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5:57:19

폴란드 섭정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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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왕국
Królestwo Polskie
Königreich Polen
파일:폴란드 국기.svg 파일:폴란드 섭정왕국 국장(1916-1918).svg
국기 국장
1917년 1월 14일 ~ 1918년 11월 11일
수도바르샤바
언어폴란드어, 독일어
민족폴란드인
정치체제군주제
통화폴란드 마크, 굴덴, 크로네
역사 • 건국: 1917년 1월 14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1918년 3월 3일
• 멸망: 1918년 11월 11일
지도
파일:폴란드 섭정왕국 1918년 지도.png
파일:폴란드 섭정왕국 국장.png

1. 개요2. 역사
2.1. 배경2.2. 동맹국의 폴란드 점령2.3. 임시 정부 출범2.4. 건국2.5. 루덴도르프 공세의 실패와 멸망2.6. 리투아니아 왕국의 건국
3. 폴란드 국경 지대 합병 논의4. 여담

[clearfix]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령 폴란드를 정복하고 그 땅에 건국한 종속국 또는 괴뢰국이다.

2. 역사

2.1. 배경

거의 100년에 걸친 분할 끝에 폴란드의 복원을 제안하기로 한 결정은 독일 제국에 의해 점령된 영토에서 제국의 존재를 합법화하고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완충 국가를 만들기 위한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이 계획은 1915년 독일 제국군러시아 제국의 지배로부터 폴란드를 해방시키기 위해 해방자로서 도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독일 제국프로파간다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이끄는 독일 제국군은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 이후 옛 폴란드 의회가 결정한 영토의 약 30,000km를 합병하기를 원했다. 예를 들어 포즈난의 인구 통계는 독일 제국 정부에게 인종 청소 정책이 새롭고 특이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몇몇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소위 폴란드 국경 지대 계획에서 독일 이주민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300만 명에 이르는 폴란드인유대인들을 추방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독일 제국 정부는 자국이 점령한 발트 3국에 거주하는 폴란드 지주들에게 폴란드에 입국하는 대가로 발트 3국의 땅을 독일인들에게 팔도록 강요하기 위해 징벌적 위협을 가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수상인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러시아 제국군에 맞서 독일 제국의 동부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폴란드 의회로 부터 폴란드 국경 지대로 알려진 특정 지역을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이 독일 제국의 인구에 추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폴란드인들은 더 동쪽의 새로운 폴란드 국가로 인종 청소되는 정책이 제안되었다.

빌헬름 2세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정복한 폴란드에 종속된 국가를 만드는 것을 구상했다. 새로운 폴란드 자치 왕국은 독일 제국 황태자에 의해 통치되고 군사, 교통, 경제, 심지어 육군과 철도망까지 독일 제국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도록 하였다.

유사한 계획들이 전쟁 초기에 독일 제국의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지식인들 중에는 한스 델브뤼크, 프리드리히 나우만, 폴 로르바흐가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폴란드 민족주의폴란드 사회가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독일이 폴란드의 큰 영토를 합병하려 한다면 심각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독일이 독일의 보호국으로서 폴란드 자치국을 설립해야만 효과적으로 폴란드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1914년 동안 독일 제국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빠르게 러시아 제국 비스툴라를 정복했고 이듬해 바르샤바에 있는 독일 제국 총독부와 자치 행정부를 분할했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폴란드의 총독이었던 한스 하르트비히 폰 베셀러는 폴란드의 독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당시 동유럽 작전 책임자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의 영향 아래, 이 제안은 독일 제국, 리투아니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당한 영토 합병을 포함했다. 하지만 외무부 대표이자 당시 수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의 사촌인 게르하르트 폰 무티우스는 합병의 내용을 반대하면서 군사적 이익이 허락한다면 분열과 분리는 피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폴란드에 대해 세 가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오스트리아-폴란드 해결책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치하에 폴란드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독일인마자르족슬라브족이 우세한 지역을 만들 것을 우려하여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했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 1세와는 달리 1916년 즉위한 카를 1세는 이 주장을 지지했다. 다른 두 가지 아이디어는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폴란드의 나머지 국가들 사이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재건국시키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치인들은 독일 제국이 의도한 대로 폴란드 연방을 건설하는 것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갈리치아를 분할하여 우크라이나령 동갈리치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2.2. 동맹국의 폴란드 점령

폴란드 왕국 점령지역
파일:폴란드 점령 지역.png
독일 제국 점령지역 (하늘색)

폴란드 왕국의 국경은 소위 폴란드 국경 지대의 합병과 함께 독일 제국에게 유리하게 바뀌게 되었고, 이는 폴란드 영토의 상당 부분을 합병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6년 말까지 독일 제국은 폴란드 영토의 약 30,000km를 합병하기를 원했다. 이 땅들은 폴란드인유대인 인구가 추방되는 동안 독일인들이 정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의 승리가 예상된 이후 폴란드 경제는 독일 제국에 의해 지배될 것이었고, 독일 제국비스와강과 디브라우아 분지, 라돔, 키엘체의 산업 단지를 통제할 준비를 했다.

이 계획은 우치 지역의 독일계 폴란드인들이 11월 5일의 제정된 법안에 항의하여 독일 제국 정부에 보낸 편지에서 제안되었다.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의 공세가 실패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을 겪자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폴란드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 러시아 제국과의 평화가 깨졌을 때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하여 폴란드군의 창설이 중앙 열강의 손실을 대체할 수 있기를 기대했고 속국 설립을 구상했다. 그리고 1916년 10월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도부는 프시치나에서 열린 공동 회담에서 미래의 폴란드 국가 수립을 약속하는 선언을 가속화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폰 베셀러 장군은 친오스트리아계 폴란드인들과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파리의 폴란드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민족민주당(ND)은 중앙 열강과의 어떠한 협력도 거부했다. 빌헬름 2세와 수상이 유제프 브루딘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대표단을 만난 후 최종 세부 사항이 마련되었다. 그 후 동년 11월 5일, 바르샤바 총독 폰 베셀러는 폴란드의 미래 통치자, 국경, 통치 체제를 명시하지 않고 폴란드 왕국을 만들 것을 약속하는 11월 5일 법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브와디스와프 스투트니츠키가 이끄는 친독파는 존재했지만 폴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렇다 할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 선언 직후 바르샤바의 독일 총독은 군 징집 광고를 냈고, 이는 폴란드 정부의 부재를 비난하는 폴란드 시위로 이어졌다.

2.3. 임시 정부 출범

1917년 1월 14일, 임시 국무원이 소집됨과 동시에 독일 제국이 15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0명으로 구성된 임시 정부가 출범했다. 의회의 첫 번째 선언은 군주제를 정치체제로 하였고, 폴란드 동쪽으로의 확장과 지원군 파견을 지지했다. 그리고 평의원들은 폴란드의 실질적인 자치권을 주장했으며, 4월 21일 교육, 법원, 선전포고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자치권의 범위에 불만을 품고 5월 3일 파업을 조직하여 모든 대학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

한편,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1917년 1월 22일 14개조 평화 원칙을 통하여 폴란드의 통일과 독립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2월 혁명에서 니콜라이 2세가 실각함으로써 중립적이거나 독립적인 입장을 선호하는 폴란드 세력이 강화되었다.

2.4. 건국

1917년 9월 12일 폴란드 임시 위원회의 중단 이후, 중앙 열강들은 임시 헌법을 도입했다. 이 헌법은 양원제 의회가 있지만 장관의 책임이 없는 입헌군주제를 고안했다. 학교와 법원만이 폴란드 당국에 넘어갔지만 폴란드인들의 항의로 독일 소수민족들은 별도의 학교 제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폴란드 국왕이 선출되기 전에 임시 정부로서 폴란드의 섭정위원회(Rada Regencyjna)가 설치되었다.

이후 10월 15일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사망한 기념일에 섭정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설치되었고 11월 26일에는 6월부터 정부에서 일해온 변호사 얀 쿠하제프스키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행정부는 오토 폰 슈타인마이스터가 이끄는 독일 제국 당국의 손에 엄격히 통치되었다. 1918년 3월, 독일 제국의 결의안은 폴란드, 쿠를란트, 리투아니아에 토착민 행정부를 설립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 당국은 폴란드 당국에 행정권을 이양하는 것을 거부했고, 폴란드인들을 독일 제국의 감독 하에 훈련을 받을 후보자로 간주했다.

1917년의 위기 이후 폴란드군의 징집은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겨우 5,000명에 불과한 미미한 성과를 거두었다. 1918년 5월, 유제프 도브보르무시니츠키 장군이 옛 러시아 제국군에서 소집한 폴란드 군단을 폴란드로 이동시키면서 병력이 강화되었다.

2.5. 루덴도르프 공세의 실패와 멸망

1918년 독일 제국루덴도르프 공세가 서부 전선에서 승전하는데 실패한 후,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4개조 평화 원칙에 기초하여 평화를 추구할 것을 제안했다.[1] 그리고 10월 3일 막시밀리안 폰 바덴독일 제국우드로 윌슨의 주장을 수용하고 독일 제국이 점령한 국가들에서 군사 행정을 즉시 폐지할 것을 발표하였다.

10월 1일 폰 베셀러 장군은 베를린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회담을 가졌고, 암울한 군사 상황을 알고 바르샤바로 돌아와 낙담했다. 이후 10월 6일, 그는 행정부를 폴란드 공무원들에게 넘겨주었고, 10월 23일에는 폴란드군[2]에 대한 지휘권을 섭정위원회로 이양했다.

11월 6일 이그나치 다신스키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다신스키 자신도 폴란드 인민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바르샤바의 온건파는 여전히 마그데부르크에 구금되어있었고, 국민들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장군의 귀환을 희망했다. 하지만 이미 10월에 섭정위원회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석방을 요청했고, 해리 케슬러 백작과의 협상 끝에 장군은바르샤바로 돌아가 11월 10일에 도착했다. 다음날 독일 제국휴전 협정에 서명했고 바르샤바에 주둔한 독일 제국군은 폴란드 반군에 대한 사격을 거부하면서 무장 해제되었다. 이후 섭정위원회와 다신스키 정부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게 모든 권한을 양도했다.[3]

2.6. 리투아니아 왕국의 건국

독일 제국군의 지원으로 리투아니아 의회는 12월 11일 리투아니아 왕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폴란드의 정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역사적인 연합체로 간주하고, 특히 새로운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를 폴란드의 도시로 간주하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섭정위원회는 1918년 초 베를린을 방문하는 동안 러시아 SFSR와의 협상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섭정위원회는 독일 제국 수상인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대표들은 이를 거부했고, 폴란드 정부의 합법성을 부정했다. 독일 제국 대표 막스 호프만독립 폴란드는 항상 유토피아로 간주되었으며, 우크라이나국의 주장에 대한 지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라고 발언했다. 이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2월 9일 체결되면서 1913년까지 폴란드의 일부였던 헤움 지방이 우크라이나국에 양도되었고, 폴란드의 많은 사람들은 이 지역을 폴란드의 제4차 분할로 간주하여 2월 14일 바르샤바에서 정치적 총파업과 얀 쿠하제프스키 행정부의 사임을 촉발시켰다.

3. 폴란드 국경 지대 합병 논의

1917년 말 독일 최고 사령부는 우디 주변에 정착한 폴란드 소수 민족들이 독일 제국 정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안한 정책인 폴란드 국경 지대를 독일 제국에게 합병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계획은 1918년 3월 독일 제국 정부에 의해 원칙적으로 동의되었고 이후 4월에 프로이센 귀족원에서 지지를 얻었지만 빌헬름 2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폰 베셀러 장군에 의해 강력하게 반대되었다.

1918년 7월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20,000km의 국경 지대를 합병하는 것을 제안하면서 그의 계획을 각서에 명시했다. 하지만 이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폴란드의 선택을 주장하여, 카를 알브레히트 폰 합스부르크 대공이 왕위를 수락하는 것을 막고 독일 제국의 합병 계획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빌나민스크를 떠나 폴란드로 가는 것에 동의했지만, 국경 지대 계획을 재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빌나의 귀환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옛 폴란드 입헌왕국의 일부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한 폴란드인들의 감정을 진정시키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4. 여담

1918년 8월 아킬레 라티는 가톨릭 교회를 변화된 정치적 상황에 적응시키기 위해 바르샤바교황 순시관으로 도착했다. 그 후 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바르샤바에 머문 유일한 외교관으로 명성을 얻었고, 이후 1922년 교황 비오 11세로 선출되었다.


[1] 3일 후 바르샤바의 섭정위원회는 우드로 윌슨의 제안을 폴란드 국가 수립의 기초로 채택하기도 하였다.[2]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폴란드 연대 포함[3] 섭정은 3일만에 해산되었다.