후지와라 세력이 크게 후퇴했다.

앞서 천연두로 죽은 후지와라 4형제 중 우마카이(宇合, 식가)의 맏아들 히로츠구(広嗣)는 덴표 10년(738), 야마토노카미(大養德守)에서 진제이(鎭西, 진서)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로 직위가 바뀌었다. 그는 이를 좌천이라 생각하고 크게 불만을 품어 덴표 12년(740) 8월 29일에 시정을 비판하고 기비노 마키비와 겐보를 처분하라고 요구하는 표문을 조정에 보냈다.

9월 3일, 히로츠구가 거병했다는 소식이 빠른 말을 통해 수도 헤이조쿄에 도착했고, 천황은 오오노노 아즈마히토(大野東人)를 대장군으로 삼아 절도를 하사한 후, 부장군으로 기노 반마로(紀飯麻呂)를 임명했다. 그리고 도카이(東海), 도산(東山), 산인(山陰), 산요(山陽), 난카이(南海) 등 5도(道)의 군사 1만 7천 명을 동원하도록 명령했다.

4일, 조정에 출사한 하야토 24명에게도 종군하라고 명령했고, 다음날 사에키노 쓰네히토, 아베노 무시마로가 칙사로 임명되어 전승 기원을 위해 이세 신궁에 폐백을 봉납하는 한편, 여러 쿠니에 관음보살상을 만들고, 《관음경》 10경을 사경하여 전승을 기원하라는 명령을 거듭 내렸다.

9월 21일, 나가토국에 도착한 오오노노 아즈마히토는 현지에 정박해 있었던 신라선의 인원과 기기를 채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다음날인 22일에 칙사 사에키노 쓰네히토 · 아베노 무시마로가 하야토 24명, 군사 4천 명을 이끌고 항해하여 판궤진(板櫃鎭, 부젠국 기쿠군)을 공략하고, 등미(登美)·판궤(板櫃)·경도(京都) 3진의 군사 1767명과 병기 다수를 노획했다.

후지와라노 히로츠구는 기쿠군 근처의 원가군에 도착하여 봉화불로 쿠니 안의 군사들을 모았는데, 히로츠구 자신은 오스미· 사쓰마 · 지쿠젠 · 분고 4국의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구라테도로 나아갔으며, 동생 후지와라노 츠나테(綱手)로 하여금 지쿠고 · 히젠 2국의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분고에서 진군하도록 했다. 그리고 다고고마로를 전하도로 진군하게 해서 관군을 세 방면에서 포위하려고 했다.

9월 25일, 부젠의 여러 군지(郡司, 군사)들이 각기 500기, 80명, 70명 등을 이끌고 관군에 투항해 왔다. 9월 29일,
"히로츠구는 흉악한 역적으로 광포하게도 반란을 일으켜 인민을 괴롭히니 불효불충의 죄를 신이 벌하실 것이다. 따르는 자들은 즉시 귀순하라. 히로츠구를 죽이는 자에게는 5위 이상을 내리겠다"
는 내용의 칙이 규슈 여러 쿠니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발호되었다.

10월 9일에 히로츠구의 군사 1만 기는 판궤하(기타큐슈市)에 이르러 강 서쪽에 포진했고, 칙사로 보내진 사에키노 쓰네히토 · 아베노 무시마로의 6천여 군사들은 강 동쪽에 포진했다. 하야토를 선봉에 세우고 조를 짜서 강을 건너려는 히로츠구군에 관군은 쇠뇌를 쏘며 막았다. 한편으로 휘하의 하야토들을 시켜 적측의 하야토에게 투항을 권하도록 했다. 이에 히로츠구측의 하야토들이 화살 쏘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쓰네히토 등은 10번이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를 불렀다. 말에 탄 히로츠구가 나타나 칙사를 찾으며,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면서
"나는 조정에 항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정을 어지럽히는 두 사람(기비노 마키비와 겐보)을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조정에 항명하는 것이라면 모든 신들이 벌하실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쓰네히토 등이
"그렇다면 뭐하러 병사까지 이끌고 왔는가?"
라고 묻자, 히로츠구는 대답하지 않고 말에 오른 다음 돌아가버렸다. 당시 문답을 듣고 있던 히로츠구측의 하야토 세 명이 강에 뛰어들어 관군쪽에 가담해버렸고, 이어 히로츠구군의 하야토 20명과 10여 기가 잇따라 관군에 항복해 버렸다. 투항자들은 세 방면에서 관군을 포위한다는 히로츠구의 작전을 관군에게 보고했고, 아직 다른 두 방면의 군사들은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렸다.

결국 판궤하에서 패전한 히로츠구는 배를 타고 히젠(肥前)국 마쓰우라군 지가 섬(오도 열도)으로 건너가 그대로 신라(新羅)로 망명하려 했지만, 탐라(耽羅) 근처까지 이른 배는 더 나아가지 않고 역풍까지 불었다. 히로츠구는
"나는 대충신이다. 신령이 나를 버리실 리는 없다. 신이시여, 풍파를 가라앉혀 주소서."
라 빌며 역령을 바다에 던졌지만 풍파는 더욱 격렬해졌고 끝내 배는 지가 섬으로 돌아왔다. 섬에 숨어 있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는 10월 23일, 마침내 아베노 구로마로에게 붙잡혔고, 11월 1일에 오오노노 아즈마히토에 의해 형제인 츠나테와 함께 히젠국의 가라쓰(唐津)에서 처형되었다.

덴표 13년(741) 1월에 사죄 16명, 몰관 5명, 유배 47명, 강제이주된 자 32명, 장을 맞은 자가 177명으로 히로츠구의 난은 마무리되었고, 히로츠구의 아우들도 대부분이 연좌되어 유배에 처해지면서, 히로츠구의 후손인 후지와라 '시키케'(式家, 식가)는 '난케'(남가)와 '홋케'(북가)에 눌려 한동안 정계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반란의 진압을 알리는 보고가 미처 헤이조쿄에 닿기도 전에, 쇼무 덴노는 갑자기 간토로 내려간다면서 수도를 떠나버렸다. 이후 천황은 이가국, 이세국, 미노국, 오미국을 돌아다닌 끝에 구니노미야코(恭仁京, 야마시로국)로 수도를 옮겼다. 그후로도 거듭 나니와노미야코(難波京)로 옮겼다가 다시 헤이조쿄로 돌아오는 식으로 거듭 천도를 반복했다. 머나먼 진제이에서 일어난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을 쇼무 덴노가 얼마나 무서워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2.2. 불교에 빠진 천황

쇼무 덴노의 치세인 덴표 시대는 각종 자연 재해나 역병(천연두)이 횡행했던 시대였다. 천황은 불교에 깊게 귀의해 덴표 13년(741)에는 고쿠분지(國分寺) 건립의 조(詔)를, 덴표 16년(743)에는 유명한 도다이지(東大寺)의 비로자나불(대불) 건립의 조를 내렸다. 덴표 16년(743)에는, 경작되지 않은 황무지들의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서 새로이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새로 개간한 토지에 대해 일정 기간 동안 개간한 자의 개인 사유를 인정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율령국가 일본의 근간이기도 했던 율령제, 공지공민제의 붕괴를 결정적으로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덴표 17년(744년)에는 나니와로 다시 수도를 옮겼는데, 이해 윤 1월 13일(3월 7일)에 아사카(安積) 친왕이 각기병으로 급사했다[7]. 덴표 18년(745) 시라카키쿄를 수도로 선언했다가 다시 헤이조쿄로 환도했다.

덴표쇼호(天平勝寶) 원년 7월 2일(749년 8월 19일), 딸이자 황태녀였던 아베 내친왕에게 양위했다[8]. 남자로서 태상천황이 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덴표쇼호 4년 4월 9일(752년 5월 30일), 도다이지 대불의 '개안법요'(開眼法要)를 실시했다[9]. 덴표쇼호 6년(754년)에는 당나라의 승려 간진(鑑眞)이 일본을 방문해 태상천황이 황태후와 천황을 데리고 함께 만나기도 했는데, 이무렵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던 태후 미야코가 세상을 떠났다.

덴표쇼호 8년(756년)에 덴무 덴노의 손자 후나도 왕(道祖王)을 황태자로 삼으라는 유조를 남기고 붕어했다. 계명은 '승만'(勝満)이었다.

3. 사후

사후에는 코묘 황태후의 의사가 반영되어 태상천황이 생전에 아끼던 유품들이 도다이지에 봉납되었는데, 일부가 오늘날까지 도다이지 쇼소인(正倉院, 정창원)에 전해진다.

덧붙여 1907년에서 1908년에 있었던 도다이지의 대불전 개수공사 때 불상의 연화좌 옆에서 칼 두 자루가 발견되었다. 2010년 엑스레이 조사로 이 칼들이 쇼무 태상천황의 유품들을 도다이지에 봉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759년 12월)에 다시 쇼소인에서 반출되어 《국가진보장》[10]에 제물(除物: 제외된 물건)로 기재된 '요노보켄'(陽寶劒: 양의 보검)과 '인노보켄'(陰寶劒: 음의 보검)임이 판명되었다. 이 칼 한 쌍은 모두 쇼무 태상천황이 생전에 아끼던 것으로 쇼소인에 한 번 봉납되었다가 다시 코묘 황후에게 반환된 모양이다.

천황의 능은 지금의 일본 나라 시 호렌쵸(法蓮町)에 있으며, '사호야마노미나미노미사사기'(佐保山南陵)로 불린다. 이 무덤 동쪽에 코묘 황태후의 능도 함께 모셔져 있다.

4. 이론

그는 후지와라씨의 피를 이은 최초의 천황이자 후지와라씨의 영향력을 많이 받은 천황이었다. 하지만 흔히들 알려진 것과 달리 나이가 들면서 후지와라씨에 반기를 든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후지와라 4형제는 북규슈에 유행하던 천연두가 갑자기 도읍 헤이조쿄를 덮치면서 모두 급사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4형제가 무고로 죽인 나가야 왕이 내린 저주라고 믿었다.

이후 권력의 공백이 생겨 정권을 장악한 자는 타치바나노 모로에와 기비노 마키비, 겐보 등 비 후지와라파였다. 다만 타치바나노 모로에는 자기 어머니가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 재가해 코묘 황후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후지와라씨와 인척관계였다. 이에 후지와라노 히로츠구가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수도에서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쇼무 덴노는 관동 행궁을 나섰다. 이에 대해 반 후지와라 정권에 조종되었거나 노이로제 때문에 빠져나왔다는 말이 있지만, 이 관동 행궁의 루트는 과거 진신의 난 때 오오아마 황자의 군대가 나아가는 움직임과 같았다. 이는 진신의 난의 재림을 암시하는 위협이기도 했다.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737년 12월 27일, 즉 후지와라 4형제가 몰살당하고 바로 얼마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날 코묘 황후가 있는 황후궁에서 쇼무 덴노의 어머니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가 겐보에게 연락을 받은 뒤 확실히 좋아졌다고 했다. 후지와라노 미야코는 쇼무 덴노를 낳은 뒤 남모르는 근심 때문에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사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때 후지와라노 미야코는 며느리이자 이복 여동생인 코묘 황후가 있는 황후궁을 방문한 쇼무 덴노와 37년 만에 재회했다. 겐보에게 한 번 간호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오랜 병이 다 나아서 아들과 바로 재회하였다니 통 이상한 말이다. 즉 아들을 낳은 뒤 후지와라노 미야코는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감금되었다가 형제들이 연달아 급사하자 해방된 것이다.

후지와라노 미야코의 어머니 가메노히메는 가모노 에미시의 딸이었는데, 가모(加茂)씨는 소가씨의 강한 지반인 카츠라기(葛城) 주변에 살았던 일족이었다. 따라서 후지와라 씨족이 곡해해 자신들의 덴노로 키우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며 미야코를 가둬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일로 쇼무 덴노는 변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것이 코묘 황후의 행적이다. 코묘는 시어머니이자 이복 언니인 후지와라노 미야코를 황후궁에 불러서 남편과 재회하도록 했다. 과거에도 미야코를 자기 거처로 불렀지만 저지된 적이 있었다. 나가야 왕의 저주로 4형제들이 죽었다는 소문은 코묘 황후 입장에서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코묘 황후는 당신과 함께 보는 눈이라면 얼마나 즐겁겠냐는 시를 《만엽집》에 남길 정도로 남편 쇼무 덴노와 금슬이 좋았다. 코묘는 나가야 왕의 저주를 대단히 두려워했던 후지와라 씨족 출신 황후로서 불교에 귀의해 멸죄의 사찰을 세우고, 구호소를 세워 사람들에게 적선을 베풂으로써 남편을 지키고자 했다.

이후 쇼무 덴노와 코묘 황후가 합심하여 세운 절이 도다이지였다. 《속일본기》에는 740년 2월 쇼무 덴노가 나니와로 행차했는데, 그곳에서 카와치(河內)의 치시키지를 참배하고는 그 절의 건립 사연에 감동해서 도다이지를 세우고자 했고, 코묘 황후가 설립을 지원해주었다. 치시키지는 시주자들이 세운 절로서 여태까지 세워진 국가나 호족들을 위한 절이 아니었다.

쇼무 덴노는 도다이지 건립을 위해 반골의 승려 교기를 고용했다. 교기는 소가씨가 추진한 율령제를 후지와라 씨족이 왜곡해서 악용하여,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받던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불교를 퍼뜨리고,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교기는 세수를 수도로 옮기는 도중에 쓰러지는 사람들을 위해 후세야를 만들고 각지에 다리를 놓았으며 치수 공사를 했다.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아래에 모였으며, 결국 우바쇼쿠가 되어 헤이조쿄 주변에 출몰했다. 이들의 숫자는 장정 수천 명이 넘어갔다고 한다.

이에 조정은 멋대로 출가해서 방랑하면 국가 재정이 파탄난다며 교기 일파를 탄압했지만, 정작 쇼무 덴노는 교기에게 도다이지 건립을 맡기는 것으로 끌어들였다. 거기다 '우바소쿠=걸식승'을 정식으로 인정해 토목공사에 참가시켰고, 그들의 두목인 교기를 불교계의 최상위에 발탁했다. 치시키지는 우바소쿠들이 세운 절이었는데, 과거와 다른 의미를 가진 새로운 절이었고, 이에 감명받은 쇼무 덴노는 풍수지리 비슷한 원리로 후지와라 씨족을 위한 절인 호류지를 억누르는 위치인 곳에 제일의 치시키지인 도다이지를 건설했다.

5. 가족관계

  • 황후皇后: 코묘 황후
  • 부인夫人: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히로토지(県犬養広刀自, ?~762)
    • 장녀: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内親王, 717?~775) - 고닌 덴노와 혼인
    • 3녀: 후와 내친왕(不破内親王, 723?~795?)
    • 차남: 아사카 친왕(安積親王, 728~744)
  • 부인夫人: 후지와라씨(藤原氏, ?~748)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藤原武智麻呂, 남가, 680~737)의 딸
  • 부인夫人: 타치바나노 코나카치(橘古那可智, ?~759) - 타치바나노 사이(橘佐為, ?~737)의 딸
  • 부인夫人: 후지와라씨(藤原氏, ?~760) -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 房前, 북가, 681~737)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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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이 천황의 재위 시기에 일본에서 최초로 이 발견되었다. 도다이지 청동 대불을 만들고 나서 도금을 해야겠는데 일본에서는 그때까지 금이 나지 않고 있었던 것(은이나 다른 광물은 나고 있었다.)이다. 이때 무츠노카미(陸奥守)[11]를 맡고 있었던 구다라노고니키시 쿄후쿠(百濟王敬福)[12]가 휘하의 백제계 도래인 주금 기술자들을 거느리고 쿠니 안을 뒤져서 지금의 미야기 현 오다 군 가나야마(金山)에서 금맥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고, 황금 900냥을 조정에 갖다 바쳤다. 이후 일본 조정은 무츠에 황금 공납 임무를 맡기게 된다.[13]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불새/봉황 편》에서도 등장한다. 물론 얼굴은 휘장에 가려진 채로. 반란이 속출하고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 민심을 다잡는다는 명분으로 대불 축조를 명령한다.

2010년에 일본 NHK에서 방송된 2부작 사극 <대불개안>[14]에 등장한다. 배역은 쿠니무라 준. 정신병에[15] 걸렸다가 승려 겐보(玄昉)의 신통력으로 병이 낫게 된 모후 미야코로부터 "불상을 만들자꾸나. 아주 커다란 불상 말이다."[16]라는 중얼거림을 듣고 도다이지 대불 건립을 명령한다.

[1] 일본 나라현 나라시 소재[2] 쇼호칸진쇼무황제[3] 아메시루시쿠니오시하라키토요사쿠라히코노스메라미코토[4] 아사카 친왕(安積親王). 이 아들은 훗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2010년에 일본 NHK에서 방송된 2부작 사극 <대불개안>에서는 아예 독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5] 코묘 황후 소생의 아들이었던 모토이(基)는 태어난 지 1년만에 사망했다.[6] '조'는 천자가 내리는 명령을 가리킨다. 고쿠분지는 일종의 관영 사찰로써 각 쿠니마다 하나씩 세워졌는데 수도 헤이죠쿄의 도다이지(동대사)가 전국 고쿠분지의 총본산이었다.[7] 이에 대해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 의한 독살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8] 일설에는 스스로 '삼보의 종'이라 칭한 천황이 독단으로 출가해버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몹시 당황한 와중에 퇴위 수속을 밟았다고도 한다[9] 16m 높이의 대불 축조로 일본 내 청동과 금•은의 재고가 바닥났다고 한다[10] 國家珍寶帳, 쇼소인의 소장품 목록[11] 지금의 혼슈 동북부로 후쿠시마현,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아키타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카미'는 중국으로 치면 태수 또는 자사와 같은 지방의 최고 통치직이었다.[12] 이름에서 보이듯 백제계 도래인 집안 출신으로 의자왕의 왕자인 선광의 후손이었다. 가바네(姓)인 '고니키시'(王)를 빼고 그냥 구다라노 쿄후쿠라고도 하는데, '고니키시'라는 가바네 자체가 백제왕의 칭호인 건길지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지적도 있으며, 고구려 출신의 도래인 약광의 후손들 역시 '고마노고니키시'(高麗王, 고려왕)라는 씨성을 사용했다. 가바네를 빼고 '고마'라는 우지(氏)만 쓰기도 하는 용법도 똑같다. 이 '고니키시'라는 가바네는 백제와 고구려 왕족 외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특수한 가바네였다.[13] 이때 가인(歌人) 오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가 일본 땅에서 최초로 금맥을 찾아낸 것에 감격하면서 지었던 노래가 바로 <바다에 가면>(우미유카바)인데... 항목 참조(정확히는 노래의 일부분만을 따서 곡을 붙인 것이다. 원래 노래는 더 길다).[14] 도다이지 대불의 건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복잡한 권력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15] 작중 묘사는 자폐증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16] 스스로 부처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자처하던 겐보가 병을 치료할 때 모후 앞에 비로자나불의 그림을 갖다 놓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