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4:14:07

김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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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길태
金吉泰
파일:external/image.donga.com/-1000017766_0.24779400.jpg
출생 1977년 5월 19일 ([age(1977-05-19)]세)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주례동
(現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김해 김씨 (金海 金氏)
신체 174cm, 67kg
가족 양부(1938년생), 양모(1941년생)[1]
양누나 2명
양외조카
학력 삼덕초등학교 (졸업)
삼락중학교 (졸업)
경남상업고등학교 (중퇴)
범죄 강간살인, 시체유기
신분 기결수
형량 무기징역[2]
수감처 경북북부교도소

1. 개요2. 생애3. 범행4. 논란
4.1. 신상공개4.2. 팬카페 설립
5.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살인마김길태.jpg
신상 공개 당시의 김길태

김길태 살인사건의 범인. 제2의 정성현으로도 불린다.

2. 생애

파일:00000.jpg

김길태의 삼덕초등학교 졸업 사진(좌)과 삼락중학교 졸업 사진(우).[3]

그는 1977년 가을[4] 부산직할시 부산진구(현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의 모 교회 앞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당시 슬하에 딸만 둘인 종손 양아버지가 남동생의 소개로 데려와 키웠다고 한다.[5]

초등학교 시절 운동을 잘 하던 그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말수가 급격히 적어지고 어두운 구석이 늘었다. 양어머니는 "길태가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난 어디서 왔어?'라고 가끔 묻곤 했다"고 했다.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 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어머니의 진술과는 달리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에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인지하였지만 부모에게 차마 묻지 못하고 숨기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부모에게 확인을 받으려고 물은 것이다.

1993년 경남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 해 10월까지 합해 총 40여 일을 무단 결석했고, 1년정도 다니다 중퇴했다. 반면 운동엔 탁월했는데 중2 이후 체력장 등급은 1급 아니면 특급이었다. 교사들은 "몸이 민첩하고 빨랐다"고 기억했다.

그는 17살 때인 1994년부터 절도 혐의로 소년원에 드나들기 시작하였으며, 이후에도 폭행, 절도, 구타 등 각종 범죄를 저지르면서 총 11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그는 교도소에서도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으며, 가끔씩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기질을 보여 7차례나 규율 위반으로 독방에 수감되는 등 징계를 받았다. 또한 2005년 경에는 정신질환자로 분류돼 특별 치료 시설이 있는 진주교도소로 2년여 이감되기도 하였다.

그는 20살인 1997년에 9살짜리 어린아이를 옥상으로 끌고 가 강간하려다 부모에게 들켜 미수에 그치는 바람에 징역 3년을 복역했다. 그는 출소한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2001년경 지나가던 여성을 납치해 자신의 옥탑방에서 9일간 감금하고, 수차례 강간하여 징역 8년을 선고[6]받고 2009년 6월에 출소했다.

주변 사람들이 기억하던 그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고등학교를 그만 둔 그는 덕포동 옥탑방에 틀어박혀 지냈는데 옥상 난간에 기대 담배 피우는 모습만 가끔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그의 외삼촌은 "친구는 물론 친지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었다"며 "누나들과도 연락이 끊겨 조카들 얼굴도 한 번 못 봤을 것"이라고 했다.

그 결과 범죄가 누적되면서 마침내 아동 성폭행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7] 양부가 사건 이후 '그놈(김길태)을 전국 방방곡곡 교도소에서 20년간 뒤치다꺼리했다'고 하며 '(김길태가 기억이 안 난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교도소에서 거짓말만 배웠다', '(기자에게 물으며) 그놈 아직 안 죽었느냐'라고 발언한 것을 보면 이 일로 인해 양부모에게도 외면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범행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길태 살인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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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란

4.1. 신상공개

당시 다른 피의자들의 얼굴을 노출시키기 않고 최대한 가리면서 보호하던 반면, 김길태는 이례적으로 경찰이 신원을 숨기지 않고 얼굴을 공개한 채로 끌고 갔다. 그는 검거 당시 쓰고 있던 마스크를 경찰에게 압수당하고 대중들에게 얼굴을 강제로 만천하에 공개했으며, 호송 도중 분노한 시민에게 머리통을 세게 맞기도 했다.

일부 시민들은 그가 전과자이고 이 사건 외에 다른 성범죄의 피의자로 쫓기던 상황에 추가로 저지른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고 해도, 경찰의 이러한 대처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위배하는 행위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0년 3월 15일 홈페이지에 경찰의 검거 과정이 잘못되었다는 진정을 올리고 이에 대해 조사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4.2. 팬카페 설립

심지어 그의 팬카페가 설립되는 일도 있었는데, 문제의 카페 운영자들은 마치 수사본부의 프로파일러가 직접 발표한 양 허위사실을 유포했으며 김길태 모에화, 피해자와의 커플링 팬아트 등의 도를 넘은 행위를 이어갔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은 격분했고, 이에 대한 경찰 수사 후 해당 카페는 강제 폐쇄되었다. 관련 기사.

조사 결과 카페 운영진 이씨와 김씨는 당시 각각 대학교 2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다고 한다. 결국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등을 사유로 팬카페 운영진들의 경찰서 정모가 이루어졌다. 관련 기사. 이후 팬카페 운영자 dogtrap은 자신의 블로그에 사과문을 올렸으나 사실은 사과문을 가장한 세로반전이었고 내용은 "씨X구라다"였던 것도 모자라 글귀 자체도 전체적으로 엉망이었다.

"김길태도 불행한 인생, 돕고 싶다".

한 사람은 그를 위해서 수백만 원에 이르는 변호사 선임비를 대신 내 주기도 했다. 그가 어린아이를 강간하고 살해한 흉악범임에도 그의 기구한 생애 등으로 인해 일주 동정 여론이 존재했으며, 사건 당시인 2010년에는 현재와 달리 흉악범에 대한 온정주의가 존재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5. 기타

  • 그는 이후에도 교도소에서도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는 등 아직까지 정신을 못차리는 듯 하다. 트위터에서 탈옥했다는 루머가 퍼진 적이 있었으나 담당 교도관이 직접 그의 수감 여부를 확인한 결과 거짓이라는 공식 발표가 났다.
  • 중앙일보는 사설 란에서 승려 법정이 사망한 날과 일치한 이 범죄자의 검거일을 엮어서 고인드립을 쳤는데 법정스님과 김길태가 나와서 스님이 야단을 치고, 김길태는 울고, 결국 스님이 길태가 되어 다시 태어나겠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
  • 호송 송치되는 중 '김길태 이 쓰X기야'라는 등 시민들의 욕설이 난무하였고 한 시민이 손바닥으로 그의 머리를 힘껏 때린 일이 있었는데, 그 시민의 행동을 칭찬하는 팬카페가 등장했다. 김길태 머리 때린 아저씨 팬카페. 2024년 현재에도 폐쇄되지 않고 간간히 게시글이 올라오는데, 세간의 주목을 받은 강력범죄가 발생하거나, 그 피의자를 누군가 폭행하는 유사 사건이 발생하면 꼭 게시글이 하나는 올라온다.
  • 어린 나이의 피해자를 강간살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기구한 생애 때문에 동정 여론이 형성된 적이 있다. 물론 흉악범죄인 사건이랑 별개로 그가 수 차례나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면서 다시금 자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어도 도움 받을 수 있는 손길을 외면한 채 극단적으로 어긋난 범죄를 저질러 온 자의와 책임은 부정될 수 없으며, 양부모는 그를 사랑으로 대했고 그가 잘못을 저질러서 감옥에 갔을 때 옥바라지까지 해주었음에도 그런 흉악범죄를 저지른 건 애초부터 인간성이 파탄났다는 뜻이다.[8]


[1] 후술하겠지만 부모는 친부모가 아니라 양부모다.[2] 2011년 4월 28일 대법원 판결.[3] 아마 재학 중 교복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중학교 교복이 고등학교보다 조금 늦게 도입된 걸 감안하면 그 시기는 대략 1991년~1993년경 사이이며 아주 늦어도 1995년까지였음을 알 수 있다. 사상구는 아니지만 부산 4학군(동래학군)의 중학교 중에는 1986년 가을에 이미 재도입하여 1972~1973년생부터 교복을 착용한 곳도 많았다.[4] 5월생이므로 당시 생후 5개월 전후였다.[5] 길에서 태어나서 길태라고 불렀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양부의 주변에 길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2명 있었는데 다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그들과 닮으라고 길태라고 지었다고 한다.[6] 이후 이때 받은 형량이 죄질에 비해 너무 약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김길태가 '피해자와 눈이 맞아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는 취지로 진술했고, 피해자가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탈출하지 않은 점 등으로 인해 그의 주장이 일부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7]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 가해자 고종석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흉악범의 상당수는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식이다. 처음에는 절도나 폭력 같은 사소한 범죄부터 시작해서 갈수록 죄질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8] 김길태 사건 2년 후에 벌어진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의 범인 고종석도 비슷한 케이스로, 항간에서는 자칭 지인들의 주장을 믿고 가정폭력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어린 시절 사랑하는 친모를 여의며 상처를 받기는 했어도 계모와 새누나가 나름 돈도 주고 체포된 후에도 면회를 올 정도로 나름 챙겨주었던 것을 볼 때 김길태처럼 그냥 비뚤어지고 갱생을 1도 안 하려는 등 원체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것에 가깝다.[9] 핏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