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e Courbet ||
본명 | 장 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 Jean Désiré Gustave Courbet |
출생 | 1819년 6월 15일 |
프랑스 두주 오르낭[1] | |
사망 | 1877년 12월 31일 (향년 58세) |
스위스 라투르드페일 | |
직업 |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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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리얼리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는 19 세기 프랑스 회화에서 사실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화가다.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는 데 전념한 그는 학문적 관습과 낭만주의를 거부했다. 그의 독립적인 작품 활동은 인상파나 입체파 같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쿠르베는 19세기 프랑스 회화에서 혁신가이자 작품을 통해 대담한 사회적 발언을 한 예술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쿠르베는 1840년대 말과 1850년대 초에 그린 그림으로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 쿠르베는 전통적으로 종교적 또는 역사적 주제의 그림에 주로 사용되던 웅장한 스케일로 이상화되지 않은 농민과 노동자를 묘사함으로써 관습에 도전했다. 이후 쿠르베의 그림은 대부분 풍경, 사냥 장면, 누드, 정물화 등 노골적인 정치적 성격이 덜한 작품들이었다. 사회주의자였던 쿠르베는 프랑스의 정치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71년 파리 코뮌에 연루되어 6개월간 투옥되었고, 1873년부터 4년 후 사망할 때까지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쿠르베는 독립성,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인해 오만하다는 평가를 당대에 받았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전통적인 세계관을 거부하고, 인간 역시 나무나 돌처럼 세계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그라, 인간을 웅장하게 그리는 역사화를 조롱키도 했다.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세계관은 파산했고, 쿠르베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다.#
2. 생애
구스타브 쿠르베는 1819년 오르낭(두브 지방)의 레지스와 실비 우도 쿠르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는 반왕정주의적 감정이 팽배했다.(그의 외할아버지는 프랑스 혁명에 참전했다.) 쿠르베의 누이들인 조에, 젤리, 줄리엣은 그가 처음으로 그린 회화의 모델이 되었다. 파리로 이주한 후 그는 종종 오르낭으로 돌아와 사냥과 낚시를 하며 영감을 얻었다. 원래는 법학가가 되려 했으나 포기하고 화가의 길을 걸었다.쿠르베는 1839년 파리로 가서 슈타우벤과 헤세의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독립심이 강했던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스페인, 플랑드르, 프랑스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하고 그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등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하는 것을 선호하며 금세 스튜디오를 떠났다. 1846-47년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여행하면서 렘브란트, 할스 및 기타 네덜란드 거장들처럼 화가는 주변의 삶을 묘사해야한다는 쿠르베의 신념이 강화되었다. 1848년, 그는 젊은 비평가들, 특히 샹플뢰리를 비롯한 신낭만주의와 사실주의자들 사이에서 지지자를 얻었다. 쿠르베는 1849년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라는 작품으로 첫 번째 살롱 성공을 거두었다. 샤르댕과 르냉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쿠르베에게 금메달을 안겨주었고 국가가 구매했다. 금메달은 그의 작품이 더 이상 살롱에 출품할 때 심사위원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쿠르베는 1857년(이때 규칙이 변경된다.)까지 이 면제를 누렸다. 1849~50년에 쿠르베는 <돌 깨는 사람들>(1945년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소실됨)을 그렸는데, 프루동은 이 작품을 농민 생활의 아이콘으로 존경하며 "그의 위대한 작품 중 첫 번째 작품"이라고 불렀다. 이 그림은 쿠르베가 길가에서 목격한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샹플뢰리와 작가 프랜시스 웨이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가난에 대한 완벽한 표현을 접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그때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제 스튜디오로 오라고 했죠."
그의 화가로서의 특징은 철저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누군가의 요청에 "난 천사를 본 적이 없다. 천사를 내 눈앞에 데려다놔라. 그때 그려주겠다."라 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 그래서 사실주의를 무척 싫어하던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는 쿠르베가 그린 그림을 보고 "그래서 어쩌라고? 차라리 사진을 찍으면 될 거 아냐?"라는 비아냥을 쏟았는데 당연히 쿠르베와 드가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었다. 1859년에는 국제박람회에 점잖은 그림을 낸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작품을 출품해보라는 정부 미술관장의 권유가 있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고 박람회장 정면으로 자리를 마련해 개인전을 열었다. 관람객이 없어서 실패했고 그 중 유명한 작품이 《화가의 아틀리에》였다.
쿠르베는 "한 세기의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과거 또는 미래의 세기의 모습을 재현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파리 살롱이 화가의 최고의 소명으로 여겼던 역사화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살아있는 예술의 가능한 유일한 원천은 예술가 자신의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장 프랑수아 밀레는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그리는 데 영감을 얻었다. 쿠르베는 구상화, 풍경화, 바다 풍경, 정물화를 그렸다. 그는 작품에서 사회 문제를 다루고 농촌 부르주아지, 농민, 빈민의 노동 환경 등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주제를 그림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작품은 오노레 뒤미에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과 함께 사실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쿠르베에게 사실주의는 선과 형태의 완벽함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거친 물감 처리를 수반하며, 자연의 불규칙성을 묘사하면서 예술가가 직접 관찰하는 걸 그리는 거다. 그는 삶의 가혹함을 묘사했으며, 이를 통해 예술에 대한 현대의 학문적 관념에 도전했다. 쿠르베의 사실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그의 고향인 프랑슈콩테 지방과 그의 출생지인 오르낭에 대한 평생의 애착이다.
원래 법학가 지망생이라 그랬는지 파리 코뮌에 참가할 정도로 정치와 사회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훗날 파리 코뮌이 무너지자 의원이었던 쿠르베는 스위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3. 작품
<rowcolor=white> 《절망하는 남자》 |
<rowcolor=white>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Bonjour Monsieur Courbet)》 |
<rowcolor=white> 《화가의 아틀리에》 |
<rowcolor=white> 《돌 깨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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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진과의 관계
그가 화가의 꿈을 걷기도 전인 182~30년대에 사진이 이미 발명되었지만 쿠르베는 '사실'을 추구했다. 여기서 '사실'이라는 개념은 사진이 나오면서 한물 간 재현메타가 아니라, 1848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사회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사회비판적인 예술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또한 쿠르베는 실제로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데 사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전에 화가들이 재현메타를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한 것과 비슷하다. 또한 그의 작품은 역설적으로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도 했다.[1] NGA Systematic Catalogue, "Gustave Courbet", National Gallery of Art[2] 이센스의 손님 demo버전의 커버로 쓰이기도 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번 《어둠 속의 사건》의 표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