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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 쓰촨성 대지진,(2008),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2009), 중국 재스민 혁명,(2011), | ||
관련 정치인 | 덩샤오핑 · 장쩌민 · 시진핑 · 리커창 · 후춘화 · 보시라이 · 원자바오 | ||
기타 |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 동북공정 · 반분열국가법 · 후진타오 강제 퇴장 논란 |
ئىيۇل ۋەقەسى-
1. 개요
2009년 7월 7일 우루무치 거리에서 삽과 방망이로 무장한 한족들(출처) |
2009년 7월 5일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우루무치에서 일어난 유혈사태. 이 사건으로 인해 최소 197명이 사망하고 1500여명이 체포되었다. (중국 당국 발표 기준).
2. 상세
7월 5일 약 1천여 명의 위구르인들이 중국 광둥성 사오관시에 위치한 공장에서 위구르인 두 명이 살해당한 일##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격화되면서 한족들과 충돌했다.당시 중국의 정보 통제로 인해 상황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7월 5일 저녁에 공안 진압이 시작되자 원래의 평화 시위가 폭력시위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날 밤부터 칼 등으로 무장한 위구르족 수천명이 공안과 무력 충돌하고 한족 민간인을 공격하는 인종폭동의 양상을 보였고 주로 한족이 피해자였으나 위구르족 역시 사상자가 있었다. 위구르족 중심의 폭동은 7월 6일 저녁에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그 다음 날에는 역으로 한족이 중심이 된 폭도 수백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해 위구르인들을 공격하면서 그들이 운영하던 점포들을 파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이 한족 폭도들로부터 위구르인 거주지를 방어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공안에서는 해당 사건의 사망자 197명이 대부분 한족이라고 주장했지만 해외 위구르 민족운동 단체에서는 위구르인 사상자 수가 "실종"으로 계산돼서 축소, 은폐되었다고 주장한다. 2009년 7월 8일 세계 위구르 회의는 우루무치에서 일어난 유혈사태로 최대 800명의 위구르족들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 유혈사태를 중국공산당 측은 레비야 카디르 같은 일부 친일 인사들이 획책한 분열주의 폭동으로 규정했으나 해외의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 유혈사태가 외부 개입이 유도되지 않은 평화 시위에서 시작되었으며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에 만연한 위구르인에 대한 차별 대우 및 경제 발전 성과 소외라고 지적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일축했다. 게다가 당시 위구르인들은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흔들면서 시위했는데 중국인과 위구르인의 평등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3. 원인
사오관시의 한 장난감 공장에서 해고당한 한족 노동자 한 명이 앙심을 품고 해당 회사 내 위구르인 근로자 여섯 명이 한족 여성 두 명을 성폭행했다는 루머를 퍼트렸는데 이를 사실로 오해한 한족 노동자들이 위구르인 노동자들에게 린치를 가해 위구르인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이 직접적인 발단이었다.해당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조선일보 기사 등에서 시위의 근본적인 원인은 위구르족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속적인 차별 대우에 의한 것임을 지적했다. 애초에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은 위구르족이 먼저 시작한 게 아니라 한족 노동자들이 루머 때문에 위구르인을 공격해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에 대해 위구르인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혈사태의 주된 공격자는 한족인 반면에 위구르인들은 피해자로 한족의 폭행에 반발 내지는 항의하다가 사상자가 발생했다.
4. 유사 사건
2014년 7월에도 위구르인들에 대한 차별 정책을 반대하는 평화 시위가 야르칸드 근교 엘리스쿠(Elishqu)라는 마을에서 일어났지만 7월 28일 중국 군경들이 평화 시위마저 유혈 진압하면서 98명이 사망하였다. 중국 공안은 시위 중 흥분한 사람들이 칼을 들고 경찰서를 공격해서 발포했다고 주장했지만 세계 위구르 회의 등 위구르 독립운동 단체들은 해당 시위는 부녀자들이 주로 참여한 평화 시위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위구르인 사망자 수가 축소 발표되었다고 주장했다.5. 사건 이후
당시 시위 세력이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과 요구사항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황금방패 정책에 의해 2009년 7월 페이스북은 중국 본토 내 서비스를 차단당했다.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해당 유혈사태를 학살이라 표현하여 중국 측에서 항의하였다.#
2021년 시진핑은 이 유혈사태에 투입된 무장경찰들을 12주년 기념으로 포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