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6:33:01

아노마라드 공화국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folding [ 펼치기ㆍ접기 ]
<colcolor=#000,#fff> 가문 아르님 가문 · 티카람 가문 · 폰티나 가문 · 벨노어 가문 · 아르장송 가문 · 아마란스 가문 · 진네만 가문
조직 모르비아네즈 · 묘족 · 민중의 벗(나이트워크) · 약속의 사람들 · 왕국 8군 · 에투알
문화 빌라 전쟁 · 세 가지 맛 린디즈 절임 · 실버스컬 · 후라칸 ·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 · 추격자
인외 존재 골모답 · 구울 · 유령 · 프시키
기타 데모닉 · 블러디드 · 아노마라드 공화국 · 나우플리온의 검
마법
가나폴리의
유산
늙은이의 우물 · 소원 거울 · 인형 · 악의 무구(피 흘리는 창 · 녹청의 장갑 · 황동빛 방패 · 은빛 투구) · 에피비오노의 망토 · 퀴레의 여든 개의 눈동자 · 신성 찬트 · 티엘라 · 티그리스
마법의 도구 고향의별 호 · 미의 극치호 · 엔디미온의 주사위 · 우레의 룬 · 윈터바텀 킷(스노우가드 · 윈터러) · 카프리치오 바이올린
지명 및 장소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지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elixir_childrenoftherunemap.jpg
}}}}}}}}}
렘므 엘티보 · 헤베티카
루그두넨스
연방
루그란 · 레코르다블 · 두르넨사(칼라이소) · 팔슈 · 하이아칸(블루 코럴 섬)
산스루리아 산스루 · 칸타 파르스
아노마라드 켈티카(비취반지성 · 그로메 학원 · 모나 시드) · 코츠볼트 · 네냐플(포도원 · 헤이마치 마을) · 폰티나 · 벨노어
티아 · 트레비조 · 잔
오를란느 오를리 · 사과의 섬
이카본 군도 페리윙클 섬 · 노을섬
트라바체스 론 · 롱고르드 · 그와레
필멸의 땅
(가나폴리)
아르카디아 · 늙은이의 우물 · 새벽탑
기타 달의 섬 · 로젠버그 호수 · 썰물섬
}}}}}}}}} ||

1. 룬의 아이들의 설정
1.1. 건국 과정1.2. 쇠퇴1.3. 멸망1.4. 사후정리
2. 평가3. 유산

1. 룬의 아이들의 설정

룬의 아이들 윈터러, 데모닉 데모닉에 등장하는 국가.

975년에 건국되어 985년에 멸망한 아노마라드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 국가 수반은 당스부르크 전 백작. 한밤중의 봉기로 아노마라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점령했으나 왕국 각 지역에서 살아남은 왕족과 귀족들의 반격으로 불과 10여 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아노마라드 왕정이 복고되었고 아노마라드 왕국은 공화국 시절을 기점으로, 지도층이 크게 바뀌어 구 왕국과 신 왕국으로 구분되어 불리고 있다.

1.1. 건국 과정

975년 당시에 구 아노마라드 왕국의 최후의 국왕 엘반트 3세는 절대왕권의 신봉자로, 본인의 변덕스러운 성격까지 겹치면서 가히 왕권을 남용하며 왕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국왕은 아무 예고도 없이 왕국의 귀족들을 수도로 호출하여 연회를 가지곤 했는데, 먼 지방에 사는 귀족들은 이런 국왕의 호출을 무시할 수 없었고 매번 일일이 호출에 응해서 상경하는 것도 고역이었다.[1] 결국 대부분의 귀족들은 지방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 운영을 가족에게 일임하고 아예 수도 켈티카에 자택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서 왕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 거의 모두가 켈티카 혹은 인근 지역에 기거하기에 이르렀고 이 꼬락서니에 히스파니에 폰 아르님'주머니에 구슬을 너무 많이 담았다'라며 정세가 뒤집힐 사건이 터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런데 왕국 북부 지역에 영지를 둔 당스부르크 백작은 지병을 이유로 국왕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국왕 엘반트 3세는 이에 크게 불쾌해하였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고 백작을 내버려둔 채 다른 귀족들과 연회에 골몰하기만 하였다. 시간이 흘러 국왕의 탄신일, 귀족들이 모두 연회장에 모여 이를 축하하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는데[2] 그간 영지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당스부르크 백작이 연회장에 나타났다. 그동안 자신의 부름을 무시하던 백작의 등장에 국왕의 심기가 불편해졌을 때, 느닷없이 정체불명의 무장집단이 연회장에 나타나 귀족들을 인질로 붙잡는 것을 시작으로 수도 켈티카 전역에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알고보니 당스부르크 백작은 지병을 핑계로 영지에 틀어박혀있으면서 영내에서 공화주의파 조직 민중의 벗을 창설하여 왕국내에 공화파를 양성하면서 수도 켈티카의 동향을 면밀하게 파악하며 봉기의 때를 노리고 있었다.[3] 국왕 탄신일 기념 연회로 왕국 귀족들이 모두 한 곳에 모이자 백작은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민중의 벗을 이끌고 상경, 단원들을 수도에 몰래 들여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훗날 이를 그믐밤의 배신이라 부른다.

백작과 민중의 벗은 연회장의 왕가 일원과 왕국 귀족들을 모두 인질로 붙잡은 것은 시작으로 수도 켈티카의 관문을 점거하여 수도를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수 일 뒤에는 켈티카 인근 지역의 약 4분의 1 가량을 모두 점령하였다.

한편 지방 영지에서 가주 대신 영지를 경영하던 남은 귀족들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원하기 위해 힘을 합치기는 커녕, 수도에 억류되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한 귀족들의 재산을 자기들끼리 뜯어먹는데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결국 왕당파는 봉기의 초기 진압에 실패하였고, 민중의 벗은 수도와 인근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국왕 일가와 수천에 달하는 대귀족들이 모두 체포되어 귀족들의 구심점이 와해되어버렸고, 왕권을 남용하던 엘반트 3세의 실정까지 겹친 것이 컸다.[4]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 때문에 공화파는 봉기를 성공시키고 기선제압에도 성공한 것이다.

당스부르크 전 백작은 국왕 엘반트 3세와의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아노마라드 왕국의 멸망을 선언하고 아노마라드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 스스로 공화국 수반에 오른다.

1.2. 쇠퇴

세상이 하루 아침에 뒤집어졌다. 공화국의 건국 이후 수도에 억류된 귀족들에게 남은 것은 비참한 최후뿐이였다. 권력을 잡은 공화파는 단 3일 만에 귀족 대부분을 제거하였다. 귀족들은 대대적인 공개 처형으로 목이 달아나거나, 겨우 처형은 면했으나 수감되거나, 혹은 공화 정부에 고개를 숙였다. 일부 귀족은 아예 공화국에 전향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귀족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일반 민중들이 대귀족의 저택에 몰려들어 귀족들을 잡아죽이는 일도 빈번했다. 일부 귀족들은 사병을 모아 저항했으나, 이미 수도 전체가 공화파에게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소수의 사병으로는 발악 이상을 할 수 없었다. 이름 있는 대귀족들은 공화국이 모두 목을 쳐 버렸고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문은 아르님 공작가 뿐이었다. 그 외 남은 귀족들은 모두 별 가치없는 중소 규모의 변변찮은 가문들뿐이었다.[5]

반면 아르님 가문은 일반 민중을 억압하기는커녕 위기 상황에서 꼬박꼬박 도움을 베풀었던 기이한 가문 내력 덕분에 일반 민중에게 존경받고 있었고, 공화 정부도 민중의 지지를 받는 아르님 공작 내외에게 위해를 가할 수가 없었다. 또한 과거 영지였던 페리윙클 섬과 공식적으로 관계를 단절했기에,[6] 이름값만 있고 실 권력은 없는 명예직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귀족 작위만 박탈당하는 선에서 생명과 재산을 모두 보전할 수 있었고, 공적으로는 귀족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공작 대접을 받았다.

신생 아노마라드 공화국은 그 기세를 몰아 지방에 남아있는 왕국의 잔당을 쉽게 몰아낼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켈티카 점령과 공화국 수립 이후 방침을 두고 수뇌부 사이의 의견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를 중재할 수 있는 국가 수반 당스부르크가 덜컥 병에 걸려 쓰러져버리며 공화국의 앞날에 악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공화국이 정체되어있는 사이, 지방에 남아있는 왕당파 귀족들 사이의 내분이 점차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곧 집결한 왕당파는 공화국에 대한 대대적인 판격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수세에 몰린 공화파는 반격할 여력을 상실하고 이내 천혜의 요새지형에 위치한 수도 켈티카에 틀어박혀 가망 없는 소모전을 강요당하고 말았고 공화국은 사실상 멸망의 수순에 돌입하고 만다.

공화파는 말만 공화국이지 소수의 귀족들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트라바체스 공화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국민총투표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전국에서 실시하긴 커녕 수도 켈티카에서만 단 1번 실시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런 일련의 사태를 통해 일반 민중에게 공화주의의 희망을 보여주기는 커녕, 자기들끼리의 내분으로 왕당파에 의해 궁지에 내몰리기까지 하자 공화국은 곧 켈티카에서도 지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외부의 적도 다 정리가 안된 상황에서 내부 권력다툼으로 자멸한 한심스러운 추태를 부리고, 몇몇 공화주의자들은 전직 귀족과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선민의식까지 마구 표출하면서[7] 켈티카의 민중 대다수조차 이내 공화정부에 대한 지지를 거두어버리고 만다.

이런 와중에도 공화국이 당장 멸망하지 않았던 것은 왕당파도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방에 남은 귀족들은 처음에는 주인을 잃은 재산을 두고, 다음에는 공백이 된 왕위를 두고 격렬한 물밑다툼을 벌였다. 공화국이 제때 움직였다면 갈피를 못잡고 분열되있던 왕당파 귀족들을 각개격파하고 진짜 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으나 당스부르크의 사망과 내부 분열이 발목을 잡았고 결국 왕당파 내부의 분열이 아미센 대공과 파리나크 백작을 중심으로 하는 2개의 세력으로 정리되어버렸다. 공화파는 이들 두 세력을 모두 막기는 커녕 한 세력을 막을 여력조차 없었고, 왕당파는 알아서 죽어가는 공화파보다는 눈 앞에 있는 자기 경쟁자를 경계했기 때문에 켈티카에 대한 공격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모든 아노마라드 사람들은, 심지어 공화국 치하의 켈티카 시민들조차도 공화국의 멸망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켈티카 방어도 불가능한 시점에 이르자 공화국 내부의 강경파들은 수도에 남은 모든 귀족들을 처형하여 민중의 봉기를 유도해야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8]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강경파들이 내뱉는 가장 극단적인 헛소리로 치부되었지만, 공화국의 멸망이 가시화될수록 광기가 확산되었는지 진짜 실행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10살이 채 되지 않았던 데모닉 조슈아의 예측에 따르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공화파의 제물로 죽거나 왕당파에게 배신자로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었다.

1.3. 멸망

공화국이 스스로 와해되어가던 시기, 공화파는 이제 켈티카 외곽 지역까지밖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빈약한 공화국 군대를 짓밟고 수도를 탈환하는 것은 다 큰 성인이 어린아이의 팔을 비트는 것 만큼 손쉬운 일이었으나 왕당파는 전 아노마라드 국왕 엘반트 3세의 종조부인 아미센 대공과 엘반트 3세의 조카인 파리나크 백작을 중심으로 한 2개의 파벌로 나뉘어 차기 왕위 계승을 두고 치열한 물밑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자기 세력을 불리는데 사력을 다했고 많은 귀족들은 가문의 운명이 걸린 선택의 기로에서 고심의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 켈티카 공략전의 시일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했다.[9] 이 상황에서 아르님 공작과 함께 아노마라드 귀족 사회의 거물급 귀족인 폰티나 공작은 양 세력 어디에도 협조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어서 귀족들의 혼란을 더했다.

그런데 이런 교착 상태가 유지되던 중, 파리나크 백작을 지지하던 엘란 대공이 주둔하던 로젠 관문에 갑작스럽게 인접 렘므 왕국에서 기습 공격을 개시했다. 게다가 이 사건으로 아노마라드 왕당파가 크게 당황하여 혼란에 빠져있을 때, 차기 왕위 계승을 둔 경쟁에 침묵을 지키던 폰티나 공작이 왕가의 방계 혈통에 속한 '체첼 타고로크'를 차기 국왕으로 선포하고 공화국의 심장부 수도 켈티카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폰티나 공작은 아미센 대공과 파리나크 백작의 파벌이 경쟁을 벌이는 사이, 대외적으로는 침묵을 지키면서 뒤로 몰래 방계 왕족 체첼 타고로크를 차기 국왕으로 등극시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극비리에 자신의 여동생과 체첼 타고로크와 혼약을 성사해놓고 아미센 대공과 파리나크 백작 모두를 동시에 물리칠 장대한 구상을 세웠는데, 원래대로면 엄청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장기간의 계획이었지만 공화국의 파멸 이후 자신과 가문의 운명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아르님 공작이 폰티나 공작의 노림수를 알아차리고 은밀하게 접촉하여 밀약을 맺음으로써 계획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폰티나 공작의 구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미센 대공과 파리나크 백작의 세력을 모두 압도할 수 있는 힘으로 두 세력을 무찌르고 타고로크를 국왕으로 등극시킬 능력을 갖거나, 혹은 양 세력이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리기 전에 켈티카를 빠르게 선점하고 새로운 국왕의 즉위를 선포하여 각 세력의 지지층을 와해시켜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대귀족 폰티나 가문이라고 해도 현재 아노마라드 귀족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두 파벌을 힘으로 압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한, 켈티카 공략의 경우 아무리 다 죽어가는 공화국을 상대한다고 해도 아미센 대공과 파리나크 백작이 대응에 나서기 전에 수도를 탈환하고 새로운 국왕의 등극을 선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폰티나 공작은 아르님 공작이 접촉하기 전까지는 필요한 힘을 기르면서 움직일 시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10]

그런데 폰티나 공작의 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아르님 공작이 돌연 물밑 회담을 제안하였다. 아르님 공작은 폰티나 공작의 구상을 대부분 간파하고 있었고, 아르님이 폰티나의 계획이 성공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제의해왔다. 이는 아르님 공작 입장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었지만 폰티나 공작 입장에서는 도저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달콤한 제안이었고[11], 결국 두 공작은 비밀리에 손을 잡게 되었다.

이후 아르님 공작은 켈티카 내부의 귀족들을 비밀리에 규합하고, 공화국의 내부 정보를 폰티나 공작에게 전달한다.[12] 덕분에 폰티나 공작은 공화국이 가장 취약해지는 시점을 포착하여, 체첼 타고로크를 필두로 수도 공략전에 나서 아미센 대공과 파리나크 백작이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수도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아르님 공작은 켈티카에 남은 귀족들을 모두 이끌고 타고로크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명분을 세워주었고, 폰티나 공작은 이들과 함께 체첼 타고로크를 아노마라드 왕국의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시키고 이를 만천하에 공표하였다. 폰티나 공작이 행동을 개시하고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단 나흘. 공화국이 남은 여력을 끌어모아 사력을 다해 방어전에 나섰지만 아르님 공작의 내부 정보 유출에 힘을 받은[13] 폰티나 공작과 체첼 타고로크의 군대는 공화국 최후의 헛된 꿈을 간단하게 분쇄해버렸다. 이렇게 아노마라드 공화국은 단 10여 년 만에 멸망, 이 놀라운 사건은 훗날 전격의 나흘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1.4. 사후정리

체첼 타고르크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신 아노마라드 왕국의 '체첼 다 아노마라드' 국왕이 되었다. 체첼을 옹립한 폰티나 공작과 아르님 공작 또한 신왕국의 최고공신으로 권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체포된 공화국 인사들과 왕당파로 재전향하지 않은 전직 귀족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이들의 사형 집행으로 수도 광장은 한동안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무기를 처음 잡아 본 일반 시민들조차 일단 공화국에 가담한 게 드러나면 모두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고 한다.

아미센 대공과 파리나크 백작은 상황을 파악하고 황급히 켈티카로 진군했으나, 이미 체첼 타고르크가 모든 상황을 정리해버린 다음이었다. 그나마 파리나크 백작은 대세가 결정되었음을 깨닫고 순순히 물러나며 알맞은 처신을 했지만, 아미센 대공은 분개하여 체첼 타고르크에 대해 반항의 의지를 표출한 끝에[14] 역적으로 선포되어 숙청되었다.[15] 당연하겠지만 이런 왕좌의 게임류의 결말은 기본적으로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Winner takes all)이기 때문.[16]

2. 평가

국왕 엘반트 3세의 실정으로 귀족들 내에서도 적지않은 내분이 일어났기에, 공화파는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일반 민중의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한, 반쪽짜리 혁명에 불과했다. 국왕의 통치는 귀족들에게는 피곤했을지언정, 일반 민중을 핍박하지는 않기 때문. 그믐밤의 배신은 일반 민중의 시각으로는 그저 집권층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되려 공화파의 '혁명'으로 일반 민중의 삶이 더 복잡해지기만 하며 공화주의에 대한 거부감만 커져갔다.

애초 아노마라드 왕국은 대외적으로든 내부적으로든 국가 운영에 큰 문제가 없었다. 트라바체스 공화국에서 온 보리스는 아노마라드 왕국을 딱 풍요 그 자체로 묘사했고[17], 시골 깡촌에서 극빈계층으로 태어나 마을 주민들의 수확물을 서리하고 다니던 막시민조차 고아에다가 짐덩이인 동생들을 데리고도 그럭저럭 빌어먹고 살았다.[18] 결국 이들의 공화국은 민중의 지지를 얻기는커녕 귀족들끼리 밥그릇 싸움하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고, 공화정부가 왕정 때보다 정치를 잘 하고 민생을 신경썼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니[19] 오히려 반감을 사기만 했다.

최대의 적인 왕당파가 권력을 두고 사실상 3분할 되어 내분을 벌이고 있음에도 수도와 인근 지역에 고립되어 방어에만 급급하다가, 왕당파에서도 가장 세력이 작은 체첼 연합의 공세 한번에 무기력하게 멸망했다는 것에서 공화국의 역량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말년의 공화국이 벌인 막장 행보의 여파는 멸망 당시 12살이었던 조슈아 폰 아르님이 10대 후반으로 성장한 현재 시점에도 유효한데 공화국의 후임을 자처하는 민중의 벗이 테러나 암살 같은 극단적인 행위를 자제하고, 신문이나 전단같은 선동을 주무기로 삼으며 최대한 많은 이들을 포섭대상으로 삼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음에도 순수하게 공화사상에 감화된 소수의 귀족 자제들을 제외하면 일반 평민들에게조차 제대로 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다.

3. 유산

공화국의 소멸로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민중의 벗의 소수의 단원들이 살아남아 아노마라드 전역으로 흩어졌고 지하조직으로 개편되어 물밑에서 또다른 혁명을 준비하고 공화주의자들을 육성하고 있다. 또한 공화국의 '의회'도 망명의회로 개편되어 지하에서 은밀히 공화국의 재건을 준비하고 있다. 다만 현 시점에서는 또다른 혁명을 대비하기 위해 왕국 8군 등을 창설한 왕국의 경계망을 피해 살아남기 급급하다.

란지에 로젠크란츠, 이엔나 다 아마란스등이 여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고, 1부와 2부의 주인공이었던 보리스 진네만조슈아 폰 아르님 또한 언젠가는 이 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20]

[1] 아노마라드 왕국은 대륙의 4분의 1을 점유하고 있는 대국이다. 작가가 밝힌 설정상, 하이아칸에서 켈티카까지의 거리가 대충 루마니아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라고 했으니 아노마라드 왕국의 면적은 대략 현재 서유럽 국가 전체에 달한다고 보면 된다.[2] 이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단 한명의 귀족이 있었다. 바로 폰티나 공작.[3] 현 체제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보고있는 귀족 본인이 공화주의자가 된 것이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다. 흔히 혁명가는 의식주와 고등교육이 보장된 중상류 계층에서 많이 배출되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도 '돈 많은 평민'에 속하는 부르주아지의 이야기다. 영지를 가진 진짜배기 영주귀족이 공화주의 혁명을 주도한 경우는 거의 없으니 당스부르크의 공화 혁명은 확실히 특이한 사례이다.[4] 엘반트 3세는 귀족들을 허구헌날 호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귀족 소유의 사병을 몰수하여 왕국군에 편입시키는 행위를 너무 자주 벌였다. 왕국군 보강으로 왕권 강화를 꾀한 것은 좋으나 왕국군 부대 편제가 너무 자주 변경되다보니,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급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5] 그래도 귀족은 귀족인지라, 이들 중 상당수는 훗날 벌어진 '진격의 나흘' 당시 아르님 공작을 따라 체첼 타고르크에게 합류하여 그가 켈티카에 입성하여 국왕으로 즉위하는데 큰 공을 세워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6] 물론 실제로는 여전히 아르님 공작가가 페리윙클 섬을 지배하고 있지만 이는 아노마라드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7] 사람들은 이런 선민의식을 가진 공화주의자를 뒤에서 공화귀족이라 부르며 빈정댔다.[8] 공화파는 그나마 얻은 수도 부근 시민들의 마음조차 얻지 못했고, 수도에 있던 귀족들은 이미 켈티카 빈민들의 폭동 때 쓸려나간 상황이었다. 즉 귀족 처형 = 공화파 지지 = 시민 봉기의 공식이 성립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을뿐더러, 처형한다고 민심을 얻을 수 있을만한 귀족들은 이미 진작에 정리된 상황이었다.[9] 켈티카에 먼저 탈환한다면 왕위 계승에 명분을 더할 수 있었겠지만, 섣부르게 먼저 나섰다가는 상대방에게 뒤통수를 맞고 쓰러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 적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싶으나, 공화국의 세력이 강력했다면 왕당파가 하나로 결집했을 것이지만 당시 공화국은 왕당파가 이렇게 대놓고 파벌 싸움을 벌여도 아무런 행동을 못할 만큼 쇠락한 상태였다. 그리고 어차피 아미센 대공파와 파리나크 백작파도 서로를 같은 편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고.[10] 그런데 또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기다리기만 했다간 공화국이 덜컥 망하고 아미센 대공과 파리나크 백작이 수도에 입성해버릴 위험성이 존재한다. 교활한 폰티나 공작으로써도 뾰족한 수가 없던 상황인 것.[11] 아르님 가문 입장에서는 점점 과격해지는 공화파 때문에 조만간 숙청당할 위기였으니, 공화국을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왕당파 중 가장 세력이 약해서 도움이 절실하고, 몸값을 높게 부를 수 있는 것이 폰티나 공작 측이다. 물론 가장 세력이 약한 폰티나 공작으로써도 아르님 공작과 손을 잡고 빠르게 켈티카를 함락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12] 왕당파가 어찌하기 이전에 바로 오늘 스스로 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공화국이 계속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수장 당스부르크가 병석에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최후까지 공화국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당스부르크가 사망해버렸고, 아르님 공작은 공화국의 내부 사정과 더불어 당스부르크가 사망할 것이라는 정보까지도 폰티나 공작에게 전달했다.[13] 아르님 공작은 공화국의 내부 정보를 전달하고, 켈티카 공방전이 시작되자 아예 성문을 열어주는 엄청난 공을 세웠다.[14] 자기 몫을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물론 진격의 나흘 때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으니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15] 이런 아미센 대공의 어처구니없는 처세때문에 아노마라드 사람들의 욕설 래퍼토리가 하나 늘었는데 바로 "이런 진격의 나흘 때 아미센 대공 휘하에나 있을 놈!"이라고 한다.[16] 당연하지만 왕좌는 하나 뿐이고 먼저 가서 앉는 사람이 임자다. 이 시점에서는 이미 체첼 디 아노마라드가 먼저 왕좌에 앉았고 수도의 귀족들이 충성을 맹세하면서 기정사실화가 된 이상 이를 뒤집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나중에라도 힘으로 밀어버리는 게 가능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기정사실화가 된 이상 대공을 따르던 귀족들도 기정사실에 굴복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17] 참고로 당시 시점은 신 아노마라드 건국 직후다. 아노마라드 공화국이 실질적으로 켈티카 인근에서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영향을 미쳤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구 아노마라드 체제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시기인데, 이 말인즉 구 아노마라드 또한 신 아노마라드와 별반 차이 없이 풍요를 누렸다는 뜻이다.[18] 막시민이 아무리 선을 지켰다 해도 마을 주민들의 대응은 그냥 굶주린 고아들이 성가시다며 귀찮아하는 정도에 불과했는데, 사람들이 자기 먹을 것도 없는 힘겨운 상황이었다면 막시민은 마을의 짐덩이로 여겨져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즉 시골 깡촌에서조차 식량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19] 가장 대표적인 공화 혁명인 프랑스 혁명과 비교해 봐도 이 차이는 확연하다. 프랑스 혁명 또한 민중이 민중을 때려잡는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지만, 앙시앵 레짐 체제 하의 프랑스는 더더욱 막장이었기에 민중들이 '어차피 굶어죽을 거 뭐라도 하고 죽자'고 혁명을 지지할 수 있었다. 반면 아노마라드는 앞서 언급했듯이 국민들이 굳이 행동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풍요로운 국가였다.[20] 보리스는 란지에에게 빚이 있고, 조슈아는 현재 히스파니에와 프란츠 폰 아르님이 계획 중인 '아르님 왕국'의 첫 포석이 될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엮이게 된다. 게다가 2부 마지막에 란지에가 네냐플에 편입하는데 하필 배정받은 기숙사가 주인공들이 있는 도토리 빌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