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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보병사단 주요 사건 일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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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fff> 1984년 06월 26일 |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 | |
1998년 12월 4일 | 제22보병사단 불발탄 폭발 사고 | |
2012년 10월 2일 |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 |
2014년 6월 21일 |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 |
2019년 4월 4일 | 2019년 고성-속초 산불 | |
2020년 5월 1일 | 2020년 5월 고성 산불 | |
2020년 11월 3일 | 북한이탈주민 철책 훼손 귀순 사건† | |
2021년 1월 5일 | 제22보병사단 병사 폭행 사건 | |
2021년 2월 16일 | 2021년 동해 민통선 무단침입 사건 | |
2022년 1월 1일 | 귀순 탈북자 2022년 월북 사건† | |
2023년 6월 25일 | 고성 제진검문소 민간인 무단침입 시도 저지사건 | |
2023년 10월 24일 | 2023년 속초 목선 귀순 사건 | |
2024년 8월 20일 | 2024년 북한군 하사 귀순 사건 | |
† 동일 인물에 의한 사건 | }}}}}}}}} |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 ||
<colbgcolor=#000><colcolor=#fff> 발생일 | 2014년 6월 21일 | |
유형 | 살인 사건, 대량살인 | |
원인 | 총기난사 | |
피의자 | 임도빈 병장 | |
발생 위치 | 강원도 고성군 대한민국 육군 제22보병사단 제55연대 GOP | |
인명 피해 | 사망 | 5명 |
부상 | 9명 (중경상) |
1. 개요2. 조짐3. 사건 진행 과정4. 피해자5. 총기난사 주범 임도빈 병장에 대해6. 논란
6.1. 병영 내 집단따돌림6.2. 관심병사를 비롯한 병사 관리 문제6.3. 22사단과 GOP의 열악한 근무 환경6.4. 늑장 응급조치와 이송 논란6.5. 추격 과정을 비롯한 군과 국방부의 문제점6.6. 오인 사격 형사입건 논란6.7. 희생자 예우 논란6.8. 언론 관련 문제6.9. 게임 원인설6.10. 여론 문제
7. 사건 여파8. 기타9. 관련 사건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clearfix]
1. 개요
당시 SBS 뉴스에 나온 시민 이재열 씨의 인터뷰 일명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의 심각성과 국민이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꼬집은 인터뷰.[1][2] |
가해자인 임도빈 병장의 이름에서 따 와 일명 임 병장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지금까지 비슷한 류의 총기난사 사건은 많이 발생하였으나, 이 사건이 유독 화제가 된 이유는 피의자가 전역이 불과 3개월밖에 남지 않은 병장이었고 병장이 벌인 총기난사 사건은 거의 없다시피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병장과 상병이 무장탈영 후 인질극 중 총기난사하는 사건이 있는 등 전혀 없진 않았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왜' 사고를 쳤는지는 관심 밖이었기 때문에[3] 주목받지 못했다. 병장의 동료 사살은 이 사건 말고도 1988년에도 있었는데, 정신이 멀쩡한 상태였던 임병장과 다르게 정신병 증상이 생긴 상태에서 현역 복무를 하다가 동료를 사살했던 '이 병장 사건'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윤 일병 사건), 공군의 김 일병 자살 사건과 더불어서 대한민국 육군의 고질적인 병영 문화의 폐해(똥군기, 기수열외, 각종 가혹행위와 따돌림 등)가 만들어낸 비극이자 사회에서 피해를 입고 당하기만 했던 사람이 참지 못하고 벌인 살인극. 5명이 피살되고 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피해자 중에는 평소 그에게 친절하게 대했던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부분 때문에 원한이 있는 병사들만 살해했다고 하면 원한 관계로 인한 사건으로 보지만, 친절하게 대한 사람 등 친분이 있는 병사들까지 살해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묻지마 살인'에 속한다.[4]
2. 조짐
이 사건은 일어날 조짐이 명확했다. 2014년 4월 중순에 임병장의 소초장이 장비 분실 및 허위보고 모의 혐의로 보직해임되었다. 그러니까 소초장이 공석인 상황이었고 소초장의 임무 수행은 부중대장이 대신 담당하고 있었다.소초장을 대행하던 부중대장 강 중위는 원래대로라면 2014년 9월 전역 예정인 말년 중위였으므로, 소초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보직 해임된 전 소초장 문 중위도 이 사건으로 인해 추가 징계를 받았으므로 보직 해임되기 전에도 전 소초장이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윤 일병 사건과 묶여서 언급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윤 일병 사건이 크게 알려진 것이 7월 말인 것이지 사건 자체는 4월 7일에 일어났는데, 그 때에 진작 병영부조리가 있는지 대대적으로 확인해서 조치했더라면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3. 사건 진행 과정
3.1. 2014년 6월 21일
피의자인 육군 보병 임도빈 병장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오후 7시 55분까지 주간 경계근무를 마치고 복귀한 직후 GOP에서 장전된 K2 소총을 아군 초병을 향해 난사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주간 근무자로 알려졌다. 사건을 일으킨 임도빈 병장은 K2 소총과 실탄 75여 발 등[5][6]으로 무장한 채 탈영하였다.이에 22사단은 사건 발생 2시간 후에 진도개 하나를 발령하고 위기대응반을 꾸려 대응하였다. 이전에는 국방부에서 진도개 하나를 발령했다고 알려졌지만 한참 후에야 22사단이 자체적으로 발령한 것[7]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사건 전파가 늦어져 관할서인 강원고성경찰서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육군 부대로 문의한 적이 있다.
관할 고성경찰서도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하여 군과 함께 합동 작전을 펼쳤으며, 고성군 전 지역에 대한 차량 검문 검색 및 신분 확인을 시행하였다. 더불어 강원도 고성군청 공무원과 읍면사무소 공무원들도 휴일을 반납하고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하여 주민을 대피시키고 보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고성군 최북단 마을인 현내면 명파리, 마달리, 그리고 배봉리 원주민 540명이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로 대피하였다. 참고로 이들 지역은 원주민이 아닌 외지 관광객이나 외지인 등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곳이자 군부대의 검문과 신분 확인하에 출입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에 민간인 피해는 적을 것이라고 군 당국이 해명했다. 원주민 중에는 60대나 70대 이상인 노인과 농민층이 많은 편이라 버스를 통해서 비상 엄호수송을 하였으며 다행히 민간인 인명피해는 없었다.
고성군 지역민들도 이 소식을 들은 후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사건이 밤에 일어났던 만큼 '집안 문 단속을 철저히 할 것'과 '집 밖에는 아예 나가지도 말라'는 지시를 할 정도였으며 군은 탈영병이 민간인을 인질로 붙잡아 해치거나 탈영병이 민가에 침입하거나 그를 목격한 경우 즉시 군부대나 헌병대에 신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고성군 내 읍면장과 이장들에게 주민들에 대한 신변 보호를 당부하고 무장 상태의 탈영병이 주민들을 무력으로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가급적 불필요한 외출 등을 삼갈 것을 요청하였다. 공교롭게도 여름철 농번기라 농민들의 신변이 위협 받을 우려가 있었다. 또한 고성군 및 설악권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도 신변 안전을 강조함과 동시에 가급적이면 인적이 드문 곳에 가는 등의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당부하였다.
3.2. 2014년 6월 22일
이후 6월 22일 새벽 1시경엔 군인권센터에서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하여 '군의 기밀 유지가 국민의 생명 안전 보장보다 우선이냐'며 당국을 비판하기도 했다. # 또 YTN 속보 생방송 진행 중 전화 연결 인터뷰에서 연결자가 철책 내 근무 형태와 인원 교대 방법, 근무 시 지참 탄수 등의 보안사항을 까발려 버리는 바람에 문제가 됐다. 말해준 사람도 문제이지만 앵커도 근무 형태가 어떻냐는 등의 민감한 질문을 직접 던지기도 하고 진행 자체가 너무 미숙해서 이 부분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가는 등 구설수에 올랐다.30년 전 실제로 총기난사 후에 월북을 했던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이 같은 22사단에서 발생하기도 했고, 지리적으로 강원도 고성군은 북한과 접하고 있는 지역인 데다가 야산도 많은 곳이라 일각에서는 월북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내놓았으나 월북은 하지 않은 채 사건이 종결되었다.
21일 군경 당국은 고성에 22사단과 인접 사단 병력 등 도합 9개 대대급 병력을 투입해 대대적으로 임 병장의 수색에 들어갔다. 철야 수색 끝에 군경 병력들이 고성군 전 지역을 대상으로 추적에 나섰으나, 야간이라는 악조건 때문이었는지 21일 당일 및 22일 새벽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한편 임도빈 병장의 부모 역시 현장으로 가서 탈영병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탈영 후 약 19시간이 경과한 22일 15시경 소대장 한 명이 오인사격으로 총상을 입었다. 처음에는 임도빈 병장의 사격으로 인한 총상이라고 알려졌으나 그 곳에서 회수한 탄피가 같은 수색팀 병의 총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되어 오인사격으로 밝혀졌다. 처음에는 부상 부위가 가슴이라고 보도되었으나 가슴이 아니라 팔 부상이었고 정정되어 보도되었다. 자칫하면 사망자가 한 명 더 늘 수도 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결국 22일 15시 경에 육군 제8군단장은 투항을 거부하면 사살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22일 밤 11시에 다시 포위망에 접근했다가 차단선의 군이 수하[8]를 시도하자 도주했다고 한다. 이에 군은 임도빈 병장에게 경고 목적의 실탄 10여 발을 발사했다. 임병장 수하 시도하자 도주... 그 후 다시 포위망 속으로 돌아갔다.
3.3. 2014년 6월 23일
오전 9시 26분에 생포했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오보였다. 다만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성공해 사실상 생포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인 건 맞다. 아버지와 통화를 요구하여 현장을 지휘하던 육군 헌병 대대장이 휴대전화를 던져주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 아군간의 오인사격으로 아군 한 명이 총상을 입었다. 총알이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갔다고 하는데, 그리 큰 부상은 아니지만 조금만 옆으로 지나갔어도 사람이 죽을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오전 8시 20분부터 포위 병력이 임도빈 병장과 대치했다.[9]
오전 11시 25분경에는 가족들도 와서 투항을 설득했다. 임도빈 병장은 총을 스스로에게 겨눈 채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이 때 "나가면 사형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10]
오후 2시경 임도빈 병장은 육군과 가족들의 설득으로 마음을 좀 누그러뜨렸는지 교섭인이 던져 준 약간의 음식을 먹고는 펜과 종이를 달라고 해 유서를 적었다. 군과 임 병장의 가족은 "나와서 얘기해라, 다 해결된다", "쏘지 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며 투항을 유도했으나 임 병장은 "다 끝났어요"라며 총으로 가슴을 쏴 자살을 시도했다.
상황을 주시하던 체포조가 임 병장의 자살 기도에 놀라서 달려들어 임 병장을 생포한 다음 응급조치 후 바로 강릉아산병원으로 이송시켜 긴급 수술을 하였다. 수술했을 때 총탄은 심장을 빗맞았으나[11]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가슴의 유두 위로 총탄이 들어가 어깨 위쪽으로 빠져나온 상태였다. 특히 왼쪽 폐 윗부분이 총탄으로 조각난 터라 수술에서 그 부분을 절제했다.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고 임도빈 병장은 어느 정도 회복 후 조사를 받기 위해 국군기무사령부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고성 주민들은 길고 길었던 3일간의 대피 소동을 끝내고 일상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처음에 '옆구리에 쐈다'는 오보의 영향으로 자살이 아닌 자해나 자살쇼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에 쏴도 당연히 생명이 위험[12]하며 사건의 사망자 일부보다도 더한 부상이었다. 애초에 총알은 어디든지 단 한 발만 맞아도 생명이 위험하다. 사망자는 후송이 오래 걸렸고 임 병장은 즉시 체포, 후송되어 목숨을 건진 것일 뿐. 결정적으로 판결문에서조차도 자살을 시도했다고 인정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현장에서 보고 있었다 보니 머리를 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보상이 합의되었으며 군 수사에 협조한다고 했다. 보상 액수는 비공개이지만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 가족들은 전사자 지정을 요구했지만 국방부는 훈령상 해당이 되지 않는다며 거부하였고[13] 대신 거기에 준하는 대우를 하겠다고 밝혔으며, # 최종적으로 순직 처리하기로 결정되어 현충원에 안장됐다.
4. 피해자
- 부대 내 사상자
- 추격 과정
- 부상 - 2명: 아군 간 오인사격으로 인한 총상(2)[16]
그 외에도 직접 신체적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PTSD에 걸린 부대원이 있으며 이 중 일부는 의병 전역했다. 하지만 사망자들의 유가족들은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고 현재까지도 심적으로 고통받고 있다.
5. 총기난사 주범 임도빈 병장에 대해
사진은 중학교 때의 사진이다.
- 1992년생([age(1992-10-01)]세)[17]
- 신체 키 169cm, 몸무게 55kg #, 혈액형 A형
- 가족관계: 부모님, 형
- 2012년 12월 17일: 논산 육군훈련소 입대
- 2013년 2월: 육군 22보병사단에 자대배치(전입)
- 2013년 4월: 1차 인성검사 A급 관심사병 판정
- 2013년 11월: 2차 인성검사 B급 관심사병 판정[18]
- 2013년 12월: GOP 투입
- 2014년 3월: 자체 인성검사 '특이사항 없음' 판정
- 2014년 6월 21일: 총기난사 사고 발생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기 위해 부대에서는 부분대장 직책도 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부분대장직은 아무런 힘도 실권도 없다.[19] 이는 그냥 끼워맞추는 거고 생색내기다. 원래대로라면 2014년 9월 16일에 만기전역을 할 예정이었다. '전입' 이라는 보도 내용 때문에 임 병장이 이전 부대에서 사고를 치고 전출되어 현 부대에 전입 온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냥 신교대 수료 후 현 부대에 자대배치 받은 자원이며 단순한 자대배치와 GOP 투입을 '전입'(일단 부대에 새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니 문자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전역을 불과 3달 앞둔 상태에서 벌인 행위이기 때문에 임 병장의 동기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18개월을 버틴 병장이 고작 3개월을 남겨두고 총기 난사 사고를 벌였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수준이다 보니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대체로 추정되는 동기는 집단따돌림[20]을 비롯한 내무부조리이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임도빈 병장은 멀쩡하게 복무하다가 사건을 터뜨린 것이 아니며, 이미 A급 관심병사로 관리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부대에서는 임도빈 병장이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큰 관심병사란 것을 알고도 GOP에 실탄을 주고 집어넣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게다가 원래 GOP 복무를 하더라도 관심병사는 총이나 탄환을 다루는 주특기나 근무에서 배제하는 것이 통례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사건은 순수히 부대의 관리부실로 빚어진 사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정도 수준의 부적격자를 별다른 조치도 하지 않고 실탄을 운용하는 GOP에 덜컥 보내서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군 부대의 실책이 크다. 22사단 GOP 경험자에 따르면 작전에 실탄을 가지고 투입하기 위해서는 소초와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에 대한 테스트를 거친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상당히 문제가 된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A급은 물론 B급 관심병사도 잔류시키고 전방에 투입했다.
임도빈 병장이 자살할 경우 이러한 이유를 밝히지 못한 채 미궁에 빠질 뻔 했으나, 자살 시도 후 생포되었고 병원에 이송되었다. 23일 저녁에 임도빈 병장의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생명에 지장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뉴스로 확인되었다.
24일 오전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임도빈 병장이 생포되기 전에 작성하였던 유서에 집단따돌림이 원인이었다고 기술한 것이라고 알려졌고 동료 부대원들에게서도 유사한 내용의 증언을 확보하여 큰 파장이 일었다. 임도빈 병장이 생포됨에 따라 유서의 내용보다 수사 대상이 더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임도빈 병장을 집단따돌림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까지 나온 상황. '계급열외'에 대한 불만을 유서에 남겼다는 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기사까지 나왔다.
그런데 같은 날 국방부의 공식 발표는 임도빈 병장이 남긴 유서를 분석한 결과 소초원에 대한 불만이 낱낱이 적혀 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하였고,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사과하는 추상적인 내용만 가득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언론들의 보도와 완전히 대치된다.
임도빈 병장의 유서는 국방부가 희생자 유족들의 반대로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으나 유가족들은 메모 공개를 반대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공개하자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27일 국방부는 유족들이 유서 공개를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관계를 확인 후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며 '사실상 반대한 것 아니겠느냐' 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공개된 유서의 내용은 자신의 가족과 희생자 유가족에게 사과하는 짤막한 내용과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 등 군 입대 전부터 후까지 자신이 당한 고충을 추상적으로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현재 전역한 당시 선임의 증언에 따르면[21] 착하고 선임들이 시키는 일도 잘 했으나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무시당했으며 무난하게 군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도 금품 갈취 등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흉기를 들고 가서 왕따 가해자를 해치려 한 적이 있었으며, 놀란 부모가 말려 실행하지는 않았으나 고등학교를 자퇴한 원인이 되어 대신 검정고시로 졸업을 대체했다. 후에 대학에도 진학했다고 한다. 허나 총기난사 사건 때문에 현재 출학 됐을 것이다.
5.1. 생포 후 본인의 진술과 수사 상황
임도빈 병장 본인은 26일 대면 조사에서 동료들이 자신을 비하한 데 격분하여 범행을 저질렀고 평소 부대원들이 선임병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는 진술을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범행 동기에 대해 함구하다 변호사 선임 후 진술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나 임도빈 병장 측은 사건 발생 직후 구두조사를 했으며 이 때 이미 육군에서 전체적인 동기를 파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변호사 5명을 선임 후 조사에 임했다.[22] 진술을 했는데, 2013년 11월 GOP에 투입한 직후부터 따돌림이 시작되어 자신을 놀리는 별명인 해골 그림을 그려 놓고 간부들도 4주 동안 하루 16시간 근무를 시키고 뒤통수를 때리고 돌을 던지는 등 동료 부대원은 물론 간부들까지 나서서 따돌렸다고 진술하였다. 그 외에도 정신과 치료 전력을 알렸지만 이유를 아무도 묻지 않거나 다른 부대원이 상담 신청을 했다가 바보 취급받아서 참고 지냈다는 진술로 군 병사 관리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자신만 따돌림당한 것이 아니라 부대 내 따돌림이 만연했으며 괴롭힘에 시달리던 다른 병사가 장비를 파손하고 동기 중 한 명이 자살 징후를 보여 전출되었다고도 진술했다. 자신을 괴롭힌 간부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진술하였다.
조준사격을 했다는 의혹을 부인하였고 어두워서 조준사격을 하지 못했고 사람 그림자를 보고 쐈다고 했다. 해당 뉴스에서는 사상자에 비해 사용된 실탄 수가 적다고 조준사격을 의심했으나 조사 결과 실탄은 당초 알려진 10발이 아닌 최소 25발 이상이 사용되었다고 밝혀졌다. 사망자 중에 자신의 부대 적응을 도와줬던 병사도 있다고 진술했다.(기사 삭제됨)[23]
YTN은 도주 시 총기가 고장났으며 노리쇠 뭉치가 고장 나 펜으로 임시조치를 하고 자살 시도를 했다고 진술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군 당국의 임도빈 병장의 선제 사격으로 부상자가 나왔다는 발표와 대치되는데, 국방부의 김민석 대변인은 보도에 나온 그런 진술을 임도빈 병장 본인이 직접 했는지, 실제로 총기가 고장났는지는 검증이 되어야 확인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후 군 수사 당국은 노리쇠 뒷부분이 부러진 것은 사실이나 총기 작동은 이상이 없다고 발표했다.
임도빈 병장은 우발적이라고 진술했지만 군 당국은 계획범행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기본적으로 우발적인 범행은 계획적 범행보다 형량이 크게 낮아진다.
사건 동기를 물어보면 흥분하여 혈압이 올라가고[24] 조사 과정에서 30분만 지나도 힘들다는 반응을 보이는 등 조사를 제대로 받을 몸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불구속 상태여서 기초 수사만 한 상태이고 29일 발표에 따르면 4~5일간 몸 상태를 보고 난 후 구속영장 신청 후 현장 검증과 강제 수사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희생자 5명 중 가해자는 1명이라고 진술했으며 변호인 측에 의하면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이 죽은 것을 알게 되어서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중간조사 발표에 따르면 지목된 간부는 범행에 대해 일체 부인하고 있어 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림의 경우 증거 확보는 완료되었으나, 임도빈 병장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임도빈 병장을 묘사한 그림은 확실히 그런 식으로 그려져 있긴 하지만, 다른 부대원들도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단순한 캐리커처 방식으로 이를 모욕감으로 느끼기엔 부족함이 있지 않냐는 것이 국방부의 입장이다. 또한 관련 언급을 할 때 많이 흥분한 상태여서 구체적 진술이 확보되지 않아 사실 여부를 판단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도주 과정에서 수색대를 3번이나 만났지만 지나쳤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국방부 대변인이 그럴 수도 있는데 그래서 코너로 몬 것이라고 대답해 논란이 되었다. 군 당국은 총격전이 있었다는 기존 발표를 번복하고 총격전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뒤집었다. 후에 발견된 탄피가 수색팀의 것으로 확인되어 처음에 임도빈 병장에게 총격당했다는 소대장은 근처에 있던 육군 하사의 오인사격에 의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임도빈 병장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여론은 자꾸 외부 요인으로 몰고 가고 싶은 거 아니냐며 반응이 좋지 않았다. 중범죄자의 집에 대한 압수수색은 보통은 이상할 것이 없으나, 이 경우는 1년 반 동안 군대에서 살던 병장이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단서가 있을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 컴퓨터라도 뒤져서 외부 요인으로 들먹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군 수사 기관에서 관련자에 대한 뒷조사를 멋대로 하여 군 책임이 아닌 개인간의 문제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변호인 측의 주장에 따르면 현역 특정 간부 하나가 주동자라고 했다. 임도빈 병장이 현역부적합 병사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임도빈 병장을 그렸다는 문제의 낙서 중 일부가 공개되었는데 국방부가 모욕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을 느꼈다고 말한 것과 반대로 "빡칠 만은 했네", "저게 모욕감을 느끼기에 부족하다니 그게 더 황당한데" 식의 반응도 있지만 "저게 사람을 죽일 만큼 화가 날 짓인가?"라는 반응도 있어 엇갈렸다. 국방부 관계자의 말대로 다른 부대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 그림이 있다면 임병장이 이것만으로 화가 났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평소부터 부대원 및 간부들의 무시, 멸시, 투명인간 취급, 자신감 결여, 소외감, 스트레스 등이 쌓였을 때는 이 그림이 그동안 쌓여 왔던 분노를 터뜨리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겨우 저런 그림 가지고 화났냐" 라던가 "겨우 저런 그림 가지고 화나다니, 정신이 이상한 놈이네" 라고 하는 식의 발언은 할 게 못 된다.
5월에도 자신을 놀리는 병사와 몸싸움을 벌였고 얼마 후 싸운 병사와 함께 근무에 편성되어 바꿔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임도빈 병장은 이때 간부가 "둘이 알아서 해결하고 초소에 가서 총으로 끝장을 보라"는 말도 했다고 주장했다.
병무청에서는 입대시 심리검사에서 정상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징병검사, 그 중에서도 심리검사에 대해서는 받은 사람 대부분이 강하게 불신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럼 그렇지, 가라로 하니까 못 걸러낸 거잖아' 식의 반응이 많다.
7월 4일 오후 8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영창에 수감되었다. 적용된 죄목은 상관 살해, 상관 살해 미수, 군용물 손괴, 군무 이탈, 군용물 절도와 형법상 살인, 살인미수 등 총 7가지이다. 영장 심사 과정에서 체포 과정에서의 자살 시도에서 죽지 못한 것이 한이며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와중에 변호인 측은 구속영장에 동기가 기재되지 않았다며 의혹을 제기하였다.
6일 해당 GOP 소초장 강모 중위에 대한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 소초에서 잠을 자면 안 되는 시간에 취침을 했고, 탄약고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소지하지 않아 하사가 자물쇠를 부수고 열어야 했던 점, 사건 직후 인접 소대에 지원 요청을 한다는 이유로 현장을 떠났는데 이는 유선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도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주한 것은 아니고 제압을 시도하고 지혈 등 응급조치를 하기는 하였으나, 김모 일병에게 지원 요청을 명령했으나 부상으로 이동하지 못해 자신이 직접 이동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8일 현장검증이 실시되었다. 분노에 휩싸여서 저질렀다고 진술했으며 조준사격을 일부 인정했다고 알려졌다.
14일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육군대장 권오성 장군은 미온적인 언론 대응 태세를 질타했으며, 군 조직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라고 주문했다.[25]
15일 추가로 중간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미 임도빈 병장이 고등학생 때 따돌림과 금품 갈취 등을 당했고, 21일 오후 4시(사건 발생 4시간 전) 순찰일지에 자신을 비하하는 그림이 더 늘어난 것을 인지했고 과거 왕따 기억이 떠오르면서 동료들을 죽인 후 자신도 죽기 위해 저지른 계획 범행으로 발표했다. 사단장을 비롯한 지휘관들도 줄줄이 보직 해임되었고, GOP 내의 관심병사 150여 명을 후방으로 보직 변경했다. 결국 사건 이전에는 자기네들이 스스로 관심병사라고 낙인찍은 사람을 150명이나 총기 들려서 근무시켰다는 이야기. 사고가 안 나는 것이 이상할 판국이다.
7월 9일, 임도빈 병장은 해당 부대의 부소초장 이 중사를 모욕 혐의로 고소하여 불구속 상태로 수사가 진행되었다. 병사들 앞에서 임도빈 병장을 힘이 없다고 놀린 등의 혐의를 받았다. 이 중사 본인은 대부분의 혐의를 부정하고 인정한 것에 대해서도 단순한 장난이었다고 진술하였고, 이에 대한 거짓말 탐지기 반응도 진실로 나와 전형적인 '가해자는 장난이지만 피해자에게는 고통'인 것으로 보인다. 이 중사는 이 고소와는 별개로 임도빈 병장이 5월에 다른 병사와 주먹다짐을 한 것을 징계위원회는 커녕 보고조차 하지 않은 등의 의혹을 받았고 이로 인해 임도빈 병장은 이 중사를 원망했다고 한다. 소초원 6명이 모욕 행위 등을 한 정황도 드러났으나 임도빈 병장이 이들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은 원하지 않아 소속 부대에서 징계하기로 했다.
일지 낙서 일부와 임도빈 병장의 유서 원본도 공개되었다. 소초원들은 낙서를 장난으로 생각했다고 하나 임도빈 병장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다른 낙서도 많지만 임도빈 병장을 묘사한 낙서가 다른 낙서보다 더 모욕적인 것 같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사건과 별도로 소초일지에 낙서질하는 자체가 황당하다는 반응[26]도 나왔다. 유서 원본은 유가족에 대한 짤막한 사과와 자신이 당한 괴롭힘을 추상적으로 나타낸 정도의 내용이고, 울면서 썼는지 군데군데 번진 부분이 보인다.
8월 1일 임도빈 병장과 소초장인 강 중위를 구속 기소하고, 오인사격 관련 입건된 7명은 정당한 사유가 있다는 검찰의 판단에 따라 불기소 처리하기로 했다. 임도빈 병장을 모욕하고 폭행한 혐의로 입건된 부소초장 이 중사에 대해서는 기소 여부를 검토했다고 한다.
임도빈 병장이 유일하게 고소했던 부소초장 이 중사는 불기소되었다. 소초 내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기소 사유를 '임도빈 병장이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27], '입에 착착 감겨서 불렀을 뿐 모욕 의도가 없었다', '지휘관에게 항변하지 않았으므로 모욕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또한 이 중사는 허위 공문서 작성 혐의로도 기소유예되었는데 530GP 사건, 181GP 사건 등에서는 부GP장이 비슷한 혐의로 구속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5.2. 재판 과정
5.2.1. 1심: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 판결
2014년 9월 18일 첫 공판이 진행되었다. 군검찰 측은 치밀한 계획 하에 일어난 계획 범행이며, 자신의 잘못으로 질책을 받는 것을 자신을 괴롭히고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일으킨 범행이라고 주장하였다. 임도빈 병장 측은 공소 사실은 대체로 인정하였으나 육군에서 발표한 대로 치밀한 계획 범행이 아니며, 따돌림으로 인한 우발적임 범행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육군 당국이 부대 내 따돌림이 없다는 천편일률적인 수사만 하고 있다며, (군 당국이 이러니)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면 자살밖에 답이 없다는 말을 했다. 특히나 육군에서 문제의 낙서를 캐리커처 수준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기에 조속히 시정해야 한다고까지 하였다.이 공판에서 임도빈 병장의 부모는 유가족들에게 사죄하였으며, 유가족은 사건이 집단 따돌림 문제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시했으나 유가족 모두가 임도빈 병장을 이미 용서했으며 임도빈 병장을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여 재판정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2014년 10월 23일에 있던 두 번째 공판에서는 변호인이 집단 따돌림을 입증할 병사 5명을 증인으로 신청했고, 수사 기록 중 후임에게 무시당하고 간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진술을 법정에서 공개하는 등 집단따돌림을 증명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이 때 일부 유가족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변호인이 따돌리거나 괴롭힌 병사는 총기난사 사건의 피해 병사와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며 항의를 가라앉혔다. 반면 군 검찰은 소초원 40여 명 중 임도빈 병장이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다고 진술한 소초원이 3~4명에 불과하므로 일부 주장에 불과하며, 따돌림이 있던 것은 맞지만 집단 따돌림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
재판부는 국민참여재판 기각으로 변호인이 제기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군사법원의 특수성을 들어 기각했는데, 변호인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변호인이 재판 종료 후 밝힌 바에 따르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28] 포기했으며 대신 하려고 했던 임 병장의 최후진술 육성 녹음 파일 공개는 KBS에 파일을 보냈으나 공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11월 7일 3차, 20일 4차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간부와 병들은 대체로 집단 따돌림이 아니라는 증언을 하였다. 그러나 '잘 어울렸던 것 같다'와 '임도빈 병장이 문제라서 안 어울렸다'고 엇갈린 증언이 나왔고[29] 1명이지만 '따돌림 같았다'는 증언이 있는 데다 존칭을 안 쓰는 등의 행위를 한 이유로 든 것들에 대해 오히려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 그렇게 하느냐'는 여론이 생겼고[30] 친해지기 위해서 별명을 불렀다는 것이 왕따 가해자들의 패턴과 같다는 점 때문에 여론은 오히려 따돌림이 맞는 것 아니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31]
재판부는 범행 동기를 좀 더 검토하기 위해 정신감정을 결정했으나 정신감정 결과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으로 볼 수 없으며 오랜 기간 따돌림당한 경험으로 인격이 다소간 왜곡되는 등 '특정 불능의 인격장애'라는 진단도 있으나, 이는 일반인에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으므로 정상인으로 봐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2015년 1월 16일,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 최종공판에서 군 검찰 측은 비무장 상태인 소초원을 대상으로 계획적이고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다며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고 2월 3일 제1야전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 재판부는 계획적인 범죄에 의한 살인죄를 인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비록 5명을 살해한 죄가 크지만 집단괴롭힘 피해자이면서 본인의 의지가 아닌 징병으로 입대했고 여기에 군 생활 중에도 부대원들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32] 등 임도빈 병장에게 정상 참작 소지가 있고, 이런 병사를 GOP에 배치한 점에서 군 당국의 관리 책임이 크다는 게 명백함에도 기존 대량살인범, 총기살인범들과 동일한 형량을 판결한 것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나 윤일병 사건의 이병장, 청부살인 사건의 김형식 전 시의원 등에게도 결국 내려지지 않은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는 형평성 논란도 있으며 '오원춘도 안 받은 사형을 받다니 오원춘이 임 병장보다 죄질이 떨어지냐'며 비꼬는 의견도 많다.[33]
임도빈 병장의 변호인은 재판부가 따돌림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항소 의사를 밝혔으며 항소장을 제출하였다.
5.2.2. 2심: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판결
변호인은 군사법원에서 또 재판을 받는다면 항소해 봐야 번복되지 않을 것이 뻔하므로 민간법원에서 재판받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6월에 고등군사법원에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라는 기사로 보아 민간법원으로 옮기는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34] 항소심 재판장과 주심 판사는 제28보병사단 폭행사망 사건에서 상해치사만 인정한 1심을 파기하고 살인죄를 인정한 재판부로, 이 때문에 임도빈 병장 측은 양형은 어쩔 수 없어도 근본적인 범행 동기(집단 따돌림과 병영부조리)만은 항소심에서 드러나기를 기대했지만 2015년 8월 17일,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항소심에서도 항소를 기각하면서 사형 판결을 유지했다. 2심 판결문.요지는 따돌림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본인 주장 외에는 근거가 없고 자신이 잘못해서 소외된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낙서나 별명 부르기 같은 다른 사람들은 다들 견디는 것을 살인과 동일시해서 계획적이고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 사람을 5명이나 죽였으니 사형은 어쩔 수 없다는 사람도 대놓고 따돌림 문제를 배척하는 태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언급하는 부분이나 임 병장 때문에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군의 사기 저하가 일어났다는[35] 등 군은 책임이 없다는 식의 소위 모든 책임을 임도빈 병장만의 탓으로 돌리는 국방부의 태도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5.2.3. 3심: 대법원 판결
2016년 1월 18일, 대법원은 임도빈 병장의 판결을 2부에 배정했으나 양형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원합의체로 넘겨 다시 합의하겠다고 발표하였고[36], 2016년 2월 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상옥 대법관)로 상고가 기각되고 임도빈 병장에게 사형선고가 확정되었다. 관련 기사, 판결문.다수 의견인 상고 기각 의견을 낸 대법관은 9명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를 들었다.[37]
- 심신미약은 아니며 지적 능력도 평균 수준이다.
- 분노의 직접적 원인이 된 그림은 다른 소초원도 그려져 있고, 이전에 그 낙서를 보고도 넘긴 적이 있다.
- 낙서 대부분을 그린 황 모 상병은 임도빈 병장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해서 그렸다고 진술[38]
- 괴롭혔거나 따돌렸다고 주장한 병사뿐 아니라 친하게 지내던 소초원[39]을 포함 전원을 살해 대상으로 했다.
- 마치 전투에 임하는 것과 같이 소초원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많이 살해할 수 있는 순서, 방법 등을 계획한 다음 지능적이고 냉혹하게 그 계획에 따라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 임도빈 병장이 계획한 대로 되었으면 사망 5명 부상 7명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 사상자들은 젊은 나이에 무참히 살해 당하거나 큰 부상을 입었고, 임도빈 병장을 '형'으로 부르는 등 친하게 지내거나 호의적인 후임병까지 살해했으며, 문제의 낙서와 무관한 사람이 다수이다.[40]
- 도주 과정에서도 수색대에게 거짓말을 하며 따돌렸고, 대치하게 되자 휴대전화로 자신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 최소 무기징역을 선고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사망자들과 유가족에게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국방부와 군대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발생한 사건이고 괴롭힘과 따돌림이 원인이라며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41]
- 피해자와 유족은 임도빈 병장이 반성과 사죄는커녕 사상자에게 범행의 책임을 덮어씌우려 한다며[42] 엄벌을 탄원하고 있고, 피해자와 유족들에 대해 피해 회복이나 사죄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 종합하면 사형 선고가 정당화될 특별한 사정이 있다.
- 사리판단 능력에 어떠한 결함이 있었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따돌림이나 폭행, 가혹행위 등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인 괴롭힘이 존재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 사건에서 위와 같은 인격장애[43] 등이 임 병장에 대한 비난 가능성을 경감할 만한 사정으로 고려되기는 어렵다.
- 이병~일병 시절까지는 적극적으로 복무를 하였으나[44] 상병이 된 후부터, 특히 GOP에 투입된 이후에는 열외의식이 강해지고 선임병 역할에 충실하지 못해 스스로 동료 장병이 호의적으로 대하지 못할 상황을 만들었고, 그렇게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거나 외톨이가 되는 스스로 자초한 악순환 상태에서 다른 소초원이 자신을 따돌리고 괴롭힘을 가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 대부분의 소초원들도 큰 문제 없이 지낸 임도빈 병장이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의아해하고 있으며, 임도빈 병장 스스로 일부 인원이 자신을 따돌렸고 나머지는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동정한 것이라고 인정한 것을 봐도 변명과 책임 전가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 GOP 환경이 사건 발생의 한 요인이긴 하지만,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젊은 장병들을 GOP 등 최전방에 근무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45]
- 범행의 책임, 범죄와 형벌 사이의 균형, 유사한 범죄 발생을 예방할 필요성 등 참작할 정상이 있긴 해도 법정 최고형 선고가 불가피하다.
- 원심(2심)은 각종 증거와 진술을 충분히 모으고 검토하였으며, 임도빈 병장과 변호인이 변론할 기회도 충분히 주었으므로 원심이 부당하다고 인정할 현저한 사유가 없다.
사형 반대 의견인 대법관은 4명으로, 그 중 이상훈, 조희대, 이기택 대법관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들었다.
- 범행 결과만을 두고 보면 사형 선고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형이 갖는 뜻이 너무나 무겁고, 그 정도로 임 병장에게 극한의 책임을 묻기에는 수긍할 수 없는 대목이 뚜렷하게 있다.
- 사형은 범행 동기에 참작할 사정이 없음이 명백하고, 그에 따라 피고인을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는 것밖에 답이 없음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경우에 한해 선고해야 한다. 이는 심지어 다수 의견도 똑같이 밝히고 있는데, 위와 같은 요건의 존재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범행 결과 자체가 중하다고 사회적 파장과 형벌의 예방적 목적 등을 내세워 사형을 선고한다면 인간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 임도빈 병장이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 소초장 등은 동기생들로부터 무시 당하는 경향이 있었다거나, 조용하고 착하였고 성격이 소심하여 후임병들에게 뭐라고 얘기하지 못하고 화도 못 내 부담감이 심했던 것 같다거나, 후임병들로부터는 잘 못하는 선임으로 인식되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 많은 소초원도 분대원이나 후임병으로부터 무시당하는 등 선임병으로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 소초원들은 임도빈 병장을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고, 순찰일지에 임도빈 병장을 묘사하면서 '일로와 맞장 뜨자', '6. 10. 말 놓는 날(피고인의 후임이자 이 사건 범행으로 사망한 병사가 쓴 것으로 보인다)', '병신', 'ㅂㅅ', 'ㅂㅅㅇㅌㄱ'와 같은 문구를 기재했다.
- 원래 A급 관심병사로 GOP 근무를 할 수 없었으나, GOP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B급 관심병사로 조정했다.
- 비록 선임병이었지만 다른 소초원들, 특히 후임병들로부터 그에 따른 대우를 받지 못하고 무시 당하는 등 소초 내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고 볼 여지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 범행 직전 자신을 희화화하고 비하하는 그림과 글들을 보고는 그 동안 소초 내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여 쌓인 억압된 분노와 적대감 등이 갑자기 공격적 행동으로 폭발적으로 표출되어 범행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인격장애의 발로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따라서 그 범행 동기에 참작할 사정이 없음이 명백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 그 동안의 집단 따돌림으로 쌓인 분노와 적대감에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어 소지하던 총기와 수류탄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원심에서 판시한 것처럼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 하에 범행을 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원심의 평가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
- 따돌림이나 괴롭힘 등이 범행의 원인이라고 호소하는 것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호소를 근거로 수사 기관에서의 조사 때부터 원심에 이르기까지 범행을 자백하고 있는 임도빈 병장이 범행을 뉘우치지 않고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체포 직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범행을 후회하거나 자책하고 있다는 징표가 된다.
- 직업과 경력, 교육 정도, 성장 과정, 가족 관계, 전과의 유무 등에서 사형 선고를 긍정할 만한 양형 요소가 없다. 재범 위험성을 긍정할 분명한 사유도 없는데, 정신과적 치료 등으로 큰 치료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 함부로 재범의 위험성을 긍정하면 안 된다.
- 이와 같이 그 범행 동기에 참작할 사정이 없음이 명백하다고 볼 수 없다. 범행의 결과가 매우 중하다고 사회적 파장과 형벌의 일반 예방적 목적 등을 내세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 임도빈 병장은 원래 GOP 근무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인다. GOP에 투입하면 충분히 어떤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으면서도 소초 투입 전 이루어진 심리검사에서 A급 관심병사로 분류되었는데도 인위적인 재검사를 통한 조정으로 B급으로 재분류되여 투입되었고, 임도빈 병장의 인격장애로 인해 초래될 사고를 방지할 어떠한 조치도 없던 등 병사에 대한 관리 소홀도 이 사건의 한 원인이다. 따라서 범행의 책임을 오로지 임도빈 병장에게만 돌려 사형 선고를 통해 생명을 박탈하는 것이 합당한지 의문이다.
역시 사형 반대 의견을 낸 김창석 대법관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들었다.
- 사형은 징역형 등 다른 형벌과 달리 헌법의 기본권 조항과 쉽사리 조화를 이룰 수 없고, 이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려고 할 때는 위헌적인 결과가 초래될 수 있으므로 매우 중대한 생명이나 공익을 지키기 위해 사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급박하고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지, 설렁 범행이 극악하고 결과가 중대하더라도 온전히 범죄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지 등을 면밀히 심리해야 한다.
- 하지만 원심은 양형 이유로 괴롭힘이나 따돌림이 범행 동기로 참작될 정도가 아니라거나, 범행 과정이 냉혹하고 무자비하다거나,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의심이 든다는 등의 사정만 종합하여 제1심을 유지한 것은 사형의 양정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위법이 있으므로, 원심을 파기해야 한다.
임도빈 병장은 61번째(군 사형수로 4번째) 사형수가 되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여러모로 비판 여론이 나왔다. 김길태, 오원춘 같은 다른 범죄자도 '교화의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사형은 함부로 선고할 게 아니다'는 이유로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는데 이 사건이 정말 더 계획적이며 잔혹하고 참작의 여지가 없냐는 의견, 군 내부 문제를 외면하고 임도빈 병장 혼자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웠으며, 따돌리고 괴롭힌 자에 대한 처벌이 없다는 것에 대해 강한 비판이 나왔다. 실제로 임도빈 병장 관련자 중 어느 누구도 괴롭힘에 대한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고, 당시 소초장 직무대행이었던 강 중위만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그나마도 따돌림에 대한 것으로 선고받은 것이 아니다.[46].
'괴롭힘을 당하다 한 건데 정당방위다' 같은 반응이 아니더라도 법리적으로도 비판 여론이 있다. 대법원은 21세기 이후로 단순히 범행이 중하다고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형은 교화의 여지나 참작할 동기가 없어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하는 것밖에 답이 없음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때 선고해야 한다'고 원칙을 정했고, 다른 사건은 물론 이 사건의 판결문에서도 자주 밝혀온 바다. 이는 군법도 예외가 아니며, 실제로 강도강간, 강도살인 등의 죄를 저지른 손모 중위에게 교화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파기한 2001년 판례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사형을 선고한 이유는 죄질이 무겁고 사형을 선고해서 유사한 사건 발생과 잠재적 피해자 발생을 예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판결문에서 사형 선고의 기준이 되었던 '교화의 여지나 참작할 동기가 없어 사형밖에 답이 없음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때'가 있는가? 교화의 여지는 분명히 있어서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느낌조차 들며, 대놓고 참작할 정상이 있어도 사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하고 있다. '사형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때' 또한 굳이 여론까지 가져오지 않아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원합의체에서 사형을 반대한 대법관이 4명이나 나오지 않았는가.
심지어 이 사건이 마지막으로 사형이 확정된 사건이다 보니 심지어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사형의 선고가 정당화될 수 있을 때에만 사형 선고가 허용된다'를 설명하기 위해 사형에 의문을 표한 대법관이 여럿 있었음에도 사형이 선고된 이 사건의 판결문이 인용되는 코미디가 일어나고 있다.
사형을 반대한 대법관들이 판결에서 보수적인 의견을 많이 냈으며, 법 원칙에 입각한 판결을 내린다는 평을 받는 경향이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 원칙적으로는 사형이 적절하지 않는데, 군대에서 총기난사를 했으니 원칙을 무시하고 죽으라는 판결이 나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원칙일 깰 정도의 것이냐(특히 이 사건 이후에 원칙에 따라 어떠한 흉악 범죄에도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전혀 안 하고 있으므로)는 것.
현재 임도빈은 사형수 신분으로 국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다만 1997년 이후 더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대한민국 특성상 임도빈에게 실제 사형이 집행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나마도 군인을 대상으로 한 사형 집행은 1986년 이후 중단되었다.
6. 논란
6.1. 병영 내 집단따돌림
이미 전역 3개월 남은 병장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점에서 집단따돌림이 원인이라고 대부분 추측했고 임 병장 본인도 그렇게 진술했는데 진술 중에 간부까지 나서서 따돌렸다는 점과 없는 사람 취급하는 정도를 넘어 돌을 던지는 등 괴롭힘이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더 논란이 되었다. 물론 본인의 진술이니 걸러 들어야겠지만, 변호인을 선임하기 전이나 본인 진술이 나오기 전부터 다른 사람에게 나온 진술이나 부대 내에 그려진 낙서, 군 수사 기관의 발표 중 관련 내용 등 집단따돌림이 원인이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국방부가 '낙서는 캐리커처 수준'이라고 한 것도 논란이 되었는데 언론에 공개된 낙서 일부를 보면 '캐리커처 수준'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이다. 수사관은 그 낙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커녕 ‘아니 이런 그림을 보고 사람을 죽였다고? 그게 이해가 돼? 다른 동기가 있는 것 아냐?’고 다그쳐서 절망한 임 병장은 입을 닫아버렸다. 임 병장의 변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 그림 중 제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요. 비쩍 마른 임 병장을 그려놓고요, 아주 희화적으로. 그 주위에 사람 눈을 여러 개 그렸어요, 소름이 돋죠. 그 이야기는 뭐겠습니까? 우리가 너를 왕따 시키고 있다는 극단적인 표현 아니에요? 보고 있다. 그 눈들은 다 조롱의 눈이죠. 그리고 'ㅂㅅ'(병신), 'ㅇㅌㅋ'(오타쿠)의 이니셜을 써서 표현하고 있고요. 이런 것들을 갖다가 캐리커처 적으로, 해골이 없다라는 것을 캐리커처다, 이것은 장난이다, 다른 병사도 그려져 있다, 그거는 절규하는 소리조차도 안 듣겠다는 이야기에요. 니 말을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하물며 그 전에 이야기했다면 들어줄까요? 더 미친놈 취급을 당하겠죠. 그 그림은요,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그림입니다.
(중략)
최초 면담 시에는 저도 똑같은 이야기 했습니다. ‘혹시 너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냐?’ 이렇게 묻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림을 보고 설명을 들으니까, 특히 그 눈, 사람 주위를 둘러싼 눈을 보고는 저는 소름이 좀 돋더라고요.
(실제로 다른 병사들 캐리커처도 있던가요?)몇 개 있었어요. 몇 개 있었고 거기에는 그다지 비하하거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은 들었어요. 이 친구만 집중적으로 타깃이 되었어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 초소에 사람들이 몇 명인데 왜 그 임 병장의 그림이 2/3 이상이냐고요. 어떤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이고 즐거움의 공간이라면 왜?, 그리고 ‘병신 오타쿠’를 보고도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건 어쩌자는 겁니까. ‘병신 오타쿠’, 우리는 너를 병신 오타쿠라고 한다, 이걸 극명하게 썼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이해가 안 된다면 더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래서 임 병장도 수사관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절망하고 더 이상 진술을 못 하겠다, 나는 너무 힘들었는데 이렇게 말 하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걸 군은 또 진술을 거부했다고 하는 거죠.
출처
(중략)
최초 면담 시에는 저도 똑같은 이야기 했습니다. ‘혹시 너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냐?’ 이렇게 묻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림을 보고 설명을 들으니까, 특히 그 눈, 사람 주위를 둘러싼 눈을 보고는 저는 소름이 좀 돋더라고요.
(실제로 다른 병사들 캐리커처도 있던가요?)몇 개 있었어요. 몇 개 있었고 거기에는 그다지 비하하거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은 들었어요. 이 친구만 집중적으로 타깃이 되었어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 초소에 사람들이 몇 명인데 왜 그 임 병장의 그림이 2/3 이상이냐고요. 어떤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이고 즐거움의 공간이라면 왜?, 그리고 ‘병신 오타쿠’를 보고도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건 어쩌자는 겁니까. ‘병신 오타쿠’, 우리는 너를 병신 오타쿠라고 한다, 이걸 극명하게 썼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이해가 안 된다면 더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래서 임 병장도 수사관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절망하고 더 이상 진술을 못 하겠다, 나는 너무 힘들었는데 이렇게 말 하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걸 군은 또 진술을 거부했다고 하는 거죠.
출처
임 병장이 고등학교 때를 비롯해 입대 전에도 심한 따돌림을 당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병영뿐만이 아닌 사회의 집단따돌림 문제도 지적되었다.
시사IN이 공개한 수사 기록 일부에서 보고 기분 나쁘라는 의도로 한 낙서였다고 부대원이 진술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그런데 국방부는 낙서가 캐리커처 수준이며 그걸로 기분 나빠한 임 병장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 사건의 수사 기록, 관련자 진술, 판결문, 상고 이유서 등을 보면 제대로 수사할 생각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드러난 것만 다음과 같다.
- 부소초장이 모욕을 했다는 것을 부소초장의 진술을 토대로 불기소 처분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그 때 같이 있던 문 모 하사에게 확인을 하지 않았다(진술조서 자체를 작성하지 않았다.). 부소초장이 했다는 모욕 내용을 대질 신문에서 말하자 부소초장이 몹시 당황했고, 앞뒤가 안 맞는 진술을 보였는데도 군판사, 군검찰 등은 해당 진술을 전혀 추궁하지 않았다.
- 문제의 낙서에 대해서 임 병장을 나타낸 그림 주위에 낙서가 되어 있고[47] 비율도 임 병장을 나타낸 낙서가 유의미하게 많았는데도 혼자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한 해당 그림과 글을 처음 봤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때 격분하지 않고 지금 격분하여 사건을 일으킨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이유로 무시.
- 낙서를 한 황모 본인을 포함, 관련자들은 보고 화가 나라고 그린 것이 맞으며, 자기를 그런 식으로 했으면 화가 났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 사건 당시 임 병장의 동기였던 증인 방모는 문제의 낙서를 이미 동기끼리도 문제 삼아서 후임을 다그쳤다, 후임이 선임을 먹었다는 진술을 했는데도 그렇게 판단했다. 심지어 언론에는 어째서인지 '몇몇과 사이가 악화되었지 집단 따돌림이 아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 설렁 임 병장 혼자만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후임병 김모가 임 병장을 무시하도록 조장하거나, 이로 인해 심모 하사가 너무하다고 질책하거나, 임 병장의 말투를 따라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는 사실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았다는 등의 임 병장 본인이 아닌 다른 관련자의 진술에서도 드러났다.
- 사건이 터진 소초에서 설문 때 간부의 비위 사실을 적었다는 이유로 따돌림이 없고 병영 생활 태도와 학창시절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의식 때문이라고 판단.
- 군 집단따돌림을 인정할 수 없으니 '어린 시절 당한 따돌림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이 내제되어 있다'고 정해 놓고 이를 '그러니 사회에 내보내도 또 범죄를 서슴치 않을 것이다'고 판단하는 근거로 이용했다.
- 집단 따돌림 정황을 '자신 스스로의 병영 생활과 피해의식으로 그런 상황을 자초했다'고 하면서도 '동료들도 멀쩡하던 임 병장이 왜 그런 사건을 저질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모순[48]적인 판단을 하였다.
1심에서 군 검찰과 군사법원이 집단따돌림을 인정하지 않으면서[49] 과연 국방부가 병영 내 집단따돌림을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수준. 특히나 이 사건의 경우는 수사 기록에 분명 "보고도 못 본 척 경례를 하지 않기, 후임병들과 대화하며 임 병장 성대모사 등 흉내 내기, 할배·슬라임 등 별명 부르기, 평상시 대화 중 무시하는 호칭 부르기, 협조일지 뒷면에 임 병장을 놀리는 듯한 글과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 낙서를 보고 웃고 떠드는 행위, 주변에 없는 사람 취급하기 등이 있다(김 상병, 6월25일 헌병 조사)."라는 기록이 있고,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집단괴롭힘의 증거임에도 군검찰과 군사법원은 이건 집단따돌림이 아니며 임병장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저지른 것이라며 우겼다. 2심 국방부 고등군사법원도, 임 병장이 살인자가 된 이상 처벌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대법원마저 조직적 따돌림이나 폭행, 가혹행위 등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움을 겪었다고 볼 만한 사정은 찾아볼 수 없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의지가 전혀 없음을 입증했다.
이렇게 해서 임병장이 저지른 범행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적과 임병장 본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갔으므로 앞으로 군 입대에 적합하지 않은 자원들의 병역기피 시도가 더욱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이 되는데 누가 가고 싶겠는가? 또한 이러한 일은 절대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걸 확신할 수도 없어졌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라 해야 할 집단따돌림에 관련해선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
6.2. 관심병사를 비롯한 병사 관리 문제
A급 관심병사이던 임 병장을 지휘관이 B급으로 내린 후 얼마 안 가 실탄을 운용하는 GOP에 투입했다는 점, 그리고 관심병사로 지정만 해 놓고 별다른 관리를 한 흔적이 없어 관심병사 관리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정신 치료 전력을 알렸으나 무시했다는 임 병장 측의 진술이나 현역부적합 병사로 보인다는 변호인 측의 주장, 왜소한 체격과 3km 구보도 힘들어했다는 증언, 고등학교 때도 따돌림 가해자를 해치려고 했다는 주위 증언 등으로 인해 '이런 놈을 왜 진작 거르지 않고 현역으로, 그 중에서도 GOP에 투입하냐'는 말도 많이 나왔다. 특히나 GOP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였던 것도 아니고 사건 한 달 전에는 동기였던 병장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50] 이미 징후가 보였기에 더더욱. 원래대로라면 징계위원회를 열어 징계 조치나 GOP 배제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데, 부소초장 이 중사가 소초장 강 중위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임 병장이 따돌림 문제로 근무조 변경을 요구하거나 FEBA로 전출시킬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하는 등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고 방치해서 일이 터진 것이다'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한부모 가정일 경우 B급 관심병사로 분류한다는 등의 황당한 기준, 관심병사로 지정만 하지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오히려 관심병사라는 것이 쉽게 노출되어 군 생활을 어렵게 하는 낙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과 같은 문제, 사건 발생 후 3주가 채 되지 않았을 때 상병 전역한 A급 관심병사가 자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관심병사 제도 자체에 대한 회의론도 일었다.
관심병사를 추격조에 투입했는데, 일부에게는 실탄을 지급하지 않아서 논란이 되었다. 부상당한 김모 중위가 이끌던 소대에도 이렇게 실탄을 받지 못한 병사가 있었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애초에 투입을 시키지 말든가, 고기방패나 시키려 데리고 나온 거냐'는 비판적인 반응이 일었다. 실제 교전 상황이 벌어질 경우 실탄을 든 병사들이 자기 자신은 물론 관심병사까지 지켜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그 이전에 병사를 작전에 투입하면서 실탄을 지급하지 않았다니, 그게 군대인가? 싸우라고 한 건지, 그냥 나가 죽으라고 한 건지 분간이 안 간다. 그나마 아무 일 없이 넘어갔으니 망정이지, 만약 실탄을 받지 못한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다면 더한 논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무장한 상대 앞에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죽음으로 내몰린 격이니 말이다.
여론은 대체로 집단따돌림뿐만 아니라 군 내부에도 문제가 있으니 고쳐야 한다는 입장이며, 유족들도 군의 무책임한 병역 관리를 보며 임 병장에게 연민을 느낀다면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 개인간 갈등으로 원인을 몰아가면 안 된다고 언급했다.
군도 사건 이후로 관심병사를 GOP에서 후방으로 보직 변경하거나 조기 전역시키는 등의 조치를 하고는 있으나 사건 이후로도 관심병사가 자살하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논란이 이어졌다.
초창기에는 밝아지고 말도 많아지는 등 괜찮아져 B급으로 조정했다고 보도되었지만, 조사 결과 인위적으로 B급으로 조정했다고 밝혀졌다. 임 병장은 위에서 인성 검사를 할 때 좋게 체크하라고 요구하였다고 진술하였고 전 소초장, 당시 소초장 등도 GOP에 투입할 인력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억지로 A급을 B급으로 조정하고 투입한 것을 인정했다.
유가족 중 한 명이 밝힌 바로는 원래는 빈 총을 주다가 사건 당일 인수인계가 안 되어서 실탄을 줬다가 사고가 났다고 한다. 사고 칠까봐 실탄도 못 맡기고 있었으면서 GOP에 집어넣은 것. 진짜로 머릿수만 채운 것이다.
이 사건으로 병력을 채우기 위한 과도한 신검 기준 완화에 대한 개선 요구가 많았고, 실제로 영향을 끼치기는 했는지 2014년 상반기 92%이던 현역 판정 비율이 이후 90%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 이후에는 80% 초반대까지 떨어졌다.(커뮤니티 등지에서는 징병률 98%라는 말이 떠도는데, 이는 2014년 당시 '이대로 인원 채우려고 막 뽑다가는 2022년에는 98%가 된다!'고 주장하는 기사일 뿐이고 실제로는 80%대로 완전히 달랐다. 공익까지 포함해도 98%는 절대로 안 나오며, 공익까지 계산할 거면 옛날 징병률도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커뮤니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높다.) 다만 이것은 2014년 당시 현역 대상자가 보직보다 많아 입대 적체가 일어나는 현상 때문이었던 것도 커서 신검 대상자 자체가 줄어든 2020년대 들어 신검 기준 완화를 하려고 하고 있다. 다만 이 사건의 기억이 아직도 강렬한지 정신과 기준은 신검 기준 완화 와중에도 그대로거나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6.3. 22사단과 GOP의 열악한 근무 환경
위에서 언급한 관심병사를 GOP에 투입시킨 문제의 이면에는 만성적인 병력 부족과 22사단의 넓은 경계로 인한 열악한 근무 환경[51]이 원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GOP 문서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GOP의 특성으로 인해 주말 휴식이 없고 휴가와 외출·외박 등도 제한되어 있는 데다 외부와 고립되어 소수의 인원들만 계속 봐야 하는 상황 등으로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 22사단은 2012년에 일명 노크 귀순 사태가 터진 이후 GOP 근무 병력을 120%로 늘렸는데, 이로 인해 관심병사에게 실탄까지 줘서 투입시킬 정도가 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일단 군은 그것이 임 병장이 투입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수사 과정에서 인원이 부족하다고 반강제로 정상으로 쓰라는 압박을 가해 B급 관심병사로 조정한 직후 GOP에 투입된 것이 밝혀지면서 그것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고 진우찬 병장의 아버지는 GOP의 근무 환경을 보고 아들을 이리 보내고 혼자 편하게 지낸 것이 미안하다며, 오히려 B급 관심병사가 A급이 될 판이라며 그 사람(임 병장)도 피해자일 수 있겠다는 말까지 꺼냈다.
체포조가 방탄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 방탄복 논란이 불거졌는데, 방탄복 보급률은 DMZ가 47.6%, GOP가 30%, 전체 병력으로 봤을 때는 겨우 6%에 불과했으며 김관진 당시 장관은 '국방 예산을 더 투입해야 할 것 같다'며 예산 탓을 하여 아래의 늑장 응급조치와 이송 논란과 맞물려 '무기 사는 데는 돈을 펑펑 쓰면서, 장병들 목숨값은 개만도 못하냐', '간부 골프장이나 없애라'며 논란이 되었다.
군에서도 예산을 늘려 최전방에는 방탄복을 100% 지급하고, GOP 근무병은 제초 작업에 투입하지 않고 중대가 아닌 소초마다 의무병을 배치하는 것을 추진하는 등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개선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쇼를 했다. 다만 이것이 개선해야 할 것은 맞아도 열악한 근무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안 된다는 주장도 많다. 현 GP·GOP 근무 방식이 구시대적이며, 감시 장비 투입 등을 통해 필요한 인원 수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결국 최전방 수호병 제도를 새로 만들어 1만여 명의 병사가 경계근무를 전담하게 하고 나머지 병력은 GOP 투입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였다.[52]
6.4. 늑장 응급조치와 이송 논란
JTBC 뉴스 9의 인터뷰에서 부검 과정을 참관한 이후 방송 인터뷰에 곧바로 응한 미 육군 군의관 출신인 희생 장병의 외삼촌의 증언에 의하면 부검을 지켜본 결과 일부 장병은 응급조치를 빨리 했다면 살았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당시 군의 허술하고 느린 응급처치가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2014년 6월 25일 JTBC 뉴스 9 내용. 그리고 국회에서는 문재인 의원이 국회 국방위원회 현안보고에서 사망한 장병 중 3명의 경우는 병원으로의 이송이 늦어져서 사망한 것이 아니냐고 질의했다.[53] 해당 기사. 이로 인해 군의 사건 대처와 부상자 처리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실제로 군의 병크로 응급헬기가 1시간이나 지연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늑장 응급조치 대응이 사실로 밝혀졌다.
5명 모두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이며, 응급처치나 이송이 빨랐다면 살 가능성이 높았다고 알려졌다. 그동안의 총기사고에서도 계속 나타났던 문제인데 변화가 없었던 것. 또한 그 응급조치도 의식이 있는 병사들 위주로 하여 당시 의식이 없으나 살아 있던 병사들이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사망자 중 임 병장이 자살 시도할 때 입은 부상보다 더 약한 부상을 입은 병사가 많았고, 임 병장은 바로 후송되어서 살았으니 명백히 군의 부상자 후송 능력의 잘못인 셈. 결국 군 당국이 응급처치를 제대로 못한 것을 시인했고 유족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평시에도 이따위인데 전시라면 얼마나 많은 부상병들이 목숨을 잃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나마 나은 것은 이 문제가 공론화는 되었다는 것이다. 530GP 사건과 강화군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도 후송 문제가 있었으나 공론화가 되지 않아 고쳐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 사건도 처음에는 심장에 총알을 맞았다고 잘못 발표해 '일찍 후송해도 죽을 수밖에 없었음'이 될 뻔했다. 희생자 친척 중에 군의관 출신이 있어 살 수 있는 부상인 것을 눈치챘고, 언론에 임 병장이 당한 괴롭힘이 늦게 공개되어 병영부조리 등 다른 문제에 묻히기 전 응급처치와 후송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육군에 의무후송항공대가 창설되었고 GOP 부대에 전투형 응급처치 키트가 보급되었다. 이 사건을 반면교사 삼아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에서는 빠른 응급처치와 후송이 이루어졌고 다리를 잃긴 했지만 부상자들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6.5. 추격 과정을 비롯한 군과 국방부의 문제점
국방부는 피해자 유족들의 요청으로 메모를 비공개 처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피해자 유족들은 기자회견에서 유서 공개를 거부한 적이 없다고 밝혔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다음날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유족들은 사실관계 확인이 될 때까지 비공개해 달라고 요청한 만큼 말 바꾸기라고 보기는 어렵다.메모에는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사과만 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 후에 공개된 메모에는 추상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자신이 당한 고충에 대한 토로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동안에 있던 군의 크고 작은 사건 처리도 그렇고, 이 사건에서도 임 병장과 총격전이 있었다는 초반 발표를 번복하고 추격조 내 싸움으로 정정하거나 임 병장을 그린 낙서가 모욕감을 느끼기에 부족하다고 발표했으나 공개된 낙서의 일부는 대부분이 모욕감을 느낄 만한 낙서였던 등 군 내부 수사에 대해 불신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임 병장은 수색대를 여섯 번이나 만나고도 지나쳤다는 주장에 국방부 대변인이 "그럴 수도 있는데 그래서 코너로 몬 것"이라고 대답하여 논란이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했던지 '형량 줄이려고 거짓말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으나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피아식별 띠를 가지고 간다', '암구호를 잊어버렸다'는 말에 보내줬다고 한다. 심지어 임 병장 본인은 탈영 후 자살 시도까지 1발도 쏘지 않았는데 오인사격이 3번이나 일어나고 간부만이 임 병장의 얼굴과 이름을 공유해서 잡지 못했다고 한다. 애초에 간부끼리만 공유한 것도 문제지만 그 간부도 심부름을 간다는 말에 보내준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사진과 임 병장이 다르더라', '신형 전투복이라 이름표 식별이 어렵다'라는 변명을 했기 때문에 임 병장이 더한 살의를 품었거나 무장 공비였으면 어떡했을 것이냐고 좌우 가리지 않고 어처구니 없어했다.
주민들을 대피시키지 않아 민간인 사상자가 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고, 주민들에게 입막음을 시도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국방부 스스로 보기에도 어이가 없었는지 체포 작전의 실태를 정확히 확인하라는 장관의 지시로 대대적인 검열에 들어갔다고 한다. 초기에는 작전이 비교적 잘 되었다고 자평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반대로 얘기하면 임 병장의 진술이 없었더라면 내부 문제점이 묻혔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 동안 총기사고가 계속 있었는데도 '총기사고 대응 매뉴얼이 없다'고 밝혀졌다.
총기사고 때마다 군이 내놓는 대책이 겉돌기만 한다는 문제도 지적되었다. 이 사건이 9년 전의 530GP 사건과 판박이이고, 그때 내놓은 대책[54]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런 사건이 다시 벌어진 건데 그때와 비슷한 대책이나 내놓았다는 것. 그리고 과거의 총기난사 사건에서도 원인으로 최전방의 열악한 근무 환경이나 병사 관리 문제, 늑장 응급조치와 이송이 문제가 되었고 추격 과정에서의 문제 역시 과거의 무장공비 사건에서도 계속 지적되었던 것이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고 고쳐지지도 않았다.
6.6. 오인 사격 형사입건 논란
2014년 7월 9일 오인 사격한 7명을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형사입건했다는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물론 형사입건 그 자체는 처벌이 아니지만,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네가 범죄를 저지른 것 같다고 의심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그냥 그 때 일어났던 일 진술이나 몇 번 듣고 말거면 입건하지 않는다. 그 동안에 있었던 교전에서는 오인 사격으로 입건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서에는 오인 사격한 상병이 중형을 선고받았다는 언급이 있지만, 검색해도 그러한 기사나 판결문 등 관련 자료가 없기 때문에 진짜인지 확인할 수 없다.) 오인 사격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한다면 누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작전에 투입되려고 할까?
입건 대상자도 논란이 되었다. 먼저 총격을 가한 소대장은 부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입건에서 제외되고 대응 사격을 한 하사 2명만 입건되는가 하면 누가 쏘았는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현장에 있던 5명을 입건했는데 그 중 쏘았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운전병과 무전병까지 포함되었다.
결국 오인 사격에 정당한 사유가 있다는 이유로 전원 불기소처분되었다.
6.7. 희생자 예우 논란
일부 유가족이 "훈령을 바꿔서라도 전사자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참고로 전사자와 순직자는 일시 보상금과 유족들이 받게 되는 연금 액수에서 차이가 나는데, 이에 돈 때문에 그러냐는 좋지 않은 시각도 있다. 유족들은 죄 없이 죽은 병사들이 명예롭게 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요청했다고 밝혔으나 전사자라는 것은 적대 세력과의 교전(전쟁) 상황에서 사망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북한군 혹은 무장 반란 세력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거나,[55] 아니면 전쟁 상황에서 아군 오사에 의해 사망한 경우만 전사자 대우를 받을 수 있는데 이 경우는 전쟁 상황이 아닌 데다 명백한 아군(대한민국 육군 소속)인 임 병장의 총격을 받은 거라 누가 봐도 명백한 임무 중 사고사(살인 사건)일 뿐이다.또한 '희생자들이 집단따돌림의 가해자일 수 있는데, 벌써 순직 처리하고 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56] 이는 강화군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을 비롯한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이 거의 다른 사병의 가혹행위로 인한 원한이었기에 계속 논란이 되었던 부분. 임 병장이 희생자 5명 중 가해자는 1명뿐이라고 진술하면서 이 논란은 사그라든 편이나 반대로 보면 딱 1명이라고는 해도 명백한 범죄 가해자가 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인정한 것이기에 완전히 사그라들지는 않은 논란이다.
6.8. 언론 관련 문제
아무리 빠른 정보 전달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하여 중대한 오보를 일으켜 여러 차례 혼선을 빚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의 과잉 취재를 하여 임 병장의 사생활을 취재하기도 했다.- 22일 소대장이 가슴에 총탄을 맞아 생명이 위독하다는 보도를 하였으나, 팔에 맞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고 정정하였다.
- 23일 월요일 아침 임 병장이 생포되었다는 오보를 냈다가 정정하였다.
- 23일 오후 임병장이 생포되었을 당시 옆구리로 총을 발사하여 자살을 시도하였다고 보도하였으나, 가슴을 향해 발사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정정하였다.
- 연합뉴스는 6월 22일 자로 "조용하고 평범한 가족이었는데... 아들이 설마" 라는 기사를 보도했는데, 보도 직후 여론의 뭇매를 맞고 기사를 내렸으나 #, # 연합뉴스의 기사를 그대로 복사해서 보도한 중부일보에는 이 기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 사실 무장 탈영병이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의 집을 찾아가서 사생활까지 취재하는 것은 이웃에게 알려 낙인찍히게 하는 것으로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
- 응급실에 실려가는 임 병장은 사실 대역이고, 진짜 임 병장은 취재진을 피해 다른 문을 통해 들어간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국방부에서는 병원측 요청이라고 해명했지만, 병원에서는 요청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 2014년 6월 23일에 뉴데일리는 한겨레 신문 기자가 작전에 투입된 초병을 폭행했다고 주장한 기사를 작성했고 현재도 그 기사가 걸려 있다. 뉴데일리 해당 기사. 하지만 이 내용은 뉴데일리에만 올라왔고 이 기사에 한겨레 신문은 곧바로 반박 기사를 냈으며 국방부는 6월 24일 미디어오늘과 김민석 대변인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초병 폭행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다"고 말했다. 김민석 대변인은 그러나 "사실관계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현지 부대에서 판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디어오늘 해당 기사. 이 논란은 국방부와 8군단의 공식 발표가 나오기 이전까지 확산될 조짐이 보였다.
6.9. 게임 원인설
사건과 관련해, 임 병장의 병영 부적응과 범행의 원인으로 게임 등을 지목하기도 했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임병장이 평소에 혹시 게임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항복해서는 안돼 하는 이런 감정 이입이 생겨날 수 있"다고 말했다.#
- 군 관계자에 따르면 임 병장은 입대 전 국내 업체가 개발한 전투 게임을 PC방에서 하루 12시간씩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건이 전투 게임과 매우 흡사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 황진하 국방위원장은 "22사단 임병장이 고등학생 때 게임 중독에 빠져 학교도 안 가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살다보니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했다"면서 "이런 사람이 전혀 다른 환경, 전우들과 어울려야 하는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니 총기 사고를 일으켰다는 분석이 수사 과정에서 나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임 이외에도 임 병장이 평소 판타지 소설#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졌다는 등 임 병장의 취향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6.10. 여론 문제
집단따돌림이 원인이 된 사건의 특성상 희생자 = 가해자, 임병장 = 피해자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편파적인 시각이 많아졌다. 희생자 현충원 안장에도 뭐 저런 XX들을 현충원에 넣느냐는 식의 반응이 많았을 정도이다. 반작용으로 임병장에 대해서는 동정여론이 조성되어 임병장의 진술을 듣고 그럴 만하다는 식의 이야기 역시 많다.희생자에게 함부로 가해자 이미지를 씌운 것은 명백한 잘못인데, 그들이 가해자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황인 데다 실제로 그 동안의 총기난사 사건에서도 가해자와 별 원한이 없거나 오히려 좋은 관계였는데 피해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임 병장 본인의 진술로 희생자 중 집단따돌림 가해자는 1명뿐이라고 하였고 본인부터가 후회하고 죽은 병사들에게 죄책감을 가진다고 하니 '죽을 만해서 죽었네'나 '따돌림 가해자라서 불쌍하지 않다'는 식의 의견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왕따 가해자도 잘못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럼 임병장이 무죄란 말이냐?'로 몰아가거나 이 사건에만 한정짓지 않고 따돌림 피해자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임 병장의 범죄는 무엇으로도 절대 합리화될 수 없으며 죗값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것이 따돌림 자체를 그럴 만한 것으로 여기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도 윤 일병이 문제가 있어서 맞은 것인가?
7. 사건 여파
한국 군대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장 위에 있는 논란거리가 많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건의 원인, 사건에 대한 군의 대응, 상황 종료 후 군의 대응과 태도 등 수많은 부분에서 엄청나게 까였다. 체포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여 강군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고 병영부조리가 줄어들긴 커녕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다.이 사건 이후 언론에 보도되는 군대 내 사건 사고가 많아졌다. 관심병사가 줄줄이 자살하는 사건에 이어 제28보병사단에서 의무대 윤모 일병이 선임병과 간부인 하사까지 가담한 가혹행위로 구타를 당하다 사망한 사건이 뒤늦게[57] 알려지면서 병영부조리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 두 사건이 제대로 터지며 한국군에 대한 인식은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 한 번은 다녀와야지."에서 "군대는 어떻게 해서든 빼야 한다."로 바뀌었다. 유가족이 임 병장처럼 사건을 일으킬 수도 있었는데 끝까지 버텼다며 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했다.
사건 발생 후 3주도 지나지 않아 일어났던 이 병장 자살 사건도 후에 군 내의 구타와 병영부조리 때문에 정신적 문제가 생긴 것임이 밝혀졌고, 이 사건도 간부들의 무관심과 방치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알려지면서 간부의 자질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병영부조리, 간부의 병사 관리 문제로 인한 군 사건 사고가 계속 폭로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원정출산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MC몽을 이제는 비난하지 못하겠다"나 심지어 "유승준을 비난하지 못하겠다" 같은 과격한 의견[58]도 자주 보일 정도. 원인이 비슷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온 윤 일병 사건으로 인해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이라는 유명한 말도 등장했다.
이 사건의 여파인지, 병사를 관리하는 보직의 기간이 연장되었다. 그것도 거의 2배인 48개월[59]로. 현재 중대장들은 전부 강제 연장되었으며, 대대장 또한 48개월로 연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2015년 1월 이후의 입영 대상 중심으로 분/소대 전투병을 모집했다. 주 업무는 전방사단/전투 겸 경계근무이다. 수당은 약간 올라가며, 명예휘장을 수여한다고 한다.
최전방 수호병(구, 분/소대 전투병)과 의무후송항공대대는 이 사건 때문에 신설되었다.
이 사건과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이후 국민들의 군대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추락했으며, 의외로 많이 보이던 '그래도 군대는 갔다 와야 한다'는 인식을 '어떻게든 군대를 빼야 한다'로 바꿔 놓았다. 부조리가 거의 없어졌다는 의경 지원률이 치솟고 아들의 군 생활을 확인하려는 부모가 많아지는 등 군대에 대한 불신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사건 이전에 군은 속된 말로 요즘 군대 부조리 없고 시설 좋다는 식의 홍보를 하고 있었고, 일부 예비역들도 '이등병이 아니라 이등별이라 때리지도 못한다' '요즘 군대 편하잖아?' 같은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다.[60] 그러나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이 사건과 윤 일병 사건이 터졌으니 군이 부조리 없다고 떠들어 봐야 못 믿을 것이라는 인식이 단단히 박히게 되었다.
그래도 이 사건 이후 군 문화가 분명 바뀌기는 했다. 이 사건 이후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는 증언도 많다. 일부 현역이나 예비역들이 '갓진병영'이라 비꼬며 '갈굼이 있어야 군대지, 위계질서도 없는데 그게 군대냐[61]', '병 생활을 안 해서 부조리가 필요한 줄 모른다[62]'고 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실제로 통계상으로도 군 내 자살자 수가 많이 떨어졌다. 선진병영이 마냥 책상행정은 아닌 이유.
이후에도 강원 전방부대 이병 총상 사건, 대구 공군 정일병 자살 사건 등 지속적으로 부조리를 버티지 못한 병사들과 관련된 사건이 이어지면서, 아직까지도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부조리가 터지면 사실상 진급과 인사발령에 매우 큰 불이익을 떠안게 되기 때문에, 군 간부들이 더욱 관리를 엄격히 하리라 기대되었지만, 정작 여전히 군 내부에서는 여러 부조리가 방치되고 있고, 지금 당장의 상황만 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이 이어지면서 계속된 군내 부조리사건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병역판정검사에서 캐치하지 못했으나 군 생활에 심각한 어려움이 있는 질병, 장애가 발견되어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다면 현부심으로 보내버린다고 하지만 지휘관 입장에서는 현부심으로 보내버리는 것 그 자체도 인사에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웬만하면 최대한 참고 은폐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황이다. 지휘관이 아무리 유능하고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개선이 사실상 불가능한 병사의 경우에 대한 인사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상술했듯이 이 사건과 윤일병 사건을 계기로 자식을 징집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조기유학을 보내 시민권을 취득하게끔 하겠다는 주장들과 불법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징집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주장들이 급증했다. 부모로써 자식을 징집에서 제외시킬수만 있다면 가령 그 방법이 범죄행위고 자신이 범죄자가 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주장들도 급증했을 정도로 이 사건의 여파는 엄청났다.
그외에도 영주권을 포기하고 입대를 택하는 이들은 어리석다고 보는 주장들도 급증했다.
8. 기타
- 이 외에도 세월호 사고 당시에도 그랬던 것처럼 출처 불명의 루머[63]나 지나친 음모론은 피해자들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며 수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엉뚱한 피해자들을 양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 공교롭게도 이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지고 바로 하루 뒤에 MBC의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에서는 하필이면 GOP 경계에 관한 내용을 방영하였다. 애시당초 촬영분 자체가 사건과 무관한 4월에 촬영된 거고[64] 처음부터 쇼라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어서 대체로 별 관심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이에 대해서 분위기를 생각해 나중에 방송하는 등의 대책이 필요했다는 평가도 일부 있었다. 물론 제작진도 완벽히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그걸 감안해 일부 편집했다. 또 2014 브라질 월드컵 대한민국과 알제리전 군대 응원전도 해당 사건으로 취소됐다. #
- 해당 사건이 일어난 소초는 당연하게도 완전히 해체되었다.
-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충혼비가 존재한다.
- 임 병장은 국군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삶을 포기한 것처럼 살았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교도소에서도 자살을 시도하다가 발견되어 살아나기도 했다. 평소에는 화 한 번 안 낼 것 같은 사람인데 어떤 자극이 가해지면 미친듯이 화를 낸다.[65] 국군교도소에서 근무했던 헌병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교도소의 사형수 문서에도 비슷한 증언이 있다.
- 임 병장의 부모는 면회를 자주 오기 위해 국군교도소 근처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다. #
-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임 병장을 스타크래프트의 등장 인물인 짐 레이너와 비교하여 '임 레이너'나 서든어택과 연관지은 드립을 치고 있다. 마치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인 조승희를 '제너럴 조' 라고 칭하는 드립과 일맥상통하다. 실제로 임장군, 제너럴 임이라는 드립도 있다. 성장 환경을 봐도 비슷한 면이 많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사회 지도층이 앞장서서 조승희도 사회의 피해자라는 점을 인정한 반면, 한국에서는 군에서 임병장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를 보였다. 물론 살인에 대한 책임이 임병장에게도 있는 것은 맞지만, 군 관리 실패로 일어난 군에 대한 신뢰와 군 사기 저하를 임병장에게 떠넘기고 따돌림과 가혹행위에 대한 것 또한 축소하고 떠넘기는 행태[66]를 보였는데 군에 대한 신뢰와 사기가 상승할 리가 있나.
- 부조리를 없앴다고 존경한다는 드립을 치는 것과 별개로[67] 이 사건과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의 여파로 부조리 척결 뿐 아니라 유격 훈련 등 많은 일정이 취소되는 바람에 안타깝지만 개인적으로는 편해졌다고 회고하는 예비역도 적지 않다. 물론 사건 당시 주변 부대 출신들은 반대로 갑자기 출동 나간다고 온갖 생고생을 했다며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 조승희가 인종차별을 저지른 사람을 죽인 것처럼 왜곡되는 것처럼 임 병장에게 죽은 사람들이 전부 임 병장을 괴롭히던 사람인 것처럼 왜곡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이 문서에서도 언급하듯 대부분이 임 병장을 괴롭힌 병사가 아니며 심지어 잘 대해 주던 병사까지 있었다.
- 사형을 재개하자는 주장에 '임도빈은 사형 집행 안 했으면 하는데' 식으로 반례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사람 죽였으면 사정이 있었더라도 죽음으로 갚아야지'하는 사람도 있어 모두가 임 병장의 사형 집행에 반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사건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사례이다. 사형 자체에 대한 반대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임 병장 사건'만'을 다루는 글이나 영상에는 일반적인 흉악 범죄를 다루는 글이나 영상에 으레 달리는 '저런 놈에게 우리 세금이...', '사형을 안 시키니까 저런 범죄가 일어나지' 같은 사형시키자는 류의 댓글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이후 군대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딴 듯한 사건이 묘사된다. 부조리를 견디지 못해 사고를 쳤다든가, 군대가 개인만의 잘못으로 몰아가며 책임회피를 시도한다든가 하는 특징은 군대 내 다른 사건에서도 흔한 모습이니 우연히 겹쳤을 수도 있지만 총기 난사가 소재로 등장하는 것 자체는 이 사건이 강렬하게 기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작품을 해석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 D.P. 시즌1 마지막화의 쿠키 영상과 그 전말이 드러나는 시즌2 2화에서 김루리 일병이 총기난사를 하는 장면은 공식적으로 특정한 사건에서 따오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이 사건과 가장 유사점이 많다. 2014년과 가까운 2015년이라는 배경, 경계근무 후 반납하지 않은 총기를 이용한 것, 오타쿠이며 부대원들에게 무시당한다는 점 등이 겹친다.
- D.P. 시즌2 후반부의 주제가 총기난사 후 늑장 응급조치와 이송 논란 관련 내용이다. 군부대의 부실대응으로 응급헬기가 지연되어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점과 이를 숨기기 위해 군에서 총기로 인한 즉사라며 브리핑을 했다는 점 또한 같다.
- 조석봉의 무장탈영과도 겹치는 점이 여럿 있다. 부조리를 참지 못해 무장탈영했다는 그 자체도 그렇고, 조석봉의 무장탈영을 보도하면서 조석봉이 원래 문제가 많았던 것처럼 묘사하면서 군의 책임은 없고 범인(사고치기 직전에는 피해자였던)만이 문제라고 언론플레이를 시도하는 것 또한 동일하다. '다들 방관했으면서, 왜 내가 벌을 받아야 하냐, 나쁜 건 그 새끼인데'하는 조석봉의 대사도 임 병장도 '그들도 잘못이 있다'고 유서에 적거나 영창에서 '군대 가기 싫은 사람 보내놓고 책임은 내게 다 지운다'며 자해한 것과 비슷하다.
- 군검사 도베르만에도 부조리를 견디다 못해 총기난사를 저지른 사건이 등장했다. 사건 배경이 GOP이며, 상관 살해를 포함한 7가지 죄목으로 기소된 점, 입맞추어 부조리가 원인임을 은폐하려는 부대원들, 그래도 따돌림이 있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있고 정작 가장 괴롭힌 사람은 살아남은 등 이 사건과 닮은 부분이 보인다. 편상호 일병이 총기난사를 하면서 '더 이상 안 참아'라고 하는 대사와 법정에서 유가족들에게 '참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대사 역시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증, 개연성 부문에선 D.P가 훨 낫다. 그 외도 마찬가지
- 수많은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생포 당시의 사진과 아버지.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수상 소식을 들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겐 큰 절망과 슬픔이었다. 이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 할머니와 저격수. 관련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짤방. 실제 상황인데도 저격수 옆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있는 할머니 때문에 짤방이 되었다. 보통 '할머니가 부사수'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닌다.
- 진돗개 하나 발령.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는 대원들의 뒤를 웬 강아지 한 마리가 맹렬히 쫓아오자 한 대원이 잠시 멈춰서 강아지를 진정시키는 모습이 동네 CCTV에 포착되었다. 해당 대원은 이후 처벌을 받았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 사진은 아니지만 임병장이 수색팀과 마주쳤을 때 대처를 묘사한 뉴스 그림도 자주 보인다. 보통 '저걸 속냐 개빠졌네' 내지는 '특급전사를 관심병사 취급한 한국군' 같은 식으로 군을 까는 반응이 대부분. 크게 두 가지 추측이 나오는데, 정말로 병사들에게 정보 전달을 안 해서 몰랐을 것이고[68] 경례는 당황해서 했을 것이란 추측과, 임병장이라고 짐작은 했으나 괜히 목숨 날리기 싫어서 모른 체 했다는 추측이 있다. 실제로 '현명하게 대처한 사람'식의 제목으로 저 그림이 올라오기도 한다.
지통실에서 tv를 켜 놓는 것을 두고 언론에게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라고 대놓고 말하는 곳도 많다. 이렇게 보고받으려고 민영방송사를 쓰는 야전부대가 꽤 된다. 정보 입수 목적이기 때문에 보도전문채널인 YTN이나 연합뉴스TV만 틀어놓는다. 방송할 게 없는 새벽에는 광고만 주구장창 나와서 화 환 49000원[69] 광고를 모르는 예비역이 거의 없다.당직사령이 짬 안되는 중위급이라면 휘하 병사(통신, 상황병)가 앞에서 이 광고를 흉내내기도 하고 당직사령은 웃고 넘어간다. 새벽3시쯤 되면 본인도 당직부관(하사)도 지루함을 참지못해 빙빙 돌기 직전이기 때문.
- 이 사건보다 두 달여 전에 일어났다가 묻혔던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이 알려지게 된 것도 이 사건 때문이었다. 군인권센터가 임 병장 사건 유가족과 접촉해서 이 사건에도 관여하고 있었고 임 병장의 변호를 맡던 법무법인 열린사람들이 윤 일병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인 하 병장의 변호도 맡고 있었는데 변호사가 윤 일병 사건이 묻히기에는 너무 끔찍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윤 일병 사건의 유족과 군인권센터가 접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군 부조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기에 윤 일병 사건이 국민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는 측면도 있다.
-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10여 년의 기간 동안 더 이상 군대 총기난사가 일어나지 않아, 현재까지 한국 현역 군인이 저지른 마지막 총기난사 사건으로 남아 있다. [70]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에는 군대 총기난사가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범죄였다. [71]
9. 관련 사건
9.1. 과거의 총기 사고 사례
2005년 530GP 사건 이전의 사건들은 국방부가 대놓고 사건을 은폐/축소하였다. 또한 이때 당시 국민들은 군대에서 죽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을 정도로 군 인권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 1959년 2월 18일: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
- 1962년 7월 8일: 최영오 일병 살인 사건
- 1985년 2월 24일 : 제28보병사단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 - 28사단 화학지원대에서 박 모 이병이 총기를 난사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상술한 군인에 대한 마지막 사형 집행이 바로 이 사건이다.
- 1988년 10월 10일 : 이길우 병장 사건 - 총기난사라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모 부대 초소에서 이길우 병장이 동료를 사살하고 수류탄을 터뜨려 자신도 부상을 입은 사건이 벌어졌다. 22사단 임 병장 사건이 일어나기 26년 전에 일어난 사고로, 이것도 전역을 불과 몇 개월 앞둔 병장이 일으킨 사건이다. 이 병장은 입대하기 전인 198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해의 어느날에 경찰이 이 병장을 절도범으로 오인해 파출소로 연행했다. 그런데 이 병장은 파출소에서 경찰에게 고문을 당했고 그것으로 정신병이 생겼다.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던 1986년에 입대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정신병이라는 소견서가 있어 귀가가 될 것이라고 해서 입대했는데 귀가가 되지 않았고, 그대로 현역 복무를 하게 되었다. 이 병장의 부모가 10차례 해당 병사의 소속부대에 찾아가 중대장과 인사계를 찾아가 "제대를 시켜주든지 입원 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고, 이 병장은 부대로 찾아온 부모 앞에서도 횡설수설하다가 88년 10월에 동료를 사살하는 사건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이 병장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이 병장의 부모가 국방부 앞에서 혈서를 쓴 종이를 들고 농성을 벌이는 기사가 나온 이후 징역 10년으로 감형 조치되었다. 관련 기사가 나온 곳이 한겨레뿐이다 보니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 1989년 8월 8일: 경기도 옹진군(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에서 해병대 이상호 하사(21)가 무장 탈영한 뒤 민간인과 해병대원들에게 총격을 가해 민간인 1명과 해병대 소령을 살해하고 민간인 1명과 해병대 상사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
- 1994년 10월 31일: 경기도 양주군(현 양주시) 광적면[72] 육군 모 부대 사격장에서 서문석 일병이 통제관들을 향해 K2 소총을 난사해 중대장과 소대장 등 2명이 사망하고 6~7명 중경상을 입었다.
- 1996년 9월 22일 : 강원도 양구군 동면에서 김시용 이병이 총기를 난사하여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무장 탈영하였다. 후에 자수하였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 1996년 10월 1일 : 강원도 화천군[73]에서 김용식 상병이 총기를 난사한 후 인질극을 벌이다 2시간 반만에 투항하였다. 3명 사망, 1명 부상. 위의 사건과 이 사건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도중 일어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묻혔다. 범인은 후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사형 집행이 중단되면서 지금까지도 국군교도소의 최고참으로 복역 중이다.
- 2005년 6월 19일 530GP 사건: 경기도 연천군 제28보병사단 530GP에서 김동민 일병이 내무실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여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한 사건.
- 2007년 강화도 해병대 총기 탈취 사건[74]: 2007년 12월 6일 조영국이 경계근무를 마치고 귀대 중인 해병대원들의 K2 소총과 실탄, 수류탄 등이 든 탄통을 탈취하고 이 과정에서 해병 한 명을 칼로 살해하고 다른 해병에게는 중상을 입힌 사건. 전국에 몽타주가 뿌려지고 탐문 수사가 진행된 끝에 12월 12일 총기를 회수하고 서울에서 범인을 체포하였다.
- 2011년 7월 4일 : 강화군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
- 이 외에도 530GP 사건을 계기로 역대 총기난사 사건 등 국군의 주요 사건 사고들을 죽 정리한 2005년 기사.
9.2. 과거의 무장 탈영 사례
-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 - 1984년에 같은 22사단에서 조준희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M16을 난사한 뒤에 월북해 버렸다. 그리고 수색 과정에서 지뢰로 인한 사상자와 부대원간의 아군 오사까지 겹치면서 최종적으로 15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당했다. 조준희 일병은 제5공화국 당시 대학 2학년으로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입영시켜 굴리는 녹화사업 대상자였는데 이 때문에 부대 고참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했고 이에 앙심을 품고 저런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리고 월북한 다음날부터 계속 북한의 선전 방송에 나와 같은 부대원들에게 월북을 권유했다고 한다.
- 추풍령 무장 탈영병 사건 - 1986년 12월 3일 해병대 서용운 중사와 박정욱 하사가 무장 탈영하여 영일에서 흥해로 가던 시외버스를 탈취해 승객 23명을 인질로 잡아 인질극을 벌였다. 서 중사는 운전기사 배호근을 총기로 위협하여 판문점으로 가자고 요구했다. 하지만 도중에 차 타이어가 터지는 바람에 일단 타이어를 교체하기 위해 추풍령 휴게소에 정차했다. 배호근은 타이어 교체하기 위해 공구를 빌린다는 핑계를 대고 버스에 내려 그대로 휴게소로 도주해 신고했다. 박 하사는 운전기사를 감시하겠다는 핑계로 같이 내렸으며, 그대로 자수해 버렸다. 이에 서 중사는 버스에 내려 총기를 난사해 추풍령 휴게소로 진입하던 트럭 운전사 한석해와 강대훈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서 중사는 버스 안에 M18A1 클레이모어 대인지뢰를 설치해 놓고 한 손에는 클레이모어 격발기를, 다른 손에는 장전된 M16 소총을 들고 "도망간 아내를 데려오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인질들 중 22세 어머니와 그녀의 아들과 딸, 70세 할머니를 석방했고, 19명의 인질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였다. # 추격해온 해병대 병력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18시간이나 대치하고 있었다. # 결국 특전사 제707특수임무대대가 현장으로 출동하여 저격수에게 중사가 사살되고(11시 20분) 인질들이 무사히 구출됨으로써 사건이 종결되었다. 다만 언론에는 서 중사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 혜화동 무장 탈영병 총격 난동사건 - 1993년 4월 19일 임채성 일병이 K1 기관단총과 실탄 130여 발, 수류탄 22발을 훔쳐 탈영한 후 민간인에게 총기를 난사하여 1명 사망, 군과 대치 중 총에 맞고 부상당한 상태로 생포되었다. 이 사건 후 1주일도 안 되어 이필섭 합참의장이 경질되었다.
- 53사단 장교 무장탈영 사건 - 1994년 장교 2명과 하사 1명이 병사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무장 탈영한 사건.
- 가평 이등병 무장탈영 사건 - 2006년 8월 10일 이봉민 이병이 박 모 상병과 김 모 병장에게 총을 쏜 후 무장 탈영하였고, 박 상병은 끝내 사망하고 이 이병도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한 상태로 발견된 사건. 이 이병이 오랫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해 수사 결과가 제대로 보도되지 못하고 묻혔으나 이 사건으로 사건 경과가 일부 알려졌는데 고참의 암기 강요 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범행으로 이 이병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니 지금은 출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 관련 문서
- 학교폭력
- 학교폭력/성인이 된 이후/병역
- 관심병사
- 기수열외
- 배척
- 집단괴롭힘
- GOP
-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
- D.P. 1,2기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사건이 등장한다. 김루리라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였지만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총기난사 후 탈영 한 것과 육군에게 유리하게만 발언하는 것까지 육군의 무능함까지 잘 표현하여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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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 2019년 러시아 군용기 독도 영공 무단 침범 사건I 고양시 여자화장실 군인 묻지마 폭행 사건A P |
[1] 언론에서 인터뷰를 해서 유명해졌고 지금도 이 분의 발언이 캡쳐본으로 나돌고 있지만 발언 자체는 사건이 터졌을 당시 네이버 뉴스 등에서 베스트 댓글로 이미 유명해진 말이었다.[2] 조한진씨 뒤에 나오는 이씨는 되레 조씨의 거주지 경상남도 진주시의 동남 방언을 구사하고 조한진씨가 되려 이씨의 거주지 충청북도 충주시의 충청 방언을 구사하는데 방송국에서 실수로 바꿔 내보낸 것. 사진 속 인물은 충북 충주 거주하는 이씨가 맞고, 뒤에 나오는 인물이 경남 진주시에 거주하는 조씨이다.[3] 기껏해야 '요즘 군대가 너무 편해서 그렇다' 식의 어처구니없는 말뿐이었다.[4] 밑에 후술하겠지만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판결문에서도 5명이나 살해한 것 자체가 중죄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수열외를 주도한, 즉 원한 관계에 있는 자들만 살해한 게 아니라 무차별 살인이기 때문에 사형이 불가피하다고 언급하고 있다.[5] 최초 근무 시작 시 75발 지급, 이후 약 25발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290여 발을 소지하고 있다는 추정 기사가 나왔지만 이는 #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6] GOP나 강안, 해안경계 작전 시 1인당 실탄 25발이 들어있는 탄창 3개와 수류탄 1발을 기본으로 지급하고 유탄수 및 기관총 사수는 추가로 40mm 고폭탄 및 기관총 링크탄을 지급받는다. 단, 전입 2주미만 신병은 빈 탄창 3개만 지급받는다.[7] 진도개는 연대급에서도 발령 가능하다.[8] 誰何. 아군끼리 약속된 암호를 확인하는 행위나 피아 확인을 위해 경고하는 행동. 주로 국지도발 훈련에 포함된 차단선, 탐색격멸 훈련, 수색, 야간 훈련 시에 아군만이 알고 있는 준비된 언어를 주고받아 피아를 구분한다. 그런데 연합뉴스에서 '수화' 라고 제목 헤드라인을 잘못 올렸다가 수하로 정정되었다. 암구호도 이것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9] 변호인은 임도빈이 이전 이미 자살을 시도했고 이 때 총기가 고장난 것을 처음 발견해서 대치한 장교에게 자신을 쏠 것을 요구했다고 진술했다.[10] 임 병장이 자살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인원이 투입되었고 사살당할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투항한다고 사는 게 아닐 텐데 왜 자살을 막으려 드냐'에 가까운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과거에 무장탈영이 빈번하던 시절에는 자수 권유에 어차피 사형일 것이라며 권유를 뿌리치고 자살로 끝을 맺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총기난사가 많이 발생하는 미국에서도 총기난사범이 자수를 권유해도 거절하고 자살하거나 경찰에게 총을 쏘다가 사살되는 경우가 많다.[11] 총구를 입 안에 물거나 턱에 대고 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겨눠 자살하는 사례가 드물기는 하지만 없지는 않다.[12] 왜 방탄복이 흉복부 전체를 가리는 형태인지 생각해 보자. 임 병장의 경우에는 총알이 폐 상엽을 관통했기에 살아남았지만, 총알이 대동맥이나 척추를 관통했으면 즉사 내지 후송 중 사망할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자살 의도는 충분하며 총알이 치명적인 장기를 피해갔을 뿐이다.[13] 전사는 말 그대로 전투 중에 죽은 걸 의미한다. 따라서 적군과 교전하다 죽은 게 아닌 군 내 사건으로 사망한 이들은 해당사항이 없다. 또한 임 병장과 교전 중에 부상자는 있었어도 사망자는 없었으니 전투 중에 죽은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희생자 예우 논란 항목을 보자.[14] 전원 1계급 특진한 추서 계급.[15] 부상자 이송지 - 국군강릉병원(4) 국군수도병원(2) 강릉아산병원(1). 경상자부터 죽기 직전까지 갔던 중상자까지 있었는데, 천만다행으로 부상자 모두 생명에 지장 없이 회복되었다.[16] 한 명은 추격대 소대장이었고 또 한 명은 추격부대 소속 병사였다. 소대장의 경우 임도빈 병장의 사격으로 다친 것이라고 나왔지만, 임 병장은 무장 탈영 이후에는 자살 시도 이전까지 한 발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다시 조사한 결과 아군 간의 오인사격이었다.[17] 범행 당시 만 21세 7개월이라고 대법원 판결문에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생일은 10-11월일 것이다[18] 당시는 B급 판정의 경우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GOP 투입이 가능했다. 후술하겠지만 정말 괜찮아진 것 같아 B급이 된 것이 아니라 GOP에 투입할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B급으로 조정하였다.[19] 안 그래도 대한민국 국군에서 '부'의 영향력은 미미한데(일례로 무려 부대대장 씩이나 되는 보직이 현역도 아니고 예비역 대위 자리이다. 그러니까 예비군 훈련때만 나타나는 보직이다.) 그 중에서조차 제일 낮은 보직인 부분대장이면 사실 일반 병사나 마찬가지이다.[20] 기수열외라고 표현하는 언론도 있으나, 육군에는 헌병을 제외하고 '기수' 개념이 없으므로 기수열외보다는 집단따돌림에 가까울 것이다. 22사단을 기준으로 하자면 102보충대를 거친 22사단 신교대 출신과 육군훈련소 출신이 섞여 있고 해당 훈련소에서도 기수라는 개념을 거의 쓰지를 않는다. 사건을 일으킨 임 병장의 경우는 A급 관심병사 출신으로, 관심병사 지정을 극비리에 하는 것도 아니라서 중대 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거의 다 알고 작업 열외나 특수보직을 주고 옆에 두고 감시하려고 드니 눈치가 있으면 모를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군다나 A급 관심병사는 웬만한건 죄다 문제없음으로 덮고 은폐하고 넘어가려는 군대에서도 확실하게 이 사람은 어딘가 문제가 있으니 특별 관리를 해야 한다고 지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은연 중 무시를 당해 왔을 것이고 관심병사는 대부분 작업 같은 데서 열외되거나 특수병을 맡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남들 다 하는데 빠지니까 후임들이 대부분 짬 대우를 안 해 주는데 그나마 대규모 부대라면 최소한의 선은 지키지만 그렇지 않은 부대라면 그 관심병사는 그냥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대접받게 된다. 자기가 원하면 나갈 수 있는 미국의 일반 직장에서조차 이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분노를 참지 못해 간혹 총기난사가 터지는데, 징병제 군대에서 이랬으니 사고가 안 터지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다.[21] MBC 리얼스토리 눈 74회, 2014년 6월 26일 방송의 일부이다.[22] 로펌을 변호인으로 선임한 것이며, 관례에 따라 변호사의 이름을 기재한 것이다. 변호사 중 한 명은 530GP 사건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다른 한 명은 지금은 해병대 제1사단 일병 사망 사고/수사 외압 논란에서 박정훈 대령이 선임한 변호사로 유명한 김정민 변호사이다. 수임 당시 제28보병사단 폭행사망 사건에서 하 병장의 변호를 맡고 있었으며, 이 병장에게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변호사로도 유명하다.[23] 사망자 5인 중 자신을 괴롭힌 건 간부 1명뿐이고 나머지 4명은 자신을 도왔던 인물이라고 하며 울었다고 한다.[24] 변호인 측의 주장에 따르면 수사관이 동기라고 말한 그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걸 보고 사람을 죽였다니 말이 되냐, 다른 동기가 뭐냐'고 추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25] 링크 삭제되어 강조로 대체.[26] 부대에 따라서는 소초일지에 오탈자 후 수정한 흔적만 있어도 엄청난 내리갈굼이 오는 부대도 있다.[27] 중사가 놀리는데 대놓고 기분 나쁜 내색을 할 수 있을지는 알아서 생각하자. 더구나 그 중사는 5월에 임도빈 병장이 놀리는 동기 상대로 놀리지 말라며 서로 주먹다짐까지 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28]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이 날 때까지 재판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530GP 사건에서도 상관 살해를 사형으로만 규정한 것에 대해 변호인이 위헌법률심판을 제기하였고, 위헌으로 결정되어 재판도 파기환송되어서 장기화된 전례가 있다.[29] 문제의 낙서를 그렸다는 황 모 상병은 헌병 조사에서 기분 나쁘게 할 목적으로 그렸다고 진술했다가 공판에 증인으로 나와서는 기분 나쁘게 할 목적이 아니었다고 말을 바꾸면서 이후 임도빈 병장이 기분 나쁘게 할 때마다 문제의 낙서를 그렸다며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을 하였다.[30] 증언을 100% 사실로 본다면 그 후임은 임 병장에게 감정이 좋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럼 왜 임 병장에게만 그런 행위를 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31] 따돌림이 없다는 증언 직후 임도빈 병장은 '심장에 총구를 들이댄 사람이(없는 따돌림을 있다고) 거짓말을 하겠느냐'고 절규했고, 임도빈 병장의 변호인은 '임도빈 병장은 재판에서도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발언한 바가 있다.[32] 정신감정에서도 인정된 부분이다. 다만 정상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대체로 정상이며 심신미약 사유는 되지 않는다고 봤으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면 다시 범죄도 서슴치 않을 것이라며(1심은 아니고 2심 판결의 표현인데, 판결문에서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 정도도 아니고 이러한 표현을 쓰는 것은 이례적이다) 가중사유로 보았다.[33] 다만 군형법과 일반 형법이 차이가 많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오원춘은 1명을 살해했지만, 임병장은 5명을 살해했다. 이는 극단적 인명경시 살인에 해당된다. 허나 5년 뒤에 일어난 살인사건도 역시 5명이 살해당했고, 1심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범인의 심신미약이 인정되어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사건 경위를 보면 후자가 죄질이 훨씬 나쁜데도 말이다.[34] 애시당초 군인은 민간 형사 사건도 군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35] '방산비리, 병영부조리에는 왜 솜방망이 처벌만 내리냐'는 비아냥만 나왔다. 애초에 이 사건에서 신뢰와 사기 저하가 일어난 원인도 임병장 자체가 아니라 장병 관리 부실, 한숨이 나오는 체포 작전 등 군대의 문제였다.[36] 양형부당 명목 상고가 전원합의체에 넘어가는 것은 극히 드물다. 사례도 1976년의 판결처럼 오래된 것이라 최근에는 거의 최초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을 정도.[37] 대법원장 포함 9명으로, 대법원장은 관례적으로 다수의견을 따르기에 실질적으로는 8명.[38] 머리를 20여 회 치면서 관등성명을 대게 하거나 관물대를 엎었다고 한다. 가혹행위로 간주하기 충분한 내용이다.[39] 판결문에 따르면 사망자 중 일병 둘과 동료를 구하러 오던 상병 하나로 언급되어 있다.[40] 선임을 함부로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친하게 지낸다는 증거가 되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전역을 불과 3개월 앞둔 말년병장에게는 공석에서는 아니더라도 편한 시간엔 선후임 상관없이 반말하는 게 당시 기준으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당사자 병장이 그걸 허락했을 때 한정. 참고로 전역 3개월이면 일반적으로 일과는 40일 가량 남은 상태. 당시 기준으로 보통 전역 한 달 전에 남아 있는 휴가를 모두 소비하기 때문. 그리고 형으로 부르는 것이 친하게 지내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와는 별개로 자신과 친한 후임병까지 살해한 것은 임 병장과 검사, 판사 측 모두 인정한 명백한 사실이다.[41] 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의 가해자는 법정에서 가혹행위 여부로 다투는 대신 자신이 미쳐서 저질렀다고 용서를 구했지만 사형을 판결받았다. 국방부와 군대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발생한 사건이고 괴롭힘과 따돌림이 원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면 그 때는 아무 이유도 없이 대량살인을 저질렀다고 사형을 선고했을 것이고, 사형을 선고하기 위해 속된 말로 가불기를 걸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42] 유가족은 1차 공판에서 용서의 뜻을 보이는 듯했지만 따돌림 자체가 아예 없다고 주장하였고, 임도빈 병장 측이 따돌림 주장을 굽히지 않자 엄벌을 탄원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다.[43] 이것마저도 일반인 수준이라고 나와 더욱 인정받기 힘들어졌다.[44] 일부 군필자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일이병 때 막나가던 병사가 아니다.[45]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도 어폐가 있지만, 진짜로 불가피한 선택이라면 가중 사유가 아니고 오히려 참작 사유가 되어야 한다. '사람 모자라니까 아무나 끌고 갔지만 이후에 책임은 끌려간 네가 다 질 것이다'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46]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 결과가 알려지며 밝혀졌다. 징역 1년은 지원을 요청하겠다면서 도주했다는 죄목으로 받은 형량으로, 2014년 7월에 구속되었으니 이미 출소한 지 오래일 것이다. 단, 소초원 관리를 못 한 책임은 물을 수 있겠지만 강 중위가 임 병장을 직접 괴롭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임 병장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진술서를 보면 그 때는 몰랐는데 사고가 터지고 다시 생각해보니 따돌림을 당했던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진술했다. 대행이라지만 소초장 임무를 맡은 사람이 이 정도로 대원 사이의 관계에 무관심했던 것은 그것대로 문제이긴 하지만.[47] 후임이 쓴 것으로 보이는 '6. 10. 말 놓는 날'이라는 낙서까지 있었다.[48] 종합하면 '멀쩡하게 지내지 않아서 동료들에게서 따돌림을 자초했지만, 동료들은 임 병장을 따돌리지 않고 멀쩡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말이 된다.[49] 정신감정에서 나왔던 '따돌림으로 인한 특정 불능의 인격장애'에 대해서는 판결문에 '학창 시절에 따돌림을 당한 것은 인정하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며 끝까지 군 내의 따돌림을 인정하지 않고 외부에 떠넘기는 태도를 보였으며, 임 병장이 고소한 중사도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과거 병영부조리로 인한 총기난사 사건에서도 '우리는 문제가 없었고 총 쏜 놈이 이상한 놈이라 쏜 것 뿐이다'는 프레임을 짜기 위해 사건의 이면에 있던 괴롭힘이나 따돌림을 재판에서는 거의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50] 원래 몸싸움까지 벌일 정도면 규정상 GOP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한다.[51] 22사단은 과거에도 탈영병 월북 사건 등 사건 사고가 많았는데, 썰전에서는 마그마(사건의 근본 원인)가 지각의 약한 부분(근무 환경이 특히 열악한 22사단)을 뚫고 분출한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1984년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 1985년 박 이병 총기난사 사건, 1996년 김용식 상병 총기난사 사건, 2005년 530GP 사건 등 많은 굵직한 사건이 최전방에서 발생한다. 이는 최전방에서 총기를 탈취하기 쉬운 것이 이유지만, 일부 사건의 범인은 근무가 힘들었다고 진술하는 등 최전방의 열악한 근무 환경이 원인인 것도 사실. 181GP 사건의 경우는 아예 열악한 근무 환경 그 자체만이 원인으로 일어났다.[52] 특전사 방탄복 비리 사건도 있고, 주한미군이 한국군에게 방탄복을 빌려준 적도 있다.[53] 이송이 늦어진 이유가 군이 보유한 헬기가 야간에 태백산맥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54] 인성검사 강화를 통한 부적응 병사 관리 강화, 징병상담관 제도 신설.[55] 꼭 전투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제 지뢰에 피해를 입은 경우도 전사/전상으로 인정 가능하다.[56] 희생자들은 전원이 현충원에 안장되었다.[57] 사건 자체는 4월 7일에 일어났는데 국방부가 대놓고 은폐하다가 군인권센터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58]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발치몽, 스티붕 때문에 병역면탈 단속이 더 엄격해져서 원래 군대 안 가는 게 좋은 부적격자들이 더 현역으로 쑤셔넣어지는 통에 이런 사단이 난 거다."라는 식의 주장도 있다. 뒤집어 말하면 그동안 병역면탈이 줄어들 가능성만 있다면 부적격자가 현역 더 끌려가도 상관없다는 여론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제는 병역면탈 사건이 터져도 이를 이유로 신검 기준을 강화하자는 의견은 거의 없어진 상태이다.[59] 대대장의 임기는 대개 1년 반~2년.[60] 못 믿겠으면 그 즈음 작성된 글들을 찾아보라. 지금 시점에서는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군대가 마굴처럼 여겨지지만, 그 당시에도 '지금은 군기 다 빠진 군대'타령하는 사람이 넘쳐났다.[61] 병 사이는 분대장을 제외하고 상하관계가 아니며, 병간 위계질서가 딱히 필요하지도 않다. 이러면서 오히려 초임 하사나 소위는 무시하는 이중잣대를 보여주기도 한다.[62] 오히려 병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게 잘못된 것인 줄 더 모를 수도 있다. 윤일병 사건에 연루된 하사도 병 출신 하사이면서 '구타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직접 구타까지 자행했다.[63] 아군 측 사상자가 10명이라고 발표되었을 당시 '지인 건너건너의 고성군 주민 말로는 25명이 죽고 다쳤다더라' 등과 같은 종류.[64] 그래서 방송 초반부에 자막으로 이 사실을 내보냈다.[65] 출처 - 《담 안에서 만난 하나님》, 정영준 저[66] 1심 재판 과정에서 군 검찰은 첫 공판에서 "부분대장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지적하는 것을 따돌림과 무시로 생각했다"며 따돌림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다가 구형할 때는 "후임이 이런 선임을 따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며 따돌림은 자기 탓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모순을 보여주기도 했다.[67] 물론 처음 드립이 터졌을 때는 농담이었지만, 사건의 영향으로 너도 나도 사리는 분위기가 되어서 진짜로 병영부조리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진지하게 병영 생활 개선에 기여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68] 실제로 정보 내려오는 게 느려터져서 그냥 더 빠른 뉴스 보도로 정보를 얻었다는 증언이 적지 않다.[69] 이 광고는 현재에도 방영되고 있다.[70] 예비역까지 포함하면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 총기 난사 사건이 마지막이다.[71] 당장 직전에 일어난 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과는 3년여밖에 시간차가 나지 않는다. 그 전의 530GP 사건과는 6년의 간격이 있고, 90년대 이전에는 총기난사가 잦아서(한 해에 여러 번 발생하기도 했다)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72] 위의 스크린샷에는 '황적면'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광적면(廣積面)'의 '광(廣)'을 '황(黃)'으로 오식한 듯. 양주시에는 황적면이 없다. 양주시/행정 항목 참조.[73] 위의 스크린샷에는 경기도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화천군은 처음부터 강원도 관할이었다.[74] 범인이 현역 군인은 아니었지만 군 관련 총기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