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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하라 유대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 유대인 방언을 사용하는 중앙아시아 유대인을 지칭한다. 왜 하필 부하라 유대인이라는 명칭이 붙었냐면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상인들을 대개 부하라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 같은 어휘가 쓰이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쓰이던 지명이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대인의 수는 통계상 3만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만 7천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대인의 인구 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만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2. 역사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드,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쉼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1]를 거점 삼아서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드와 타슈켄트, 발흐 내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대인들은 고대 페니키아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가 되면 사마르칸드의 유대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2] 원래 중세 초에 중앙아시아에서 유대인이 제일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 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한 후 맥이 끊겼던 듯 하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유대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이란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튀르크인들과 대판 싸우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힘들어지는 바람에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의 라이벌이었던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유대인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 유대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하였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사파비 제국에서 서쪽 오스만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3] 사파비 제국 동쪽에서도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 칸국들과 교역하였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짓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대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하곤 했다. 유대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으로 군마로 쓸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이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대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4]
소련에서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단체의 후원금으로 미국으로 많이 이민갔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대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대인의 수는 총 8만 5천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만 5천여 명은 구 소련 영내에, 3만 2천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대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대인 인구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택하였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대인의 후손이 10~12만명 정도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스를 중심으로 5만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 되는 부하라 유대인이 남아 있으며 우즈벡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사정상 이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쓰고 러시아인인 척 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5]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유대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의 이민, 정착이 이루어지고[6]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슈케나짐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3. 종교
이들은 미즈라힘, 세파르딤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아슈케나짐 유대인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아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꽤 많았다.중세 중앙아시아 유대인 중에서는 불가지론자 혹은 무신론자로 알려진 인물들도 출현했다. 중세 초 중앙아시아는 기독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이슬람이 다양하게 공존하던 지역으로 다른 종교 신도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무신론자라는 오해를 살 만한 기록을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세 이집트 출신 랍비 사디아 가온은 중앙아시아의 히위(HIwi Al-Balkhi)라는 "사악한 이단자"가 모세오경을 200여가지 이유로 비판한 내용의 글이 중동 각지의 유대인 학교에 알려지면서 학생들이 나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물론 중세는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시대였고 다른 랍비들이 히위에게 이런저런 악마의 편집으로 무신론자나 이단자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중세 초의 유대인 사회 기준으로 보기 드문 진짜 무신론자도 나왔다. 아불 하산 아흐마드 빈 야히아 빈 이스하크 알 라완디, 이른바 이븐 알 라완디라고 알려진 사람이다. 라완디의 아버지 야히아는 랍비였다가 다른 랍비들과 대판 싸우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슬람 입장에서 유대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선교사가 되었는데 이븐 알 라완디도 아버지를 따라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부전자전이라고 무슬림 철학자가 된 이븐 알 라완디는 다른 무슬림 철학자들과 대판 싸운 후에 시아파로 종파로 갈아타고 84세로 죽기 직전에 자신이 직접 자신은 그 어떤 종교도 믿지 않고 신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라고 고백한 후에 죽었다. 비교하자면 근현대 서구의 유대인들이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상당수가 종교적으로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에 빠져든 경우와 나름 유사했다.
이븐 알 라완디의 사상과 철학은 근대 이신론자들이나 현대 서구의 무신론자들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인간의 이성을 찬양하는 말로 시작했으며 우주가 영원불변하다면 창조주가 필요없다는 발언은 근대 이신론자들의 견해와 유사했다. 성경과 쿠란에 나온 예언자들의 기적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마술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나 "인간이 거짓과 사기가 나쁘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지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똑같은 사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계시종교가 굳이 왜 필요한가?"라는 주장은 현대 무신론자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기도 했다.
4. 문화
이들이 먹는 음식은 코셔 푸드로 만든 타지키스탄 요리 및 우즈벡 요리 등 중앙아시아 일대 요리로 탄두리 화덕에 구운 난(빵)과 플로프, 삼사, 면 요리인 라그만 등이 있다. 코셔가 유제품과 고기를 같이 먹을 수 없다는 규정상 유제품 요리는 따로 두거나 고기가 들어간 요리에는 유제품이 들어가진 않는다.5. 분포
5.1.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대인
1868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1,500여 명의 부하라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차 대전 기간부터 1930년대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약 4천여 명이 추가로 이스라엘로 육로를 통해서 이주했는데 이 과정에서 8백여 명이 탈수, 기아,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소련에서 유대인의 해외 이주를 허용하면서 15,500여 명이 이스라엘로 추가로 이주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는 10~12만명의 부하라 유대인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5.2. 미국의 부하라 유대인
소련 붕괴 후에는 유대인을 지원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지원으로 많은 수의 부하라 유대인들이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에서 미국으로 이민갔다. 미국으로 이민 간 부하라 유대인들은 오늘날 뉴욕 퀸스를 중심으로 5만명 정도가 모여산다고 한다.뉴욕에 있는 중앙아시아 요리 식당들은 대부분 이들이 운영한다.
6. 참고 문헌
- 러시아어 위키피디아 부하라 유대인 문서
-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 저
[1] 서기 4세기 무렵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2] 이들의 일파는 송나라 시절 중국 카이펑으로 이주하여 카이펑 유대인의 기원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3] 사파비 제국은 시아파 종주국,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 종주국으로 양측의 무슬림들이 서로 교역하기는 어려웠다.[4] 다만 통계상 3만여 명의 부하라 유대인 중 1만여 명이 전쟁 중 전사했다는 내용은 신빙성이 의심된다.[5] 사실 우즈베크인들은 유대인들이랑 크게 관계가 나쁘진 않고 그냥 보통이다. 심지어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은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다만 국민들 중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6] 대표적인 사례로 이리나 비녜르의 가족의 사례를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