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 ||||
아슈케나짐 | 세파르딤 | 미즈라힘 | 카라임 | 페르시아 유대인 |
부하라 유대인 | 산악 유대인 | 베타 이스라엘 | 카이펑 유대인 | 인도 유대인 |
아랍어 | يهود مزراحيون |
히브리어 | מזרחים |
영어 | Mizrahim, Mizrahi Jews |
바그다드 출신 유대인으로 인도에서 부를 모으고 영국에 정착한 서순(Sassoon) 가문 | 예멘 유대인 |
1. 개요
미즈라힘(미즈라흐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중동 및 남아시아 등에 거주하던 유대인 집단으로 분류된다. 미즈라흐(Mizrach)는 히브리어로 "동쪽"이란 뜻이다.2. 분파의 구분과 범위
전 세계 유대인 분파 권역 | |
아슈케나짐 | |
세파르딤 | |
독자적 분파 | |
미즈라힘 | |
후(後)아슈케나짐 | |
후(後)세파르딤 |
전세계에 350만 명, 이스라엘에 320만 명이 있다.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중 가장 많은 분파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인들은 중동에서 기원한 민족이다. 그러나 위에 지도에는 페르시아 유대인 거주지역을 미즈라힘 분파 권역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이스라엘 유대인 사회의 미즈라힘 차별 관련한 논란 때문에 규모를 축소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후술할 세파르딤과의 관계 문단 참조.
모로코 유대인들이 미즈라힘으로 분류되는 등 오늘날에는 실질적으로 아랍어권 유대인(무스타라빔)만을 지칭하는 의미로 변화하고 있다. 원래는 페르시아 유대인 등을 미즈라힘으로 분류했으나 부하라 유대인 등등이 자신들은 러시아계 유대인이므로 아슈케나짐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반발하면서 '동방 유대인'이라는 분류 기준이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현대 이스라엘의 미즈라흐 유대인들은 이집트, 예멘, 모로코 등지에서 아랍어를 모국어로 쓰던 유대인들의 후손으로 정의하는 게 더 편리할 것이다. 동유럽에 주로 거주하던 아슈케나짐이 독일어의 영향을 받은 이디시어를 쓴 배경은 당시 동유럽에서 통상할 때 주로 독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미즈라흐 유대인들이 아랍어를 쓰는 이유도 아랍어가 동지중해 일대에서 일상어이자 교역언어이기 때문이다.[1]
미즈라힘의 조상은 세 갈래로 나뉜다.
2.1. 세파르딤과의 관계
보통 세파르드 유대인(세파르딤)에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아랍어를 모국어로 썼으면 미즈라힘, 유럽 출신이라서 아랍어를 모르면 세파르딤으로 구분된다.[4] 예전 이스라엘에선 분파를 구분할 때는 의례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는데 아슈케나짐이 아니면 다 세파르딤으로 싸잡아서 분류되었다.3. 역사
3.1. 고대
고대부터 유대인들은 시대 상황이나 성향에 따라 종종 이웃 민족들에게 유대교를 포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5] 헬레니즘 시대 및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안티오크와 알렉산드리아의 많은 그리스인들과 페니키아인들이 유대교의 체계적인 유일신 신앙의 매료되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렇게 로마 제국의 동방 영토에는 기독교가 출현하기 전까지 유대인 개종자들이 꾸준히 증가하였다.[6] 특히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나라를 잃고 좌절했던 페니키아인들이 유대교로 대규모로 입교하였다.[7]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 인구는 개종자 수의 증가에 힘입어서 급속도로 증가하였다.[8]3~4세기 로마 제국 동방에서 기독교가 유행하면서 안티오크와 팔레스티나의 유대교 공동체는 기독교 공동체에 밀려서 쇠퇴했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계속 건재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홍해를 내왕하는 아랍인 교역상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포교 노력을 기울였으며 덕분에 고대 말부터 이슬람 발흥 이전 남아라비아(오늘날의 예멘)[9]에서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양대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서로 경쟁하였다. 4세기 말에 힘야르 왕국이 유대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으나 기독교인의 수도 적지는 않았다. 그와중에 유대인 왕이 개종을 거부한 기독교도 수만명을 태워죽이는 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다만 2년 후 그는 악숨 왕국에 의해 잡혀 죽었다.
아라비아 내륙에서도 적지 않은 수의 유대인들이 고대 아랍 다신교를 믿던 부족들 및 기독교도 부족들과 이웃해 살았다. 오아시스에서 대추야자 과수원을 운영하던 부족들 중에는 예멘의 마리브 댐 붕괴 이후 기근을 피해서 이주한 부족들도 있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부족들도 많았다. 이슬람의 발흥과 확장 이후 아라비아반도의 과수원을 운영하던 유대인 부족들은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추방당했으나 예멘의 유대인 공동체는 현대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
예멘 이외에 지역에서의 중동 유대인들의 역사는 정통 칼리파조와 우마이야 왕조의 팽창과 확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마이야 왕조를 거치는 동안 레반트 지역에서는 그리스어가 힘을 잃고 아랍어가 주 사용언어로 자리매김했는데 이러한 시대 상황으로 원래는 그리스어와 아람어를 사용했던 지중해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아랍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페르시아 유대인의 상당수도 아랍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어 아랍어를 사용하면서 미즈라흐 유대인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3.2. 중세
유대인들은 이슬람 황금기에 2등시민 대우를 받긴 했지만 동로마 제국에서 종종 유대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했을 때의 트라우마가 남았기 때문인지 칼리파들에게 협조적인 편이었다.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지중해 동부의 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군들에게 학살과 약탈을 당하고 알렉산드리아가 중세 후반기부터 흑사병의 유행으로 인구가 점점 줄어들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자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대인들은 다시 각지로 흩어졌다. 예멘에서는 압둘 나비 빈 마흐디라는 이름의 현지 지도자가 아덴의 유대인들에게 개종 아니면 죽음을 강요하면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는데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이 예멘을 장악하고 압둘 나비를 축출하면서[10]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예멘 유대인들은 유대교로 원복하였다. 당시 예멘 유대인들은 박해받는 처지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관련하여 살라흐 앗 딘의 주치의였던 마이모니데스와 서신을 교환하였다고 한다.[11]
예멘은 한동안 아라비아반도 유대인들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예멘의 수니파 무슬림들은 주로 샤피이파를 따랐는데 샤피이파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무슬림들이 의사나 통역사가 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 편이었고 특히 샤피이파 법학파를 후원하던 예멘 라술 왕조 치하에서 유대인 상당수가 의사, 무역업과 상공업으로 본격적으로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했다.[12] 다만 예멘 시아파는 종파를 불문하고 무슬림들이 따로 의사나 과학자, 통역수가 되는 것을 제한하지는 않아 굳이 유대인들과 공존할 필요가 없었고 유대인들을 박해하던 편이었다.
3.3. 근세~근현대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 도회지의 상권을 두고 그리스인 및 아르메니아인들과 경쟁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중동 지역의 유대인들의 사회적 입지가 한 층 개선되었다. 아나톨리아 해안가 및 루멜리아에 있던 유대인들의 상당수는 통상과 교역에 필요한 여러 가지 언어를 동시에 구상할 수 있었으므로 종종 오스만 제국의 통역 보조로도 활약하며 아랍 무슬림 유목민이나 농부들보다도 나은 대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의 (예멘을 제외한) 아시아 영토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가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유럽 영토에서는 그리스인이나 유대인들의 입지가 더 강한 편이었다. 다른 한편 오스만 제국의 이라크 영토에서는 고대 이래 아람어를 사용하는 여러 유대인 촌락들이 잔존하여 세력을 유지하였다.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아랍어 사용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주로 아랍어만을 사용했으며[13] 이들의 입지나 처지는 특별히 농부나 유목민들보다 나을 바 없는 처지였다. 오스만 제국에서의 유대인 집단들의 이러한 차이는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고 영토가 하나둘씩 잘라나가면서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더욱 벌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 및 해안가에 살던 부유한 유대인 상인들은 여러 가지 언어에도 능통했기 때문에 미국 등으로 이민가기에 여러모로 유리했으며 오늘날 이스라엘의 세파르딤으로 편입되었다. 중부 유럽의 아슈케나짐들이나 오스만 제국 서부 영토의 유대인은 외모도 흡사했으며 생활 환경도 비슷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아시아 내륙 영토에 살던 유대인들은 개종한 아랍계 유대인들과 통혼한 역사로 외모도 다른 유럽계 유대인들과 확연히 차이날 뿐더러 문화 차이도 심하고 결정적으로 모국어나 다름없는 아랍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아랍어권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예로 들자면 20세기 초반에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 인구는 3%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은 극도로 가난한 빈민들로 비위생적이고 비좁은 유대인 쿼터에 밀집해서 살았다. 예루살렘 근교의 무슬림 농민들은 이웃 유대인들과 똑같은 아랍어 방언으로 소통하며 많은 관습을 공유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농민의 대부분이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후손으로서 동로마 제국 시대에 반강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당한 뒤 이슬람 왕조에서는 지즈야를 강요받아 하나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척 했다가 나중에 유대교 율법을 잊어버려서 나중에 진짜로 무슬림이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건조하고 척박한 팔레스타인 땅을 경작하는 유대인 농민이 지즈야를 납부하면서 생계까지 동시에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즈라힘들 중 아랍계 유대인은 이스라엘인 무슬림 혹은 팔레스타인인과 사실상 관습과 문화까지도 대부분 공유하는 친척 관계나 다름없다.
오스만 제국의 아시아 영토 중 오늘날의 시리아 동부-이라크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유대 아시리아 신아람어(Jewish Assyrian Neo-Aramaic)가 보존되었다. 오늘날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아르빌이나 자코, 아끄라, 바이타 누리에서는 독자적인 아람어 방언을 사용하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번영을 누렸으나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의 충돌이 격화하는 과정에서 1950년 유대인 인구 상당수가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원래 미즈라힘과 세파르딤은 종교 의례나 종파 같은 부분에서는 같은 전례를 공유하는 같은 부류지만 상술한 여러 가지 차이점 때문에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미즈라힘으로 분류된 유대인들과 세파르딤으로 분류된 유대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현대 이스라엘은 아슈케나즈 유대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아슈케나즈 유대인과 흡사한 집단일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고 아슈케나즈 유대인과 차이점이 클수록 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알제리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19세기 이후 대부분 프랑스 세파르드 유대인과 동화되었으며 더 이상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는 반면 예멘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흑인과 통혼한 경우가 많아서[14] 베타 이스라엘이랑 구분이 잘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이스라엘에서 과연 알제리계 피에 누아르 출신 유대인과 예멘 출신 유대인이 사회적 입지가 똑같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4. 대우
아슈케나짐들이 우대받는 이스라엘 특성상 부하라 유대인 등 과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은 중앙아시아, 캅카스 일대에서 온 유대인들은 그냥 자신들의 출신 배경에 대해 입을 꼭 다물고 다수파라서 차별받을 여지가 적은 러시아계 이스라엘인에 엮여가려는 성향이 크다. 왜냐하면 세파르딤이랑 미즈라힘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자신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따진다면야(의미가 없긴 하지만) 오히려 이들이 진짜 정통 유대인에 가까울 것이다.[15] 지리적으로도, 역사, 문화적으로도 그렇고... 정작 서유럽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주도하는 것과 이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큰 아이러니다.[16]미국 국적의 미즈라흐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유대계 미국인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혈통적인 의미에서 아랍계 미국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5. 인도계 유대인
자세한 내용은 인도 유대인 문서 참고하십시오.6. 출신 인물
- 로니 달루미: 이스라엘의 가수.
- 알렉스 울프
- 엘리 코헨
- 요시 베나윤
- 이갈 나오르: 이스라엘의 배우. 이라크계 유대인 혈통이다.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사담 후세인 역을 맡았다.
- 사기 무키
- 야엘 셸비아
[1] 세파르딤들이 쓰는 라디노어도 과거에 유대인 공동체가 로마 제국 시절부터 사용하던 라틴어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2] 페르시아 유대인과 어느정도 겹치지만 이라크에 거주하던 유대인 공동체의 상당수는 상당기간 아람어 전례 등을 그대로 유지했다.[3]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유대교 역시 이방인 포교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는 종교이다. 하자르 칸국의 예도 있고 서기 523년엔 예멘에 있던 힘야르 왕국의 유대인 군주가 기독교인 수만명을 화형시키기도 하였다. 다만 중세 이후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탄압을 받으면서 포교를 체념하다시피 해서 그렇지...[4] 유럽계 세파르드 유대인이 쓰는 라디노어는 현재 사어화되었다.[5] 에돔인이 유대교로 개종한 사례가 대표적이며 사도행전 2장 10절에도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6] 유대교로 개종했던 그리스인들은 나중에 초기 기독교 사회의 중추를 구성했다.[7]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 서부의 해상 무역을 전부 그리스인들에게 빼앗겼던 페니키아인들이지만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를 있는 이들의 해상무역망은 건재하였는데 이 마지막 남은 해상 교역로에서도 그리스인들과 대립하는 와중에 페니키아인들은 일부러 그리스 문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유대교를 믿음으로써 자신을 차별화했다.[8] 페니키아인은 유대인과의 차이는 종교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문화적으로 동일한 민족공동체였다. 현재의 북이스라엘과 레바논 출신으로 히브리어와 똑같은 계통의 언어를 썼고 이들이 믿은 신이 다름아닌 바알이다. 허구한날 유대인들이 바알신교에 빠진 것도 페니키아인들이 사실은 같은 민족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가까웠기 때문이다.[9] 고대 예멘은 로마와 인도 간의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아라비아 펠릭스(축복받은 아라비아)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10] 살라흐 앗 딘에게 축출된 압둘 나비는 시아파로 순니파 아이유브 왕조와 종파가 달랐다.[11] 다만 마이모니데스가 살라흐 앗 딘에게 예멘 유대인들을 도와달라고 직접 요청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2] 한국인 입장에서 쉽게 설명하자면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조선시대 양반들이 역관이나 의사 등등의 직종을 양반이 하기에는 천하다고 중인 계층에게 맡긴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수도 있다.[13] 아람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고향 촌락에서 자신들끼리 사용하던 수준이었다.[14] 예멘 유대인들도 다른 예멘 아랍인들과 마찬가지로 재산이 있는 경우 흑인 노예를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5] 특히 종교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팔레스타인인들과 거의 똑같은 팔레스타인계 미즈라흐 유대인이 미즈라흐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정통 유대인에 가까울 것이다.[16] 실제로 골다 메이어는 "이스라엘의 약점은 아랍화되어 있고 무지하여 개조가 필요한 세파르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라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는데 그녀가 사망했을 때 미즈라힘 + 세파르딤 유대인은 축포를 쏘며 잘 죽었다며 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