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06:25:10

사리콜인

중앙아시아인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2px -12px"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우즈베크인 카라칼파크인 투르크멘인
타지크인 아이마크인 파슈툰인 파미르인 칼라쉬인
하자라인 모골인 슈그니족 사리콜인 와키인
발루치인 브라후이족 위구르인 부하라 유대인 누리스탄인
야그노비인 구자르인 러시아인 타타르 우크라이나인
고려인 파샤이인 독일인 아프가니스탄인 쿠르드족
중앙아시아 아랍인 아제르바이잔계 중앙아시아인 바시키르인
※ 현존 민족만을 표기
※ 다른 지역·국가의 민족 둘러보기 }}}}}}}}}

1. 개요2. 문화3. 역사4. 분포5. 현황6. 관련 문서

1. 개요

사리콜의 금발 소녀

사리콜인은 사리콜어를 사용하는 파슈툰계 소수민족으로 주로 중국신장 위구르 자치구타슈쿠르간 타지크 자치현, 중국-파키스탄 국경 일부에 거주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에 거주하는 인구는 50,000여 명(2021년 통계 기준)이지만 타지키스탄에 거주하는 인구는 1,000~2,000여 명 남짓이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도 일부가 거주한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와키인과 엮어서 타지크족이라고 칭하지만, 타지크인과는 역사와 언어와 문화 등에서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다. 타지크인은 오늘날에는 순니파 무슬림이지만, 이들은 쉬아 이스마일파 무슬림이며 이슬람으로 개종한 역사도 별로 길지 않다.

2. 문화

파일:3009D9F7-D72E-4676-B986-CFE61BE3EBBA.jpg
이들은 다른 무슬림들과 다르게 여성들이 히잡 대신 퀼토라는 전통모자를 쓴다.

이들의 전통 문화는 노루즈같은 조로아스터교 전통 풍습이 유달리 많이 남아있다. 2007년 발견된 타슈쿠르간 내 무덤 유적 발굴 결과 사리콜인들은 늦어도 기원전 500년경 무렵부터 조로아스터교를 믿어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슬람으로 개종을 거부했던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부족들이 명목상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되었을 때 일부러 다른 무슬림들과 사이가 나쁜 소수종파인 이스마일파로 개종한 듯 하다. 반농반목 생활을 하며 사리콜어 문자는 현대에 만들어졌다. 종종 중국의 소수민족 정보를 보면 타지크족은 전통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이라고 나오는데, 원래 타지크인의 직계 조상 소그드인은 고대 세계의 학문과 교역을 주도하던 민족으로 문해율이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높지 않다. 소그드인을 직계조상으로 두는 민족은 서이란어계의 타지크인이 아니라 동이란어계의 야그노비인들이고 이들의 야그노비어도 동이란어계이며 소그드어도 마찬가지로 동이란어계이다. 즉 조상은 될 수 있어도 직계조상이라고 하기엔 연결성이 부족하다. 잉글랜드인의 직계조상이 켈트인이 아니라 앵글로색슨인인 것과 같다. 타지크인은 서이란어계의 페르시아어를 쓰는 이란의 페르시아인과 더 가깝고 그들과 직계조상을 공유한다. 또한 중국의 잘못된 분류 상의 '타지크'는 타지키스탄의 타지크-소그드인과 분포지를 공유하는-도 포함하나 주로 파미르 산맥의 사리콜 사람들이다. 그리고 타지크인들과 사리콜인들은 종교와 언어, 사는 지역이 많이 다르다. 또한 사리콜인들도 동이란어계 언어를 쓰니 결과적으로 같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역시 논리상 비약이 많다. 일단 직계조상도 아니고, 전통 문자 여부는 관련 민족인지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3. 역사

이곳의 사리콜인들은 원래 카슈가르사카족들과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사실상의 친척이나 다름없는 민족이었으나 카라한 칸국에 의해 카슈가르가 정복당하고 튀르크화한 이후 별개의 문화권으로 갈라져 오늘날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7세기 타슈쿠르간을 방문했던 현장법사는 사리콜인들의 언어와 풍속이 카슈가르 사람들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야만스럽다고 기록했다.

과거 당나라의 서역 진출 시에 이들이 사는 지역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티베트와 당나라 간의 전쟁에 휩쓸려 많은 사리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때는 사리콜 왕국이 이 지역에 건설되었으나 왕국의 존속 연도나 왕 이름 같은 정보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14~15세기 모굴리스탄 칸국에서 무슬림이 아닌 사람을 납치하면 합법적으로 노예로 거래할 수 있다는 법을 세운 것을 계기로 동튀르키스탄에 잔존한 불교 신도들은 순니파 이슬람으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시아파 이스마일파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시아파 이스마일파의 경우 노우루즈 같은 조로아스터교 풍습을 권장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시절 동안, 이들은 신장의 다른 지역들처럼 베그들의 지배하에 있었고, 사리콜인들은 노예제를 시행하여 자신들 중 일부 사람들을 처벌의 형식으로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때 키르기스인들이 사리콜인들을 잡아다가 훈자, 길기트 발티스탄, 치트랄 지역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들이 있었다. 이에 보복의 일환으로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버린 키르기스와 같은 수니파 포로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이후 그들 또한 치트랄과 쿤주드 지역을 거쳐 부하라로 팔려나가버렸다. 동투르키스탄 지역 내 수니파 무슬림들은 이단 이스마일파를 믿는다는 이유로 라피디(Rafeedi)[2]라고 불렀다.

샤리아에 따르면 무슬림이 무슬림을 노예로 파는 것은 위법이라는 명목이지만, 이미 당시 동투르키스탄 내 노예 대부분은 이스마일파를 믿는 파미르인들이었고 튀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사이에서 이들을 밀매하고 '갈차(Galcha)'라 부르며 이방인 취급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노예 신분인 만큼 비참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1933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타슈쿠르간에 거주하는 사리콜인들의 인구는 8,000~9,00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온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10,000여 명 이하에다가 대부분 가난한 자급자족 농민인 이유로 별로 존재감이 없었다.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운동[3] 동안, 카자흐-위구르 연합군은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사리콜인들의 가축을 도살하고, 작물을 파괴했으며, 이들과 키르기스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했다. 이후 소련이 손실된 가축과 작물을 대신 변상했다고 한다. 1949년,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중국에 편입되면서 타슈쿠르간 또한 중국령이 된다.

4. 분포

파일:Tashkurgan1.jpg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접경 지역에 위치한 타슈쿠르간 타지크 자치현

사리콜인들은 대부분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카슈가르 남부 타슈쿠르간이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이 지역은 전통적인 교통의 요지로 오늘날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타지키스탄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한다.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여서 중국 역사서나 기행문에는 이들이 사는 곳을 총령진이라 기록했는데,[4] 총령진은 다시 말해서 파미르 고원의 진지라는 뜻이다.

5. 현황

이들이 사는 지역은 대체로 험지이다보니 관련 연구가 매우 쉽지 않은 편이고,[5] 기독교 선교사들이 있긴 하나 선교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만 있고 이들의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해 까막눈 수준이다.[6][7]

우려되는 점이라면 신장 내 한족 인구는 점점 많아지고, 중국공산당이 신장 내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한화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8] 이웃 타지키스탄파키스탄에서는 이스마일파의 교육 및 생활 환경이 아가 칸 4세의 인프라 투자로 대대적으로 개선되는 것과 다르게 중국 정부에서는 해외의 이스마일파 및 아가 칸 4세의 개입을 막고 있다. 또한 고작 5만밖에 안되는 이들이 사는 곳에 한족들이 관광 및 사업 목적등으로 대규모로 몰려들게 된다면 전통적으로 살아왔던 삶이 망가지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6. 관련 문서



[1] 민족명 Sarikoli는 사리콜어로 "노란 계곡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왜냐면 이들의 거주지는 해발고도가 높은 탓에 초목이 희소하여 땅이 노란 황토빛을 띄기 때문이다.[2] 시아파에 대한 멸칭[3] 중국에서는 일리 반란(伊宁事变)이라고 격하하고 영토를 최대한 축소해 표현한다. 1944-1949[4] 과거 중국에서는 파미르 산에 야생 파가 많이 난다고 파미르산을 파 나오는 산이라는 뜻의 총령산이라고 기록함.[5] 왜냐면 들어갈 때 검문 과정이 까다로운 편이고 공안들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감시가 심한 편이다. 또한 장기체류가 허용되지 않는다.[6] 파미르 고원 고유어를 전공하는 이조차도 딱 하나뿐이다. 그것도 개신교 선교사.[7] 선교사들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이곳 사람들이 세상물정에 거의 관심이 없다보니 기독교에게 적대적인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8] 다만 수도 매우 적은편이고 그만큼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어서인지 위구르카자흐처럼 강경하게 탄압하거나 한화를 강요하지 않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